스몰웨딩 유감
강명량
내 것 네 것 없이 뒤엉겨 사는 경상도 집안에서 애당초 스몰웨딩을 꿈꾸었다는 게 잘못이었는지 모르겠다. 큰시누이가 해 넘기기 전에 금쪽같은 외아들의 결혼식을 서둘러 치르면서 웃지 못 할 소동이 벌어졌다. 어쩌면 큰시누이의 생각은 마흔을 바라보는 늦장가이고 보니 크게 떠벌리고 싶지 않아 조용한 장소에서 평소 가까이 지냈던 친지들만 불러 품위있는 결혼식을 올리고자 했을 것이다. 요즘 흔히 연예인들이 비공개로 스몰웨딩을 했다는 뉴스를 듣게 되는데, 나도 개인적으로 그런 작은 결혼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그 옛날에 우리 부모님은 북한산의 최고봉인 백운대에서 문학을 하는 친구들 몇몇이 모여 그들만의 결혼식을 올렸다고 한다. 외할머니는 새색시를 업고 그 높은 산봉우리까지 올라가 별난 결혼식을 올린 괴팍한 사위가 마음에 들지 않았겠지만, 나는 외할머니에게서 그 얘기를 듣는 순간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혼인 서약을 하고 싶었던 아버지의 순수한 마음이 퍽 낭만적이고 멋있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번 스몰웨딩은 내가 상상했던 작은 결혼식과는 사뭇 달랐으며, 작다는 게 꼭 소박하다는 의미가 아닌 줄도 알게 되었다.
남편이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을 온 60년대에는 먼저 서울에 자리를 잡은 친척집에 얹혀사는 걸 예사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영등포고모네 집을 거쳐간 친정 조카들만도 열댓 명이었다니 고모가 워낙 무던한 분이긴 해도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비좁은 방을 나눠 쓰다보면 철없는 어린 사촌들끼리 티격태격 싸움질도 했을 것이고 그런 이유로 고마운 마음보다 섭섭했던 기억이 앙금처럼 남아 서로 데면데면한 사이가 되기도 했으리라. 남편은 고모 집에 낄 자리가 없었던지 어느 먼 친척 아저씨 집에서 처음 한 달 반 동안 신세를 진 적이 있었다는데, 화장실도 없는 산동네라서 아침마다 하나뿐인 동네 공중변소를 사용하느라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고 추억담을 들려준 적이 있다. 순서울산인 나는 그런 경상도 사람들의 정서가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오영수 작가가 '특질고'에서 경상도 사람들이 미련하고 붙임성 없고 눈치 모르고 무작하다고 표현한 것이 결코 과장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한다. 남편이 내게 한 마디 상의도 없이 지방대를 다니던 막내 여동생을 서울에 있는 사립대로 편입시키고 어느 날 불쑥 같이 살게 되었다며 신혼집으로 데리고 들어왔을 때는 솔직히 너무 놀라고 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중요한 일을 독단적으로 처리했다는 게 나를 무시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랴. 남편의 따뜻한 마음씨가 좋아 무턱대고 결혼한 내가 전후 사정을 얘기하고 사전에 양해를 구했으면 설령 속으로 좀 못마땅해도 아무려면 안 된다고 정색을 하고 반대를 했겠는가. 남편은 동생을 거두는 게 오빠로서 당연한 일인데 그걸 이해 못한다고 오히려 내게 성을 내는 것이다. 지역 간 문화적 차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때로 경상도 남편은 염치없고 뻔뻔한 인간으로 또 서울 아내는 제 잇속이나 차리는 겉 다르고 속 다른 위선자로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며 살아온 세월이 40년이다. 이제는 어느 정도 상대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되었지만, 머리로 이해한다고 해서 가슴으로 다 받아들여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제 피붙이 일이라면 열 일 제치고 희생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라 말려도 소용없다는 것을 아니까 불필요한 신경전을 피하기 위해 웬만하면 그냥 남편이 하자는 대로 맞춰주며 힘에 부쳐도 같이 짐을 져주고 있는 것 뿐이다. 요즘에 와서 하나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남편이 제 뜻을 관철하는데 아내의 동의라는 형식적인 절차를 거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남들 앞에서는 마치 모든 게 아내의 뜻 인양 나를 치켜세우는 통에 체면치레에 약한 서울 사람인 나로서는 꼼짝없이 도량 넓은 아내의 역할을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무지하고 우악스럽다는 경상도 남자도 여우같은 서울 여자랑 오래 살다보니 이런 재주도 부리게 되나 보다.
