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 선 글까지 1,2,3부를 끝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상황만 정리하다 보니 오히려 ‘주눅든다’는 견해도 나올 법하다. 아니 실제로 주눅들 사람도 있다. 그만큼 일본기획자의 접근법은 탁월했다. 어쩌면 ‘한국인의 심리를 교묘하게 활용하는 데는 일본X이 가장 빼어나다’는 말이 딱 옳다고까지 보여진다. 과연 그렇게 지켜보고만 있어서 될 일인가에 생각이 미치면 긴 한 숨이 절로 나온다. 나는 지난 이십 년 동안 젊은 날의 한 경계를 민족문제에 두고 살았다. 결기(決起)를 끝까지 유지하고자 노력했지만 이번과 같이 일본 세(勢)에 무망하고 무지하게 무릎을 꿇고 있는 남과 북을 지켜 보면서 분통이 터지지 않을 수 없다. 왜 이런 상황까지 와야 했는가? 누가 이런 정도까지 만들었나? 반문해보지만 결과는 똑같다. 모두가 그렇게 만든 일이다. 어느 누구 하나 이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이 시대에는 없다. 고민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 행동해야 한다는 대전제에서 나는 최근 일련의 일들에 당혹감을 느꼈다. 촛불민심은 마침내 무조건 좌파로까지 몰리고 북한 통전부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마타도어 수준을 넘어섰다. 더군다나 매카시즘 보다 심각한 공안정국이 시작되었다. 오죽하면 지경부 장관 이윤호까지 나서서 ‘좌파 세력이 뿌리 깊은 줄 촛불을 보며 알았다’느니 하는 말이 나온다. 정권수호를 위해 다시 등장한 ‘좌파론’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친일파들의 한결 같은 수법이었던 자신들 이외는 모두 좌파로 몰아 세우는 60년 묵은 방식의 공격이 시작된 셈이다. 이건 한 마디로 코미디 같은 일이지만 21세기 한국 땅에서 엄연히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다. 굳이 지난 60년 친일세력의 근원을 따지지 않더라도 이 수법이 나온 배경은 뻔하다. 본격적인 친일을 하겠다는 것이고, 친일을 넘어 한국 사회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구도를 구축하겠다는 의도다. 그 배후에 번연히 일본기획자가 웃고 있다. 북한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MB 정권이 집권하기 전에 북한은 여러 차례 대화를 탐색했었다. 그러나 왠지 지난 1월 17을 고비로 MB와 그 측근들은 북한과의 대화 자체에 소극적이고 저항적이었다. 단순히 노무현이 했던 정책만 빼고 (거꾸로) 하겠다는 의도는 아니었다. 한미동맹 복원, 한일관계의 긴밀화를 앞세우긴 했지만, 비핵개방3000 로드맵의 본질적 실체는 거의 ‘(관계를) 하지 않겠다’에 가깝다. 그 와중에 4월 1일, 남북 간에는 서로 공방이 시작된다. ‘이명박 역도’라는 표현이 등장한 이후, 금강산 사건에 이르기까지 남북관계는 악화일로를 걷고 있다. 이 또한 친일기획자가 너무도 바라는 상황이다. 그것을 MB정권이 교묘하다 싶을 정도로 그 방향에서 움직여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북한 또한 그 위계에 휘말렸다. 지난 십 년의 잘못을 일일이 열거하기도 벅차지만, 남북관계가 제대로 된 건설적 매듭이 없는 상태에서 금강산, 개성이라는 마지노선마저 무너질 기미를 보인다. 협력의 기반이 튼튼하지 못했었다는 걸 반증한다. 이 정도 수준에서 무너진다면 남과 북은 영원히 서로가 함께 도모할 미래는 없을 듯하다. 그것을 가장 바라는 사람은 당연히 바다 건너 일본이다. 그들은 그 바다마저도 없애 해저터널로 연결하려고 덤벼든다. 이 시점에서는 본질적인 문제를 살펴보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진보니 보수, 좌파니 우파 같은 의미 없는 구분법이 문제가 아니다. 친일세력과 일본기획자와 한국, 그리고 한반도라는 주제를 새로운 항목으로 설정해 두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연구가 아니다. 나는 학자가 아니니 굳이 이것을 학술적으로 캐보려 해본 적도 없지만, 현장의 이 현상은 어떤 학술적 견해로도 해법을 만들 성격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민족정체성과 미래역사’라는 주제가 걸려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민족주의를 운운할 것이 아니다. 일 본의 ‘다시 백 년’(又100) 프로그램이 치밀한 것은 오코노기 마사오의 ‘2010년 일왕 서울 방문’이 가진 함의(含意)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7.31 다케사다 히데시(武貞秀士) 일본 방위연구소 총괄연구관의 산케이 신문 기고에서 ‘(독도문제로 자꾸 이러면) 한국이 닥칠 외환위기에 일본은 지원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한 발언은 협박에 가깝지만 실체적 현실에도 근접되어 있다. 구로다 산케이 서울특파원은 CBS와의 인터뷰에서 이 발언이 ‘너무 극단적이다’라고 희석했지만 그것이 오히려 의구심을 확인시켜 주었다. 구로다 발언이 과거부터 가졌던 이중성, 다중성에 주목해본다면 말이다. 전방위적 공격이라고 부를 만큼 일본의 공세는 동시다발적이다. 조급증마저 드러내고 있다 평가해도 좋을 정도다. 서울의 친일세력 뉴라이트는 약간의 자중지란도 있는 모양이다. 뉴라이트 전국연합 김진홍이 MB의 방일 전 ‘독도문제를 언급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조언을 했지만 일본이 먼저 도발함으로써 신뢰를 잃었다느니, 뉴라이트 인사의 청와대 입성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고 홍준표 한나라당 원내대표가 비난을 받는다는 등의 이야기가 들린다. 지엽적인 이런 말들로 친일매국세력으로 탄생된 뉴라이트라는 음험한 집단이 와르르 무너질 것으로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그들의 개별적 이익이 충족되지 않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정권을 압박할 것이라는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촛불민심은 정권의 압박에 흔들거리고 민심은 배째라고 견디는 정권 앞에서 저항의 규모도 위축되는 형세다. 회색지대에 선 무관심과 이기주의가 사회 국가 전반에 팽배해 있는 상태에서 이제 ‘친일이 무에 대수인가!’라고 외치는 소리마저 들린다. 국격(國格)이 심각 수준을 넘어서며 훼손되고 있다. 국민이 선거를 통해 초래한 정권이고 그래서 대안을 찾기 더 어렵게 되었다. 남측의 이런 사정에 북측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일까? 결코 그렇지가 못하다. 서울을 장악한 일본기획자는 반드시 평양을 동시 혹은 다음 대상으로 지목하게 되어 있다. 우리는 언제든 지켜낼 자신이 있다는 건 오만하고 어리석은 주장일 뿐이다. 서울에 대해 ‘경제와 교육’이라는 두 갈래 길로 침공을 했듯이 평양에 대해서도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이른바 ‘공기불비’(攻其不備)라는 병법이 사용되고 있다. 갖추지 못한 부분을 철저하게 공략하는 전략이다. 그만큼 서울이 빈 곳, 허점이 많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평양도 예외는 아닐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어찌 해야 하는지. 제4부도 앞서처럼 생각나는 대로 풀어 쓰려고 한다. 굳이 보고서 형식을 선택하지 않는다.
‘ 라인’(line) 이야기가 부쩍 많이 나온다. 남북 간에 라인이 없으니 금강산 사건도 혼자 떠들기 같은 모양새가 되다 보니 이유를 찾다가 나오는 말이다. 잡지나 신문에서도 서울의 대북라인이 모두 가동하지 않는다는 기사부터 그렇지 않다 여러 라인들이 있다는 식의 엇박자 정보가 나돈다. 내용을 보면 둘 다에게서 뭔가 아주 심각한 착각이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채널 (channel)과 라인’은 엇비슷하게 사용되지만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를테면 서울에서는 북측 누군가와 만나면 그것이 라인이라 하고, 뭘 함께 토의를 해도 라인이라고 한다. 그러나 채널은 개념이 다르다. 일정한 정도의 소통로(疏通路) 역할을 꾸준히 하는 대상간의 대화루트다. 그러므로 정책이란 각도에서는 채널이 열려야지 라인만 백 개 천 개가 되어도 소용이 없다. 지금 있는 기업 채널 가운데서는 현대아산이 가장 강력하다. 왜냐하면 수시로 그들의 파트너인 아태평화위(아태)와 연락을 취할 수 있다. 정부가 가진 채널은 비상전화 등 ‘핫라인’이 열려있다. 그런데 별로 ‘핫’(hot) 개념이 아니란 게 MB 정부 들어서 증명되었다. 그건 일종의 비상연락망 개념을 가진 도구였다. 이런 저런 기업들이 연락을 하던 민경련, 민화협 등의 베이징, 선양, 단둥 사무실들도 요즘은 잘 기능하지 않는다. 단둥, 베이징 등 평양에서 나와 종종 서울과 접촉 하던 라인조차도 새로운 남북간의 정치적 일을 벌이려는 기색이 없다. 그러고 보면 라인 자체가 없는 셈이다. 물론 개성, 금강산에 가면 만나는 북측 사람들이 라인으로 기능할 수 없다. 평양을 방문하는 사람들도 그들이 만나서 이야기하는 대상과 ‘그 이야기’ 이외는 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채널에 버금간다고 할 수 있는 대북라인은 없는 것인가? 현재로써는 없다. 지난 십 년 기능한 채널은 국정원-통전부라는 이른바 ‘국통라인’이 그 역할을 했었다. 표면적으로는 임동원-김용순, 김만복-김양건(서훈-최승철), 이종석-권호웅까지 이어져온 라인이었다. 그들은 두 번에 걸친 정상회담을 치렀고, 다양한 업무연계를 가졌었다. MB 정권이 들어서고 나서 먼저 북측의 변화가 발생했다. 통전부의 또 다른 이름인 아태를 포함해서 그 동안 남북관계에 기능하던 조직 기구들이 감찰을 받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국통라인마저도 슬그머니 문이 닫히게 된다. 남아있는 라인은 있다. 그러나 채널급으로 올라가기는 어려운 상황이 벌어졌다. 이 변화를 이해하려면 ‘지난 십 년에 대한 청산(淸算)’이 벌어진 배경에 금전문제, 부패문제, 그리고 사회병리적으로 자리한 북측 내부의 잘못 인식된 ‘실리주의’를 들여다 봐야 한다. 어려운 경제여건 속에서 인민경제우선주의를 표방하는 와중에 지금까지 호의호식을 했던 좋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비판의 눈길이 많아졌던 내부 환경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본래 사회가 생존여건이 악화되면 될수록 일단 ‘경찰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진다. 즉 ‘몽둥이가 살판나는’ 세상이 되기 일쑤인 것이다. 마침 통전부, 아태, 민화협, 민경련 등을 비롯한 전 부서에서 부패현상을 단속하는 대대적인 감찰이 시행되고 그 사이 서울-평양 간의 채널도 망실되어 버린 것이다. 혹자는 이런 라인을 예전 사람들이 다시 온다면 기능하지 않겠냐고 하지만 그건 기초를 모르는 소리다. 윗선이 경질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기능은 하는 국정원 내부에서조차 이 라인들과의 접촉은 이제 쉽지 않다. 왜냐하면 정권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 새롭게 채널을 만들 생각을 서울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에게 채널을 만들어서 요청하라는 태도를 견지했다. 평양의 이런 변화와 맞물려 서울은 변변한 라인도 채널도 열지 못한 상태였던 셈이다. 그러니까 지금 ‘라인을 열어라’고 서울에서 주장하는 신문의 사설이나 전문가 의견은 매우 공허한 외침이거나 그저 혼잣소리에 불과하다. 근본적으로 대화를 할 준비가 안되었다는 것이 더 문제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유심히 봐야 할 대상이 바로 ‘통일부’다. MB정부의 비핵개방3000이란 대북정책 로드맵은 아직 각론이 나오질 않았지만 통일부는 이명박정부의 대북정책을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이란 이름을 붙였다. 햇볕정책-평화번영 정책을 잇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난 10년 ‘햇볕’이 남긴 냄새를 지운다는 밑그림을 깔고 있다. 내놓은 목표는 평화공동체, 경제공동체, 행복공동체라는 공동체 의식을 드러냈지만 그마저도 채널과 라인의 상실 상황에서는 빛이 바랜다. 나는 개인적으로 ‘공영’(共榮)이란 단어에서 일본이 내걸었던 ‘대동아공영’이란 말이 떠올라 쓴웃음을 지었다. 멋을 내려고 잘 선택했겠지만 단어의 선정이 조금 잘못된 경우라고 생각된다. 과연 통일부는 김하중 체제 하에서 북한과의 채널을 개설할 수 있을까? 어렵다고 본다. 통일부야 그렇지 않을 거라고 보지만, 이건 빤히 들여다 보이는 한 수다. 비핵개방3000도 버거운 개념이지만 통일부는 존폐위기에서 잘 드러났듯이 별로 영양가가 없는 조직이 되어버렸다.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부서가 아니라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기구가 되었다. 정작 대북정책은 다자채널을 통해 처리하려는 게 MB정부다. 그러니까 외교통상부가 그 역할을 한다. 이것은 남북관계보다 국제화를 통한 북한개방전략이 효율적이라는 정권의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렇게 보면 통일부는 ‘채널’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된 셈이다. 그렇다고 외교통상부가 북한의 외무성과 남북한의 채널을 유지할 수 있는가에 이르면 더 답답해지는 모양이 드러난다. 남북한 간은 어찌 되었건 ‘특수한 관계’라고 서로 인정해버린 사이다. 외교(外交)의 대상은 아닌 것이다. 이 상황에서 남북한은 ‘채널’이 열리지 않은 채 단지 작년 말부터 진행된 북측 내부의 감찰이 끝나고 통일전선부건 어느 조직이건 대남담당기구가 나서주길 바란다. 그런데 나설 조직은 없다. MB정부 내에서 위상이 저렇게 정립된 통일부와 상대할 조직도 없다. 형세가 이런데도 남북한 간의 채널을 만들려는 적극적 노력도 없다. 왜 인가? 첫째, 청와대의 생각이다. 기 싸움을 한다. 그러니까 ‘갑의 위치’니 ‘을’이 먼저 고개를 숙여라 하는 태도가 전혀 바뀌지 않는다. 둘째, 외교통상부다. 정부의 외교정책이 미일 편중 현상으로 출발했다. 거기에 대북요소를 능동적 정책으로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셋째, 통일부다. 그들은 스스로 위상정립을 하지 못했다. 이 상태에서는 채널이 열릴 수가 없다. 토론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가지 묘한 의문이 든다. MB 정권은 스스로 대북 카드라는 것을 만들려고 하지 않고 초기부터 무장해제 했다. 한미동맹이란 소 위에 올라탄 쥐가 되기로 작정했다고도 표현한다. 반 노무현 정서, 그리고 반 햇볕이란 대전제가 대북문제 자체를 후 순위로 돌렸다고 평가 받기도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채널을 유지하는 것 자체마저도 시도하지 않았다는 게 이상할 정도다. 지난 3월 이동관 대변인이 대통령 취임식 행사에 북측의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참석하는 문제가 인수위 시절 제안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해주었다. 그 때 그는 이렇게 말했다. ‘베이징에 가면 숱하게 있는 게 대북라인이다. 불분명한 라인으로 들어온 것이어서 선택하지 않았다.’ 인수위와 현재의 정부에 이르기까지 파악하고 있는 분명한 ‘라인’은 어디에 있을까? 혹자는 아직도 ‘최승철’이 재등장하길 기다린다는 사람도 있지만 그것은 임태희 한나라당 정책위원장이 대북라인의 90%가 깨어졌다고 자인 발언함으로써 그 쪽 내부에서도 아니라고 인지한 것으로 파악된다. 그렇다면 누구를 기다리는가? 어떤 상황을 기다리는가?
