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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v 19, 2013. John 16:8. “When He has come.” “주님이 와 계실 때“
8. And when he is come, he will reprove the world of sin, and of righteousness, and of judgment;
8. 그분께서 오셔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꾸짖으시라.
(요한복음 16:8)
(3441) (우리가 잘못했기에 마음이 괴로웠던 기억을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Very few of us know anything about conviction of sin. We know the experience of being disturbed because we have done wrong things. But conviction of sin by the Holy Spirit blots out every relationship on earth and makes us aware of only one—“Against You, You only, have I sinned...”(Psalm 51:4). When a person is convicted of sin in this way, he knows with every bit of his conscience that God would not dare to forgive him. If God did forgive him, then this person would have a stronger sense of justice than God.
(3442) (하나님의 크신 은혜는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도록 가능하게 하고 신실되게 하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뿐입니다.) God does forgive, but it cost the breaking of His heart with grief in the death of Christ to enable Him to do so. The great miracle of the grace of God is that He forgives sin, and it is the death of Jesus Christ alone that enables the divine nature to forgive and to remain true to itself in doing so,
(3443) (하나님의 양심을 만족케하면서 우리의 죄를 씻게하는 것은 갈보리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보혈의 피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갈보리 십자가에서만 말하여 질 수 있습니다.) It is shallow nonsense to say that God forgives us because He is love. Once we have been convicted of sin, we will never say this again. The love of God means Calvary—nothing less! The love of God is spelled out on the Cross and nowhere else. The only basis for which God can forgive me is the Cross of Christ. It is there that His conscience is satisfied.
(3444) (죄 용서라는 것이 단순히 내가 지옥에서 구원받고 천국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죄용서란 나의 안에 주님의 본성이 들어와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서 하나님의 아신 바 되는 관계를 만드시고, 죄 많던 내가 새사람이 되어서, 주님의 거룩함에 이르는 것을 말합니다.) Forgiveness doesn’t merely mean that I am saved from hell and have been made ready for heaven (no one would accept forgiveness on the level). Forgiveness means that I am forgiven into a newly created relationship which identifies me with God in Christ. The miracle of redemption is that God turns me, the unholy one, into the standard of Himself, the Holy One. He does this by putting into me a new nature, the nature of Jesus Christ.
(3445-오늘의 idiom) (상어에게 집어 던지다) throw/toss someone to the sharks = to put someone in a position where the person will be blamed or attacked
⁂ Living in His neighborhood means there are life-transforming behavior patterns that should clearly reflect our spiritual location. This is why Paul reminds us that God’s kingdom is not about arguing and bickering over earthly stuff but abo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Rom. 14:17).
When we live like this, our lives please God and bless others (v.18).
주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곧 영적인 주소에 걸맞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우리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비방하는 데 있지 않고 “의와 평강과 희락” (롬 14:17)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게 됩니다 (18절).
⁂ Beware: The devil may add a few grains of truth to what is false.
경계하라. 악마는 거짓된 것들에
진실의 낟알을 몇 개 섞어 놓기도 한다.
⁂ Courage is not having strength to go on—it is going on when you don’t have the strength.
용기란 전진할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도 전진하는 것이다.
⁂ Masters, give your bondservants what is just and fair,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Colossians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로새서 4:1
⁂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Romans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로마서 3:23
⁂ One of the fads of 1970s America was the motorcycle jump. This trend reached its high (and low) point on September 8, 1974. Thousands of spectators gathered around the Snake River Canyon in Idaho to see if Evel Knievel could jump across the chasm in a specially designed “sky cycle.”
오토바이 점프는 1970년대 미국에서 유행한 것들 중 하나였습니다. 이 유행은 1974년 9월 8일에 절정에 달했고 동시에 바닥으로 추락했습니다. 그날 이블 크니블이 특수 제작된 “하늘을 나는 오토바이”를 타고 아이다호 주에 있는 스네이크강 계곡 사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구경하려고 수천 명의 구경꾼들이 계곡 주위로 몰려들었습니다.
⁂ In the end, however, it was unsuccessful. Knievel made it only part of the way across the gulf before his parachute deployed and he dropped to the canyon floor below. Some spectators asked, “How far across the canyon did he get?” But that wasn’t the point. He didn’t make it all the way across, so he fell short of his goal.
그러나 그 시도는 실패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크니블이 계곡 사이를 조금 날아갔지만 도중에 낙하산이 펴지면서 그만 계곡 밑으로 떨어졌습니다. 어떤 구경꾼들은 “계곡 사이의 어느 정도까지 갔나요?”라고 물었습니다. 하지만 요점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계곡을 완전히 건너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그의 목표에 이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 This scene is a good illustration of sin. The Bible talks about sin in Romans 3:23, where Paul declared, “All have sinned and fall short of the glory of God.” No one is capable of bridging the gap between God and ourselves by our own efforts, but the Savior came to do just that on our behalf. Christ perfectly fulfilled God’s standards, then gave His life on the cross to pay for our failure and wrongdoing. Where we could only fall short, Christ’s work, offered in love, accomplished all that was needed.
