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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아파트 뒤에는 무궁화가 담을 이루고 있습니다. 6월 말에 꽃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한 여름 다 지나도록 계속 피고 지고를 이어왔습니다. 그리고 지난 주말 세 송이를 마지막으로 금주 초에 들어서 그마저 꽃봉오리가 쪼그라들었습니다. 그것으로 금년은 끝난 것이지요. 다시 보려면 해를 넘겨야 합니다. 내년을 기약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 겨울을 지나야 합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려면 눈보라 아픈 때를 이겨내야 합니다. 우리는 시련 속에서 스스로 아름다움을 만들어갑니다. 그리고 때가 오면 세상에 밝게 드러냅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그러한지 아닌지 확인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일리가 있다고 여깁니다. 우리 교민이 봄에 개나리가 예뻐서 호주에 가져가서 심었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잎만 생기고 꽃이 피지 않더랍니다. 이유인즉 겨울이 없기 때문이라네요. 거참!!
좋은 주말 비 온다네요. 다음 주에는 조금 더 서늘해지리라 짐작합니다. 시월도 중순이니 가을이 조금 더 깊어질 것입니다. 나무도 산들도 가을 옷을 입고 있습니다. 맑고 파란 하늘 아래 울긋불긋 치장한 온 동네와 산들이 우리 눈을 호강시켜줄 것입니다. 구태여 멀리 가지 않아도 얼마든지 볼 수 있지요. 우리나라 좋은 나라, 볼거리도 많습니다. 그저 사람들만 시끄럽지 않다면 아주 좋은 나라입니다. 꼬박꼬박 세금 내는 우리 백성 가엾지요. 그래도 팔레스타인 보고 있노라면 나라가 있으니 다행입니다. 그래서 지키는 거지요. ㅋㅋ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10월 14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희는 하늘로 눈을 들며 그 아래의 땅을 살피라 하늘이 연기 같이 사라지고 땅이 옷 같이 해어지며 거기 거한 자들이 하루살이 같이 죽으려니와 나의 구원은 영원히 있고 나의 의는 폐하여지지 아니하리라” (이사야 51 : 6)
<1947 보스톤>
단순히 개인의 영예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나라의 힘이고 자랑이고 명예입니다. 온 세계에 한 국가를 알리는 아주 빠른 길입니다. 그런데 나라가 없다면? 그래서 다른 나라의 이름으로 출전하였다면 당연히 그 나라의 이름으로 깃발이 올라갑니다. 이미 그 나라의 이름을 걸고 출전하였으니 도리가 없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는 본 나라의 백성은 기가 찰 일이지요. 어쩌겠습니까? 세상에 내 나라의 이름 자체가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남의 땅에서 자리를 빌려 임시정부를 세우고 독립을 선포하고 내 나라의 원래의 땅을 되찾으려 싸움을 합니다. 그럴지라도 아직 영토가 없습니다. 그러니 나라라고 해봐야 아직 인정이 되지 않습니다.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삭제 사건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과 아픔을 절실하게 느꼈던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다시는 선수로 뛸 수 없게 되었습니다. 평생 그 아픔을 짊어지고 살게 되었습니다. 나라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 때의 실력을 발휘하기에는 너무 늦었습니다. 대신해줄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그 때의 아픔이 너무나 컸기에 다시는 뛰지 않기로 다짐하였을지도 모릅니다. 옆에서 함께 뛰었던 선수가 오히려 그 꿈을 되살립니다. 어떻게든 당시의 명예를 회복하고 다시 우리나라를 세상에 확실하게 알려주자는 꿈을 가집니다. 그래서 후배를 양성합니다. 문제는 그만한 인재를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요.
‘헝그리 정신’이라고 있습니다. 생존의 기본, 먹어야 삽니다. 그러니 먹을 것을 얻으려 돈을 벌려고 발버둥 치는 것입니다. 요즘이야 자기가 좋아서 아니면 명예를 얻으려고 넉넉한 가운데 운동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세기에만도 돈을 위해서 뛰고 달리고 죽자 사자 매달린 사람들도 많았습니다. 세계대회에서 특히 올림픽에서 등수 안에 들면 어느 정도 생활이 보장되니 말입니다. 어쩌면 생존이 달려있는 문제이기에 말 그대로 목숨을 걸다시피 온 힘을 쏟아 붓습니다. 나라의 명예보다 개인의 삶에 초점이 맞춰있습니다. 물론 좋은 결과는 그 두 가지를 모두 얻게 됩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입니다. ‘헝그리 정신’ 어쩌면 한계를 돌파시키는 촉매제입니다.
