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담의 `공리주의`
인간 행위와 관련된 많은 물음 중 ‘여러 대안 행위 가운데 어떤 행위를 선택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인가’는 우리 삶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근본적인 질문이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행위란 무엇인가? 도덕적 갈등 상황에 놓여 있을 때,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하는가의 문제는 일상적인 상황뿐만 아니라 중요한 의사결정 상황에도 적용된다. 벤담은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인간 행위와 관련된 이런 물음에 대한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논제] 아래의 사례는 주어진 상황에서 어떤 행위를 선택하느냐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제시문>은 공리주의가 안고 있는 어떤 문제점을 지적하고 있다. 제시문을 참고하여 사례에서 공리주의자라면 어떤 행위를 선택해야 하며, 이것이 갖는 문제점은 무엇인지 논술하시오. (800자 내외)
<사례 A>
유명한 작가이자 종교가인 페늘롱이 몸종인 나의 아버지와 함께 불타는 건물에 갇혀있다. 그런데 두 명 모두를 구해낼 시간적 여유가 없다. 그렇다면 누구를 구해야 할 것인가? 페늘롱이 쓴 책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혜와 즐거움을 선사한다. 반면 나의 아버지는 페늘롱의 몸종이며 평범한 사람이다.<사례 B>
<사례 B>
선생님께서 나에게 교실 창문을 깨뜨린 사람이 누구인지 그리고 일부러 깨뜨린 것인지를 물어보신다. 선생님은 내가 범인 중 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 그래서 만약 같이 잘못을 저지른 아이들이 누군지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용서해 주신다고 하신다. 그러나 솔직하게 말하지 않는다면 내가 혼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창문을 깨뜨린 것은 나와 영수, 철호, 민호, 상수이다. 장난을 치다 실수로 창문을 깬 것이다. 누구 한 명이 범인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런데 영수, 철호, 민호, 상수는 제발 말하지 말아달라는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나 하나만 혼나면 다른 친구들은 무사히 넘어갈 것이다.
<제시문>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 사회로, 의사결정을 하는데 있어 여론의 역할이 매우 크다. 여론은 의사결정에서 매우 강력한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다수의 의견을 반영하여 의사결정을 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이유는 공리주의 때문이다.
인터넷이라는 사이버 공간에서의 조회 수, 댓글 수를 비교하는 것이나 전문 여론조사 기관에서 설문조사를 하는 것은 다수의 의견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다. 하지만 ‘2+2=4'라는 것이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문제는 다수의 의견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닐 수 있다. 무엇이 진리이냐가 누가 많이 찬성하느냐의 문제와 같지 않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다. 여론은 공리주의의 성격을 띠고 있어서 각 개인의 신념에 위배되어도 여러 사람의 보편적인 의지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다수가 형성한 의사라고 해서 항상 옳은 것은 아니며, 이는 중우성의 폐해로 드러날 수 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된다고 해서 소수의 이익이 묵살되어서는 안 된다. 공리주의자들 말대로 결국 더 많은 행복을 낳도록 해야 한다고 할 때, 묵살된 소수의 행복이 다수의 행복보다 더 클지, 그렇지 않을지는 함부로 결정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쾌락(행복)과 고통(불행)의 정도를 비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행복의 내용이 사람마다, 때와 장소에 따라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강조하는 공리주의는 소수의 권리, 개인의 권리를 무시할 수 있는 위험을 안고 있으며 결과를 강조함으로써 행위자의 의도와 의도 없음을 구분할 수 없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배경지식 넓히기
영국의 철학자이자 법학자인 벤담(1748~1832)은 쾌락은 선이요,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하면서 인생의 목적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의 실현에 있다고 말한다. 즉,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할 때는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보다 많은 유용성을 만들어내는 행위를 하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벤담은 쾌락을 만들어내고 고통을 막는 능력이야말로 모든 도덕과 법의 기초 원리라고 하는 ‘공리주의'를 주장하면서 쾌락과 고통의 양을 비교할 수 있는 계산법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벤담의 공리주의에 의하면 그것이 쾌락주의적이든 행복주의적이든 행위의 결과를 판단할 가치의 표준은 반드시 공평하고 보편적으로 적용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결과의 긍정적 혹은 부정적 가치를 계산할 때, 한 사람의 쾌락(또는 행복)은 다른 사람의 쾌락과 똑같이 계산되어야 한다. 행위자의 이익은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함께 고려되어야 하며, 다른 개인의 이익보다 행위자의 이익에 더 큰 비중을 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쾌락과 다른 사람의 쾌락 사이에서 행위자는 엄격히 공평해야 하며 자신 또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유리하도록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 모든 인간은 그들의 이익을 충족하는 데 있어서 똑같은 권리를 가지며,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를 보편주의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공리주의는 어떠한 행위도 그 자체로 도덕적으로 옳거나 그르다고 판단할 수 없다고 보고, 행위에 따른 결과에 의해 도덕적으로 허용할 수 있는 행위와 허용할 수 없는 행위를 구별한다. 이런 점에서 공리주의는 결과주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공리주의자가 결과를 중요시 하더라도 동기 자체를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가령 동기는 좋은데 결과가 나쁜 행위와 동기는 나쁜데 결과가 좋은 행위 중 행위의 올바름을 평가하라고 한다면 그들은 후자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어휘 다지기
도덕적 딜레마(moral dilemma):일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의 물음과 관련된 도덕적 판단들이 상충되는 경우를 만난다. 이를 우리는 도덕적 갈등(moral conflict)이라고 부른다.
고전 펼치기
인간을 제외한 동물들이 폭군이 아니고서는 결코 빼앗아 갈 수 없는 권리를 획득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프랑스 사람들은 피부가 검다는 것이 한 인간에게 고통을 주고도 보상 없이 방치해도 좋은 이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발견했다. 다리의 수, 피부의 털, 꼬리뼈의 생김새가 감각적인 존재를 동일한 운명에 처하게 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아니라는 사실을 언젠가는 깨닫게 될 것이다. 그 외에 무엇이 뛰어넘을 수 없는 경계선이 되겠는가? 이성의 능력인가? 또는 대화의 능력인가? 그러나 충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난아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합리적이고 말이 더 잘 통한다.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무엇이 더 필요한가? 문제는 그들이 사유할 수 있는지 또는 말할 수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 벤담의 <도덕과 입법 원리 입문> <도덕과 입법 원리 입문> 17장 1절 중에서
벤담은 언젠가는 동물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시기가 올 것이라고 예견한 철학자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가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데 있어 고려해야 하는 것은 그 대상의 이성 능력도,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도 아니다. 앞서 제시된 능력에 한정해서 본다고 할지라도 동물에 대한 차별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완전히 성장한 말이나 개는 갓 태어난 갓난아이보다 훨씬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성 능력이나 대화 능력이 아니라 그 대상이 고통을 느낄 수 있는가 이다. 그런데 인간뿐만 아니라 동물도 고통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이다. 따라서 행복의 추구와 고통의 배제를 최우선으로 하는 공리주의자라면 인간의 고통뿐만 아니라 동물의 고통까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벤담의 주장이다. 이러한 벤담의 관점을 철저하게 따른 현대의 대표적인 생명윤리학자로 피터 싱어(P. Singer)를 들 수 있다. 싱어에 따르면 인간의 행복만을 중시하는 인간 중심주의는 종차별주의(speciesism)에 불과하다. 싱어는 이러한 관점이 인종차별이나 성차별과 마찬가지의 한계를 갖고 있다고 평가하며 동물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우리와 평등한 도덕적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관련기출문제
2002 경희대 정시, 2007 고려대 수시1, 2007 건국대 수시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