뉴 라이트의 대북정책 논리가 어느 수준으로 MB 정권에 침투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핵심 단어를 뽑아보면 그것이 바로 각론이 없는 비핵개방3000이다. 먼저 ‘정상화 비정상국가론’이 나온다. 설정 자체를 북한은 비정상국가다라고 전제하고 시작한다. 그래서 이 상태를 정상화로 바꾸는 정책이 아니면 모두 반대한다. 그리고 이어서 ‘당당함’이란 태도를 주문한다. 여기서 사용되는 것이 바로 ‘갑의 위치 회복’이다. 주는 입장인데 저자세는 안 된다는 것이고, 3000달러 수준까지 만들어 준다는 데 왜 우리가 저자세가 되어야 하느냐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언뜻 보기에는 그럴싸하게 보인다. 드러난 사실이나 상식적으로는 인지(認知) 가능한 주장이다. 그런데 함정이 나온다. 첫째, 만일 이렇게 하는 사이 다른 나라들이 먼저 한반도 북부에 접근을 강화할 경우는 어떻게 되는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 집권 초기에는 ‘상황을 봐서’ 대응하지만 ‘당사자인 우리가 이러는데 다른 나라도 앞설 일이 없다’고 했었다. 그러다가 미국의 대북 테러지원국 해제 이야기가 나오자 부랴부랴 ‘이것은 북한이 정상국가로 간다는 의미’라고 말을 바꾼다. 둘째, 어떻게 만들어 주느냐 하는 점이다. 정확하게는 ‘고개 숙여라’는 것이다. 항복하면 주겠다는 게 옳은 표현이다. 그렇지 않으면? 줄 게 없다. 이 관점에서 6.15이건 10.4선언의 승계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다. 셋 째, 구호다. 통일부가 내건 구호인 평화, 경제, 행복 공동체라는 개념에서 보면 ‘공동체’ 내용의 핵심이다. 그런데 구호로 그친다. 금강산, 개성은 유지하지만 다른 사업은 확대 가능한 각론이 전무하다. 해볼만한 걸 찾지 못한 셈이다. 사실 별로 할 생각도 없다. 개성공단 2단계 확장공정마저도 할 생각이 없다. 그러니까 현재로 봐서는 ‘할 마음도 계획도 없다’는 게 옳다. 말만 번듯하게 나열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뉴라이트가 정부에 침투하여 심어놓은 인식이다. 인수위 시점에서 비핵개방3000과 함께 정책집행의 행동 지침도 몇 가지 짜진 걸로 보인다. 그 중에 핵심이 바로 ‘갑의 위치’인데 이것이 바로 안병직 류의 ‘경제실용 우선’과 맥락을 같이 한다. 즉,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민족이라도 의미 없다는 식 접근이다. 기업논리에 익숙한 기업부설 경제연구소에서 내놓은 주장을 뉴라이트는 옳다거니 하고 받아 먹었다고 한다. 이걸 실용적 접근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실상을 가만히 까뒤집어 보면 여기에도 ‘일본’은 등장한다. 남북관계의 지난 십 년은 남남갈등의 심화를 불렀다. 햇볕이나 화해협력이나 둘 다가 세간의 민심을 설득하는 데 근본적으로 실패한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개인적 영달(노벨상)을 위한 행위’라는 것과 ‘퍼주기’, ‘화장질’ 등이다. 이전 정권의 당사자들은 공과(功過)를 이야기 한다. 퍼주기가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치적 화장질로 인해 실질적으로 화해나 협력 등의 완전하거나 최소한 되돌이킬 수 없는 기틀을 지난 십 년 제대로 못 세운 것에 대해서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기회가 있었는데 그걸 잘 살리지 않은 것에 대한 지적이다. 이 관점을 슬그머니 끌어 들여 변형시켰다. 거의 ‘무시’에 가깝게 북한을 대하는 이유로 사용되는 논리, 그리고 지금 잘 안되고 있는 현상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는 변명이 바로 ‘1~2년론’이다. 김대중, 노무현 모두 집권 후 1~2년간은 대북 접근이 쉽지 않았었다는 논리다. 1~2년. 정확하게 일본기획자의 2010년에 잇닿아 있다. 그 사이 남북관계가 좋게 된다면 일본 세의 화려한 등장에 방해요인이 될 확률이 크다. 독도문제에서도 드러나듯이 민족감정, 우리민족끼리 라는 테제를 붕괴시키는 데 가장 좋은 모습은 서로가 ‘별 일이 없는’ 상황이다. 뉴라이트는 정확하게 이런 환경을 만드는 논리를 들고 등장했고, 정부에 영향력을 미쳐 대화 자체를 못하게 말리는 형국을 조성한다. 겉으로는 국회회담으로부터 정상회담, 사무소개설 등이 제안되었지만 그것은 외교적으로도 전혀 형식을 갖추지 못한 것이었고 오히려 ‘깽판’을 놓자는 방식이었다. 여기에 다시 채널과 라인이 등장한다. 북일간에도 채널이 존재한다. 공식적인 존재는 일본 외무성과 북한 외무성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자채널의 협상에만 관여할 뿐이지 정작 북일 양자관계에서는 이들이 실제로 공식적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북 일 수교협상 등에서 북한측 상대방은 노동당 국제부다. 외무성이 아니다. 대일 사안의 공식 담당기구가 내각이 아니라 조선로동당인 것은 의미하는 바가 특별하다. 일본에 대해서는 외교적인 관계수립이 되지 않았으니 외교차원으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 밖에도 채널들은 열려 있다. 일본 내각총리실 산하 관방장관이 관할하는 내각정보조사실이나 통합막료회의 산하의 정보본부, 공안조사청도 각각 이런 활동들을 한다. 그 중 내조실과 정보본부는 활발하게 움직인다. 즉, 총리실이 움직인다는 의미다. 파트너는 조선노동당과 내각총리실 라인이 형성되는 것이다. 그 아래 여러 루트가 움직이고 취합된다. 6자 회담에서 미국을 압박하면서 일본은 북일 간 교섭의 가장 큰 걸림돌인 납치자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북일간 대화틀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어렵게 얻은 기회였다. 아베 신조 전 총리의 대북압박정책으로 평양의 일본배제론이 기승을 부리다가 나온 한 수다. 그런데 묘하다. 서울이 대북압박정책을 사용하고 일본은 그걸 푸는 데 미국의 행보와 발걸음을 맞추고 있다. 북미 관계가 테러지원국 해제의 단계를 넘어서면 북일 관계도 군사안보적 전략 차원에서 서서히 그런 관계개선 절차를 밟게 될 것이다. 이미 2002년, 2005년 두 차례의 북일 정상회담을 통해 접근해본 경험도 있다. 여론이 있다고는 하지만 미국의 대북접근은 여론도 상쇄시킬만한 큰 그림이다. 그 그림의 이면까지 따진다면 일본은 한반도 전체 즉, 남북한 양측에 동시 진출할 수 있는 카드를 쥔 셈이다. 수교협상의 배상금은 적절한 도구가 된다. 이 일이 벌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시기가 바로 앞으로 1~2년으로 봐야 한다. 그 다음 해인 2010년은 서울과 평양에 나란히 적용되는 개념이 된다. 일왕이 서울을 방문한다면, 이어 평양을 방문하게 되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이것은 논리의 비약이 아니다. ‘다시 백 년’이라는 프로그램의 존재에서부터 2010년까지 일왕이 서울을 방문하는 것을 한일 관계의 바로미터로 보는 시각과 의도에 이르기까지 모두 일관된 흐름이 엿보인다. 중간 중간 벌어지는 일들은 대체로 이를 위한 물타기에 가깝다. 북일 관계가 개선되는 상태에서 만일 서울이 현재와 같은 동일한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다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일 단 최근 들어 미국의 테러지원국 해제 분위기 등 북핵 문제해결을 둘러싸고 자꾸 변화된 분위기들이 나타나는 데 MB정권은 적잖이 당황하는 흔적도 있다. 그래서 국회차원의 대화 등 제안들이 빈발했다. 그러나 금강산 피격사건을 해결하려는 방향은 여전히 강력한 ‘대결구도’로 몰고 간다. 외교전까지 번질 거라는 전망도 우세하다. 10.4선언을 단독으로는 절대 인정하지 않겠다는 의지는 단순히 기 싸움 수준으로 보여지지 않는다. 남북한 간에 최소한의 정부채널을 갖추고 있지 않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남과 북이 오히려 일본의 이러한 의도에 깊숙하게 말려들 수 있다고 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일본은 채널을 보다 확장해 나갈 것이다. 서울이 지금까지 이른바 단선 채널인 국-통(사실상 통-통체제도 국-통의 연장선상이나 하위 개념이었다.)을 유지할 때, 일본은 다양한 채널화를 시도해 왔다. 앞으로도 만일 단선채널만을 고집하는 형태라면 서울이 오히려 일본, 미국에 대북정보와 전략을 의존해야 하는 사태도 올 것이다. 서로 언어가 통한다고 좋아할 일이 아니란 것은 틀림없다. 같은 언어로도 얼마든지 서로 외국어처럼 들리게 할 수 있으니까.
지난 십 년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는 없다. 공과(功過)가 있다는 점을 인정하는 전제에서다. 계 간지 ‘광장’ 창간준비 제2호(2008.7.18)에는 문정인, 이해찬, 임동원, 정세현 4인의 좌담이 실렸다. 주제는 ‘북핵 이후의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 질서개편’이었다. 순서는 ‘민주정부 10년’의 평가, MB정부 대북정책 평가, 북핵 이후의 한반도 평화체제와 동북아 다자안보체제 구상이었는데 첫 주제가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위의 네 사람은 당시의 직접 정책을 집행한 당사자들이었으니 이들이 공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는 지 엿볼 수 있었다. 간략히 이들의 주장을 살펴보자. 임동원. 북한을 어떻게 보는가에 있어 ‘점진적 변화론’으로 읽었던 10년이었다. 대결, 방관, 포용의 대북정책에서 포용이 선택되었던 시기였고, 북핵문제에 대해 연계전략보다는 병행전략이 사용되었다. 남북관계는 6.15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문정인. 지난 10년은 패러다임의 변화시기였다. 전쟁 적대의 패러다임이 평화 공존의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았다. 보수 일부를 제외하고는 남북관계가 적대적 관계라기 보다는 공생의 관계, 공리와 공영의 관계로 본다. 1차, 2차 남북정상회담은 성공적, 감격적이었다. 전쟁이 일어나선 안 된다. 군사적 도발을 용납 않는다. 통일 방식을 합의하는 3대 원칙이 지켜졌다. 한반도 문제에서 서울이 주도적 입장에서 ‘4대 강국 결정론’, ‘세력균형결정론’에서 벗어났다. 정세현. 6자 회담의 추동력이 주최국인 중국보다 한국의 기여가 더 컸다. 동북아 균형자론이 비판 받기는 했지만 역할을 했다. 남북장관급 회담의 정례화는 의미가 크다. 북측도 ‘과거에는 전망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미래예측을 못하니 힘들다’고 한다. 이해찬. 경제에 미친 영향이 크다. 북한 변수가 안정되어 금융시장이 안정되었다. 남북관계와 정치민주화는 밀접하게 이어진 문제다. 이들은 대체로 지난 십 년의 정책 행위 당사자로 ‘공’(功)에 비중을 두었다. 그 중 문정인이 특히 공과를 종합적으로 지적했다. 그 중 잘했다고 주장하는 부분을 요약해본다. ‘10 년 동안 남북협력기금이 약 8조 조성되었고, 그 중 4조는 경수로에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1조 3천억만 지출되고 나머지는 차환계정으로 조성됐다. 4조 중 2조 3천억 정도가 대북인도지원에, 1조 7천억이 남북 도로 철도연결사업에, 개성공단에 2천억 수준이 집행되었다. ‘퍼주기’가 아니었다. 제1차 정상회담에서 현대가 4억5천만불을 지불했지만 이건 현대가 금강산, 백두산, 개성 등의 30년 조차권의 대가다. 문제가 될 수 없다. 보수가 지향하는 자유주의 시장경제에 오히려 맞는 개념이다. 안보불감증이라는 건 말이 안되고, 남남갈등이 햇볕과 포용으로 생겼다는데 이건 대북정책을 정쟁화하면서 발생한 것이다. 2차 북핵위기가 햇볕정책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건 미국의 정책 실패 때문이다.” 그러면서 그가 인정하는 부분은 이런 것이었다. “ 완전한 평화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점은 인정한다. 불완전한 평화로 적대적 관계에서 평화로 넘어가는 일종의 중간단계다. 남북경제협력, 교류협력이 더 잘되어서 남북이 사실상 통일을 가져올 수 있었으면 좋았지만 국제정세와 같은 외생 변수의 원인을 탓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한계를 인정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MB 정권의 무기력하고 무능에 가까운 정책적 지향점에 비해 이들의 대화가 옳은 부분이 많다고 인정한다. 그렇지만 이들이 간과하고 지나간 부분이 바로 ‘과’(過)에 대한 이해다. 조중동의 협조였건 ‘경제살리기’라는 테제를 앞세운 뉴라이트의 효율적 공격이었건 간에 보수지향이나 혹은 반 김대중-노무현에 섰던 사람들에게 지난 십 년의 남북관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다. 대체적으로 이 부분만큼은 ‘잘했다’고 손을 들어주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 모든 것이 잘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단 인정해야 한다. 그것을 문정인은 ‘한계’라는 말로 표현했지만 실상은 그로 인해 친일세력과 일본기획자가 서울에 발을 디디게 만들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 거꾸로 보기 해보자. 북한은 과연 지난 십 년에 만족하는가? 이건 현재의 MB 정권과 비교하지 않는 속내를 찾아보는 것이다. 그 단초가 되는 것이 바로 작년 말부터 이어져 오는 평양의 대대적인 사정(査正)과 감찰(監察)이다. 중점 부서의 개인비리부터 기구와 조직이 모두 해당되었다. 그 핵심에 바로 지난 십 년을 담당한 부서가 존재한다. 통전부와 아태, 민화협, 민경련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대남담당부서와 합작하여 만들어내었던 햇볕정책이며 평화번영 정책은 결과적으로 매우 참혹한 숙청대상이 되었다. 이유는? 이뤄놓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전략적으로 남북관계가 남과 북 양자에게 성공적이었던 부분은 분명 존재한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매우 귀중하다. 6.15 이전과 이후의 남북관계가 차이가 있다는 분석도 동의 가능하다. 당연히 과거 없었던 남북간의 정상회담이었으니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그런데 왜 이뤄놓은 것이 없다는 지적이 나오는 것인가? 이 점에서 문정인이 살짝 흘리고 지나간 ‘남북간의 경제협력, 교류협력이 잘되어서 통일까지 갔으면 좋았겠지만’ 이라는 말이 끄집어 내질 수 있다. 남북간은 경제협력이나 교류를 했지만 그 결과에서 지난 십 년의 성과물이 없다는 결론이다. 서로가 공감 가능한 범주의 협력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것은 2007.10.3 노무현-김정일 간의 오전 회의에서 노무현의 ‘개성공단이 성공적이다’라는 말 끝에 나온 김정일의 반박이 잘 말해준다. 성공적이지 않았다. 서울은 성공적이라고 주장하면서 홍보에 열을 올리는 사이, 평양에서는 ‘그것을 왜 하나!’라는 반발이 터져 나왔다. 다시 채널과 라인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임동원-김용순, 김만복-김양건 (서훈-최승철), (이종석-권호웅) 채널이 해놓은 일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정치적인 고비에 서로가 정상회담, 장관급회담, 이산가족, 경제회담, 군사회담 등을 적절하게 사용하면서 상호 활용을 했다. 그 가운데 현대그룹이 금강산, 개성사업을 하면서 남북 간에는 나름대로 평화분위기를 이어갔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남북이 ‘공생, 공리, 공영’을 얻은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평양 내에는 서울이 접촉하는 통전부와 그 계열 이외에 더 많은 부서들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스템이 다른 대상을 정치적 필요성에 의해 너무 규격화해서 바라 보는 가운데 생겨난 착시다. 그래서 지난 십 년 이후 서울에서 보수로 포장된 MB 정권이 탄생하고 엇박자가 생긴 셈이다. 남북관계는 지난 십 년으로 ‘돌이킬 수 없는 평화, 공존’은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게 증명된다. 좀 더 세부적으로 보자. 지난 십 년으로 북한은 먹는 문제를 해결했는가? 북측의 경제와 산업이 남측과 불가분의 관계를 형성했는가? 이산가족 문제를 비롯한 분단역사의 기본적인 과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했는가? 나아가 민족문제가 어떤 과제보다도 우선될 목표라는 인식이 국민들에게 심어졌는가? 실천적인 통일의 방안이 서로 강구되었는가? 등. 해결되지 못한 주제는 허다하게 많다. 시간이 짧아서 그랬던 것인가? 경제협력을 보자. 물동량을 따져보면 과거 십 년 꾸준히 서로 교역이 이루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산업이라고 부를만한 협력은 없다. 왜 개성공단에 대한 불만이 있는가? 그것은 그야말로 노동력을 활용한 임가공 공단이다. 그들 내부 산업에 기여도는 없다. 산업의 기초가 없고 협력방안을 짜기가 쉽지 않으니 그렇게(그 수준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을 북한은 이제 인정하지 않는다. 금강산도 마찬가지다. 두 군데 모두에서 벌어들이는 돈은 일 년 해서 약 4,000만불 수준에 불과하다. 더 확대될 여지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남북 간의 경협이 안정적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민족문제로 돌아가 보면, 당장 이산가족이 나온다. 이산 제1세대는 기다림에 지쳐 이미 절반 이상이 세상을 떠났다. 해결은 현재도 난망 하다. 80세 이상의 고향방문도 성사되지 않았다. 이대로 분단역사의 증인들은 사라지고 나머지 2세, 3세 들은 민족문제에서 소원해질 수도 있을 터이다. 이 모든 것이 서울의 잘못은 아니다. 남북 양측 모두에 책임이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잘못일 수는 없다. 그러나 주도를 한 측은 지난 십 년의 정권이다. 완성을 못한 것이 문제가 아니라 추구하고 실행하는 방향이 더 정갈했어야 했다. 정치적 활용도도 중요하지만 문제의 근본에 접근하려는 시도는 없었다. MB 정권에게 ‘나는 잘 했는데 너는 왜 못하나’ 라고 말할 자격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그 시점에서 벌어진 잘못된 결과물이 오늘까지 엄연히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전 정권은 한번쯤은 정권교체가 벌어질 경우, 어떠한 상황이 올 것인가도 생각했어야 한다. 전임사장이 어음을 발행하듯이 10.4선언을 하는 행위는 어떤 말로도 진정성이나 정당성을 가질 수가 없다. 그러한 잘못된 정책 행위가 겹쳐서 남남갈등이 벌어졌음에도 이것을 상대세력의 ‘정쟁화’라고 안일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결국 각론, 실행각론에서의 잘못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지 않으니 바뀌는 것이 없다. 평양의 입장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지난 십 년의 파트너 역할을 한 통일전선부는 과연 십 년을 흘러 보내면서 이러한 부분을 인식하고 있었는가? 그렇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역할을 재고(再考)당하는 상태가 온 것이다. 남북관계가 특별한 중점을 둘 정도가 되었다면 2차 북핵 위기가 왔겠는가 생각해봐도 마찬가지다. 미국의 정책실패도 원인이 있겠지만, 서로 연락조차 되지 않는 대화단절 시기에 입증된 것은 남북관계가 겉보기와는 달리 ‘허상의 신기루’ 수준이었다는 점이었다. 북측 내부의 강경 군부도 그랬지만, 그것을 활로로 선택하게 만들었던 남북관계가 당시에도 존재했다. 평화, 공존의 유지는 인정하지만 노무현 정권 말기인 2006년 7월과 10월의 미사일발사와 핵실험 시기로 돌아가보면 남북관계는 중간이 텅 비어버린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른바 이종석 시기다. 그는 관리를 했지 능동적인 변화를 준비하지 않았었다. 지난 십 년의 단말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그리고 2007.10 제2차 남북정상회담은 누가 봐도 무리한 접근법이었다. 남발된 어음이었다. 냉소적으로 보자면, 연료도 준비되지 않았는데 차를 굴린 꼴이었다. 가다가 멈춘 것이 지금이다. 서울과 평양이 본질적으로 바뀔 수 있었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서로 정치적으로 화장질을 하기 바빠서 놓쳐버렸다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그 사이, 친일과 일본기획자는 성큼 서울에 뿌리를 내렸다.
