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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강원용 목사, 그가 남긴 씁쓸한 여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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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1.-
서울 경동교회 명예목사인 강원용 목사가 어제 17일 숙환으로 세상과 이별했다. 서울대병원에 안치된 고인의 빈소에는 각계각층의 저명인사들의 조문이 줄을 잇고 있다. 정부에서는 사회통합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그에게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기로 결정했다. 개신교, 가톨릭, 불교 등 각 종교계와 정치권 등에서는 우리 사회의 큰 어른을 잃었다며 애도의 뜻을 표했다. 기독교와 일반 언론들 또한 고인의 생애를 추적하며 그의 사회·국가적 공헌을 앞 다투어 기사화했다.
동아일보(서울=연합뉴스)에 따르면, 故 강원용 목사는 1945년 해방 이후 김규식, 여운형 등과 함께 청년대표로 건국운동에 참여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김수환 추기경, 함석헌 등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으며, 1974년에는 악법철폐, 인권회복 등을 목표로 창립된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을 맡았다. 2000년 10월에는 남북간의 평화정책을 위해 범국민적, 초당적 협력을 위한 대화모임인 사답법인 ‘평화포럼’을 발족했다. 1961-1967년에는 방송윤리위원회 위원장을 맡았으며, 1988년에는 방송위원회 위원장으로 취임했다. 김대중 정부시절에는 대통령 직속 방송개혁 위원회 위원장을 지내기도 했다. 고인은 사회적으로 봤을 때 매우 ‘굵직한’ 인물이었다.
고인의 종교적인 약력은 다음과 같다. 1949년 경동교회에서의 목회활동을 시작으로, 세계기독교교회협의회 실행위원ㆍ중앙위원(1961년), 크리스챤 아카데미(現 대화문화아카데미) 원장(1963년), 한국종교인협회 회장(1965년),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 회장(1986년),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 회장(1986년), 한국기독교 100주년기념사업회 이사장(2000년) 등을 역임했다. 고인은 한 평생 ‘종교 간의 대화’를 위해 투신한 한국 에큐메니컬운동의 ‘대부’였다. 그의 죽음을 두고 종교계와 정치계가 애석한 마음을 금치 못하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故 강원용 목사가 평생에 주력했던 일은 ‘크리스챤 아카데미’였다. 현재 그것은 ‘대화문화아카데미’라는 이름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의 주목적이 종교 간의 ‘대화’를 이루는 것이라는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기독교장로회 출신인 그는 이 아카데미를 1963년에 세움으로써 개신교 교단 간의 벽을 허물고, 개신교, 천주교, 불교, 유교, 천도교, 원불교 등 6대 종교 간의 대화를 이끌어, 당시 분위기로 봐서는 가히 ‘혁명적인’ 일을 추진했다.
고인은 그의 저서 ‘빈들에서’(열린문화, 1993)에서 자신을 “한국이란 빈 들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소개했다. 이는 마치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인 침례인 요한을 연상케 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외침은 무엇을 위한 외침이었던가? 그것이 과연 성경적인 외침이었을까? 동아일보는 강 목사가 남성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진보적 여성보다도 여성 해방적 관점을 가졌으며, 크리스챤 아카데미에서 ‘젊은 여성을 위한 중간집단 교육’ 강연에 참가한 당당하고 멋진 페미니스트였다고 찬사를 보냈다. 고인의 생전 외침은 ‘사회통합,’ ‘종교 간의 대화,’ ‘여성 해방’이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일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일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께서 성경에 말씀하시는 바를 정면으로 대적하는 일로써, 신약시대의 교회의 사역과는 정반대되는 것들이다.
동아일보는 고인이 그의 저서 ‘빈들에서’의 맺는말을 통해 자신의 죽음에 대해 미리 이렇게 적었다고 밝혔다. “죽음이라는 불가지(不可知)의 세계를 맞이하는 순간까지 나는 지금까지 내가 그래왔듯 나날이 새롭게 살아갈 것이다. 나는 언제나 과거에 얽매인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사람이고자 했다. 나는 한국의 빈 들에서 악의 영과 싸우는 일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다는 몰라도 나는 한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다. 죽음은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다.”