이 사건은 죄가 어떤 것인지를 아주 잘 보여줍니다. 성경은 로마서 3장 23절에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라는 바울의 선언을 통해 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는 어느 누구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간격에 다리를 놓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구주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바로 그 일을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실패와 악한 짓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셨습니다. 우리가 결코 이루지 못할 것들을 그리스도께서 사랑으로 모두 이루신 것입니다.
⁂ Our response is to trust Him and receive this matchless gift of salvation.
우리가 할 일은 그리스도를 믿으며,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이 구원의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 There is no other name on earth
By whom salvation’s given
Save Jesus Christ the Lamb of God,
God’s precious gift from heaven.
하늘로부터 내려온 하나님의 귀한 선물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이 땅의 그 어떤 이름으로도
구원을 얻을 수 없네
⁂ The cross of Christ bridges the gap
we could never cross on our own.
우리 힘으로는 결코 건널 수 없는 간격을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어준다.
⁂ Jesus said to her,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John 8: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8:11
⁂ The flashing lights of the police car drew my attention to a motorist who had been pulled over for a traffic violation. As the officer, ticket book in hand, walked back to his car, I could clearly see the embarrassed driver sitting helplessly behind the wheel of her car. 번쩍거리는 경찰차의 경광등을 보면서 나의 시선은 교통위반으로 도로 옆길에 정차하고 있던 운전자에게로 향했습니다. 경찰이 교통위반 딱지를 들고 자기 차로 돌아가는 동안 당황스런 모습으로 꼼짝없이 운전석에 앉아있는 여성의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습니다.
⁂ With her hands, she attempted to block her face from the view of passersby—hoping to hide her identity. Her actions were a reminder to me of how embarrassing it can be when we are exposed by our choices and their consequences.
그녀는 자신을 숨기고 싶은지 지나가는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얼굴을 가리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행동을 보면서 나는 우리가 선택하여 생긴 결과가 드러날 때에도 얼마나 당황스러울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When a guilty woman was brought before Jesus and her immorality was exposed, the crowd did more than just watch. They called for her condemnation, but Jesus showed mercy. The only One with the right to judge sin responded to her failure with compassion. After dispatching her accusers, “Jesus said to her, ‘Neither do I condemn you; go and sin no more’ ” (John 8:11). His compassion reminds us of His forgiving grace, and His command to her points to His great desire that we live in the joy of that grace. Both elements show the depth of Christ’s concern for us when we stumble and fall.
죄를 범한 한 여인이 예수님 앞으로 끌려나와 그녀의 음행이 드러나자 군중들은 그냥 보고만 있지 않고 그 여자의 처벌을 원했습니다. 그러나 죄를 심판할 수 있는 자격을 가진 유일한 분이신 예수님은 자비를 베풀어 여인의 잘못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대하셨습니다. 그녀를 고발한 자들을 돌려보낸 후, 예수님은 그녀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한복음 8:11)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긍휼은 우리에게 주님의 용서의 은혜를 깨닫게 해주고, 그 여인에게 내리신 명령은 우리가 그 은혜의 기쁨 속에 살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 두 가지는 우리가 잘못하고 실족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계신가를 잘 보여줍니다.
⁂ Even in our most embarrassing moments of failure, we can cry out to Him and find that His grace is truly amazing.
가장 당황스러운 실패의 순간에도 우리는 주님께 큰 소리로 아뢸 수 있고, 그럼으로써 주님의 은혜가 참으로 놀랍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 Amazing grace—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a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 Jesus alone can supply the grace we need
for each trial we face.
시련을 겪을 때마다 필요한 은혜를 공급해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다.
⁂ A: Aren’t you supposed to be somewhere now?B: I had a dinner engagement, but it got pushed back.A: That’s right. You said you had a hot date.B: 내가 하지도 않은 말 지어내지 마. It’s just a “friends” thing.
⁂ A: 너 지금 어디 가있어야 하는 거 아니니?B: 저녁 약속이 있었는데 연기됐어.A: 맞아. 너 데이트 있다고 했잖아.B: Don’t put words in my mouth. 그냥 친구로 만나는 거라고.⁂ [Additional expressions]*Aren’t you supposed to – Don’t you have to / Weren’t you scheduled to / Didn’t you arrange to*be somewhere now – be at some appointment at this time / go some place to meet some one*I had a dinner engagement – I did have an appointment for dinner / A dinner engagement was scheduled*it got pushed back – it was delayed / it got postponed / we decided to put it off*That’s right. – Yes, I remember. / I’ve got it now. / It’s coming back to me.*You said you had a hot date. – You told me that you were going to go on a really exciting date.*Don’t put words in my mouth. – I didn’t say that. / That’s not what I said. / You’re making that up.*It’s just a “friends” thing. – My appointment is just with a friend. / We’re just friends.
⁂ dough는 피자의 기본이 되는 밀가루 반죽인 도우를 말합니다. 따라서 'make dough'라고 하면 '밀가루 반죽을 만들다'라는 의미입니다. 예를 들어, “We make dough fresh every day. (우리는 매일 신선한 도우를 만듭니다.)” 또는 “In college, I made dough from scratch a few times. (대학 다닐 때 몇 번 도우를 처음부터 만들어 봤다.)”와 같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문맥에 따라서는 'dough'가 'money'의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를 들어, “He made some dough from his investment. (그는 투자해서 돈을 좀 벌었다.)”와 같이 사용합니다.