그런 정신을 가진 청년을 얻었습니다. 어려운 가정 형편을 탈출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정말 기를 쓰고 달려야 합니다. 남보다 한번이라도 더 배달하려면 더 빨리 달려야 합니다. 지금처럼 오토바이로 달리는 때가 아닙니다. 맨몸으로 달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라 잃은 아픔을 경험한 손 선수의 입장에서는 그런 정신보다 우월한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이제 막 독립한 우리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매우 좋은 기회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뛰기는 잘 뛰는데 그런 정신으로 나가봐야 어떻게 돌변할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다행히 상황이 바뀌어갑니다. 마음도 자세도 바뀝니다. 먹기만 하는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이지요.
사람은 준비되어 가는데 거쳐야 하는 관문이 쉽지 않습니다. 올림픽에 앞서 일단 세계대회에서 한번이라도 심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보스톤 마라톤 대회에 출전하기로 합니다. 세상이 마음만 먹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우리나라가 아직 이렇다 할 국력이 갖추어져 있지 않으니 걸림돌도 많습니다. 미국에서 열리는데 아무나 받아주지 않는답니다. 누군가의 초청이 있어야 하고 재정보증도 서야 한답니다. 그러나 준비된 것은 사람 곧 선수일 뿐입니다. 보증금으로 그 커다란 금액을 어디서 얻울 수 있겠으며 현지에서 돌봐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도무지 감당하기 어려운 장애물들이 이어집니다. 그렇다고 나라가 도울 힘이 있습니까? 아직 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과연 그렇게 되어 갑니다. 준비한 사람들이 복이 있고 간절한 마음으로 끈질기게 쫓아가는 그 정신에 하늘도 감동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돕는 자가 생기고 소식을 접한 우리 백성 또한 너도나도 동참합니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미국으로 향합니다. 당시 우리나라에는 비행기 한 대도 없었습니다. 이래저래 남의 것 얻어 타고 가는 길, 어렵사리 현지에 도착합니다. 그런데 이게 또 웬 말입니까? 이번에는 일장기가 아니라 성조기를 달고 뛰어야 한답니다. 세상에! 아직 미군정 치하에 있기에 미국의 국명을 사용해야 한다고요. 뒤집어질 일이지요. 우리 대한민국의 이름을 걸고 명예회복을 위해 왔는데 말입니다.
가끔 다른 나라에 귀화하여 그 나라의 이름으로 뛰는 선수들을 봅니다. 그야 개인이 선택하여 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손기정 선수가 일본의 이름으로 뛴 것은 개인의 선택도 나라의 선택도 아닙니다. 강제로 귀화된 셈이지요. 자유선택과 강압적 주입하고는 사정이 전혀 다릅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국제사회에서 인정해줍니까? 다시는 그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됩니다. 21세기 우리 대한민국은 세계 가운데 우뚝 솟은 나라요 민족입니다. 절로 어깨가 으쓱대고 가슴이 활짝 열립니다. 손기정 선수, 서윤복 선수 그리고 이들을 뛰게 하느라 수고해준 사람들, '백남용' 씨, ‘이길용' 기자, 1947년 당시 미군정청의 체육과 과장인 '스매들리' 씨 등등 함께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영화 ’1947 보스톤‘(Road to Boston)을 보았습니다.