고인은 성경의 다른 진리는 몰랐어도 “죽음이 결코 인생의 끝이 아니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진 것이고 그 뒤에 심판이 정해』져 있으니 말이다(히 9:27). 고인의 행적과 말을 되짚어보면, 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고 죄사함 받아 영원히 불타는 지옥의 형벌로부터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보이지 않는다. ‘기독교 밖에서도 구원이 있다’고 평소 가르쳐온 고인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고서 목사를 해온 것이고, 그리고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점 때문에 故 강원용 목사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하는 바이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참된 구원을 믿었더라면 우리의 마음이 이토록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남북이 통일되면 이북에 있는 부모님 산소에 한 번 가보고 싶다던 고인. 그가 이루지 못한 소원의 아쉬움보다는 그가 참 진리를 알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이 우리의 마음을 더욱 씁쓸하게 한다.
故 강원용 목사의 죽음과는 별도로, 고인이 생전에 비성경적인 사역을 해왔음을 증명하는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월간 <성경대로믿는사람들> 160호(2005년 7월)에 실린 기사인데, 고인의 비성경적인 사상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인 비평을 해놓았기에 독자들에게 소개하는 것이다.
강원용 목사의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 대한 비평
주영훈 / 천안성경침례교회 담임목사
『그대로 두라. 그들은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들이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고 하시더라』(마 15: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마지막으로 하신 말씀이다. 이 시대에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지도자의 자질과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씀하고 있다. 최근 기독교 서점가에서 신간으로 나온 책 중에는 강원용 목사가 신앙고백록이라고 쓴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있다.
필자는 일간신문에도 광고된 터라 그의 신앙관이 어느 정도인지 궁금해서 읽어 보았다. 이 책의 저자인 강원용 목사는 최근에(4월 8일) 한국복음주의협의회 주최로 강변교회에서 김창인, 조용기 목사와 함께 트리오로 회개 아닌 회개로 화제가 되었던 목사이다. 사실 그가 진정으로 회개했다면 <내가 믿는 그리스도>라는 책을 쓰지도, 출간하지도 말았어야 했다. 이 책에서 우러나오는 독소는 그야말로 성경적 믿음을 철저히 파괴하는 내용이다. 그는 자유주의 목사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것을 증명하듯 한국기독교 장로회 총회장을 지냈으며, 세계교회협의회 중앙위원과 실행위원, 세계종교인평화회의(WCRP) 공동의장을 역임했다. 한마디로 한국기독교계의 에큐메니칼운동의 원로 중의 원로이다.
그가 56년 목회를 회고하면서 쓴 신앙고백록인 <내가 믿는 그리스도>는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영적으로 눈먼 안내자인, 구원받지 못한 한 목사의 회고록이다.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책을 읽는 데는 상당한 인내력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책에는 성경적 구원도, 믿음도, 올바른 신약교회관도, 성경관도 그 어떤 것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짧은 지면을 통해 그가 가지고 있는 신학사상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알아보고자 한다.
성경에 대하여
“저는 여기서 몇 가지 문제점을 지적하려고 합니다. 우선 성서를 누구보다 사랑하고 신적 영감의 경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경전)이라고 생각하는 신자들이나 교역자들이 빠지는 오류입니다”(p.20). “단지 왜 축자영감설 곧 문자적인 성서 영감설이 진실이 아닌지를 깨닫자는 것입니다. 성서의 문자가 모두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라는 데는 결코 이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기독교 신자들이나 성직자들이, 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는 절대적인 진리 경전이라고 굳게 신앙한다면 그들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집단으로 전락하기 쉽다는 것입니다... 흔히 독단에 과오를 범하는 기독교 집단을 근본주의적 보수주의 신앙 집단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그 신념과 주장의 근거로서 디모데후서 3장 16,17절의 말씀을 근거로 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구절이지요. 이 구절을 확대 해석하여 신구약성서의 모든 하나에도 절대 오류가 없다는 매우 경직된 교리로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p.22). 「성서를 문자적으로 오류가 전혀 없는 절대 계시의 경전이라고 믿는 것이 신앙심 깊은 성도로 착각하게 만드는 잘못된 광신주의가 오늘날 한국 기독교의 발목을 잡고 있습니다”(p.24).
강원용 목사는 이 책에서 한 번도 “성경”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가 “성서”라고 말하는 그 자체가 믿음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 강목사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성서에서 “영감”이라는 말씀도 없으면서(딤후 3:16) 영감 (Inspiration)을 운운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바른 성경이 없었고 비진리 가운데에서 비정상적으로 팽창한 시기에서, 성경은 영감으로 기록되고(딤후 3:16,17), 섭리로 보존되었다는(시 12:6,7) 성경적 믿음을 제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성경대로 믿는 신앙을 잘못된 광신주의로 매도하고 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어야 하는 평범한 믿음 (the common faith)은,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이 시대를 통해 섭리적으로 보존되었다는 사실이며, 현재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은 최초의 성경과 같은 권위를 지닌 하나님의 말씀이며, 믿음과 실행에 있어서 “최종권위”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그가 말하는 경직된 교리도 아니요, 전혀 문제가 없는 논리적인 믿음인 것이다. 오히려 그가 지금 한국 기독교의 발목을 잡아 왔던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한 가지 성경만을 쓰셨다. 한 가지 성경만이 영감으로 기록되고 섭리로 보존되었다. 그 외 모든 변개된 성서들 (개역성경, 표준새번역, 개역개정판 등)은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이 아니다.
