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에 들어가기 전 양측이 서로에게 필요한 자료 등을 요구·공유하는 절차인 “디스커버리 제도”는 미국 등 주로 영미법(common law) 계수 국가 중심으로 운영되는 ‘증거개시절차’를 의미합니다.
본격적인 재판에 앞서 당사자는 소송 상대방에게 사실관계를 확인할 수 있고, 자료 제출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디스커버리 제도는 증거수집 절차의 문제점을 보완할 수 있는 수단으로 꾸준히 거론되어 왔고, 대한변협 역시 민사소송에서 재판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으로서 이 제도 도입을 추진해왔다고 합니다.
김관기(사시30회) 대한변협 부협회장은
"디스커버리 제도는 사실관계 발견을 위한 절차를 당사자들이 자주적으로 수행하고, 법원은 이를 감독하는 방식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특히 민사소송에서 디스커버리 제도는 증거의 구조적 편재를 시정하는 기능을 갖습니다.
예를 들어 의료·제조물책임·특허침해소송에서 상대방이 가진 문서 등을 확인할 수 있다면 분쟁의 실체에 접근하기 쉽습니다. 지금 법원에서는 증인신청과 당사자신문신청을 해도 잘 수용되지 않는 점을 변호사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부분만 바뀌어도 상당한 변화가 이뤄질 것입니다.”
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가급적이면 재판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좋지만, 재판을 하는 과정을 가더라도 상대의 의도와 상대가 제기하는 문제에 대해 미리 파악할 수 있다면 판정에 대해 더 납득이 되지 않을까 생각을 해 봅니다.
<인간은 자신만의 섬에서 각자의 세상을 살고 있다. 단지 그 섬에서만 유효한 공동선과 악이 보편적으로 적용된다고 착각할 뿐이다.
우리는 모두 다른 유전자와 축적된 경험으로 만든 분별심이 고정관념인 줄 모르거나 망각한 채 이 세상을 살고 있다. 이것이 부딪칠 때 필연적으로 시시비비가 발생하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 법을 제정하게 되었다. 법은 공동체의 질서 유지를 위해선 필수불가결한 조건이다.
‘가장 나쁜 조정도 가장 좋은 판결보다 낫다’는 법언(法諺·법률 격언)이 있다. 필자는 지난 35년간 1만 건이 넘는 판결문을 데이터베이스(DB)에 남겼다. 그중 민사사건이 7000건이 넘는데, 이러한 판결로 처리된 사건 외에 조정으로 해결한 경우가 전체 판결 건수의 20%가 넘는다.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두 사례 중 하나가 대구지방법원 시절의 사건이다.
친정엄마가 시집간 딸들에게 준 2500만 원이 증여인지 대여인지를 두고 다투다가 폭행으로 이어졌고, 쌍방 폭력 혐의로 모두 벌금까지 선고받았다. 딸들은 어머니와 남동생을 상대로 치료비 청구 소송을 냈고, 엄마는 대여금 반환 및 위자료 청구 소송을 내 맞섰다. 후회가 남을 친족 간 다툼이라 당사자와 아들을 불렀고, 그들을 보는 순간 ‘회심곡’이 생각났다. 해금의 구슬픈 가락이 당사자들의 닫힌 마음의 빗장을 열었고, 노래 한 곡이 3년간 얽힌 감정을 풀어내는 데는 10여 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사실 필자도 예상치 못한 빠른 합의였다.
또 하나는, 서울중앙지방법원 시절에 있었던 2002한일월드컵 응원곡 ‘오 필승 코리아’의 저작권을 둘러싼 법적 분쟁이다. 한국 축구대표팀의 공식 응원단인 붉은악마 측이 작곡가와 한국음악저작권협회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삼세판까지 갈 수도 있는 사안이었지만, 쌍방이 적정한 선에서 저작권에 관한 합의를 하여 무난하게 조정되었다.
오랜 세월 많은 사건에 몰입하다 보면 난제 속에 답이 보이고, 뜻밖으로 쉽게 매듭을 풀 수 있는 때가 있다. 이 순간을 놓치지 않으면 조정을 통해 갈등이 상생으로 바뀌는 순간이 온다. 바로 이때가 법관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순간이기도 하다.