‘ 특사’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남북한 간에는 이른바 특사 보내기라는 수순을 통해 정치적 해법을 구한 전례가 많다. 최근에도 박근혜 대북 특사론이 나왔다가 해프닝으로 끝났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가 MB에게 제안을 꺼냈지만 한 마디로 거절 당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박희태는 박근혜와 상의도 없이 그렇게 했다는 점에서 집권 이후 두 차례나 그녀를 ‘흔든’ 셈이 되었다. 가장 성공적인 대북특사로 꼽히는 2005년 정동영 대북특사 케이스도 해프닝으로 끝났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2005.6.17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은 평양을 방문, 김정일 위원장과의 면담을 갖는다. 그 결과 6.21 제15차 남북장관급회담이 개최되고, 7.9 북한 외무성이 6자 회담 참가를 발표한 후, 7.12 이른바 대북 송전 200만Kw라는 ‘중대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이것은 아무런 결과 없이 유야무야 되고 만다. 실효성이 없는 제안이었다. 애드벌룬이었고 그건 하나씩 전말을 따져보는 가운데 논의대상에서 어느 순간 훌쩍 날아가 버렸다. 그 후 정동영은 이 경력 하나를 살려서 대북특사로 거론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대선기간에는 ‘개성동영’이라고 외쳤지만 본질적으로 의미를 잃었던 행보를 사람들은 눈치채고 있었다. 2006. 10.9 북핵실험이 벌어지고 난 후 다시 특사론이 대두되었다. 당시 열린우리당 최성은 북한도 여야 초당적인 대북특사로 박근혜 전 대표를 원한다고 다시 박근혜론을 들고 나왔다. 그러나 이 정보를 어디서 들었는지는 모르나 박근혜는 북측의 당시 고려대상에 없었다. 마치 2006년 초 김대중이 그렇게 특사로 가길 원했지만 평양이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평양은 노무현의 복심을 원했던 것이 당시의 사정이었다. 도무지 노무현이란 인물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 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2006.11 월간 ‘말’지의 여론조사 결과다. 대북 핵특사 적임자로 김대중 29.4%, 이명박 24%, 박근혜 17%로 나왔다. 이명박이 박근혜보다 높은 점수를 얻었다는 것은 다른 조사항목을 보면 납득이 된다. 한반도 긴장문제를 해결할 대선후보로 이명박 30.8%, 박근혜 20.3%가 나온 것이다. 월간 ‘말’의 진보적 성향을 감안해본다면 당시의 이 조사는 신뢰성이 높다. 국민들은 이명박에게 남북문제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특사’란 정치적 결정으로 남북이 지난 십 년 바뀐 구석이 있었는가 의문이 드는 것은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에서 커다란 효용성이 없었던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북핵문제가 불거진 2002년 이후 사실상 북핵과 남북문제를 병행론으로 풀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노무현 정부는 이를 선순환론이라는 애매한 개념으로 남북문제의 6자 회담이란 다자협상의 하위성을 인정했다. 그 결과 나타난 것이 2005~2006년의 경색국면이었다. 실제로 북핵 실험 이후 노무현 정부는 임기 기간 중에 북한이 6자 회담에만 나와도 좋겠다고 했을 정도로 공황상태에 빠졌다. MB 정권이 들어서고 특사론은 벌써 박근혜를 대상으로 두 차례, 그리고 넌지시 자가발전에 가까울 정도이지만 김대중에 의해 한 차례가 나온 바가 있다. 대 통령직 인수위 시점에서 한반도 주변 4강에 대한 특사로 정몽준-박근혜-이상득-이재오가 미중일러를 다녀왔다. 그러나 당시에도 북한에 보낼 특사는 언급되지조차 않았다. MB는 대북특사 자체를 운용할 생각이 없었던 것으로 봐야 한다. 비핵개방3000이란 정책 로드맵을 보면 이건 명확해지지만, MB정권은 일단 대북문제를 현실적으로 북한의 페이스에서 풀거나 풀리는 것을 ‘꺼리는’ 것으로 판단해도 좋을 것 같다. 그렇다 해도 MB 정부는 한 번도 ‘특사’파견 문제를 타진하지 않았나? 7월 11일 박왕자씨의 금강산 피격 사건이 벌어지기 전, 6월 촛불민심이 격화되기 시작하고 대통령의 사과담화까지 나온 상태에서 국정원은 여러 경로를 통해서 대북 특사 파견 문제를 타진했다. 핵심은 이것이었다. 첫째, 김정일 위원장을 만날 수 있는가. 둘째, 경색된 남북관계를 풀 수는 있는가. 셋째, 누가 특사로 가는 것이 가장 좋겠는가. 이것은 일종의 타진이었지만 다른 채널이 없는 MB 정부에서 이렇게 할 수 있는 곳도 국정원 외에는 없었다. 그에 대한 답변은 냉랭했다. 첫째, 무슨 얘기할 내용물이 있어야 하지 않나. 둘째, 먼저 그 쪽(서울)이 내놓을 수 있는 정책은 뭔가. 셋째, 그냥 온다면 받아주겠나. 내용만으로 보면 완전 거부지만, 그 이면에는 비핵개방3000을 고집하는 상태에서, 6.15와 10.4선언 자체를 출발점으로 보지 않는 상태에서 특사를 받을 수 없다는 걸 명백하게 해버린 것이다. 당연히 이런 상황을 청와대가 받아들이지 못했다. 여전히 ‘여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7월 11일 피격사건 당일 상황을 인지한 상태에서도 18대 국회개원연설에서 “과거 남북간에 합의한 7.4공동성명, 남북기본합의서, 비핵화공동선언, 6.15공동선언, 10.4정상선언을 어떻게 이행해 나갈 것인지에 대해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가 있다”고 이른바 ‘중대제안’을 하였다. 국민의 피격소식과 이 제안 사이에서 격렬한 비판여론이 있었지만 그것을 알고서도 MB가 이 연설을 강행한 까닭은 무엇인가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MB는 성격적으로 또 현재의 정부 시스템상 중요한 결정이 모두 자신에게 쏠리게 되는 방사형의 네트워크를 구성해 두었다. 최고 권력이 매사 직접적인 관할을 하는 시스템인 셈이다. 대북문제의 경우, 그가 생각하는 관점에서는 ‘특사’를 보낼 사람도 없거니와 이건 시간이 걸려도 자신이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제안은 보기 좋게 냉랭한 답변을 받았다. 그래서인지 박희태의 박근혜 특사론에 ‘지금 특사를 보낼 필요가 없다’는 MB의 대답이 특별한 숙고도 없이 나왔다. 형세만을 놓고 보면, MB가 새롭게 남북관계에 접근해보려고 하지만 정권 초기 누적된 불만과 MB식 정책에 대한 평양의 의구심이 서로 간 미세한 대화의 틈바구니도 제공하지 못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7월 말 싱가포르 ARF 의장성명에서 금강산 사건과 10.4 선언의 삽입을 둘러싸고 남북 간에 치열한 외교전이 벌어진 해프닝을 거치면서 박희태의 박근혜 특사론까지 이르는 과정은 남북한 문제가 결코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해법이 없다는 비관론이 나올 법도 한 장면이었다. 지난 십 년의 남북관계를 해왔던 소위 전문가들이 MB 정부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계속 내고 있지만 이 문제는 쉽게 풀어질 공산이 없는 듯 보인다. 어느 한 쪽이 포기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결국 미국이 테러지원국 해제까지 하고 나서야 또 다른 방식이 나타날 공간은 마련될 것이다. 여기에서 주목해볼 일은 그런 기회가 온다고 해도 다시 ‘특사’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는 점이다. 과연 MB는 박근혜를 특사로 보낼 수 있을 것인가? 북한은 박근혜를 특사로 받을 수 있을 것인가? 이 두 관점에서 보면, 이 둘 다가 그리 쉽지가 않다고 판단된다. 우선 MB가 박근혜에게 쥐어줄 카드가 마땅치가 않다. MB 정권은 현 시점 여의도정치가 제대로 가동되고 있지 않다. 즉, 청와대가 주도하는 여의도이고, MB가 권한을 여의도에 대폭 부여하면서까지 자신의 레임덕을 만들 이유조차 없다. 그런 차에 박근혜를 선택할 상황도 나오질 않는다. 설혹 그렇게 된다고 하더라도 이번에는 평양이 문제다. 박근혜를 상대하는 것이 MB의 앞으로 대북정책의 견제력을 높여줄 수 있는가에 의문이 남기 때문이다. 이 미묘한 역학 관계에서 대안으로 다른 인물이 등장할 개연성도 있다. 홍 준표 한나라당 원내총무의 남북국회 차원의 의원교류나 김형오 국회의장의 남북국회차원의 교류 제의는 그 점에서 새로운 대안처럼 보이지만 지금은 그런 곁가지의 교류가 문제가 아니라 MB와 정권에 대한 기본적인 노선평가에서 서로 맞지 않는 부분이 나와버렸기에 본질적 경색은 이어질 거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차제에는 남북이 서로 이야기할 사업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하게 되었다. 박왕자 금강산 피격사건의 여파와 대북중대제안, ARF 의장성명을 둘러싼 해프닝, 그리고 특사 제안 자체를 MB가 거부하는 상황까지 이어보면 이것은 서울-평양 양측 모두가 지독스런 자가당착에 휘말려 버렸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금강산 관광은 발이 묶였다. 이산가족 면회소만 덩그렇게 있지 이산가족 이야기는 꺼내지도 못한다. 서울의 관료들이 군사분계선을 넘지도 못한다. 통일부의 통지문은 수령조차 거부된다. 김하중은 정작 북측의 파트너들에게는 통일부 장관 취급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 봐도 무방하다. 이 전반적인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려면 무엇인가 특별한 것을 찾아야 하지만 MB는 ‘북측과 진지하게 협의할 용의’는 표명했지만 토의의 방향에서 기본요건 자체를 거부했다. 무조건 만나서 토의하자는 것은 그간 해온 말들로 인해 성립되기 어렵다. 말이 행위에 대한 준비 없이 먼저 나온 것은 곧 닥칠 문제를 푸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절감한 몇 개월이었다. 10.4선언을 MB가 조건 없이 무조건 채택하지 못하는 것은 납득할 만하다. 그 속에 담긴 내용이 모두 해야 할 일이라면, 확실히 노무현은 어음 그 중에서 질이 나쁜 견질어음을 발행한 셈이 된다. 그것도 정권말기에 그렇게 할 일이 아니었다. ‘감격적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이상한 것이다. 그 장면은 그랬는지 모르지만 과정과 내용은 형편이 없다. 정치적 의미에 너무 천착해서 보게 되면 또 평형을 잃는다. 또 ‘영화 한 편’ 찍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보다 일찍 진행하고 또 일부의 사업은 진행형이 되어 있었어야만 마땅하지만 덩그렇게 서명만 하고는 뒷일은 새로 올 사람이 감당하게 만든 꼴이다. 이러니 누구 탓할 일도 없다. 거기다가 이걸 받은 MB는 남북문제 자체를 전 순위로 다루고픈 생각이 없는 사람 같다. 후 순위, 그 가운데서도 입맛에 맞는 상황까지는 기다린다는 전략이다. 현실적 확대발전의 각론 짜기도 생각하지 못한다. 나오는 방안이 모두 비현실적이다. 나들섬 구상이 대표적이다. 미국, 일본이 앞서가고,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 이후에는 그간 행사를 위해 몸을 낮추어온 옵션이 사라지는 상황까지 오게 되면 그 때는 순위가 문제가 아니게 된다. 그런데도 이렇게 간다. 그래 서 이런 생각도 드는 것이다. 뉴라이트가 MB에게 주입한 생각은 일본의 의견이다. 정권 초기부터 보수우익 세력의 좌장 노릇을 하려던 김진홍이 방일 중 독도문제를 언급하지 말라고 조언했듯이 이 사안도 비슷한 의견전달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비핵개방3000은 그 기본틀이지만 다른 부분에서 확인되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갑의 위치를 확보해라’, ‘정권초기 길들이기에서 이겨야 한다’, ‘식량과 비료를 달라고 북은 반드시 고개 숙인다’는 등이었다. 그 중 식량과 비료가 지난 5월 말까지도 청와대의 키워드였다. 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무산되자 6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약간 변한 것이 바로 국회개원 연설이었다고도 한다. 역시 이렇게 보나 저렇게 보나 잘못된 첫 단추가 꿰어진 것은 사실이다. 이젠 약간의 감정싸움으로까지 가는 모양새지만 그렇게 해서 손해나 이득을 따지는 실용적 구분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남북문제는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손해가 나는 것은 서울-평양 양측 밖에는 없다. 다른 나라는 다들 제 살 길이 있다.