육육육
우리 생활에 언어가 필요하듯 숫자 또한 매우 필요한 도구입니다. 요즘 우리는 다 알 듯이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숫자의 기원은 아니지만 발전되어 온 결과입니다. 도대체 왜 숫자가 생겨났을까요? 생활에 필요하니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뭔가 수가 늘어나면 일단 기억하기 위해 수를 헤아려야 합니다. 잊지 않기 위해서는 기록도 해두어야 합니다. 가족이야 좀 많아도 눈으로 기억해두겠지만 가축이나 물건이 많아지면 하나하나 세야 하고 또 기록해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상호 간에 거래를 하려고 해도 그 수를 서로 맞게 세야 하겠지요. 그래서 생겨났을 텐데 이 숫자는 특히 과학에는 필수이고 우리 생활과도 떼려야 뗄 수 없습니다. 또 사람마다 좋아하고 기피하는 숫자도 생겨납니다. ‘럭키 쎄븐’이라고도 하고 ‘죽을 사’라고도 말합니다. 숫자가 그런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사람들이 그렇게 붙여놓은 것뿐입니다. 그럼에도 특히 신앙인들 그리스도인들이 괜스레 기피하는 숫자도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궁금한 것들이 많지만 특히 ‘말세’와 관련하여 관심을 가지는 용어가 바로 이 ‘666’이란 숫자일 것입니다. 물론 하고 많은 숫자 중에서 왜 하필 ‘666’이냐 하는 의문도 생기지만 아마도 보기 쉽고 부르기 쉽고 머리에 남기 쉬워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혹 시내버스 번호 중에는 이 번호가 없나요? 그렇다면 이 버스를 타고 다녀야 하나요, 말아야 하나요? 왜 이 번호를 무서워하지요? 통상 우리 기독교인들이 이 숫자를 보면 ‘짐승의 수’라고 생각합니다. 보기만 해도 아니면 생각만 해도 두려움이 생깁니다. 가까이 해서는 안 될 숫자, 어쩌면 금기해야 할 숫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습니까? 왜 이 숫자에 대해서 그렇게 두려워해야 하지요? 그런가 하면 ‘777’은 완전수 그래서 ‘하나님의 수’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 ‘888’은 ‘예수님의 수’라고 합니다. 도대체 그런 해석이 성경 어디에 나오는지 궁금합니다. 그러면 은하철도 ‘999’는 무슨 숫자인가요? 사람들이 엉뚱하게 상상하여 스스로 어리석음을 표출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성경을 이야기해야 하고 성경만으로 밝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이 섞여서 이것도 저것도 아닌 쓰레기가 되고 말 것입니다. 잠 30 : 6 “너는 그 말씀에 더하지 말라 그가 너를 책망하시겠고 너는 거짓말 하는 자가 될까 두려우니라” 하나님 말씀에 더한다면 무엇을 더하겠습니까? 세상 지식 또는 자기 생각입니다. 그런 것을 섞으면 거짓말이 된다는 뜻이지요. 5절 “하나님의 말씀은 다 순전하며 하나님은 그를 의지하는 자의 방패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섞인 것이 없이 순전합니다. 삼하 22 : 31 “하나님의 도는 완전하고 여호와의 말씀은 정미하니 저는 자기에게 피하는 모든 자에게 방패시로다” 하나님 말씀은 완전합니다. 아주 정밀하고 자세하니 섞을 필요가 없습니다. 섞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왜 섞을까요? 자기가 깨닫지 못하니 자기 식으로 해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면 하나님 편에서는 거짓말하는 자가 되는 것이지요. 거짓말하는 자는 천국에 있을 수 없습니다. 계 22 : 15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 밖에 있으리라”
‘666’에 대해서 그 동안 들은 말을 종합해보면 이렇습니다. 네로 황제다, 로마카돌릭교회 교황이다, 히틀러다, EC공동체다, 컴퓨터 바코드다, 슈퍼컴퓨터다 등등. 시대를 지나가면서 변화하는 모양입니다. 앞으로는 또 뭐라고 나올지 궁금합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666’이 컴퓨터 바코드라고 해서 야단법석을 떤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품마다 이 바코드가 찍히지 않은 것이 거의 없지요. 사야 해요, 말아야 해요? 요즘은 성경책에도 찍혀 있습니다. 그 성경 사야합니까, 말아야 합니까? 왜 이런 법석을 떨어야 하지요? 모르니까 그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이야기합니다. 신자들은 이 사람 말에 춤추었다가 저 사람 말에 춤을 추었다 우왕좌왕하는 것이지요. 가장 문제가 되는 일은 하나님 말씀 곧 성경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늘 들어온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라고. 그런데 왜 자꾸 성경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상식이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세상을 위한 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세상에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 주셨습니다. 출 19 : 5 - 6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피조물로 하나님께 속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말씀을 세상에 하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 백성에게 하십니다. 하나님 백성을 제사장으로 세워서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도 세상을 구원하고자 오신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역시 그들을 제사장으로 세워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 1 :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둘째 그러므로 성경 속의 역사도 세상 역사가 아니라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이것을 세상 역사 바로 세계사로 생각하니 넌센스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 속의 역사는 아담 이후 오늘까지 6천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인류사로 우긴다면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결코 과학이나 이성과 충돌하지 않으십니다. 그것을 뛰어넘어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런데 과학과 인간이성만도 못한 이야기를 한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처사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 자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을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만도 반만 년이 넘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아담 이후의 역사 그것은 바로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말씀을 넣어 하나님 백성으로 창조하신 첫 사람 아담 이후의 이야기는 곧 하나님 백성의 역사인 것입니다.