변개된 성서들은 그것을 스스로 증명하지 않는가?(딤후 3:16,17에서 “영감”이라는 단어 삭제, 시 12:6,7에서 “보존”이라는 단어 삭제)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어떤 그리스도인지는 몰라도, 필자가 믿는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을 영원토록 보존하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주어진 것으로 교리와 책망과 바로잡음과 의로 훈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게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철저히 구비되게 하려 함이니라』(딤후 3:16,17). 『주의 말씀들은 순수한 말씀들이라. 흙 도가니에서 단련되어 일곱 번 정화된 은 같도다. 오 주여, 주께서 이 말씀들을 간수하시리니, 주께서 이 세대로부터 영원토록 그것들을 보존하시리이다』(시12:6,7).
구원(복음)에 대하여
“또 되풀이하여 말씀드립니다.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은 내가 믿는 공로로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구원은 무조건, 그야말로 아무 조건 없이 주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햇빛 같고 비 같아서 선한 사람이나 악한 사람을 구별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런 사랑이 우리에게 내릴 때, 나의 깊은 의식 속에서 지금까지 나를 유혹해 온 탐욕이라는 것이 떠나고, 그 자리에 대신 사랑이 들어옴으로써 그 증거로 사랑의 반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의미이며, 그런 사람을 두고 믿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정말 탐욕을 버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받아들이며, 그 사랑에 응답하여 살고 있느냐 하는 물음들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이 문제 앞에서 저는 ‘그렇다’고 대답할 용기가 없습니다”(p.353).
그가 계속 되풀이하여 말하는 복음은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행 20:21)이 아니라, 탐욕을 버리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그는 구원받지 못한 목사라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 준다. 구원은 누구든지 아무나 받을 수 있다(요 3:16, 계 3:20). 그러나 반드시 자신의 믿음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롬 10:9,10). 자신의 죄를 시인하지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도 않았는데 조건 없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은 없다. 탐욕을 버리고 구원받은 사람은 신약 시대에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불교식 강론으로 50년 이상을 강단에서 설교했다고 하니 어떤 교인이 제대로 된 구원의 복음을 들었겠는가? 자유주의 신학의 온상인 한신대 교수 김경재 목사는 이것이 복음의 진수를 갈파한 원로 지혜자의 기독교 강화라고 이 “다른 복음”을 부추기고 있다(갈 1:9).
사도 바울이 전했던 복음의 진수는 바로 이것이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달하였나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죽으시고, 장사되셨다가 성경대로 셋째 날에 다시 살아나셔서』(고전15:3,4). 『네가 네 입으로 주 예수를 시인하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이는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고백하여 구원에 이르기 때문이라』(롬 10:9,10).
교회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 전통에서는 ‘내가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마 16:18)라는 성서 말씀을 강조하여 베드로의 교회수장직을 강조하고, 베드로의 사목적 교도권을 강조하는 성직질서를 옹호합니다. 그러나 성서학자들은 개인 위에 세운다는 말보다는 베드로의 그 고백 위에 세운다는 뜻으로 해석합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 운동을 했지 교회를 세우거나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를 설립한 분이 아니었습니다.(p.275).
이 한국의 대표 원로 목사는 베드로(헬, 페트로스)와 반석(헬, 페트라)도 구별을 못하고 있다. 교회의 기초는 로마카톨릭이 말하는 베드로가 아니라,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는 시종일관 로마카톨릭에 대한 비평은 일절 없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설교자라면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여 선포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철저히 왜곡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도대체 무슨 뜻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혁명가인가, 사상가인가?
“이러한 복음을 전하는 신앙 공동체는 지난 2,000년 동안 교회에서 계속해 온 전도와 이웃돕기 방법을 오늘도 계속 이어가되 새 상황에 맞게 개혁해야 합니다... 신앙 공동체의 또 다른 과제는 이 땅에 화해와 평화를 실현하는 일입니다”(pp.336,337).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 어디서든지 우리는 죄의 현상을 쉽게 보고 있습니다. 종교와 종교 간은 고사하고 교회와 교회, 심지어 정치적, 경제적, 사상적 모든 분야에서 우리는 대립의 관계를 보고 있습니다. 이것을 화해시키는 일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큰 일입니다”(p.338).