최근 들어 마치 소송 만능 국가가 된 것처럼 법정에 사건이 폭증하고 있다. 다른 선진국과 비교하면 우리나라는 1만 명당 고소 사건이 일본의 150배가 넘는다. 그리고 같은 기준의 민사사건은 미국 캘리포니아주보다 많고, 일본과 비교하여 인구 비율을 고려하면 6배가 넘는다.
대개 우리나라 사람은 협상보다는 삼세판 소송을 택한다. 13명의 대법관이 연간 4만 건이 넘는 사건의 홍수에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을 그대로 방치하면 결국 국민이 피해자가 되고 만다. 그런 면에서도 조속한 상고허가제 도입이나 상고법원 신설 등 상고심 제도 개혁은 더 미룰 수 없는 사법개혁의 필수 과제이기도 하다.
필자가 2012년 북유럽 3개국 법원을 둘러보았을 때, 인구 500만 정도인 핀란드의 대법원은 대법관 19명이 연간 100건 안팎 정도만 판결문 형태로 답을 해 주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을 설명했더니, 핀란드 대법원장이 전혀 믿을 수가 없다는 표정으로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고 되묻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난 35년간 수많은 사건의 판결을 선고했다. 대개의 사건은 제로섬 게임처럼 승소·패소가 명백하게 결정이 난다. 하지만 사안에 따라서는 확정적인 결론을 낼 수가 없어 조정을 통해 사건을 해결해야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대개의 사건은 쌍방이 역지사지의 마음을 내지 못하고 장기간의 지루한 소송 절차로 이어진다.
조정으로 사건이 마무리되면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주변 관계자들에게도 물질적·정신적으로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분쟁이 즉각 종결될 뿐만 아니라 재판 후 이어지는 집행까지 대개 조정·화해 조항에서 정해지기에 일반적인 판결 절차에 비해 더 신속하고 효율적이며, 나아가 분쟁 해결의 타당성이 확보된다. 이행의 확실성은 덤으로 생기는 수확이다. 마지막으로, 법원 전체의 업무가 경감되어 어려운 사건에 집중할 수 있는 여력이 확보된다.
물론, 재판장이 사건 처리에만 급급하여 정당한 권리자의 일방적 손해만을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 쌍방이 모두 수긍하는 합리적인 안을 가지고 조정에 임해야 한다. 특히, 법원이 판결보다 조정에 치중할 경우 사회적·법적 정의감이 약해질 수 있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소송 만능 사회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 재판 전에 상호 증거를 보여주고 협의하는 영미법계의 ‘디스커버리’ 제도를 도입하고, 공적인 통합중재원을 법원 외부에 독립기관으로 설치해야 한다. 디스커버리 제도를 통해 조기에 쟁점을 명확히 함으로써 사건의 신속한 해결도 기대된다.
대개의 사건은 소송 전 단계에서 종결짓고, 어려운 사건만 법관이 직접 관여하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언제까지고 사회의 모든 분쟁을 법원이 혼자서 다 안고 갈 수는 없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길은 공적 기관에서 하는 소송도 조정도 아니다. 소통을 막은 섬과 섬을 이어주는 기반 시설은 공적 기관이 건설해야 하지만, 그것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교통 체증 없이 출입이 자유로워지면 섬은 더 이상 섬이 아니듯이 경쟁과 갈등 대신 상생의 가치관이 일상생활에 뿌리내리는 것이 가장 근본적인 조정이고 건강한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문화일보. 강민구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
출처 : 문화일보. 오피니언 칼럼 ‘살며 사랑하며’, 너도 살고 나도 살자
소설가 정을병 씨의 작품 「육조지」에는 "경찰은 때려 조지고, 검사는 불러 조지고, 판사는 미뤄 조진다"는 말이 나옵니다. 그만큼 당사자들은 송사가 길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디스커버리 제도가 도입되어 사실관계 발견을 당사자가 부담하게 되면 재판이 지연될 수 있다는 우려도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김관기 대한변협 부협회장은 "상소가 줄어드는 이익만으로도 디스커버리 제도의 단점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공개변론에 들어가기 전에 사실관계가 밝혀지고 쟁점이 정리되면, 당사자들은 재판 진행 방향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고, 그것에 기반하여 많은 사건이 화해와 조정으로 끝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항소와 상고하는 사례가 줄어들게 되고, 공개변론에 회부되는 사건들은 비교적 충실하게 심리를 받게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디스커버리 제도의 장점은 충분합니다.“
이런 주장이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時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