셋째 성경에는 4 가지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역사와 교훈 그리고 예언과 성취입니다. 성경을 우리가 흔히 영의 양식이라고 말하듯 이 양식이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됩니다. 고전 3 :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사도 바울이 성도들에게 무엇을 먹여 양육하였습니까? 당연히 하나님 말씀이지요. 그 말씀 곧 성경에는 젖과 같은 수준이 있고 밥과 같은 수준이 있다는 말입니다. 히 5 : 12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표현만 다를 뿐 같은 말입니다. 젖과 단단한 식물로 나누었지요. 젖은 말씀의 초보이고 단단한 식물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역사와 교훈 그리고 예언과 성취 어느 쪽이 쉽고 어렵겠습니까?
넷째 성경은 하나님이 그 백성의 영혼을 살리려 주신 것입니다. 요 6 :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그럼에도 하나님 백성이 하나님 말씀을 자꾸 육으로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를 보십시오. 마 6 : 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그래서 우리는 긍휼이 풍성하신 우리 주님이 먹을 것까지 구하라고 하신다며 감동하여 일용할 양식을 구합니다. 무슨 양식이요? 우리 육신이 필요로 하는 양식 말입니다. 여태 그렇게 믿고 기도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조금만 뒤로 가면 나타나는데 그 사이 눈이 감긴 것입니다. 31- 32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설마 예수님이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라고 가르쳐주셨겠습니까?
물론 역사나 교훈의 말씀 속에는 육의 말씀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구약시대 육적 이스라엘 속의 이야기에는 육의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그 속에서도 영적인 뜻을 찾아야 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성경을 영적인 뜻으로 주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육적으로 생각하니 오해가 일어납니다. 한 가지 예를 더 듭니다. 마 24 : 29 “그 날 환난 후에 즉시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의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마지막 때를 말씀하시는데 해 달 별들이 있는 하늘에 이상이 생긴답니다. 그래서 3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고 핵전쟁이 발생하고 우주에 변혁이 생기고 요란하답니다. 한 마디로 웃기는 말이지요. 왜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들을 섞느냐 이 말입니다. 그것은 자기 생각이지 하나님 생각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제 ‘666’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봐야 합니다. 답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경 속에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찾아야 하지요. 요한계시록에 보면 하나님 백성은 인을 맞아야 한다고 하고 마귀에게 속한 자들은 표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계 7 : 3 - 4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니” 이것은 하나님 백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계 13 : 16 - 17 “저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빈궁한 자나 자유한 자나 종들로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이는 마귀에게 속한 자들의 이야기입니다. 인이든 표든 사실은 같은 뜻입니다. “이마에 인치기까지”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 모두 도장을 받았다는 말이지요. 도대체 무슨 도장을 찍는다는 말입니까? 인이나 표가 과연 우리가 육적으로 생각하는 도장일까요?
먼저 ‘하나님의 인’이 무엇인지 알게 되면 마귀 사단의 표가 무엇인지도 알아내기 쉬울 것입니다. 요 3 : 32 - 33 “그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되 그의 증거를 받는 이가 없도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하나님을 참되시다 하여 인쳤느니라” 이 앞의 내용을 보면 예수님은 위로부터 오시는 이요 하늘로서 오시는 이입니다.(31절) 그 예수님은 그 보고 들은 것을 증거하십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듣고 인정하는 사람을 가리켜 ‘인 쳤다’고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인정하는 사람이 많았습니까?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열두 제자들뿐이었습니다. 도장은 다른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전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새겨지면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한다면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은 셈이지요. 히 8 : 10 “또 주께서 가라사대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으로 세울 언약이 이것이니 내 법을 저희 생각에 두고 저희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저희에게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내게 백성이 되리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인이 되는 것이지요.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이 증거하신 말씀은 당시 목자들이 증거하던 말씀과는 다릅니다. 율법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선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래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 예수를 믿어야 구원과 영생이 있다는 복음이지요. 소위 새 포도주였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묵은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구원의 길로 들어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선포하셨습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율법의 시대는 끝났고 복음의 시대가 열린 것이지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구습에 묶여 묵은 포도주만 우긴다면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들이 되고 맙니다. 구약에 봉해져 있던 예언의 말씀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열렸습니다. 그리고 그 열린 말씀으로 인을 맞아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 백성이 됩니다. 하나님의 인이란 바로 이 열린 말씀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 한편 그 열린 말씀을 가진 목자가 인이 됩니다. 예수님이 인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새겨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언도 되어 있습니다. 학 2 : 23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스알디엘의 아들 내 종 스룹바벨아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고 너로 인을 삼으리니 이는 내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스룹바벨은 오실 예수님을 예표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인으로 삼아 사용하신다는 예언이지요. 실제로 예수님이 오셔서 그 계시의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인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제자들이 또한 인이 되어 그 뒤의 사람들에게 인을 치는 작업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백성이 형성되고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이러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진작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졌을 것입니다. 마귀 사단이 가만있을 리가 없지요. 다른 한편에서는 이들이 자기네 표 주는 작업을 합니다. 마귀의 표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인이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라면 사단의 표는 사단의 말 곧 거짓말, 비진리입니다. 거짓말이 뭐라고요? 앞에서 보았듯이 하나님 말씀에 세상 것을 섞는 것입니다. 게다가 영으로 주신 말씀을 육으로 생각하고 받는 것이지요.
