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전 지구 차원의 환경 위기-자연과 인간의 공존은 가능한가: 생태이론 對 不一不二 □ 2: 과학기술의 도구화-게놈 프로젝트, 과학기술은 구세주인가, 악마인가: 신과학운동 對 一心의 體用相
□ 3: 인간성의 상실과 소외의 심화-우리는 어떻게 소외와 불안, 고독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프랑크푸르트 철학 對 三空과 緣起
□ 4: 미국 시장과 문화의 세계화-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공세 속에서 제3세계는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는가: 세계화론 對 화쟁의 세계체제
□ 5: 이성의 도구화와 언어와 진리의 불확정성-이성은 해방의 빛인가, 굴레인가: 포스트모더니즘 對 因言遣言
□ 6: 정보화사회의 빛과 그늘-정보화사회는 유토피아인가, 디스토피아인가: 퍼지이론 對 順而不順
연재를 시작하며-지혜의 마당을 바라며 현재 세계 인류는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 인간성의 상실과 이성의 도구화, 미국문화의 세계화, 소외와 갈등의 심화와 보편화, 공동체의 파괴, 억압과 폭력의 구조화 등 위기를 맞고 있다. 이런 위기를 맞아 인류는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면서 새로운 사회를 꿈꾸고 있다. 제3의 길, 공동체 운동, 생태운동 등 많은 대안들이 모색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것은 대안의 패러다임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그 어떤 것도 미봉책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따라 새로운 원리와 가치관을 정립하고 그에 합당한 사회와 체계를 구성하고 모든 실천의 준칙과 지표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7세기 원효가 외친 화쟁 사상이 대안의 패러다임이 될 수 있을까? 있다면 무엇이 대안의 길을 제시할 것인가? 선언적, 당위적으로 동양사상이 대안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다. 공리공론을 면하려면 모든 질문과 답은 지금 우리가 맞고 있는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 보편성을 띠려면 서양의 철학과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 단순히 동서양의 철학을 비교하는 데서 넘어서서 그런 위기와 모순에 대해 짚어보고 서양 철학은 이런 대안을 내세웠는데 원효의 대안은 이런 식이라는 방식으로 서술해 가야 할 것이다. 이런 취지로 필자는 『동양철학에세이-왜 착한 사람이 더 고통받을까』(정음문화사, 2000)을 썼고 한겨레문화센타에서 <현대사회의 위기와 대안의 패러다임-원효의 화쟁사상을 중심으로>라는 강의를 지난 3월 14일부터 해 오고 있다. 이를 이 지면을 통하여 연재한다. 연재하면서 11가지의 주제를 여섯 가지로 줄였다. 워낙 무거운 주제를 한정된 지면에 쉽게 쓰면서도 핵심을 잃지 않아야 함은 정녕 어려운 일이다. 그보다는 필자의 근기根機가 약하여 여러 한계를 드러낼 것이다. 그 때마다 좋은 비판을 해 주신다면 이 자리가 풍성한 지혜의 마당이 될 터이다.(hwajeang@chollian.net) 필자는 『화쟁기호학, 이론과 실제』(한양대출판부, 1999)에서 『금강삼매경론』 등 원효의 원전만을 대상으로 하여 화쟁사상의 형이상학적 의미를 여섯 가지로 정리하였다. 거기서는 원효의 일심一心에 다가가고자 철저히 정전正典을 고증하였다면 여기서는 이를 바탕으로 자유로운 해석을 하겠다. 단 지면이 짧아 서양의 대안은 될 수 있는 한 간략히 서술하고 화쟁의 패러다임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소개한다.
죽음으로 가는 완행열차, 매일 백 여종의 생물이 멸종하고 있다 전 지구가 환경위기로 몸살을 앓고 있다. 1초 동안 0.6 헥타아르의 열대우림이 파괴되고 하루에만 100여종의 생물이 지구상에서 영원히 사라진다. 2050년까지 80%의 이산화탄소의 양이 증가하여 2100년까지 지구의 평균온도는 3도, 해수면은 0.65미터나 상승할 것이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오늘도 수억의 생명체가 제 명보다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살아남은 자라 해서 얼마나 더 나을까? 오염된 공기와 물과 토양을 먹으며, 또 이를 먹고 자란 생물을 포식하며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이미 오래 전에 자연스러운 삶을 상실하였다. 8천 미터 설산을 나는 새나 북극의 백곰까지도 환경오염으로 신음하고 있다. 살충제에 죽은 벌레를 새가 먹고 한 쪽 날개가 없는 새를 낳고 그 새를 잡아먹은 독수리가 고공을 날다가 갑자기 떨어져 죽듯, 중금속은 지구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의 몸에 조금씩 축적되고 있다. 소라 수컷을 암컷으로 변화시킨 농약 속의 환경 페르몬이 도시에까지 날아와 극히 미량으로도 도시 남자들의 정자 수를 감소시키고 여성화를 촉진시키고 폐암을 유발하듯, 그것은 소리도 없이, 서서히, 그러나 분명한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몇몇 학자들은 인류가 금세기 안에 제3의 인종의 탄생을 볼 것이라고 경고한다. 지금도 환경오염으로 기형아는 속출하고 있다. 에 나오는 외계인처럼 파충류를 닮은 아기가 지구 곳곳에서 태어나면, 지구가 기상이변을 일으켜 인류의 반 이상을 단번에 몰살시키는 천재지변을 일으키면 인류의 환경파괴는 멈출까?