큰시누이가 예약한 호텔 예식장은 양가에서 각각 백 명 남짓 하객을 초대하면 꽉 찰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날씨 좋은 날은 야외 웨딩도 가능하다지만 하객 수는 거기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다. 우선 신랑, 신부의 친구와 직장 동료에게 좌석을 배정하고 나니 양가 부모님의 친척과 친구들에게 돌아갈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다. 그동안 큰시누이가 하객 선별 작업에 얼마나 고심했을지 현장을 보고나서야 고개가 끄덕여졌다. 우리 쪽에서 참석하겠다는 형제와 그 직계 가족 수만도 스무 명이 넘는데, 친가 쪽 가족까지 합치면 도저히 우리 친척까지 부를 형편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친척들 애경사에 부름을 받지 못하는 것을 가장 큰 수치로 여기는 이 집안사람들은 결혼식이 있다는 소식에 차표부터 끊고 기다리는데 영 와달라는 연락이 없으니 난리가 났다. 참지 못한 친척들이 남편에게 가도 되느냐고 전화가 빗발쳤다. 동생에게 묻지도 않고 남편은 아무나 와도 된다고 흔쾌히 말하는 바람에 곁에서 듣고 있는 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그래서 아마 큰시누이가 참석자를 줄여볼 요량으로 허물없는 형제에게는 손주들을 데려오지 못 하게하고, 격에 맞는 하객 수준을 요구하는 등 까탈을 부렸던 모양이다. 막상 결혼식 날 참석한 하객 수는 염려한 만큼 많지는 않았다. 최고급 식사의 호텔 결혼식이 부담스러워 축의금만 전하고 오지 못한 분들도 꽤 있었을 것이다. 사실 나도 평소 나답지 않게 복장에 신경이 쓰였던 터라 못이기는 척 아들이 이끄는 대로 백화점 명품관에 가서 분에 넘치는 효도를 받기도 하였다. 도떼기시장 같은 예식장에서 한 시간 안에 후딱 해치우는 결혼식에 환멸을 느껴온 나는 우리 애들은 양가 가족의 진정한 축복 속에서 이루어지는 문자 그대로의 작은 결혼식을 소망했는데, 그게 경상도 집안 풍속과는 어울리지 않는 바람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이제 시댁의 친조카들은 막내까지 혼사를 치렀고 우리 아들들만 남았다. 우리 차례가 되면 예식장은 좀 널찍한 데를 잡아 참석하고 싶은 친척들은 누구라도 흔쾌히 오시라 하고, 예식 후에는 모두가 흥겨운 분위기 속에서 맛있는 음식을 마음 편히 즐기는 축제 같은 결혼식을 올리고 싶다. 문득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먹고 마시며 떠들썩하게 치르던 우리 조상들의 혼인 잔치야 말로 결혼식의 전형이며, 축복 받는 결혼식의 모습은 마땅히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거다. 그런데 실은 내가 결혼식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할 처지가 아니다. 두 녀석이 다 결혼에 도통 관심을 보이지 않으니 스몰웨딩도 좋고, 노 웨딩도 마다하지 않을 테니 제발 장가나 가달라고 빌어야 할 판이다. 자식의 혼사가 늦어져 애태우던 큰시누이에게서 나 자신 동병상련을 느끼며 은근히 위로를 받았는데, 저 혼자 며느리를 보니까 부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하고 지금 내 속이 영 말이 아니다. 괜히 스몰웨딩을 트집 잡으며 구시렁대는 것도 다 심술이 나서 그런 것만 같다. (2019.12.30)
첫댓글 제가 시골태생이라 시골 결혼식을 많이 보았어요
어렸을적 시골 결혼식은 참 재미있는 구경거리였어요
연지곤지 찍고 족두리를 쓴 새색시가 사람들이 가득한 방 아랫목에 왼종일 방석을 깔고 머리를
숙이고 눈을 내리깔고 앉아 있는데 그 모습이 참 이상하고 신기하고 딴 세상 사람 같았어요
모두 아득한 그리운 옛날 이야기가 되어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