조금 본질적인 문제로 들어가보자. 북일관계다. 앞서도 ‘다시 백 년’이 결코 서울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라는 지적을 했지만 이건 분명히 평양도 향한 개념이다. 왜 그런가? 전 후 일본은 확실히 패전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국민들의 경우는 여러 가지 면에서 수동적인 성격을 국민적으로 형성해버렸다. 그래서 능동적이 되라는 주문이 오히려 많지만 그게 쉽지는 않다. 그런데 한편으로 일본의 지도층은 능동적 접근을 다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본 우익은 더욱 똘똘 뭉치는 계기가 형성되었다. 계파 간의 차이는 있으나 우익이란 관점은 재정립되는 과정을 쉽게 거친 셈이다. 내가 주목해서 본 것은 뉴라이트의 ‘북한 정상화’, ‘정상국가론’이었다. 논리의 출발점은 비정상이므로 정상화(normalization)가 필요하다는 것이었지만 이것이 상대가 못 받아들이며 거부감을 일으킬 때 사용되는 것은 흔히 ‘근대화’라는 용어로 슬그머니 다른 옷을 갈아 입기도 한다. 이를테면 북한의 전근대성을 근대성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서울에서 정상화론이 다시 나오는 것은 확실히 체제변환(Regime Change)이란 이슈와도 통하며 이를 목적으로 하는 사고가 움직인다는 걸 발견한다. 그 뒤에는 바로 북한재건계획이라는 정치 경제적 개입론이 존재한다. 그러니까 뉴라이트 식의 대북접근은 최종적으로 누가 어떻게 체제변환을 시킨 또는 시키는 과정에서 재건참여를 하는가 라는 테제로 맞물리는 것이다. 현재대로라면 결코 한국이 중심으로 기능할 수가 없다. 정치력 경제력이 따라가지 못한다. 수교협상을 앞둔 일본이 내미는 카드가 슬그머니 낮았다 높아졌다 반복되는 과정을 지켜보면 그에 묘하게 대비된다. 2002년 9월 제1차 북일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일본 외무성의 다나카 히토시(田中均)는 유명한 외교관이다. 외무성 재직시설 ‘정책의 다나카’로 이름을 날렸던 사람이고, 고이즈미 준이치로 당시 총리의 전격적인 후원과 함께 김정일-고이즈미 회담을 평양에서 만들어낸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는 외무성 동아시아과장, 아주국장을 거쳐 외무심의관을 끝으로 아베신조 총리와의 불화로 외무관료 생활을 접었다. 그의 발언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있다. “일본 외교의 시작점은 한반도의 평화에 있다.” 대북 강경책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바로 이렇게 한반도 중시파들에게 있어 서울과 함께 평양은 매우 주의 깊게 접근할 대상이라는 인식은 폭넓게 퍼져있다. 그들에게 한반도에 대한 향수 같은 것이 없지는 않을 것이지만, 결국 일본이란 해양국가가 대륙을 향해 가는 길목은 가까운 한반도에 그 해답이 있다는 의미에 가깝다. 아울러 안보론 관점에서는 절대 위협요소이기도 하니 경계대상 일호인 셈이기도 하다. 북일관계는 2008.6.11~12 이틀간 에서 북측이 ‘납치 해결을 위해 조사하겠다. 해결되었다고는 하지 않겠다’는 발언을 하면서 새로운 단계로 돌입한다. 북일 양자 관계에 미국의 개입이 성공했다. 2004.5.22 2차 북일정상회담 이후 경색국면을 벗어나지 못하던 양자 간의 관계개선 움직임에 미국이 개입할 여지를 확보한 것도 흥미롭다. 다시 일본 관방장관 마치무라 노부타카가 등장한다. 6.27 각의 직후 언론브리핑에서 이렇게 말했다. “(납치문제는) 가능한 빨리 일북 간에 방법을 합의하고 재조사에 착수할 것이다.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수단이 테러지원국 지정은 아니다. 일본이 북한에 아무런 카드도 없는 것은 아니어서 필요한 카드를 활용해 해결해 나갈 것이다.” 양 자협의 관계가 복원되고 인도적 물자수송 선박에 한해 북한 선박의 일본 입항금지조치, 일북 간 인적왕래 금지조치가 해제되었다. 일본 내 여론은 여전히 반대의견이 높았지만 마치무라 관방장관의 말처럼 그들은 이제 ‘다른 카드’를 매만지고 있는 상태다. 북 한은 이런 일본을 경계하지 않는가? 철저하게 경계한다. 단순히 일제 청산을 정권수립 후 모질게 단행했다고 해서가 아니다. 일본에 대한 기본적인 적개심도 있지만 평양은 일본의 수법에 대해 연구를 많이 한 축에 속한다. 그러니까 겉모습이 어떻더라도 일본의 한반도 문제 접근 본질은 결국 침략적이라는 것에 대해 각인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일본기업은 평양에 상륙 자체가 어렵다. 사무실 하나 세우는 것도 어렵다. 재일 총련기업들이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틀을 통해 일본인들은 정작 들어오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점을 잘 반영한다. 일본은 그것을 잘 안다. 시도해본 측이니 당연히 알 것이다. 그래서 상황의 조성에 더 신경을 기울인다. 70~80 년대까지는 일본사회당이 대북 대화채널을 형성했었다. 그 이후 자유민주당이 냉전 종식과 함께 본격적으로 그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김일성-가네마루 신 회담 같은 굵직한 정치적인 변곡점이 있었지만 역시 중점은 90년대 중반 김일성 주석 사후 벌어진 북한의 고난의 행군 시대를 통해 북한의 약점을 파악하게 된 것이다. 거기도 결국 ‘경제’가 포커스가 된다. 북핵실험은 그런 점에서 일본 우익의 관점에서는 비상사태였다. 핵을 보유한 북한을 어떻게 상대하는가를 두고 치열한 의견대립이 있었던 셈이다. 그건 민심도 마찬가지였다. 핵(核)을 직접 겪어본 사람들의 공포다. 그러나 분위기가 다시 바뀌고 있다. 상대해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쪽이다. 그렇지만 6자 회담의 단계별 이행이 되는 과정에서 아직도 일본은 대북 중유제공 등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하고 있다. 이른바 무임승차다. 믿는 구석은 미국이다. 거기에 수교협상을 재 가동하면서 다시 채널을 열면서 마치무라가 이야기하는 ‘필요한 (압박 혹은 설득) 카드’를 준비하는 중이다. 2002년, 2005년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거친 후, 일본은 북한의 약점을 찾는 데 많이 치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나바시 요이치(船橋洋一)의 ‘조선반도 제2차 북핵위기’라는 책에는 북일 평양선언의 작성과정이 언급되어 있다. 초안 작성과정에서 북측은 마지막까지 단 한 장의 종이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한다. 모든 문장이 일본의 안을 토대로 북한이 주문을 추가하고, 일본측이 다시 그에 답하는 주고받기 식으로 진행되었다. 외교관행에서는 아주 드문 예라고 평가를 했다. 그런데 실제 북한과의 서류협상 과정은 대체로 이렇게 진행이 된다. 남북한 간에도 마찬가지다. 10.4 공동선언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6.15 선언의 경우도 내용상 짤막하였지만 이 전례를 그대로 따랐다. 북한은 먼저 제시하기 보다는 제시 받은 것을 검토하고 추가하는 데 익숙하다. 이런 습관은 상대의 안을 먼저 봐야 한다는 것도 있지만 자신들의 안을 던지지 않는 수동성도 한 몫을 한다. 혹자는 이런 것이 문서의 큰 구도잡기가 되지 않는 실패하기 좋은 방식이라고 보기도 한다. 오너가 하부에서 올라온 서류를 결재하는 방식이라고 북한 외교술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후자가 북한이 평가 받기를 원하는 말일는지 모르지만 전자의 폐해도 적지 않았다. 남북한 간의 교섭 합의내용을 보면 분명 그런 요소가 곳곳에서 눈에 띈다. 합의되었다고는 하지만 각론이 없는 애매한 상태가 바로 그것이다. 큰 틀에서 방향이 원하지 않는 것이 나오게 되면 쟁론이 즉각 나오게 된다. 그걸 활용하고자 하는 것 일수도 있지만 시간낭비가 되기 일쑤다. 이 경험은 앞으로 북일관계에서 매우 중요하게 취급될 것이다. 큰 틀과 각론을 세우는 데, 동일한 방식이라면 일본식 틀이 채워질 공산이 크다. 현재의 추세대로라면 북미관계의 진전은 곧 북일관계에서도 뭔가 특별한 개선점을 요구하게 된다. 비록 중유지원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있지만 다른 카드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6자 회담에서 독도문제로 과연 서울이 도쿄에 강력하게 이행을 요구할 수 있을 것인지, 나아가 평양이 도쿄를 6자 회담에서 빠져라 요구할 수 있을 지는 의문이다.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개연성이 있지만, 정작 북일관계는 지금 한창 진행 중으로 들어갔으니까. 본질을 본다는 게 어렵다. 그렇지만 ‘다시 백 년’이라는 전대미문의 이 행보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노리는 일본의 ‘눈’(시각)이다. 그 나름의 다른 목표가 분명히 있다. 서울공략처럼 친일매국세력을 앞세우는 전략은 대북관계에서는 불가능하지만, 몇 가지의 새로운 형식이 주어질 공산도 크다. 대략적으로 요약해보면 이런 방식이다. 첫째, 수교협상의 결과로 나오는 배상금 문제의 처리에서 산업화, 경제개혁 참여의 방식을 선택한다. 이른바 북한 재건론의 첫 걸음이다. 둘째, 장악된 서울을 발판으로 한반도에서 각기 다른 두 게이트(투 웨이) 접근방식을 선택한다. 때에 따라 남에서 북으로 연결되는 라인에 자신들의 신봉자들을 앞세울 수 있다. 셋째, 미국을 통해 안보적 관점에서 북핵 해체에 적극 개입한다. 결국 특정 시점에서는 에너지 지원 등 산업지원 항목이 대두되고 미국을 대신한 일본의 참여가 불가피하게 된다. 그 주도권을 미국의 힘을 빌어 일정 수준 행사한다. 넷째, 정치적으로 일왕의 평양 방문이 가능하도록 여건을 마련한다. 이미 고이즈미 전 총리의 2차 방문이 있었고, 그에 따라 분위기의 조성만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2010년 남북 동시 방문이 현 시점의 목표다. 현재로써 가장 큰 장애요인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올림픽이 끝난 후 중국의 대 한반도 동향은 일본의 작금 가장 큰 관심사항에 속한다. 중일관계는 그래서 긴장보다는 유화 쪽이 선택되는 중이다. 중장기적인 포석이라 할만하다. 어차피 평화체제 논의로 넘어가게 될 경우, 중점은 미중 양자 간에 결정이 난다. 서울도 지금은 서서히 배제되는 형국으로 가고 있다. 일본이 노리는 것은 틈바구니에서의 공략인 셈이다. 비어있는 곳을 찾는 눈을 ‘평화’라는 표면적 이유인 다떼마에(建前)로 내세우며 숨겨진 혼네(本音, 속마음)를 감추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 일본이다. 그래서 일본의 혼네를 찾는 것이, 선택하여 대응하는 것이 더 귀하게 여겨지는 시간이 되었다.
남과 북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할 수 있는가에 한 걸음 다가서 보자. 일본 세의 침투는 놀라울 정도로 가깝게 와 있다. 그런 상태를 방기했던 것이 바로 지난 십 년 시대의 잘못이라고 한다면, 앞으로 십 년 또한 그런 것을 방임할 것인가 아니면 능동적이 되어서 해결할 것인가의 과제를 가진 시간이라고 봐야 한다. 어차피 한반도의 격변은 불가피한 대세다. 그 와중에서 남북한이라는 분단의 양자관계는 정치적 재정립과는 다르게 무엇인가 특별한 변화를 요구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기 위한 장애요인은 없는가. 단번에 남남갈등의 원인이 제기된다. 왜 갈등하는가? 지난 8년 간 ‘우리민족끼리’라는 말은 대단히 많은 곳에 사용되었다. 그에 대한 사회내부의 비판도 만만치가 않다. ‘민족’이란 용어, 우리민족끼리라는 담론의 정치성 때문이다. 이 말을 정리하지 않고는 앞으로의 남북관계에서도 새로울 것 없는 낡은 담론의 틀에 다시 갇히게 된다. 즉, 남남갈등의 원인인 바로 그 담론이다. 민족인가 동족인가. 겨레인가. 북 한의 ‘민족’에 대한 개념 변형을 드는 일례는 1995.1.18 평양방송이 ‘김일성 민족’을 선언한 데서 그 연원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민족끼리는 곧 민족공조 즉, 북한식 공조 개념을 가지고 출발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이 아닌 동족, 겨레를 사용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그래야 서울이 생각하는 ‘민족’의 의미가 제대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 담론은 2008.7.31 한승수 총리의 기자 오찬간담회에서도 등장한다. 금강산 사건을 두고 비판의 날을 세운 한 마디가 터져 나온다. “북한이 ‘우리민족끼리’라고 하면서 한 번의 사과도 없다는 것은 말과 행동이 다른 것이다. ‘우리민족끼리’라는 북한의 구호에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말을 근거로 한다면 한총리는 일단 ‘민족’이란 담론에 대해서는 북한이 어떻게 사용하건 간에 혈연이란 개념에 더 접근해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민족끼리 담론은 여러 형태의 연원적, 그리고 실행 상황에서의 비판을 받고 있다. 그것을 간략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해방 이후 사회주의와 민족 담론을 결합해서 통치방안을 만들었다. 일제시대 저항적 민족주의와 주체사상을 결합하는 과정에서 북한식 사회주의 특성으로 ‘민족’을 활용했고 여기에 언어, 혈통, 핏줄 등을 추가하면서 민족에 대한 해석을 구체화 했다. 둘째, 민족을 남한에 대입하는 과정에서 비현실적인 통일지상주의와 남남갈등을 불러 일으키는 매개로 활용했다. 민족공조를 꺼내어 내부적 체제혼란을 단속하고 남한으로부터 경제적 실리를 취득했다. 셋째, 체제의 선민사상 강조를 위해, 또한 다른 몰락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차별성을 부각하기 위해 우월한 민족을 내세웠다. 그를 통해 수령독재와 세습체제 공고화에 활용했다는 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민족끼리’의 담론에 휩쓸린 6.15선언이나 10.4선언도 그 관점에서는 민족공조라는 난센스에 처한 것이니 그 가치가 없다는 주장인 셈이다. 이 담론은 현재의 남남갈등을 이해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에 대한 처방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감상적 민족주의’를 견제해야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타이트한 상호주의 원칙이 견지되어야 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분 단의 현실적인 모습이기 때문에 북한의 이러한 민족 활용은 일정한 수준의 실제 행동으로 연결되어 있음은 사실이다. 1994.12.10 단군제(檀君祭)를 지내고 난 이후 단군을 실존 인물로 부각시켰다는 사실, 세계 4대 문명이 아니라 대동강 문명이 제5대 문명이라고 주장하고, 실크로드의 출발점이 북한이라는 등의 주장은 우월 민족에 대한 강조뿐만 아니라 사실상 김일성 민족의 구체화 작업으로 간주되었다. 문제는 이러한 주장이 뉴라이트의 대응형식으로 거의 동일하게 직접 연결된다는 사실이다. 즉, 왜 뉴라이트는 신 보수우익이라는 기치를 내걸면서 걸핏하면 ‘북한요소’를 꺼내어서 친일을 합리화 하는가 하는 행위본질을 여기서 보게 된다. 그들의 입장에서 북한식 ‘우리민족끼리’는 일단 받아들이지 말아야 할 대상이며, 당연히 배척할 상대라는 인식을 깔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철저하게 ‘상호주의’를 주장해 나가면서 이른바 상대의 힘을 소진(消盡)시키는 방향을 구사하는 매개가 된다. 이 주장방식이 바로 해방 이후 민족주의 우파를 밀어낸 친일수구의 가장 중심 되는 담론이기도 하다. 중도 우파의 경우는 이 관점의 일부를 받아들이기도 했으나 친일과 친북이란 경계에서 민족이란 요소를 받아들이며 다시 ‘좌파’로 몰리게 되었다. 즉, 현재의 뉴라이트 식 ‘좌파론’의 본질에는 ‘북한요소(부분인정을 포함한다)=좌파’라는 관점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고, 그것은 해방 직후 친일파들이 상용했던 수법이다. 지난 십 년 이 구도에 변화가 온 것은 ‘우리민족끼리’에 대한 해석을 달리 했기 때문인데 우선 북한을 민족적 대상이면서도 대응할 정권으로 본 것이고, 나아가 북한요소를 부정적 측면뿐만 아니라 긍정적 측면에서 분석하기 시작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그 중점은 분단역사의 정리와 경제협력, 그리고 민족협력이란 구도가 설정되었다. 이 가운데 다시 민족협력이라는 사회 문화 체육 등 일정한 수준의 협력이 바로 ‘북한 식 민족 개념=북한체제’라는 등식으로, 재차 좌파로 분류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이 사회 국가 내부의 갈등을 증폭시키게 된다. 올바른 ‘민족 또는 동족’ 개념이 묻혀버리게 된 것이다. 거기에 민족공조의 한계상황이 분단상황에서 돌출한다. 끊임없는 ‘담판구도’가 그것이다. 남북한 간의 협력이 북한의 생존을 위한 핵무기 선택과 맞물리면서 국제문제로 비화하는 상황이었다. 김 대중-노무현 시기는 이 개념의 정리를 채 못하고 끝나 버렸다. 그러기에 갈등의 요소가 그대로 존재하고, 지금도 좌파 우파의 이야기가 농밀하게 터져 나온다. 오히려 진보 보수라는 관점은 어느 시점엔가 묻혀 버렸다. ‘진보=좌파’가 아니라 좌파 바로 그 자체를 주제로 들고 나온 것이 뉴라이트였다. 그들은 아예 자신들의 주장을 반대하는 행위나 논리 자체가 ‘좌파다!’라고 정의 내렸다. 완벽한 해방 직후의 상황이다. 이것을 극복하지 않고서는 남북 간의 협력은 MB 정권 하에서 명백한 한계에 부닥칠 수밖에 없다. 그것을 한승수 총리의 발언에서 엿볼 수 있다. 그는 교묘하게 정권 초기 북한을 ‘타도의 대상’이라고 설정하고 군사적 선제공격까지 거론한 상황을 배제하고 당면한 입장만 거론했다. 남북관계의 악화가 어느 수준으로 갈 것인가에 분단이 결코 분쟁이 없는 곳이 아니란 사실을 빼놓고 ‘민족’이란 단어를 꺼낸 것이다. 그것은 확실한 6.15, 10.4선언에 대한 비판이었다. 민족담론의 역공에 해당한다. 이 상태에서 진일보한 관계개선 방안이 나오기가 어렵다는 건 뻔하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담론 하나가 빠져 나온다. 바로 ‘우리끼리’라는 것인데, 민족이란 단어만 속 빠지고 그 가운데에 ‘경제발전이 가능하다면 누군가와’ 함께 하는 새로운 ‘끼리’가 가능하지 않겠는가라는 타진이 벌어지는 중이다. 이것은 뉴라이트 친일매국세력의 한국 사회에 대한 새로운(낡기도 한) 접근법에 해당한다. 바로 ‘한일동맹론’이다. 한미일 동맹과 한일동맹은 전혀 다른 개념으로 구분되어야 한다. 그런데 한일동맹의 본류에는 이렇게 일단 북한과의 ‘우리민족끼리’는 실용적 가치가 없지만 일본과의 ‘우리끼리’는 경제적 실용성이 담보된다는 논리 구성을 가진다. 당연히 이러한 경제상황이 발생할 경우 (방위연구소 다케사다 히데시가 말한 한국이 IMF같은 경제위기 상황이 다시 와서 일본이 자금지원을 하는 실례) 한일동맹론은 우리끼리라는 명칭이 있건 없건 간에 성립 가능한 테제가 되어 버린다. 결과적으로 ‘민족’에 대한 토의는 완전히 ‘좌파론’으로 묻히게 되는 계기를 만들어 가게 될 것이다. 아무리 하나의 겨레, 한민족, 동족을 언급한다 하더라도 ‘우리민족끼리’의 진정성이 의심 받고 그 범례가 주어지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해석이 나올 수가 없다. 그렇게 굳어지는 것이다. 과연 ‘우리민족끼리’는 정치적 용어에 불과한가. 그 렇지가 않다. 아무리 북한 내부에서 이를 정치적 용어화했다고 하더라도 지난 십 년 동안 남북한간의 협력에서 얻은 가장 큰 실익은 과거의 한국에 대한 거부감, 두려움을 북한 인민들이 더 이상 가지지 않는다는 데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변화가 아니다. 거의 의식혁명에 준하는 것이다. 이것을 90년대 후반 경제위기에서 남측을 활용해서 경제실리를 취하고 아울러 내부체제 단속을 했다는 논리로 본다면, 오히려 내부체제 속에서 남한이라는 요소가 거부감 없이 받아들여지는 환경의 장점을 더 높게 봐야 하는 것이다. 평양에 에쿠스가 다니고 대한민국이란 글자가 찍힌 쌀 포대기가 유통되고, 은밀히 남측의 영화 음악 등 CD를 돌려보는 이 현상의 뒤 그림자를 봐야 한다. 숱한 통일 장사꾼들로 인해 이런 저런 이미지는 많이 손상되었을 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수준은 대단히 양호한 것이다. 이러한 남북 간의 의식적인 교류는 전통적인 냉전구도와는 다른 실질적인 남북간의 협력구도 설정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친미, 친일 분자들에게 불안감을 안겨준 것도 사실이다. 특히 일본은 여전히 북한 땅에 제대로 된 발길을 한 걸음도 직접 떼놓고 있지 못하다. 그들도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그에 비해 경의선, 동해선 철도는 철도부문에 한해 비무장지대 관할권이 미군으로부터 양도되었고, 항공 직항로가 비록 서해를 경유하지만 그래도 뚫렸다. 금강산, 개성을 통해 얻어진 이 변화는 중대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나 더 확대발전 시키는 데는 실패했다. 그 경계에서 깔짝대는 수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 머물고 말았다. 서울-평양 간의 본질적 교감은 전혀 형성되지 못했다. 여전히 긴장되고 또한 갈등이 첨예하다. 그 틈을 노려서 친일은 공격을 개시한다. 지난 십 년이 아쉽게도 이러한 개념적 정리를 뛰어 넘는 성과물에 이르지 못한 것이다. 그 와중에 친일매국세력이 오롯이 자리하도록 해버린 것이고, 그 결정적인 역할은 바로 ‘그저 자신들이 처한 시간만 잘 관리하겠다’는 노무현 (참여정부) 시대에 벌어진 일이다. 민족이건 동족 혹은 겨레이건 간에 지금 필요한 것은 서로 간의 정합성(整合性)이 유지되는 것이다. 그것을 확보하지 못하면 이러한 갈등구도는 연속될 수밖에 없다. 드러난 취약점에는 항상 공격이 따르고 그것은 과거 잘 써먹었던 수법과 수단, 그리고 새롭게 짜진 이론과 형식으로, 또한 국제주의를 바탕으로 한 분단의 피동적 심화를 통해 끊임없이 공격 받을 개연성이 높다. 그 전조(前兆)는 이제 확실히 보이고 있다.