변한 세상을 보고 싶다면 우리가 변해야 한다 원인은 어디에 있는가, 대안은 과연 있는가? 환경주의자들은 청정기술을 통하여 통제할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유조선이 유출한 기름을 제거하기 위하여 화학약품인 유분산 처리제를 뿌리면 그것이 다시 바다를 오염시킨다. 이 예에서 보듯 환경주의적 대안들은 기계적 세계관과 인간중심주의를 바탕으로 하였기에 근시안적이고 미봉책이며 국부적이다.
생태주의자들의 입장은 다르다. 그들은 인간이 전 지구의 중심에 서서 자연을 착취하고 개발하는 것을 문명으로 여긴 인간중심주의와 자연을 인간이 이용하는 대상으로 간주하는 기계적 세계관에서 환경위기가 비롯되었다고 본다. 이들은 인간과 자연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이고 유기적인 세계관 속에서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을 통하여 인간과 모든 생태계의 조화를 추구한다.
생태주의자들 사이에서도 입장은 다르다. 사회생태학자들은 확대재생산의 원리로 자연을 무자비하게 파괴하는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작년에 100을 생산하였으면 올해 110을 생산하여야 망하지 않듯 자본주의는 '확대 재생산'을 해야만 살아남는 체제인데 자연은 유한하니 이 체제로는 자연의 파괴가 본원적이다.
에코 페미니스트들이 볼 때 자연과 여성은 똑같이 착취와 개발의 대상이었다. 인간중심주의와 이성중심주의는 인간의 자연정복에 기반을 둔 남근중심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산물이다. 남성중심주의는 가부장적인 제도 속에서 내재화하여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를 내세우며 근대 과학의 이름으로 자연과 여성에 대한 지배와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개발프로젝트를 수행하였다. 여기서 여성과 자연은 남성이, 힘을 가진 자가 한껏 소비하는 상품이며 마구 폭력을 휘두르고 배제를 하여도 무방한 타자이다. 그러니 가부장주의의 자연 파괴에 맞서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며 이를 보호하고 양육하는 여성성에 바탕을 둔 대안이 자연과 생명을 보호하리라 본다.
노르웨이의 철학자 아르네 네스는 1973년에 기존의 생태이론을 '표층생태론(shallow ecology)'이라며 '심층생태론(deep ecology)'을 주장하였다. 전 지구 규모의 환경문제는 바로 현재의 사회체제와 문명이 잉태한 것이므로 그것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체제와 문명 그 자체를 변혁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태이론 또한 근본적인 대안이 아니라 당위적이고 한정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이 이론이 이분법적 패러다임을 벗어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럼 이분법을 넘어서서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극복할 패러다임이 원효의 화쟁사상에 있을까?
화쟁의 연기론: 씨는 죽어 열매를 맺는다 "이항대립(binary opposition)적 사유에는 하나가 다른 것보다도 우위를 차지하고 지배하는 폭력적 계층질서가 존재한다."(Jacques Derrida, Positions: 56-57) 데리다는 이성중심주의에 바탕을 둔 서구의 형이상학은 정신/육체, 이성/광기, 주관/객관, 내면/외면, 본질/현상, 현존/표상, 진리/허위, 기의/기표, 확정/불확정, 말/글, 인간/자연, 남성/여성 등 이분법에 바탕을 둔 야만적 사유이자 전자에 우월성을 부여한 폭력적인 서열제도이며, 처음과 마지막에 "중심적 현존"을 가정하려고 하는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홍수를 막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댐을 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물이 흐르는 대로 물길을 터주는 것이다. 서구 사회는 인간과 자연을 이항대립으로 나누고 인간에게 우월권을 주었기에 전자의 방식을 택하였다. 댐을 쌓듯 인간 주체가 자연에 도전하여 자연을 개발하고 착취하는 것을 문명이라 하였고 이것으로 그들은 17세기 이후 전 세계를 지배하였다. 그러나 댐은 물의 흐름을 방해하여 물을 썩게 하고 결국 거기에 깃들여 사는 수많은 생물을 죽이고 심지어는 주변의 기후를 변화시키고 지진을 일으키기도 한다. 이렇듯 이항대립에 바탕을 둔 서구의 패러다임은 전 지구 차원의 환경위기를 비롯하여 거의 모든 현대성의 위기의 동인이었다.
