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양문화원 발행 《七甲文化》 제34호(2024년 12월 26일) 【수필】 버리지 못하는 청양 ‘향토 언어’ 윤승원 “청양 사투리가 아직도 여전하시네요.” 문인단체 모임에서 만난 B 시인의 말이었다. 충북 옥천 출신 시인은 내게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청양 향토 언어가 있어요.”라고 말한다. 옥천이나 청양이나 다 같은 충청도인데, 못 알아듣는 말도 있다니 놀라운 일이었다. 사실 나는 대전에서 50여 년 넘게 살면서 평소 표준말을 구사해 왔다고 자부해 왔다. 사투리가 더러 섞여 있어도 상대가 못 알아들을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B 시인이 나의 평소 ‘향토 언어’에 대해 느낀 바를 임의롭게 지적해 주니, 새삼 언어 습관을 돌아보게 됐다. “<걸터듬이>가 무슨 뜻인가요? <종애 골린다>라는 말은 또 무슨 뜻인가요? <이무롭다>(서로 친하여 거북하지 아니하고 행동에 구애됨이 없다. ‘임의롭다’의 방언)는 무슨 뜻인지 알겠는데, <으씩도 하지 않는다>(꿈쩍도 하지 않는다)는 처음 들어 보는 말입니다.” 문단에서 이른바 ‘언어 마술사’라는 애칭으로 수십여 년 글을 써 온 중견 문인이 <으씩도 하지 않는다>는 말을 처음 듣는다 하고, <걸터듬다>(음식이나 재물 따위를 몹시 탐하다 : 충청도 방언)와 <종애 골린다>(남을 놀리어 약을 올림)’는 말도 생소하다니 뜻밖이었다. 과거 청년 시절, 청양에서 농사지을 때 동네 어르신들과 공동작업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이때 입담 좋은 어르신들의 구수한 우스갯소리 덕분에 힘든 줄 모르고 일을 했다. 당시 귀에 익었던 정겨운 내 고향 ‘농사꾼의 토속적인 언어’가 내게도 알게 모르게 입에 달라붙어 버릴 수 없는 일상 용어가 됐다. ‘언어 습관’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한 지역의 통용어뿐 아니라 집안에서 어른들이 구사했던 말씀도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닮아갔다. 말을 배우기 시작하던 유아기부터 익숙해진 ‘향토 언어’가 평생 간다. 반세기 넘게 도시 생활하면서도 시골 태생의 촌스러운 향토 언어는 쉽게 변하지 않았다. 신세대 두 아들은 생소하게 느껴지는 ‘아비 특유의 향토 언어’가 튀어나오면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껄정하다’가 무슨 뜻인가요? ‘쫄밋거리다’라는 말도 처음 들어요. ‘꺼끔하다’는 또 무슨 뜻인가요?” 아들이 이런 질문을 하면 내가 답하기 전에 동향(同鄕)인 아내가 먼저 ‘해설사’로 나선다. “<껄정하다>라는 말은 ‘하는 행동이 어설플 때’, ‘옷차림이 몸에 잘 맞지 않을 때’,‘지게 따위를 지고 가는 모습이 어딘가 엉성해 보일 때’ 쓰는 말이지. <꺼끔하다>라는 말은 ‘뜸하다’라는 충청도 방언이고, <쫄밋거리다>는 ‘저린 듯하게 자꾸 떠 들렸다 가라앉았다 하는 모습’이지.” 청양군 장평면 출신인 아내와 나는 일상적으로 흔히 쓰는 말이지만 신세대 아들과 손자는 잘 알아듣지 못하는 ‘향토 언어’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 물건이나 도구 등 : △ 고리짝(궤) △ 장꽝(장독대) △ 누룽개(누룽지) △ 무수(무) △ 구녁(구멍) △ 모이자리(묏자리) △ 소시랑(쇠스랑) △ 멛방석(짚방석) △ 삼태미(삼태기) △ 도고통(절구) △ 도곧때(절구공이) △ 얼개미(어레미) △ 스슥(조) ○ 행동이나 태도 표현 : △ 께까드럽다(까다롭다) △ 장감장감 걷다(천천히 조심스럽게 걷다) △ 모지락스럽다(모질고 억센 데가 있다) △ 애상 받치다(무엇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다) △ 몃새리다(물건을 함부로 내려놓다) △ 쩝절거리다(잘 난 척 떠들다, 공연히 간섭하고 나서다) △ 새꼽밖에(새삼스럽게) 밥상머리에서 한 식구끼리 나누는 이 같은 일상적인 향토 언어나 지인들과의 대화에서 이따금 이런 말이 튀어나오면 무슨 말인지 ‘해설’을 요구받는다. 그럴 때마다 토속적인 내 고향 ‘청양의 언어’를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말로 고쳐 써볼까도 생각했다.