무엇을 어찌 해야 하는가. 본 주제로 들어가보자. 현실적으로 가능한 해법이 있는가 하는 점이다. 다시 ‘화장질’ 수준이 아닌 본질적인 방향을 찾아야 봐야 할 때다. 여 기서 두 가지의 장애물이 나온다. 먼저 섣부른 체제통일론이다. 이른바 흡수통일 같은 논리도 그렇지만 경제적 우위가 있다고 생각하는 남측의 일방적 통일 주도론이다. 이것은 갈등을 양산한다. 일본식으로 말하자면 속마음을 감춰도 무방한데 드러내놓고 우리가 너희를 먹겠다고 하는 주장들이다. 진정한 실용주의 접근에도 방해물로 작용한다. 다른 한 가지는 몹시 서툰 정책의 각론(各論)이다. 이건 실행각론과도 통한다. 아무리 쥐어 짜내도 일방적인 생각만 가지고 상대와 협력구도를 만들 수 없다. 그런 측면에서 이 한계를 빨리 극복하는 것이 필요하지 섣부르게 각론만 많이 양산하는 구도는 올바르지 않다. MB정부의 대북정책은 거시적으로는 비핵개방3000이 유지되고 있다. 각론은 없다. 실용주의 관점에서 꺼낸 로드맵이다 보니 그 속에 숫자가 명쾌하다. 소득 수준을 3000불까지 올려준다는 것이다. 그 조건은 있다. 서울의 주도권을 무조건 인정하라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실행각론은 없다. 정책이라 부르기도 민망할 수준이다. 통일부가 내놓은 MB정부의 대북정책은 타이틀이 ‘상생 공영’이다. 덩그렇게 구호만 있지 각론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가능한 일을 해보자고 하지만 과거 십 년에서 했던 일들 이외는 없다. 그리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은 10.4선언에 대한 검토도 ‘만나서 토의하자’는 것이지 그에 대한 우리 측 의견을 내놓지는 않았다. 앞 서 2002년 북일회담에서 일본의 경험을 이야기했지만 북한이 먼저 서류를 내놓은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건 남북관계에서도 동일했다. 합의를 하기 위한 초안이 서울에서 만들어지지 않으면 그걸 검토하거나 또는 서로 토론할 수가 없는 구도가 형성되어 있다. 즉, 거시적인 틀을 잡고 이끄는 것이 서울이 되려면 이 작업을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데 여기에 치명적인 오류가 정권 초기부터 개입되어 있다. 실행각론을 내놓지 않으면서 원론부터 확정하자는 주장들이 정책의 대세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 중에는 지난 십 년의 냄새 지우기로부터 완벽한 상호주의 적용 등이 포함된다. 토론이 열려 있지 않은 셈이다. 미리 일정 수준 닫아두고 그것을 넘지 않는 범위로 제한되었다. 그래 놓고서 실행각론을 짜본다고 끙끙 앓지만 어렵다. 청와대의 오늘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모순에 빠졌다. 하나는 대북정책이 과연 외교(外交) 관점에서 중심을 잡고 봐야 하는가 아닌가에 외교 편에 손을 들어주었고, 대북정책 자체의 독립성을 감안한 접근자가 전무한 상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단순한 후 순위가 아니라 대화제의 자체가 ‘연계전략’이란 모순점에서 탈피하지 못한다. ‘병행론’이 먹혀들 공간이 전무한 상태에서 공허한 외침만 계속 된다. 실행각론에 앞선 정책방향의 절대모순이 나와 있고, 이 상태에서 대화 자체의 모멘텀을 만들기도 역부족이다. 해보자고 한다면 인물부터 바꾸어야 한다. 1993.2.25 김영삼 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나을 수는 없다”라는 정말이지 화끈한 멘트를 날렸다. 그러나 이 상황은 1993년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하면서 분노로, 다시 1994년 정상회담이 예비되었다가 김일성 주석 사망, 북한패망론의 회자로 이어졌다. 남북한의 이러한 요철(凹凸)같은 상황까지 감안한 거시적이면서 미시적인 접근법은 결국 병행론 밖에는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던 지난 이십 년이다. 이걸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MB정권 5년 기간 동안 그야말로 ‘(최고 정상간) 서로 얼굴도 안 보는’ 기간이 이어질 수 있다. 지난 십 년을 돌이켜 보면 왜 실패했는가의 이유로 정권 초반에 서로 간의 조율에 실패했기에 추동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는 한계를 보게 된다. 김대중-노무현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노무현 정권 시기에는 아예 ‘노무현의 진짜 생각이 뭐야!’라는 이야기도 나돌았다. 결국 퇴임을 넉 달 앞두고서 정상회담을 했지만 그건 누가 봐도 알맹이가 없는 정권 막판의 쇼(한풀이) 같은 것이었다. 오늘의 남북관계에서도 ‘무엇’이라는 주제에 조차 접근하기가 이래서 어렵다. 일단 정권의 의지표명이 7.11 대북중대제안 속에서도 애매하고 모순된 채 남아 있고, 그것으로는 현실적 모멘텀을 이어갈 수가 없다. 결국 어느 순간에 대화의 필요성이나 기회가 찾아올지 몰라도 시간이 한참 흐른 후일 것이고, 또한 경색이 초래한 의구심이 짙어질 대로 짙어진 이후가 될 공산이 크다. 앞선 두 정권의 실패와 겹쳐 있다. 더군다나 뉴라이트와 같은 친일세력의 신 보수우익 주장이 지속적으로 먹혀들 경우, 서울은 남북관계에 있어 극심한 좌파론, 정상국가론, 상호주의론, 갑의 지위론 등 도무지 해법이 없는 갈등과 반목만을 초래하는 정책현실에 놓이게 될 뿐이다. 이걸 걷어내지 않고서는, 실용성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정권의 이 문제와 연동된 다른 사안들까지 실패는 눈에 보인다. 김일성 주석 사후 북한 붕괴론에 맹신에 가깝게 빠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그것과 아주 흡사한 행보다. 그 렇다고 ‘정부 차원의 대화 채널’마저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것 이외의 방법도 없다는 하소연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기다린다. 여유가 있다. 우리가 잘못한 건 없다. 북한은 반드시 고개를 숙인다. 주변 국가를 우리가 설득하면 된다는 식의 접근법이 바뀐 흔적도 없다. 유일하게 나온 것이 7.11 중대제안이지만 그마저도 금강산 사건, 독도문제, 부시 방한, 8.15 건국60주년 행사에 밀려 빛을 잃었다. 단절과 파열음이 더해진 형국이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하나씩 지켜볼 수밖에 없는 상태다. 우 선 금강산을 보자. 금강산 관광은 피격사건이 마무리 되지 않으면 중단될 수밖에 없다는 서울의 입장은 확고한 듯 보인다. 명분도 없다. 금강산이 지속적으로 막힌다면 어느 시점 개성관광, 개성공단마저 위태롭게 될 것은 뻔하다. 서로 말을 신중하게 하고 있지만 이건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화약고 같다. 거기에 명분은 서울보다는 평양 쪽에서 무게감이 있다고 본다. 그 경우까지 가지 않으려고 하지만 정치적 기 싸움이 확산되면 그도 위험수위에 포함된다. 일단 특사파견을 포함한 모든 일정표는 MB의 머리 속에서 8월 15일 이전엔 전무하다는 것은 확인되었다. 정치일정도 그렇다. 북한을 본다면 9월 9일 북한 정부수립 기념행사가 있다. 정치적 시기다. 그러므로 9월초까지도 어렵다. 현실적으로 앞으로 한 달 반 이상은 남과 북이 서로 될 일이 없다. 우선 하고자 하는 의지가 문제다. 그 방법은 현대그룹이 찾을 수밖에 없는 구도다. 정부 당국자가 함께 하는 토의고 확인이면 더욱 좋을 것이다. 그것을 찾아서 정부를 설득하지 못하면, 그 이후는 위험수위까지 이어진다. 찾더라도 하지 않는다거나 또는 무리한 요구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MB의 생각이라면 서울에서 누가 이 상황을 말릴 수도 없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제안하고 그만두고, 그 뒤에 새로운 제안은 없어질 수밖에 없다. 누가 이런 되지도 않을 일에 목숨을 걸겠는가. 6.15와 10.4선언에 대한 인정 여부다. 관건은 두 가지다. 남북기본합의서를 포함해서 모두 중시하면서 봐야 한다는 견해가 받아들여지는가 아닌가. 그리고 이를 토의할 수 있는 자리가 만들어지는가 아닌가에 있다. 열린 마음이 아니라 닫혀 있는 건 양측이 매 한가지다. 10.4선언을 바탕으로 하여 남북관계가 풀리길 기대한다는 ARF의장성명이 삭제되는 과정은 서울이 그것을 중심으로 움직일 생각이 없다는 걸 보여주었다. 그래서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건 MB의 스탠스라고 본다. 북한도 이는 수용이 불가하다. 6.15와 10.4 선언의 당사자가 통치하는 나라다. 자신의 서명을 부인한다고 하는 데 그걸 그대로 수용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분위기를 서로 맞추는 것을 민간에서 할 도리밖에는 없다. 이것도 어렵다면 서로 평행선에서 만날 일은 생기지 않는다. 이대로 쭉 가는 거다. 그리고는 헤어지면 그만이다. 그 사이 시대만 병든다. ‘(남 북간의 입장을 브레인 스토밍 하는) 토론회’는 그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입장만 주장하는 토론회는 불필요하다. 괜스레 싸움판을 개장하는 것과 다름없다. 융통성 있는 중간지대의 토론자와 앞서 지적한 실행각론을 꺼낼 수 있는 사람들이 만나야 한다. MB정부는 지금까지 비핵개방3000 로드맵을 주장만 했지 그 각론은 못 꺼내놓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걸 만들만한 역량이 있는 사람들이 정부 내 없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다. 그걸 인정하는 기초에서 이 토론회를 생각해야 한다. 열린 마음이 아니면 그도 어렵다. 뉴라이트 식으로 혹은 정권 초기 인수위가 만든 비핵개방3000 고수론자 수준에서 토론을 하자고 한들 소용이 없다는 소리다. 이 과정이 없이는 남과 북은 과거 정권이 그랬듯이 그냥 1~2년을 보내게 될 것 같다. 만일 앞서 일본기획자의 시각에서 보듯이 그걸 원하는 것이 대세라면 남북관계는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들의 손에서 놀아나는 꼴이 될 터이다. 어부지리의 카드가 일본으로 넘어 가는 걸 방치한 꼴이다. 이산가족 문제는 반드시 풀고 가야 할 핵심에 속한다. 지난 정권 시기처럼 그냥 형식적으로 치러지는 것이 아니라 좀 다른 방식이 나와야 한다. 이산 제1세대에 대한 배려에서조차 서로의 정치적 화장질이 대세가 된다는 건 우스운 일이다. 그러나 이 행사에서는 반드시 전제가 붙는다. 여기도 상호주의를 적용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북측에 우리 비용, 상대 비용을 각각 상계하는 방식을 선택하자고 하면 응할 수가 없다. 그런 접근이 바로 비등하지 않고 차등이 나는 경제력을 가질 경우 공작적으로 접근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래서는 이 문제도 해법이 없다. 국군포로, 납북자 등 문제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될 정치적 당위보다는 실용적 해결책이 나와야 한다. 북일관계에서 납치자 문제가 토의되는 방식과는 다르다. 냉전시기의 역사에서 벌어진 희생산물이 남북간 정쟁의 도구가 되기 보다는 조용한 해법이 더 필요할 때다. 그걸 인정하는 바탕에서만 대화가 가능하다. 대체로 정권 초기에는 어쩔 수 없이 집권에 따른 갈등이 드러난다. 서울의 깊어 가는 갈등이 정도를 더하는 형국이다. 강력하게 정권을 쥐고 주도하겠다는 MB정권의 의도는 사사건건 암초에 부딪치고 있다. 남북관계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과거 어느 때보다도 다자채널의 북핵문제를 포함한 논의는 양상이 다르다. 아차 하면 서울만 왕따가 되는 시나리오는 언제든 가능하게 구성되어 있다. 그것을 바라는 것인가? 뉴라이트 식의 해법이 얼마나 MB에게 삼투된 것인지를 확인하는 잣대는 간단하다. 논의의 중심에 서려는 것이 아니라 자꾸 일부러 외곽으로 빠지는 정책행보를 보일 경우, 그것은 뉴라이트 식 접근법이라고 부를 수 있다. 당연히 친일세력과 일본기획자의 의도를 정권이 받아들인 것으로 밖에는 볼 수 없는 결과다. 정부는 여전히 대북정책의 실행각론을 꺼내놓고 있지 못하다. 담론만 툭툭 던질 뿐, 각론에까지 이르지도 못했다. 이런 일련의 상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새겨봐야 하는 시점이다. 능력이 부족한가? 후 순위인가? (상대가 고개 숙이길) 기다리는 방안을 선택한 것인가? 그러나 서울이 멈춘다고 해서 한반도 바깥의 모두가 정지모드로 있는 건 아니다. 그들의 행보가 빨라져서 울며 겨자먹기로 휩쓸릴 때는 단순한 정책실패가 아니라 오판이었고, 그 착각 또한 의도적으로 간주되게 되어 있다. 어떤 의도였는가? 이 질문이 두려운 것이다.