다시 말합니다. 사단이 어디서 활동합니까? 세상은 이미 자기 손에 있는데 거기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자기 나라가 하나님 나라로 빼앗기고 있으니 그 하나님 나라를 무너뜨리려 발버둥칩니다. 살후 2 :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어디에 앉아 있답니까?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오늘날 교회에 들어와 앉아 하나님의 종이라고 나서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그것을 예언하셨습니다. 마 24 : 15 - 16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읽는 자는 깨달을찐저)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찌어다” 물론 다니엘이 예언한 것은 예수님 때 성취되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이 예루살렘과 백성들을 장악하고 있었으니까요. 그들은 뱀이고 독사였습니다.(마 23 : 33) 잘 아는 대로 뱀은 곧 사단 마귀입니다.(계 12 : 9, 20 : 2, 창 3장)
먼저 지금 교회를 누가 장악하고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물론 참 하나님의 종이라 하는 목자가 그 양떼를 인도하기 바랍니다. 그런데 과연 그런가, 분별을 해야 한다는 말이지요. 고후 1 : 21 - 22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하나님이 인치신 자에게는 성령이 와 계십니다. 그래서 오직 진리의 말씀을 증거합니다. 그러면 사단의 표를 받은 목자에게는 누가 와 있겠습니까? 당연히 사단의 영 곧 악령이 와서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니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단의 말 곧 거짓말이요 비진리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겉만 보고서는 결코 하나님의 종인지 마귀의 종인지 분별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겉만 보면 양입니다. 그러니 어찌 알겠습니까? 그런데 알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 울음소리를 들어보면 됩니다. 양은 양의 울음소리를 낼 것이고, 겉은 양이라도 속이 이리라면 이리의 울음소리를 낼 것입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들어보고 분별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종이라 칭하는 목자가 증거하는 설교가 하나님 말씀에 합한 진리인지 자기 생각이 섞인 거짓말 비진리인지 들어서 분별하면 됩니다. 또 하나 문제는 분별을 해야 할 내가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분별할 수 있는 기준이 되는 진리의 하나님 말씀을 내가 모르는데 어떻게 분별하겠습니까?
자 이제 666이란 숫자가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교도소에 가면 사람의 이름이 바뀝니다. 어떻게 바뀌지요? 숫자로 바뀌는 것입니다. 교도서 안에서는 이름이 아니라 번호로 호칭됩니다. 숫자가 그 죄수의 이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8 : 34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그런데 이 죄를 처음 만든 자가 누구입니까? 아담을 범죄하게 만든 자 뱀, 곧 사단 마귀입니다.(창 3장) 그러므로 이 숫자는 이 죄수의 이름입니다.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계 13 : 17) 666을 어렵게 생각할 것이 아닙니다. 사단 마귀와 그 종을 가리키는 숫자일 뿐입니다. 그리고 마귀가 자기가 세운 종에게, 나아가 그 마귀의 종이 마귀의 거짓말로 성도들에게 표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육육육’ 표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것은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했습니다. 용처럼 말하는 즉 마귀의 말을 하는 짐승이 올라와서 사람들에게 표를 합니다. 자기 말을 전하는 것이지요. 이 표가 짐승의 이름이고 그 수인데 바로 666입니다.(계 13 : 11 - 18)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을 치듯(계 7 : 3 - 4) 마귀는 자기 이름을 자기 종들의 이마나 오른손에 표를 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짐승(마귀)의 수를 ‘666’이라고 지칭한 것이지요. 쉽게 표현하면 자기의 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마귀의 종들은 그 말을 받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닌 자기 말 곧 거짓말을 심어주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보겠습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예수 초림 때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들인 서기관 바리새인들입니다. 오늘 교회 목자들이 행여 이와 같은 일을 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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