댐을 쌓는 것이 근대적, 서구적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라면, 물길을 터서 물을 흐르게 하고 나무를 심는 것은 화쟁의 不一不二의 패러다임에서 비롯된 대안이다. 화쟁의 패러다임을 가졌던 신라인은 홍수를 막기 위하여 물길을 트고 나무를 심었다. 지금도 지리산 자락의 함양군 함양읍 대덕동에 가면 낙엽활엽수림으로선 유일하게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된 상림上林이란 숲이 있다. 1,100년 전 신라 진성왕(887년∼896년) 때 이곳의 태수인 고운 최치원은 홍수로 툭하면 넘치는 위천의 물길을 돌리고 이 숲을 조성하였다. 하림下林은 사라져버렸으나 지금도 폭 200~300미터, 길이 2킬로미터에 걸쳐 200년 된 갈참나무를 비롯하여 114종, 2만여 그루의 활엽수목이 원시림과 같은 깊은 숲을 이루고 있다. 댐은 물을 썩게 하고 생명들을 죽이지만 숲은 빗물을 품었다가 정화한 다음 서서히 내보낸다. 잘 가꾼 숲은 시간당 200밀리 이상의 강우를 가둔다. 고인 물은 썩지만 흐르는 물은 산소를 머금고 이온 작용으로 자연 정화를 하며 온갖 생물들을 품는다.
화쟁의 일곱 가지 의미 가운데 하나인 불일불이不一不二는 차이를 통하여 공존을 모색하자는 사유체계다. 씨는 스스로는 무엇이라 말할 수 없으나 열매와의 "차이"를 통하여 의미를 갖는다. 씨와 열매는 별개의 사물이므로 하나가 아니다[不一]. 국광 씨에서는 국광사과를 맺고 홍옥 씨에서는 홍옥사과가 나오듯, 씨의 유전자가 열매의 거의 모든 성질을 결정하고 열매는 또 자신의 유전자를 씨에 남기니 양자가 둘도 아니다[不二]. 씨는 열매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공空하고 열매 또한 씨 없이 존재하지 못하므로 이 또한 공하다. 그러나 씨가 죽어 싹이 돋고 줄기가 나고 가지가 자라 꽃이 피면 열매를 맺고, 열매는 스스로 존재하지 못하지만 땅에 떨어져 썩으면 씨를 낸다. 씨가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고자 하면 씨는 썩어 없어지지만 씨가 자신을 공하다고 하여 자신을 흙에 던지면 그것은 싹과 잎과 열매로 변한다. 공空이 생멸변화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화쟁은 우열이 아니라 차이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고, 투쟁과 모순이 아니라 자신을 죽여 타자를 이루게 하는 상생相生의 사유체계이다. 서구의 이항대립의 철학이 댐을 쌓아 물과 생명을 죽이는 원리를 이룬다면, 화쟁의 불일불이는 그 댐을 부수고 물이 흐르는 대로 흐르며 물은 사람을 살게 하고 사람은 물을 흐르게 하는 원리이다. 화쟁의 불일불이는 이항대립적 사고, 우열과 동일성을 해체한다는 점에서는 데리다의 철학과 통하나 데리다는 해체는 하되 대안은 약한데 화쟁은 차이와 상생을 결합한 사유체계이다.
사랑이 깊고도 깊으면 얼굴마저 닮는다고 한다. 우리 주변에서 금실이 좋은 부부를 보면 부부라기보다 오누이 같다. 고등어 소리만 들어도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켰는데 상대방이 맛있다고 하니 그 비린내가 생선의 독특한 맛으로 느껴지는 것이 사랑이다. 풋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을 소유하려 하지만, 참사랑하는 이들은 내가 그리로 물처럼 흘러 그를 이루려 한다. 내 방식이 아니라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함께 바라보려는 것이 참사랑이다. 레비나스는 사랑하는 이들은 상대방의 얼굴에서 신의 모습을 본다 했다. 그러니 왜 얼굴인들 닮지 않겠는가? 그리 나를 소멸시켜 상대방을 이루려 하는 것이 참사랑이요 화쟁의 불일불이이다.
이처럼 인간과 자연이 씨와 열매처럼 서로를 닮으려 하고 자신을 소멸시켜 상대방을 살리려 한다면 인간은 함양의 상림처럼 자연의 원리를 거스르지 않는 문명을 건설할 수 있을 것이다. 인드라 생명공동체처럼 연기법이나 화쟁의 패러다임에 따른 생태공동체가 여기 저곳에 생기다 보면 이 지구 전체가 그런 공동체로 왜 변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동강댐을 놓느냐 아니냐로 시비할 때 미국 정부는 '미국의 강들'이라는 시민단체의 운동에 굴복하여 이미 지어진 댐 스무 개 정도를 파괴한 것을 아는가? 화쟁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화쟁식의 대안은 서서히 모색되고 있다. 그런 행동을 낳은 원리가 화쟁의 불일불이라고 가르쳐준다면 화쟁의 대안은 좀더 힘과 구체성을 갖지 않겠는가? 그렇다고 서양의 대안을 폐기하라는 것은 아니다. 고운 선생은 숲을 조성하기 전에 둑을 쌓았다. 화쟁의 패러다임은 서양과 동양의 대안 또한 하나로 아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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