마무리를 해보자. 나는 크게 두 가지의 담론을 던진다. 하나는 남북한이 1~2년 내에 반드시 협력의 실행각론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모드, 친일세력, 일본기획자의 ‘다시 백 년’이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노리는 현실인식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걸 인정하지 않고서 제대로 된 오늘을 읽을 재간도 없거니와 그 중점에 접근할 개연성도 전무하다. 두 가지 중 하나는 인지이며, 하나는 실행(행위)이다. 둘은 함께 가는 것이다. 서울과 평양의 반목(反目)이 깊어지면 남북 모두가 실패자가 된다. 일부 친일매국세력에게 있어 이것은 좋은 기회가 될 지 모르고 일본기획자의 눈에서 이것은 절호의 찬스라 생각할 지 모르지만, 그 과정에서 반드시 반발이 벌어지게 되어 있다. 아무리 치밀한 계획이고 실행방안이라 하더라도 누수는 있는 법이다. 더군다나 한반도는 일본의 그러한 접근법을 결코 용인해줄 수가 없고 최악의 상황까지도 염두에 둔 대결구도가 형성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그저 그러려니 수용될 내용이 아니다. 아니라고 부인한다고 해도 좋다. 그렇다면 ‘아닌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선린(善隣)이라는 증명을 해야 한다. 그게 가능한가? 아닌가? 이 두 구분법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서울-평양, 도쿄의 관계다. 내 가 이 자료를 4부에 걸쳐 정리하는 뜻은 파악된 일본 세(勢)나 혹은 일본기획자, 서울의 친일매국세력을 알리자고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민족이 제국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민족이란 개념에서 마저 갈등을 빚는 최악의 시대를 맞았다. 그 모순덩어리를 교묘히 이용하는 것으로 아시아에서 한반도와 일본이 잘 살아가는 날을 꿈꾸지 않기 때문이다. 다나카 히토시의 말에 진정성이 있고, 진심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일본 외교의 기본이라면 그에 합당한 모습이 나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독도 영유권을 둘러싼 지속적인 긴장고조, 역사교과서의 왜곡이 이어진다면 나는 일본이 제국주의 시대를 그리워하며, ‘다시 백 년’의 칼날을 몰래 감추고 한반도를 횡행하려 한다고 단정할 수밖에 없다. 경제위기를 틈타 일본의 지배력을 구축하고, 서울과 평양을 동시에 겨냥한 제국주의 시대 화려했던 날을 부활시키며, 한일해저터널을 통해 해양국가와 대륙국가의 동시 이점을 누리고, 나아가 한반도의 묵시적인 장악을 통해 다시 속국화 식민지화에 열을 올리는 것이 일본이라는 확고한 결론을 내린다는 의미다. 문제의 근원에는 일본이 있지 한반도가 있지 않다. 이 사실을 우리 시대의 한반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을 지는 모른다. 그러나 아는 사람이 안다는 것, 그 사실로부터 일본은 강력한 저항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이 시대가 지켜보고 있는 일본에 대한 눈이 된다. 마찬가지로 나의 다음 세대도 그렇게 보게 될 것이다. 영원히 한반도와 일본은 온전한 선린의 관계를 21세기에도 유지할 수 없다. 철저한 대결구도, 감시구도만 남을 뿐이다. 아시아에 사는 근방(近傍)의 적대적 대립이 가져올 결과는 상상을 초월한다. 백 번 양보해서 이러한 접근법 자체가 일본의 생존을 위한, 평화를 위한 수순이라고 하는 말을 믿어준다 해도 드러난 부분은 전혀 그렇지가 못하다. 일본이 의도했건 아니건 간에 한국에서 자라고 키워진 친일매국세력은 21세기 한반도의 적이 되어 있다. 그들을 통해 아무리 한일동맹론을 불어 넣고, 나아가 대북정책에 있어 좌파적 적대시 시각을 조성한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한반도는 위정자가 정신을 딴 데 팔며 어리석어도 백성이 어리석지는 않다. 지켜보고 대항하는 눈은 과거 20세기와는 성격이 다를 것이다. 우리도 이미 한 번 겪어본 바가 있기에 그 대응의 양상이 호락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일본 또한 잃을 것이 많을 터이다. 당장 이러한 ‘다시 백 년’의 프로그램마저도 세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화려한 부활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제국주의 일본의 참상을 잘 기억하는 나라들과 21세기의 국가간 독립적 선린관계를 중시하는 나라들 사이에서 일본이란 이미지는 구태에 젖어 있는 나라로 낙인 찍힐 것이 분명하다. 아무리 힘이 지배하는 다극(多極)의 세상이라 하나 정신이 온전한 사람들의 눈에 이런 행위는 도적(盜賊)의 그것과 같다. 뉴라이트에 대해서는 앞서 1부, 2부, 3부를 통해 나는 이미 그들을 ‘사냥개’라고 불렀다. 그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에 가입된 사람들이라 해서 그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시대와 역사를 팔아먹는 일에 동참했다는 죄는 누대(累代)에 걸쳐 이어진다. 결코 지워지지 않을 주홍글씨가 될 것이다. 사적 이익에 기반해서 이들을 지원한 자들도 예외는 아니다. 계층화, 계급화가 심화되는 급진적 신자유주의 시대 속에서 생존이 급박한 국민이라 할지라도 때론 올곧은 정신이 우선될 수밖에 없다. 그 정신을 갉아 먹은 자들이 종교를 앞세워 포장하건 아니면 금권을 내세우건 간에 결코 존경 받을 대상은 아닌 것이다. 역사가 무서운 것이 바로 이 점 때문이다. 기록될 것이고 백 년 이백 년이 지난다 하더라도 오늘 대한민국, 한반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모두 선연하게 남는다. 역사 앞에 승자는 없었다. 이틀에 걸쳐 기록을 마무리 한다. 제4부에서 못다 제시한 남북한 간에 반드시 필요한 실행각론은 추후 기회가 되는대로 상세히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2008.8.2)
이 기록은 2008.6.30~8.2 기간 작성되었던 것을 발췌 종합한 것이다. 일부 한달 여 시기 동안 여러 상황변화도 있었지만 대세는 변함없이 그대로 진행 중이다. 나 는 십여 년 전, 일본이 추구하는 ‘다시 백 년’ 프로그램의 존재를 처음 인지하였다. 그 이후 오늘까지 참으로 무거운 짐을 안고 살았다. 그들이 끈질기다는 것, 그리고 몹시도 치밀한 구도 속에서 움직인다는 것이 뉴라이트가 활개치는 서울의 모습에서 선연히 드러난 오늘이다. 요즘 들어서야 이 단어가 조금씩 세간에 흘러 나오기 시작하는 걸 보면 그들이 원하는 완성의 시기가 오히려 가깝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 지 더욱 우려가 앞선다. 이 기록은 그에 대한 종합적인 개론과 분석을 겸한 지난 시간 관찰의 일환이다. 못다한 이야기가 많지만 그 부분은 서서히 하나씩 정리해보도록 한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환경을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만 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가 자꾸만 어두운 곳을 향해 가는 것은 아닌가 불안한 ‘눈’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것은 느낌이었지만 실재한 일이기도 했다. 시대를 아깝게 하는 자는 만대의 역적이다. 민족주의, 하나의 겨레주의라는 기치는 엉뚱한 논리로 비난 받지만 정작 지금 사라져서는 안될 중요한 인식임을 나는 일본기획자와 친일매국세력의 준동(蠢動) 속에서 다시 한 번 더 깊게 새기게 되었다. 그들은 나의 반면교사(反面敎師)였다. 다음 세대의 시대를 위해 많은 이들이 이 자료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러나 무겁다. 이 무거움이 바로 우리가 당면한 시대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제목을 그저 ‘어느 민족주의자의 시대읽기’로 붙였다. 시 기별로 작성되는 과정에서 제1부와 제2부는 보고서 요약 형식이 되었다. 그를 보완하고 부연하기 위해 만든 제3부와 제4부는 가급적 쉽게 풀어 쓰고자 했다. 읽기에 무거운 내용들이나 부분들은 건너뛰고 읽어도 앞과 뒤에서 약간의 중첩을 통해 설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시대를 버리는 불행한 경우가 없기를 남북한 모두에 호소(呼訴)하며 제발 좋은 이 시대를 만들어 주기를 사지와 몸통을 엎드리고 낮추며 간절하게 갈구(渴求) 한다. (2008.8.2)
자 료를 정리하는 과정에서 나는 궁금증에 빠졌다. 과연 MB는 일본의 이러한 ‘기획’을 알고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인 셈이었다. 결론을 미리 말한다면 나는 MB가 이러한 친일세력과의 동조와는 다르게 일본기획자의 의도까지는 모른다고 처음에는 생각했었다. 그러나 드러난 상황은 결코 그렇지 못했다. <친일의 재구성>이라는 일본기획자의 의도 속에서 MB는 번연히 중심에 서 있는 게 틀림이 없고 그가 어떤 태도를 취하건 간에 이 ‘기획’에 직간접 협조했다면 바로 그것이 ‘동참’이 된다는 건 분명하다. 그래서 정리하지 않은 자료 가운데 일부를 살펴 보았다. MB가 단순히 뉴라이트를 정권 수호세력으로 생각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는 지 아닌 지는 나중에 살펴 보자. 중요한 것은 그의 ‘대일 인식의 한계’다. 2007년 3월 1일. 89돌 삼일절 기념사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역사의 진실을 결코 외면해선 안되지만 과거에 얽매여 미래로 가는 길을 늦출 수는 없다.” 3.1 절 기념식 자리인 것을 감안하면 이 말은 일제 강점기 역사와 그 이후 친일의 과정 전반에 대해 모두 ‘얽매이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즉, 미래로 가는 길은 곧 한일간의 협력인 셈인데, 여기에서 바로 ‘열린 민족주의’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라 세계와 함께 호흡하는 열린 민족주의를 지향해야 한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은 데 언제까지 과거에 발목을 잡혀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가” 라고 했다. 이 발언의 ‘세계’는 바로 ‘일본’이었다. 그렇다면 일본을 향한 편협한 민족주의를 중지하고 열린 민족주의로, 가자는 뜻이라 할 수 있다. 이후 즉각 ‘삼일절이 아닌 친일절’(진중권 칼럼, 프레시안)이란 비판도 뒤따랐다. 흥미로운 것은 두 해 전인 87돌 기념사에서 노무현이 했던 발언이 묘하게 오버랩 되었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보통국가’, 나아가서는 ‘세계의 지도적인 국가’가 되려고 한다면 법을 바꾸고 군비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먼저 인류의 양심과 도리에 맞게 행동해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해야 할 것”이라고 질타했던 그 장면이다. 당 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에 발끈했다. “나는 일-한 우호론자다. 전후 60년 동안 일본이 걸어온 길을 잘 봤으면 한다”는 말로 불편한 심기를 보였다. 아베 신조 당시 관방장관도 거들었다. “노 대통령도 제발 일본이 자유, 민주주의, 인권을 지키고 세계의 평화 확립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모습을 똑똑히 보길 바란다”고 목멘 소리를 했다. 그러니까 ‘MB-고이즈미(아베)-노무현’ 간에는 묘한 연계와 경계가 나오는 셈이다. 팽팽하지만 서로의 입장이 어딘가 모르게 닮아있는 양측도 있다. 세 간의 주목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로부터 이틀 뒤에 인터넷 신문 프레시안에는 진중권의 ‘삼일절이 아닌 친일절’이란 논조에 대해 전반적인 비판과 제언을 함께 섞은 평범한 독자 한 사람의 목소리가 있었다. (이재영, inkyu@pressian.com) 나는 그의 의견을 유심히 흥미롭게 살펴보았다. 한국 사회 일반국민들의 전반에 걸쳐 흐르는 기묘할 정도의 대일인식이 어떻게 출발하고 진행되는가 단초를 찾아보았다. 그의 의문, 주장, 제언은 다음 여덟 가지로 정리된다. 요약해서 살펴보자.
첫째, 진보세력은 대일관과 방법론에서 능동적이지 않다. ‘미래로 나아가려면 과거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에서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태도에 맡기는 수동적 태도도 문제가 있다.
둘째, 효율적 대안 자체를 제시하지 못했기에 뉴라이트를 앞세운 MB 정권이 탄생하지 않았는가?
셋째, 능동적이 되는 전제는 물론 한일간 평화의 유지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이 없어야 한다.
넷째, 일본이 과거 조선침략에 대해 반성해야 한다면, 우리 역시 침략을 허용한 것에 대해 반성해야 하는 것이 ‘올바른 어법’이 아닌가?
다섯째, 실수를 고찰하고 뉘우치는 소리가 지금껏 없었다.
여섯째, 배타적 민족주의와 증오심을 자아내는 것은 평화에 역행하는 것이다.
일곱째, 왜 일본 우익보다 더 무서운 우리 안의 증오심을 방치하는가?
여덟째, 일본에 대한 ‘햇볕정책’을 펴라.
이 사람이 의도했건 아니건 이 논리는 한국 사회의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즉, 현실과 이상의 차이다. 그리고 역사인식과 현실인식 간의 차이점도 드러난다. 대일 인식에서 가장 위태로운 판단법은 우리가 왜 일본을 비판하는지에 대한 이유를 찾는 것으로부터 비롯된다. 왜 비판하는가?
첫 째, 일본이 제국주의의 망령을 벗어나기는커녕 다시 제국주의화 되는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독도문제에서 보듯이 일본 우익은 일본식 민족주의를 자극한다. 탈민족주의를 혼자서만 부르짖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일본 우익이 가진 ‘민족본위론’은 강력하다. 더군다나 그들은 ‘다시 영광을’ 찾고자 움직이는 집단이다.
둘째, 침략 역사에 대한 반성이다. 굳이 독일의 예를 들 필요도 없다. 일본의 반성은 진정성이 없다는 게 증명되는 예가 너무 많았다. 순간적으로 정치적 타협물로 나온 것일 뿐, ‘인류의 양심과 도리에 맞게’ 서울을 대한 적이 없다고 본다.
셋째, 그들이 향후 취할 노선에 대한 의구심이다. 한일관계, 나아가 일본의 대한반도 정책이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고 부르짖지만 실상은 여전히 침략노선을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인지하지만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일 뿐이다. 아니, 오히려 동조하는 세력이 지난 60년 들끓고 있었던 역사를 서울은 가졌다. 그러나 민심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러므로 바로 ‘충돌’이 벌어진다. 일본에 대한 효율적인 대응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친일세력들에게 일본은 젖줄이다. ‘빽’인 셈이다. 그들이 선택할 대응은 담합이지만 정작 능동적인 대응을 하고자 하는 세력의 입장에서 보면, 일본에게 지속적으로 요구하는 것 이외는 해답이 없다. ‘반성해라!’를 외치는 것이다. 그 이외는 모두 내정간섭이 된다.
침략 당한 나라의 반성에 이르면 약간은 뜨악해진다. 고의적으로 상대를 침탈하기 위한 강도와 그 피해를 입은 사람의 책임을 동시에 묻는 것이다. 왜 피해 입지 않게 집 단속, 몸단속을 잘 안했는가 묻는 셈이다. 무술이라도 단련해 두었어야 되는 게 아닌가, 열쇠라도 더 만들었어야 하는 게 아닌가 묻는다. 여기에 중요한 원인이 나온다. 바로 집 안에서 공모자가 있어 문을 열어주어 강도가 쉽게 들어오게 만든 경우가 바로 일제의 조선침략이었다. 미리 연통(煙筒)한 자가 있었다.
실수에 대한 고찰은 바로 친일세력의 제거였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역사를 꺼내기도 바쁘다. 그 시대가 그랬다. 그리고 그들은 친미 친일의 기회주의를 통해 기득권이 되었다. 친일청산은 고사하고 당장 친일인명사전을 내기조차 버겁다. 침략 당시 내부의 공모했던 자들이 버젓이 이 일을 방해한다. 그런 차에 누가 실수했다고 자인(自認)할 것인가. 오히려 이제는 ‘친일이 무슨 문제인가!’고 외치는 판이 되었다.
그런 차에 여차저차 하지 말고 이제 일본에 ‘햇볕정책’을 펴자고 한다. 평화론이 여기서 다시 대두된다. 바로 ‘미래론’이다. 평화적인 미래를 위해, 한국이 앞장서서 일본과도 더 친해져야 한다, 친해지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 이 논리가 바로 MB의 89돌 3.1절 발언이었다.
2008.7.30 이영훈의 공주사대 특강 해프닝은 시사하는 바 크다. 이른바 안병직 류(나는 이들을 이완용 류의 친일매국 사냥개로 정의한다)의 바로 수제자인 이영훈은 이렇게 말했다.
“더 이상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너무 연연해 하지 말자. 우리는 일본에 대하여 좀 더 자유로워져야 한다.”
참 석했던 예비교사들은 전부 뒤집어졌다. 그런데도 그는 줄기차게 이렇게 주장했다. 이미 학자도 아니고 친일 찬양 스피커다. 왜 그런가? 이유는 앞서 설명한 바와 같다. 한 마디로 제국주의는 끝나지 않았다는 말이다. 침략이 진행 중인데도 우리는 그에 자유로워지자? 두 손 놓고 침략 당하자는 뜻과 똑같다. 스스로 무장해제를 결심하자는 선전선동가 수준이다.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명단이 일차 공개되던 지난 4월, MB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더 이상 이런 논란이 확대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인다. 2008.4.29 청와대에서는 불교, 기독교, 천주교 등 7개 종단 대표와 대통령 간의 오찬 간담회가 있었다. 주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친일문제는 국민화합 차원에서 봐야 한다. 우리가 일본도 용서하는 데…”
대통령이라고 일본을 마구 용서할 수 있는가는 오늘 한국이 처한 상황을 봐서 생각하자. 뒤에 이어지는 말이다.
“일본에 가서도 사과는 당신들이 알아서 하라고 맡겼다. 국내에선 (친일 문제를 포함해서 한일관계를) 너무 정치적으로 따진다.”
한일 정상회담에서 MB는 실제로 그렇게 행동했다. 용서를 해준다고 했다. 민의(民意)가 취합된 것도 아니니 단지 대통령 한 사람의 용서일 뿐이었지만 대표성을 가지니 그도 아닌 측면이 생긴다.
이 논리의 핵심은 바로 ‘잘못은 잘못대로 보고 공은 공대로 인정해야 한다’는 ‘공과(功過) 동시 인정론’이다. 판단 기준을 ‘과’보다는 ‘공’에 두자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다. 각종 과거사 위원회도 법 개정을 통해 전면 정비할 뜻을 내비친 것이다. 결국 ‘공’만 살리고 ‘과’는 버리자, 잊자는 뜻인 셈이다. 바로 직전, 주일대사 권철현은 한일 정상회담을 앞두고 여러 이야기들을 내놓았었다. MB 발언보다 오히려 그의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있다. 둘 다 동일한 시각이라는 전제다. 그 중 백미(白眉)는 바로 이 말이다.
“미래가 좋아지면 어느 정도 과거를 용서할 수 있다고 본다.”
이건 시점의 착각이 큰 말이지만 교묘하게 부풀려 졌다. 미래 예상되는 ‘공’을 생각해서 과거 기 벌어진 ‘과’는 잊자는 말이다. 여기서도 한 걸음 더 나간다. 자폐적 지식인의 모습이다.
“(위안부 문제에 대해) 한 때는 그걸 왜 일본 정부에만 요구하는 지 의문이었다.”
공동책임론이 나오고, 가해자와 피해자 간에 위치가 바뀐다. 아니, 피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안병직의 ‘일본이 위안부를 동원한 근거가 없다’는 잡소리와 통한다. 예외 없이 독도, 역사교과서도 그 안에 들어간다.
“낡은 과제면서 현안인 독도나 역사 교과서 문제는 우리가 먼저 꺼낼 필요가 없다.”
그렇게 해서 독도, 역사교과서 문제까지 일거에 터진 것이 7월이다. 한일 정상회담 전에 이미 결정 나있던 사항으로 보인다. 권 철현은 일본 쓰쿠바 대학 도시사회학 박사 출신이다. 3선 정치인이긴 했지만 정치감각이 무딘 것일까. 그렇지도 않다. 그가 일본 내에 자랑하는 인맥은 모리 요시로 전 총리를 비롯 누카가 후쿠시로 재무상, 나와무라 다케오 전 문부과학상, 아베 신조 전 총리까지 화려하다. 15대 의원 이후 쭉 한일의원연맹 부회장 겸 간사장도 했다. 일본통으로 불렸던 사람이 이렇게 발언을 했다면 MB의 ‘일본을 용서했다’는 근원을 짐작할 만한다. 절대 ‘모호한 역사인식’이 아니라 아주 ‘뚜렷한 현실인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김 동렬의 칼럼(데일리 서프라이즈 2008.7.18)은 이 점에서 더 직설적이다. ‘MB집단이 친일 친미 하는 이유’를 거론했다. 한 마디로 ‘단지 자신들의 뒷 배를 봐줄 빽을 따라갈 뿐이다’고 정의한다. 즉, ‘연고주의’다. 한-일, 그리고 한국 사회 내부가 모두 해당된다. 정치적으로는 대의제는 ‘공’(公)이고 빽은 ‘사’(私)다. 봉건 피라미드 형 ‘이익’(사적 이익) 수령을 통한 ‘다른 이익’(공적 이익)도 동시에 추구한다.