하지만 ‘향토 언어’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안타까운 것은 내 고향에서 흔히 쓰는 언어이면서 ‘우리말 사전’에도 분명히 등재된 말(예를 들어 ‘종애’ 등)임에도 낯설게 느껴진다고 하는 것도 있다. 사회에서 자주 쓰지 않아서 그런 것이니, 언론인이나 문인들, 교육 현장의 선생님들은 글과 말로써 향토 언어를 발굴하여 알릴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살다 보면 일상어 가운데도 어원(語源)이 궁금한 것도 있고, 표준어인지 비표준어인지 아리송한 것도 있다.
KBS 1라디오에서 매일 아침 방송하는 ‘바른말 고운 말’도 그래서 빠짐없이 듣는다. 현대인들은 글을 전문으로 쓰는 작가가 아니더라도 ‘글 쓰는 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 누리 소통망에서 댓글을 달면서도 미심쩍은 말은 반드시 ‘국어사전’부터 찾아본다. 평소 아는 낱말도 뜻을 다시 명쾌하게 확인하기 위해 사전을 찾아보는 것이다. 스마트폰에 ‘표준국어대사전’ 앱을 깔아놓고 수시로 검색해 보면 ‘바른말’ 소통 언어에 도움이 된다. 하지만 정겨운 내 고향의 ‘향토 언어’ 중에는 사전에 등재돼 있지 않은 말도 꽤 있다. 교육자였던 나의 장형(尹佶遠 1932~2010)은 한평생 교단에서 ‘국어’를 가르쳤다. 동생인 나에게는 장형이 ‘걸어 다니는 국어사전’이기도 했다. 형님과 생시에 주고받은 수많은 편지글과 시와 수필 등 문학작품을 통해 동생은 ‘바른말 고운 말’을 익혔다. 이런 글을 쓰면서 언어학의 달인이었던 장형을 그리워한다. 형님이 살아 계시면 청양군 장평면 중추리 가래울 생가 대청마루에서 진지하게 여쭙고, 토론해 볼 ‘향토 언어’가 무궁무진하다. 청양 태생임을 누구보다 자랑스럽게 여기셨던 장형이 동생의 이 같은 글을 보시면 어떤 말씀을 주실까? 꿈속에서나 정겹고 구수한 내 고향 언어에 귀를 기울여 보기로 한다. ■ 윤승원 ■ 수필가 ■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금강일보 논설위원 역임 ■ KBS와 『한국수필』 공동공모 수필 당선 ■ 『한국문학시대』 문학 대상 수상 ■ 조선일보 창간 90주년 기념 사연 공모 최우수상 ■ 저서 『靑村隨筆』 외 8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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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네이버 블로그에서 박경순 작가
한국문학시대에서 김영훈 작가
페이스북에서 김명순 시인
좋은 내용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새해에 건승을 빕니다.
한 해를 보내면서 교수님 따뜻한 격려 말씀에 졸고를 소개한 보람을 느낍니다.
교수님도 새해에 더욱 건강하시고, 기쁨 넘치는 연구활동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