강원용 목사의 <내가 믿는 그리스도>에서는 ‘하나님의 교회’라는 말은 없다. 그가 말하는 교회는 ‘신앙공동체’이다. 성경적인 용어는 찾아볼 수 없다. 심지어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기적들을 ‘설화’라고 하고 있다. 그가 말하는 교회의 사명은 사회복음이다. 정치와 경제에도 개입해서 화해를 시키는 것이라고 한다.
그는 지난 1월 1일 CBS TV ‘신년 특집 대담 코너’에 출현해 조용기 목사와의 대화에서 요한복음 3:16을 예로 들어 굶어죽어 가는 사람들을 먹이는 것이 바로 예수님을 먹이는 것이며, 잘못된 세상을 고치는 일이 예수님을 위한 일이라고 역설했었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완전히 망치는 일을 사역이라고 하고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 모르고, 교회도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유주의 원로 목사일 뿐이다.
교회는 정치와 사회 참여 등으로부터 철저히 분리되어야 한다. 신약 시대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죄인을 복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 이겨와야 하며, 성도를 바른 말씀으로 양육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고 헌신케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네가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가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전이니라』(딤전 3:15). 『네가 이런 것들을 형제들에게 기억하게 한다면 너는 네가 따르던 믿음의 말씀들과 선한 교리의 말씀들로 양육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일꾼이 되리라』(딤전 4:6).
에큐메니칼 운동(Ecumenical movement)에 대하여
“제 기억으로는 1970년 1월 첫 주일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 무렵엔 세계교회운동은 에큐메니칼 운동, 즉 교회연합과 협동운동이 매우 강하게 일어났으며, 가톨릭 교회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65) 이후 이러한 정신을 널리 선양하던 시기였습니다. 그때 명동성당 가톨릭 교회에서는 ‘평화를 위한 미사’를 올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는데, 저는 ‘강론’ 순서를 맡아 달라는 초청을 받았습니다. 개신교 목사가 명동성당에서 강론하는 일은 명동성당이 설립된 이후,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 아닌가 하여 감사하게 생각하고, 저는 ‘기독교 교회는 하나’라는 일치정신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하여 ‘강론’을 하게 되었습니다”(p.193).
그는 지금 에큐메니칼 운동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는 평화를 위해서라면 어디든지 달려간다. 심지어 로마카톨릭이라도 문제 없다. 그의 전력(WCC 중앙위원 및 실행위원)에서 보듯 그는 교회통합운동(Ecumenical movement)의 선봉으로 교회들을 56년간 주도한 것이다. 그의 슬로건은 오직 교회연합과 평화이다. 그가 진정 구원받은 설교자라면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였을 것이다(시 1:1).
“현재 살아 있는 불교의 ‘달라이 라마’는 붓다나 예수님 같이 종교 간 평화를 위해 노력하고 민족 간의 분쟁을 화해시키는 일에서 제일 선두에 서신 분입니다. 그는 불교도로서 예수님을 보살의 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현재 프랑스 플럼(plum)촌에 있는 유명한 베트남 불교의 스님인 틱낫한은 <살아 계신 붓다와 살아 계신 그리스도>라는 책을 썼고 이 책의 한국말 번역에서 저는 그 서문을 썼습니다”(p.262). “저는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말하듯이 ‘교회는 세상을 위해 있는 존재’라는 생각에 동의합니다”(p.324).
강목사는 지금 그가 믿는 그리스도를 달라이 라마나 붓다 같은 죄인들의 줄에 세워놓고 있다. 이것이 자유주의 신학의 정수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제 종교 간 평화를 위해 노력하였는가? 주님께서는 마귀의 일을 멸하시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셨다(요일 3:8, 요 12:47). 결국 그가 믿는 그리스도는 명백히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진리를 치워 버리는 자들로부터 분리(성별)하라고 하셨다. 학식과 인격이 높아 세상 사람의 모범이 되는 일이나 사람을 사표(師表)라고 하며, 반대로 따르거나 되풀이해서는 안 되는 나쁜 본보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라고 한다. 세상 사람들과 기독교계에서는 그가 사표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성경대로 믿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는 분명 반면교사이다. 그가 쓴 <내가 믿는 그리스도>가 또다시 뭇 사람들에게 성경적 진리에 반하여 믿음을 파괴하는 독소를 퍼뜨리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자신의 잘못된 믿음과 신앙을 진정으로 참회하고, 거듭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