정작 이들이 아직 자신들을 ‘친일’이라고 부르는 데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다. 인정하는 것인가? 친일이 아닌 지일(知日)이라 변명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엉뚱한 테제를 꺼낸다. 바로 ‘빨갱이론’(좌파론)이다. 우익 단체들로 이름을 내건 사람들의 이론이다.
“친일파보다 100배 나쁜 것이 빨갱이다. 좌파들은 선동선전술의 귀재들이다.”고 몰아 붙인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친일은 하지만 빨갱이가 더 나쁘고, 자신들을 나쁘다고 하는 것은 선전선동이라는 논지다. 이건 레드 콤플렉스의 부활도 아니다. 그걸 매개로 활용하는 수법에 해당한다.
‘다시 백 년’이란 일본기획자의 한반도 재침 프로그램의 존재를 이들이 알고 있는가 아닌가는 별개의 문제다. 이들 가운데 거의 대부분은 ‘사냥개’다. 즉, 이완용 류가 아니라면, 이를 알고 행동하지 못한다. 사적 이익을 위한 왜곡된 신념이 자리잡게 된 배경에는 ‘권력’이 도사린다. ‘힘을 가진 자가 선(善)’이라는 논리다.
지금 한국 사회 국가는 MB가 과연 어떻게 친일매국세력과 단절할 것인가에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그가 바로 친일매국세력의 선봉(先鋒)에 서 있고 이들을 이끌고 가고 있다. 어디로 가는가? 바로 일본기획자가 이끄는 ‘다시 백 년’의 그 길이다. 그래서 한국이란 한 국가의 국격(國格)이 사라지기 일보직전이라고, 아니 지금 사라지는 중이라고 지적하는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MB가 어리석다고 본다. 그 길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선택 가능한 길이 있다. 오히려 집권 이후 새로운 민족주의의 길로 나설 수 있었다. 자신을 지지한 사람들을 애태울 방법은 많았다. 중국이 패권적 민족주의의 길로 나서는 모습을 보고 있지 않는가. 민간을 지배하는 민족주의 정서는 올림픽 속에서 이제 스포츠 민족주의로 변신한다. 상업 민족주의도 있다. 탈(脫) 민족주의가 세계의 대세가 결코 될 수 없다. 그건 이론일 뿐, 적어도 침략하려는 일본을 앞에 둔 한국, 한반도는 민족주의라는 길을 걸어야 한다. 이건 국수주의(國粹主義)가 아니다. 역사와 국가, 시대의 생존을 위해 필요한 민족주의다. 안타깝다.
6개월도 되지 않아 서울이 현재 당면한 문제점은 크게 네 가지로 압축된다. 각각 정도(程度)가 극심해져 있다.
첫째, 소통(疏通) 부재다. 이것이 가장 큰 원인으로 지적될 수밖에 없다. 민심을 일단 대선과 총선 때의 그 상황에 고정하고 있는 상태, 그것이 아님에도 그렇게 믿고자 하는 자세가 문제다. 그래서 대화의 자리가 성립되지를 않는다.
둘째, 정권의 독재(獨裁)다. 이른바 ‘밀어붙이기’가 목불인견으로 벌어지고 있는 중이다. 지난 십 년의 냄새를 지운다거나 또는 새로운 정권 코드에 맞게 국가 시스템뿐만 아니라 인사도 재편하는 중이다. 소통을 거부하면서까지 이렇게 가야 하는 이유가 만일 MB 정권이 추구하는 목표에 부합시키기 위한 일방적 희생 강요라면, 무조건의 당위를 외치는 것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의 후퇴다.
셋째, 친일의 환경이 농밀(濃密) 수준을 넘어서 국가의 근간을 해치는 정도가 되었다. 내놓고 하는 친일 주장이 그쳐지지 않는다면 한국 사회 국가라는 공동체는 파국을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비단 MB 정권 5년 기간 이내의 문제가 아니다. 그 이후에 이 기간에 형성된 갈등이 어떤 양상으로 되갚음 될 지 상상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넷째, 갈등(葛藤)의 구조적 증폭이다. 사사건건 충돌이 불가피하다. 불신(不信)이 깊숙하게 자리하고 국민이 정부를 믿지 못하게 되는 상황이 너무 오랫동안 지속되는 중이다. 그 속에 해소하려는 움직임조차 보이지 않는 이유는 바로 ‘권력과 지지세력에 대한 믿음’일지 모르나 갈등의 저 편에 있는 국민 모두를 ‘어리석다’고 단정하는 인식은 올바른 판단이 아니다.
일본기획자의 포커스는 단순하다. ‘경제와 교육’이다. 한국의 이러한 내부적 상황과 맞물려 그들이 얻고자 하는 일차 목표는 정확하게 이 두 가지로 압축되는 중이다. 거기에 한국 내부의 친일세력이 가세했다. 전형적인 ‘매국’(賣國)이며, 이는 사적 이익을 근간으로 해서 한국 사회의 공공성 자체를 파괴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간다. 즉, 국가 정체성을 유린(蹂躪)하는 행위다.
내부의 4대 악성적 현상 자체가 조속히 제거되지 않는다면 일본기획자는 친일세력과의 완전한 결합을 통해 경제와 교육에서 한국이란 국가를 접수하게 될 것이다. 새로운 형식의 병탄(倂呑)이다. 안병직 류처럼 ‘경제를 살리려면 민족주의를 버려야’ 한다는 식의 접근이 반영하는 의미가 현실화된다면, 그래서 ‘경제살리기를 위해 친일도 허용하고 당연히 민족주의는 내버리는’ 그런 상태가 온다면, 그것을 어떻게 독립된 국가로 부를 수 있겠는지 의문이다.
지금 이 침탈의 소리에 귀를 바싹 기울이고 눈을 크게 뜨지 않으면 조만간 벌어질 일이다. 만일 이것마저도 양해되고 인지된 상태에서 국가와 국민을 이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정권이라면, 그들이 비록 직접민주주의의 수혜자라는 당위가 있지만 정작 ‘국가 운용자’의 자격을 인정할 수 없게 된다. 미국, 일본만을 바라보는 외교노선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에게 국가주권을 내어주는 것과 다름없는 매국행위이기 때문이다. 갈등의 소재(所在)에 대한 정권의 자기성찰이 없이는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일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미래예측이 아닌 것이다.
그 러나 이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하다. 정권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게 보인다. 밀어붙이기를 후진(後進)시킬 의향이 없고, 더불어 오히려 더 전진(前進)하고자 하는 형세만 남아 있다. 그래서 나는 일본기획자가 만들어 둔 이 판이 두렵다. 그저 지켜보는 지식인들은 안일(安逸)하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저들에게도 약점이 있다. 그것이 돌출될 때를 기다린다. 그 때 힘을 모아보자.”, 또는 이렇게 말한다. “5년 후에 보자. 그 때 시시비비는 가려질 것이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 (정권이) 너무 살벌하다.” 비겁한 논술이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국가정체성이라도 이어왔다. 정부수립 이후 이러니 저러니 해도, 노무현 식 표현대로라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하는 굴절’을 겪었을 망정 국가와 국민의 정체성을 타국에 맡겨본 적은 없었다. 친일을 이렇게 내놓고 외치는 때는 없었다는 의미다. 뉴라이트가 등장했을 때, 그들이 정치적 결합을 교묘하게 하기 전에도 친일논쟁은 있었다. 국민 일반에서는 이들을 ‘또라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뉴 또라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 비하(卑下)를 그들은 집권(執權)을 통해서 극복했다. 이게 무서운 일이었다. 국민들이 그들을 폄하하는 심리와는 달리 정권은 맡겼다. 그렇다고 해서 ‘제 멋대로 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 ‘경제살리기’라는 테제에 함몰된 국민의식이 이들에게 친일의 날개를 붙여 주었다. 그래서 나온 게 이런 개념이다. “경제발전이란 각도에서 역사를 다시 봐야 한다.” 역사에는 경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 시대와 경험이 있다는 걸 완전히 무시한 접근이다. 그들은 그것이 옳다고 하고, 정권 또한 그들의 말이 자신들의 이론인 양 견강부회 해버린다. 아니, 오히려 더 맹신하는 기조를 보인다. 이건 급진적 신자유주의 정책 같은 이론에 해당하지도 않는다. 입체로 보면, <친일의 재구성>에 해당한다.
우선 ‘개가 될 것인가, 사람이 될 것인가’로부터 이 주제를 시작해야 옳다. 대한민국의 역사는 절대 지난 60년으로 그치지 않는다. 면면히 이어져온 우리의 시대가 역사 속에 녹아있다. 그걸 부인하는 60년 된 신생국가, 친일국가, 일본의 위성국가, 사실상 식민지가 되는 상황까지 이르렀는데 어떻게 ‘사람’이길 기대하는가!
여기에 무슨 좌파 우파, 보수니 진보니 하는 설명이 필요한가! 나는 개인적으로 박정희를 존경한다. 그 개인이 아니라 그가 살았던 시대의 치열한 구석을 좋아한다. 다른 한 편으로 나는 민족주의자이다. 박정희가 겪었던 그 시대의 친일은 좋아할 수 없다. 또한 나는 그가 한반도에서의 헤게모니를 쥐기 위해 핵개발마저도 마다하지 않고 미국의 굴레를 벗어나려 했던 시도에 경의를 표한다. 그것이 시대 이야기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았지만 나는 MB의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실용주의’라는 주장에 존경을 표할 수 없다. 철학이 없는 친일의 수용 또한 거부감을 가진다. 무턱대고 밀어붙이기에 열중하는 정권 자체에 대해 혐오한다. 아울러 이러한 일에 동참하는 자들에게 진보니 보수라는 딱지가 붙는 것, 우익이니 신 보수우익이니 하는 명칭으로 포장되는 것 자체에 구역질이 난다. 이것이 이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에 절망한다. 과연 일본은 MB가 독도문제니 역사교과서 문제를 ‘덮어두자’고 말해서 기고만장한 것인가?
서 울 내부의 이 혼란은 자초된 것이다. 의도된 것이기도 하다. 경제살리기를 위해서는 경제를 죽여야 한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단순히 경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 사이 국가정체성을 날리게 된다. 그 때 수혜를 입는 자들이 바로 ‘매국노’다. 그렇게 해서 피해를 입는 사람들이 바로 ‘불쌍한 백성들’이다. 하나의 국가 속에 (어느 곳에다) 정체성을 판 자의 지배 하에 살아가는 백성이 있는 나라, 그것이 바로 식민지다. 괴뢰(傀儡)가 따로 없다. 모두가 꼭두각시가 된다.
이 주장은 일본기획자를 봄으로써 보다 명확해진 측면이 있다. <친일의 재구성>은 예단(豫斷)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간판을 버젓이 걸고 있다. 또한 성업중(盛業中)이다.
극복의 방안은 단순하다.
이 틀을 깨거나 아니면 국민 다수가 인지하는 수밖에 없다. 사실상 이를 눈치 챈 소수가 있다. 그러나 대다수는 이에 무관심하다. 지난 십 년의 병폐다. IMF 이후 한국 사회에 뿌리 깊게 자리해 버린 개인주의, 이기주의, 그리고 보신주의는 민주주의 확산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 하의 삶이란 자기정의로 세상사를 무심하게 만들었다. 거기다가 조중동 등 친일세력, 사적 이익에 부합하는 세력이 결탁하여 사회 분위기를 이끌었다. 부패한 종교도 합세했다. 이건 멀쩡하게 나라만 있지 사실상 동강난 상태다. 한 가지 잊었다. 무능한 정치세력도 있다. 정권도 있었다.
두 가지 선택만 있을 뿐이다. 스스로 틀을 깨고 나오던가, 아니면 깨어지는 수밖에는 없다. 그 밖에 대안(代案)이 없다. 어느 것도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넓게 회색지대를 형성하게 된다. 금권을 가진 측이 승리할 것인가? 나는 그리 보지 않는다.
이 자료는 공개될 것이다. 지금이 아니라도 어느 시점에서는 분명히 그리 된다. 일자 별 기록을 그대로 남기고 가급적 덧대어 수정하지 않는 이유는 그 속에 있을 오류까지 모두 소중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공개된 자료를 대하며 나타날 언급 당사자들의 반응을 예상하면 이런 저런 면모가 보인다.
첫째, 부인하진 못한다. 그러나 아예 대응하지 않을 수는 있다. 해 보았자 손해가 더 크다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자료와 개인에 대해 폄하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사실이 어디 홀연히 지워질 수는 없다.
둘 째, 내가 본 사실말고도 다른 각도에서 보다 많은 정보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뒤섞일 것이다. 나의 눈과 귀로 모든 것을 보고 들었다고는 생각 않는다. 나는 일 개 처사임으로. 그러나 세상에 보는 눈은 많다. 듣는 귀도 많다. 그것이 이 시대를 정확하게 보자고 모이는 계기는 마련될 터이다. 그래서 이 자료는 완성되어 갈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증보(增補)를 거치게 된다.
셋 째, 일본에 대한 ‘새로운 생각’이 한국 사회에서 생길 것이다. 더 이상 어설픈 친일세력이 힘이 없고 무시해도 좋을 존재가 아니라 그들이야말로 사냥을 위해 양성된 사냥개임을 인식하게 될 것이다. 그들이 먹이를 삼는 것이 바로 이 땅의 국민이며, 시대이고 역사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넷째, 일부는 ‘지우려고’ 할 것이다. 도마뱀의 꼬리 자르듯 그렇게 자신들의 행적을 드러나지 않게, 드러난 부분마저도 지우려고 할 것이다. 그들 스스로가 친일임을 더 고개 쳐들 수도 있겠지만 이젠 부끄러울 것이다. 우리 역사에서 친일이 지일로 평가된 적은 있으나, 성과를 만들어낸 친일이 그래도 상황논리로 인정된 적은 있으나 이렇게 적나라하게 친일과 매국만을 목적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 시대는 분명 정확하게 평가할 것이다.
다섯째, 격렬하게 자신들의 논리를 대면서 저항해올 수도 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증거를 대라고 덤벼들 수도 있다. 그러나 좋다. 해볼 가치가 있는 토론이면 해야 한다. 권력이나 세력을 앞세우지 말고 딱 ‘시대’만 생각해서 하자고 한다면 언제라도 좋다. 그럴 용기가 그들에게 있을까 싶다.
치밀한 기획이다. 서울의 혼란은 그저 온 것이 아니다. 작년 대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서히 달구어져 왔다. 이젠 담금질도 끝나고 해머로 두들겨 패고 있는 중이다. 모양이 갖추어지고 있다.
이 렇게 된 이유에 지난 십 년이 있다는 건 설명한 바와 같다. 인지하지 못했고 거기에 동참해 버렸고, 간접이건 이를 허용한 시기였다. 결과물이 잘못되었다고 물리기도 어렵다. 그 이전에도 잘난 사람들이 별로 없다. 적어도 이 문제에서만큼은 그렇다. ‘관리’를 잘해온 일본의 모습이 빤히 보인다.
우선 서울 내부에서 이를 뛰어 넘기 위한 적극적인 시도의 첫 머리는 역시 MB 정권이 몫을 가진다. 의사(意思)가 있느냐 없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관건이다. 없다면? 쉽지 않다. 밀어붙이기라는 테제에 이러한 환경을 용인(容認)하고 추동(推動)하는 의도가 개입되었을 경우, 일본기획자를 뛰어 넘는다는 건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제2의 독립운동’이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 것이다.
의사가 있다면?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사람은 당연히 MB다. 대통령 중심제 하에서 그로부터 모든 일이 풀어진다. 그의 곁에 그만한 의식과 눈, 귀를 가진 사람이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그 자신의 결정이 많은 것을 변화시킬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친일세력이 제거 되어야 한다. 눈에 보일 정도는 되어야 한다. 뿌리는 어려울 것이다. 지난 60년이라는 시간은 인삼이 산삼이 되고도 족할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어렵다. 그러나 단기적으로 최근 형성된 자생적 친일 수준은 버릴 수 있다. 그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해서 일단 일본기획자의 한국에 대한 친일의 재구성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영영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국민도 마찬가지다. 의도했건 아니건, 지식을 가지고 인정했건 그렇지 않건 간에 ‘친일이 뭐가 문제냐!’는 생각을 이렇게 바꾸어야 한다. “올바른 생각과 행동을 하지 않는 일본과 친하게 지낼 수는 없다.” 교육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다. 대안교과서라는 말도 되지 않는 논리의 책자를 이 땅에서 내쳐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살아온 시대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있는 그대로. 정말이지 공은 공대로, 과는 과대로 보여주면서 섣부른 판단보다는 평가가 가능하게 해야 한다.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가 이 시점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두 느끼고 있다. 그들에게 왜 역사와 시대를 인식하고 느낄 기회를 박탈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보니 보수, 이런 식의 구분법에 왜 아이들을 잣대에 꿰 맞추려고 하는가. 그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 그를 통해 한국의 미래를 살려야 한다.
부끄러운 자들은 사라져야 한다. 그들 스스로 다시 이상한 패거리를 조성하여 이 땅에서 턱도 없는 시도를 할 발판 자체가 사라져야 된다. 그를 통해 잘못 배우고 각인된 생각들이 지워져야 한다. 사상의 자유라고 해서 나라까지 팔아도 좋다는 사상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런 논리에 물든 자가 이 땅에 없다고 해서 이상할 바는 없다.
이 과정은 가장 바라는 시나리오에 해당된다. 쉽지 않을 것이다. 60년의 연원과 철저한 십 수년의 기획과정을 거친 상태에서 물들대로 물든 친일이 잔재 수준이 아니라 집권까지 기여한 마당에 무슨 반발을 할 지 모르니까. 그러나 해야 한다는 당위가 사라질 수는 없다. 지금까지 못했으니 앞으로도 안될 것이라는 패배주의가 이 문제에는 해당사항이 없다. 이건 우리 역사와 시대를 건 투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이 바뀔 것인가? 나는 믿지 않는다.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과 일본은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논리가 적합하다. 그들과의 관계가 블루오션이 될 수는 없다. 그냥 관계일 뿐이다. 한반도에 사는 사람이 정부가 정권이 모두가 이 땅을 노리는 상태에서 살아갈 방법이 바로 극한의 투쟁이라는 것은 운명이다. 그렇게 해야만 국제사회에서 생존한다. 편하게 살려고 아무렇게나 국체(國體)와 국격(國格)을 던졌던 민족이 후회하지 않은 적은 없었다.
촛불민심은 격렬해진다. 속말로 악이 받친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경찰은 이렇게 말한다. “상습적인 데모꾼들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분노가 골수까지 들어찬 케이스가 많다. 광우병대책위원회는 그냥 상징적인 단체일 뿐이다. 그들이 가진 사상과 촛불은 별개다. 인터넷의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는다. 통제를 한다고 해소되지 않는다. 정권, 시대, 역사를 바라보는 눈들이 날카롭다. 눈 밝은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발견한 것 가운데는 이 땅이 자꾸만 친일이란 병(病)이 깊어지는 증상도 있다. 이제 근본적인 병증의 원인을 거기서 찾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중 고등학생의 촛불은 나를 매우 흥분시켰다. 그들에게서 적어도 한국이란 사회국가의 밝은 미래를 봤다. 쇠고기 파동은 논쟁 중이지만, 정부는 절대 검역주권을 미국에 맡긴 것에 대해 부인할 수 없다. 중국이 그랬나, 일본이 그랬나. 스스로 갖다 바친 케이스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사상이 표출된 계기가 중고등학생이란 점에서 나는 그들에게 끝도 없는 경의를 표시하고 싶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대학은 뉴라이트에 물든 구석이 많았다. 참혹한 사회 인식이다. 관심이 사라진 사회에 오직 개인주의만 남았다. 그들에게서 60~90년대 초반을 이어온 한국 사회의 전통적인 불의(不義)에 대한 저항주의가 사라졌음을 발견했다. 그렇게 길들여졌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도 그렇거니와 앞으로의 시대에서 한반도라는 이 운명을 쉽게 벗어날 공간은 없다. 민초(民草)가 주인이지만 직접민주주의는 때로 백성을 어리석게 만든다. 올바른 정치가 필요한 이유다. 그게 없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반복될 수밖에 없다.
불가능하다는 패배주의나 무관심, 이기주의, 개인주의, 집단 이기주의가 사회 내 팽배한 상태에서 국가 발전의 기대는 어불성설이다. 위정자가 통치하기는 좋은 나라일 터이지만, 그 또한 역사의 비판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2008.8.3)
8.4 프레시안에는 삼성비자금을 폭로했던 김용철의 인터뷰가 실렸다. 그에 대한 평가야말로 아마 한국 사회의 오늘 구조적인 모순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그의 몇 마디 말을 옮겨 본다.
“(소 감은) 우리 사회 주류의 질서가 정말 튼튼하구나 하는 것이다. 재벌을 중심으로 엮인 그물망이 정말 견고하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이런 질서는 너무 안정적이어서, 바깥에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안 바뀌는 모양이다. 하긴, 보수적인 기존 질서가 사법 절차를 통해 바뀌는 일은 원래 잘 생기지 않는다.”
‘보수적인’이라는 말이 와 닿는다. 여기에서 ‘보수’는 ‘기득권’을 의미한다. 진보니 보수니 구분의 그것과는 다르다. 진보에도 보수적인 사람들은 많다. 일반국민은 거기에 많이 헷갈리고 있다.
해방정국 이후에 대한 평가를 모조리 바꾸려는 뉴라이트의 시도는 ‘이승만 재평가’로 드러난다. 친미 친일의 발판을 만들어 주었던 사람이다. 역사의 아이러니를 ‘보수’로 새겨준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 여명의 눈동자’란 소설에서처럼 ‘독립을 위해 일한 사람이 왜정 순사 출신 경찰에 구금되고 두들겨 맞는 사건’이 비일비재했다. 좌파로 몰린 것이다. 3년 간의 신탁통치 기간은 그래서 우리 역사에서 결코 잊지 못할 시간이었다. 정신세계가 망쳐졌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우리는 ‘진짜 보수’를 그나마 유지해 왔다. 그래서 지금의 나라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경제발전’이라는 키워드 하나로 모두 새롭게 재단하려는 시도는 왜 벌어지는가.
다시 해방 직후로 돌아가본다. 좌파 진영은 분단 정국의 북측을 향했던 사람들과 민족주의 좌파로 나누어진다. 그리고 중도 우파, 민족주의 우파가 있었다. 친미와 친일은 필요하면 어느 쪽에든 끼었다. 마지막 승자는 친미 친일의 수구세력이었다. 그들이 권력을 잡았다. 그러나 사회 전반을 지배하지는 못했다. 그 투쟁이 꾸준히 이어졌다. 미국으로부터 자유주의 시장경제가 들어오면서 이른바 자유민주주의가 싹트기 시작했다. 민주주의가 투쟁의 근원이 되어 주었다. 전쟁이 벌어졌다. 그 상처가 아주 오래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걸 치유하자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좌파가 아니라 민족주의성향을 가졌다. 어쩔 수 없는 분단환경에 좌절했지만 그렇다고 어느 시점에선가는 통일을 통한 분단역사의 극복이 가능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 과정에서 ‘진짜 보수’가 형성되었다. 진보니 보수니 하는 구분과는 다르다. 당연히 기득권의 보수적인 심리, 지역적인 보수성과도 다른 말이다.
‘구국’(救國)이란 깃발을 학생운동에서도 우익단체에서도 동시에 들게 되었다. ‘진짜 보수’와 갈등을 일으키는 세력은 항상 기득권이었다. 그들은 사적 이익을 공적 이익으로 포장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래서 지난 60년 사회 계층화는 심화되었지만 변화 또한 크게 벌어졌다. 숱한 초심(初心)의 ‘변절’이 이어졌고, 그렇게 사회는 사회의 주류를 형성하며 이렇게 흘러온 것이다.
한국 사회의 ‘진짜 보수’는 어떤 사람일까?
첫째, 자주적(自主的)이다. 사전을 찾아 보면, ‘남의 보호나 간섭을 받지 아니하고 자기 일을 스스로 처리’ 하는 것이 자주(自主)다. 그렇다고 배타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이타(利他) 성향이 높다.
둘째, 민주주의를 원한다. 세계에는 숱한 민주주의가 있었다. 씨족 공동체 사회의 군사민주주의로부터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인민민주주의, 경제민주주의, 사회민주주의 개념도 있다. 그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경향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바란다.
셋째, 시장경제를 인정한다. 즉, 시장을 통한 재화나 용역의 거래를 중심으로 성립하는 경제,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해 반대하지 않는다. 경제정책에 대한 비판과는 다른 문제다.
넷째, 민족주의 성향을 가진다. 임시정부의 법통과 3.1운동, 그리고 민족의 독립과 통일을 중시한다. 19세기 이래 근대국가 형성의 기본 원리이기도 했던 이 사상 기조가 뿌리 깊게 남아 있다.
다섯째, 그래서 일본에 대해서는 거의 혐일(嫌日)을 바탕으로 하고, 늘 경계한다. 미국에 대해서는 친미(親美) 성향은 있으나 주권(主權) 침해는 인정하지 않는다. 애증(愛憎)도 있고, 때론 반미(反美)도 된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피할 수 없는 형세라고 인정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것이 한국이란 국가 사회의 ‘진짜 보수’들이 가진 성향(性向)이다. 그런데 ‘가짜 보수’가 등장했다. 거기에 난데 없는 두 글자가 자리했다. 하나는 ‘신(新, new)’이고 다른 하나는 ‘우익’(右翼, rignt)이다. 차마 그들의 이름에 영어로는 ‘보수’를 넣지 않았지만 한글로는 ‘신 보수우익’이라고 쓴다.
왜 가짜인지 살펴보자.
첫째, 전혀 자주적이지 않다. 이기적이다. 자기네 이익집단이 아니면 모두 배타적으로 취급을 한다.
둘째, 민주주의가 아니다. 폐쇄적 성향을 가진다. 자유주의에 입각하지도 않는다. 일단 ‘끼리’에 아주 능숙하다. 정치적인 성향을 찐하게 가지며 술수에도 능하다.
셋째, 시장경제는 인정한다. 그러나 경제정책에 있어 정치적 목적성을 더 중시한다. 일부 기득권과의 결탁을 통한 경제발전도 발전이라고 이야기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모두 ‘좌파’(左派)로 매도한다.
넷째, 전혀 민족주의가 아니다. 경제발전을 위해 민족주의를 버리자고 한다. 진짜 보수의 그것을 편협한 민족주의라 하고, 열린 민족주의로 가자고 한다. 그것을 실용주의라고 부른다.
다섯째, 일본에 대해 찬양일색이다. 오늘의 일본이 아니라 과거의 일본도 찬양하는 일제강점 찬양파다. 미국에 대해서는 무조건적인 친미와 숭미(崇美)로 받든다.
과 연 이러한 성향이 어떻게 한국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든다. 그런데 이해는 된다. 왜냐하면 바로 ‘진짜 보수’가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국가 사회에 무관심해지는 상황이 초래 되었던 것은 전적으로 IMF라는 경제상황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 이전까지는 그나마 진짜 보수들이 한국 사회의 근간(根幹)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이후 십여 년 동안 간데 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 결과가 바로 이런 가짜 보수들이 판을 치는 세상이 된 셈이다.
거기에 하나가 더 보태진다. 이들 세력을 탄생시킨 배후에 ‘일본’이 존재한다. 그들은 일제 찬양파를 양산시켜 교묘하게 오늘의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자고 했다. 정치적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고 나아가 이들을 통해 ‘한일동맹’까지도 이끌어 내려고 한다. 2010년 일왕(日王)이 서울을 방문하게 하여 1910년 경술년 이후 완성하지 못했던 한반도에 대한 침탈이 성공했음을 알리고자 한다. 단순하지 않다.
그에 부응하는 것은 ‘친일’(親日)이다. ‘지일’(知日)도 ‘극일’(極日)도 아니다.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요소는 사라지고 이제 ‘친일이 무에 대수냐!’는 목소리가 자칭 우익이라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온다. 그들은 보수가 아닌가?
논리를 보자. 이렇게 말한다. 건국절 소란 속에서 나온 이야기다.
“대한민국을 ‘건국’이라고 칭하지 않는 단체는 어떻게 생각하나? 촛불시위 참가자들은 대한민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북한을 싫어하면 ‘친일파’인가?”
교 묘하기 그지 없는 ‘비틀기’다. 어떻게 ‘친일’이 우리 사회의 모든 사상적이고 역사적인 가치와 상대할 수 있는 개념이 된 것인지 우스울 지경이다. 상황이 이런데도 우리 사회의 ‘진짜 보수’는 침묵한다. 그들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인가?
그렇지는 않은 듯하다. ‘믿음과 확신’이 복잡한 시대환경에서 엷어진 탓이다. 백기완의 말마따나 소시민적 갈등에 사로 잡히고, 집권세력의 공갈이나 협박에 은근히 당하는 상황에 처했다. 그래서 오늘 한국이 이 모양 이 꼴이 되었고, 앞으로도 그렇게 무망(無望)하게 갈 모양이다.
‘간도 쓸개도 없는 사람’이 늘어간다는 표현이 딱 옳다. 살기에 지쳐 그렇다는 것보다는 스스로 기득권 진입에 대한 희망을 가지거나 또는 아예 골치 아픈 이 시대를 잊는 것이 노매드(nomad)족이라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제 색다른 한 가지를 지적해보고자 한다. 왜 한국 사회가 지난 십여 년 여기까지 왔는가? 내 가 앞서 지적한 여러 문제들은 추론에 가깝거나 혹은 사실관계는 있지만 그것을 증빙하기는 어려운 일들도 많다. 왜냐하면 이것은 국가 대 국가, 시대를 넘어 가는 일종의 침략노선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벌어진 현상을 보면 모두가 납득은 할 것이다.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야 한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일 우리가 일본에 있는 총련이건 민단을 통해 일본전복의 계획을 세워본 적은 있는가? 이현세의 만화 ‘남벌’(南伐)처럼 그러한 상황을 설정하고 집행해본 적이 있는가에 생각이 미치면, 그것은 아니다라는 답이 나온다. 정작 한반도는 19세기 말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러한 반대 경로를 밟고 있다. 무엇이 ‘평화’인가?
한국 사회 지식인의 패배주의 근원은 다양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나쁜 것은 행동보다는 다른 선택, 그러니까 ‘지켜본다’를 선택하는 경향이 많다는 점이다. 정작 변혁이나 개변은 행동하는 사람들로부터 시작되었다. 민주주의를 회복한 그 순간에서도, 정치가 그것을 이어가지는 못했지만 그 일을 했던 사람들, 그리고 다시 변절이 이어졌을망정 나름대로의 온전한 사회를 꿈꾸는 세력들은 존재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지식이나 지성을 판단하는 한 잣대가 있다. 그렇지만 한일관계는 그와는 다르다. 시대와 역사가 가진 엄존하는 피해와 가해의 스토리가 있다. 그것을 인정하는가 아닌가를 두고 한국과 일본은 지금까지 대립했다. 한 쪽은 아직도 인정하지 않았다 생각하고 다른 한 쪽은 그 정도면 되었다는 생각이다. 온당하지 않은 질문이고 답변이었다. 질문을 하기 위한 제대로 된 준비가 없었다는 이야기이며, 답변자는 그보다 더 성의가 없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늘 현안이었다. 늘 과거가 아닌 현재였다.
오늘은 특히 다르다. 분명하게 ‘친일의 재구성’이라는 상황이 서울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지식과 지성으로 재단을 해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흔하다. 그들은 이 정도를 넘어가는 것을 과격이라 표현한다. 그렇다면 그 말고의 방법이 없는가? 앞 서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앞으로 5년도 남지 않았으니 그 때 고치자”는 말이다. 그것이 일견 지식을 가졌다는 사람들의 입에서 나오고, 다시 지성인이라는 사람들(나는 그들이 정말 지성인인지는 모르겠다.)에게서 나온다. 엉터리다. 변명이고, 행동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에 생각이 미치면 아무런 해답이 없다. 그저 ‘잘 넘겨야 한다’는 수준에 불과하다. 이 기록을 마무리 하면서 가장 짤막하게 쓰고자 하는 나의 이야기는 이렇다.
“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지옥에 갈 자는 이도 저도 모두 괜찮다거나 혹은 이도 저도 선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는 자, 그리고 이도 저도 선택의 가능성은 열어두되 행동하지 않는 자, 행동하고자 말은 하면서도 정작 그리 하지 않는 자, 한다고 하면서도 자기 한계를 과장 변명하는 자, 자기의 자리에서 한계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행동하는 자, 소시민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 자신의 소신으로 그리 한다고 믿으면서 행동은 전혀 하지 않는 자, 행동 속에서 항상 자신을 먼저 보호하고자 하면서 그 일의 근원을 잊는 자, 그러면서 남을 탓하는 자, 행동하는 자의 잘못을 캐는 데 열중하는 자, 열중의 수준을 넘어서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동네방네 떠드는 자, 그러면서 스스로는 후회한다고 생각하는 자, 후회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입으로는 내가 잘하고 있다고 말하는 자, 그리 행동하는 자 등등이다.”
거의 대부분 사람은 여기에 해당한다. 어쩔 수 없다. 그게 소시민이다. 권력을 가진 자가 움직이는 패턴은 다르다. 대체로 이런 것이다.
“ 내가 옳다고 생각한 것은 밀고 나간다. 옳지만 잘 안 되는 일은 잘되게 만든다. 금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는 없다. 해결하지 못하더라도 가장 최선을 다해 해결하는 것이 옳다. 그것을 위해서는 장악을 해야 한다. 사회 속의 편을 만들고, 그들과의 교류를 하면서 적어도 내가 다치지 않는 선은 명확하게 구분하다. 그도 아닌 상황에서는 세상이 모르는 금권의 힘을 사용한다. 그 힘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도록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늘 지속적으로 연대한다. 그들과의 결합을 강화하고, 나아가 그렇지 못한 타인들에 대해서는 지배적 관점에서 그들을 ‘갑과 을’, 그 수준 이하로 생각하고 취급한다. 세상의 힘은 곧 금권에서 출발한다.”
동의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이러한 생각들이 한국 사회의 저변에 흐르며, 그 속에서 자본주의의 모순도 터져 나온다. 한국적 자본주의가 정치와 결합되어서 나온 가장 극악한 모습이다. 그나마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환경에서 ‘평등과 자유’라는 주제어로 용해되기도 했지만 신자유주의 정책하에서 이제는 드디어 ‘경제가 최고선’이란 관점이 부여되고 있다. 거기에 일본 기획자가 거든다.
“한국은 일본의 영원한 하수다. 한국 사회의 모순을 뛰어 넘는 기획은 일본으로부터 나온다. 일본은 한국이 절대 넘어올 수 없는 불변의 우위성을 가졌으며, 우리는 이것을 ‘평화’라고 부를 것이다.”
지 나친가? 그저 농(弄) 삼아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지금 한국 사회를 보면, 이런 현상을 수용하고 있는 사회 자체에 대한 분노를 금하지 못해서 그렇다. 개인적 감상이다. 이 글을 마치면서 오늘 이 생각을 적는다. 끝마무리치고는 너무 냉소적이라 해도 이걸 부인도 못한다. 그래서 서럽다. (2008.8.6 止月 山庄에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