⁂ '홀로서기'는 ‘독립하다’는 의미이므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인 'become independent'를 사용해 표현할 수 있습니다. “Young people should become independent from their parents. (젊은이들은 부모에게서 독립해야 한다.)”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stand on your own (two) feet'을 사용해, “It's time that kid learned to stand on his own two feet. (그 아이가 스스로 홀로서기를 할 시기가 되었다.)”와 같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했을 때에는 'achieve financial independence'를 사용해, “The organization helps individuals and businesses achieve financial independence. (그 조직은 개인과 기업들이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다.)”와 같이 사용합니다.
⁂ (구원의 역사는 당신의 실제 생활 속에서 많은 것들이 드라마처럼 바뀐 것을 의미합니다. 당신은 이제 더 이상 같은 방법으로 사물을 보지 않습니다. 당신의 욕망은 새롭고 예전에 당신을 유혹했던 것들은 이제 더 이상 당신에게 힘을 쓰지 못합니다.) What understanding do you have of the salvation of your soul? The work of salvation means that in your real life things are dramatically changed. You no longer look at things in the same way. Your desires are new and the old things have lost their power to attract you.
⁂ (당신에게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 있는지를 알기위해서는 당신이 진정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주님이 바꾸셨느냐하는 것입니다. 당신이 아직도 예전 것들을 갈망하면서도 위로부터 거듭났다고 말하면 당신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영이 당신의 실제 삶과 생각을 확실하게 바꾸어 놓습니다.) One of the tests for determining if the work of salvation in your life is genuine is—has god changed the things that really matter to you? If you still yearn for the old things, it is absurd to talk about being born from above—you are deceiving yourself. If your are born again, the Spirit of God makes the change very evident in your real life and thought.
⁂ (어떤 위기가 닥쳐올 때 당신 안에 있는 엄청난 변화 때문에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놀라운 사람이 됩니다. 당신이 그러한 일을 했다고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당신 안에 있는 완전하고 놀라운 변화가 바로 당신이 구원받은 증거입니다.) And when a crisis comes, you are the most amazed person on earth at the wonderful difference there is in you. There is no possibility of imagining that you did it. It is this complete and amazing change that is the very evidence that you are saved.
⁂ 내가 받은 구원과 성결은 어떤 변화를 만들어 냈나요? 예를 들면, 당신은 고린도전서 13장과 같은 말씀의 빛에 행하고 있습니까 또는 꿈틀거리며 피하고 있습니까? 주님의 생명이 의식적인 수준이 아닌 무의식의 수준에서 나의 속에서 역사하시므로 하나님께서 나를 책망하실 것이 없습니다.) What difference has my salvation and sanctification made? For instance, can I stand in the light of 1 Corinthians 13, or do I squirm and evade the issue? True salvation, worked out in me by the Holy spirit, frees me completely. And as long as I “walk in the light as He is in the light” (1 John 1:7), God sees nothing to rebuke because His life is working itself into every detailed part of my being, not on the conscious level, but even deeper than my consciousness.
⁂ (오늘의 idiom) (그의 이름은 군대라 ) their name is legion = a vast and almost uncountable number of people.
ᜊ It’s important to remember that God has placed us into the “kingdom of the Son” (Col. 1:13). Living in His neighborhood means there are life-
transforming behavior patterns that should clearly reflect our spiritual location. This is why Paul reminds us that God’s kingdom is not about arguing and bickering over earthly stuff but about “righteousness and peace and joy” (Rom. 14:17).
ᜊ Living by God’s right standards, living to be a peacemaker, and living to be a source of joy in our relationships are what kingdom life is all about. And, when we live like this, our lives please God and bless others (v.18).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그의 아들의 나라”(골 1:13)로 옮기셨음을 기억하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주님의 나라에서 산다는 것은 곧 영적인 주소에 걸맞은 변화된 삶의 모습을 우리가 분명히 보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적인 일을 가지고 서로 다투고 비방하는 데 있지 않고 “의와 평강과 희락” (롬 14:17)에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올바른 기준에 따라 살며, 평화를 도모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도 기쁨의 근원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에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다른 사람들을 축복하며 살게 됩니다 (18절).
ᜊ Masters, give your bondservants what is just and fair,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Colossians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로새서 4:1
ᜊ Hold such men in esteem; because for the work of Christ he came close to death.
—Philippians 2:29-30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빌립보서 2:29-30
ᜊ During basic training, Desmond Doss irritated his drill instructor and fellow soldiers. A pacifist by conviction, he refused to carry a weapon into battle, and this made his peers doubt his courage. Trained as a medic, the young Christian had no qualms about facing combat. But his goal was to save lives.
데스몬드 도스는 기본 군사훈련을 받는동안 훈련교관과 동료들을 화나게 만들었습니다. 평화주의 신봉자인 그는 전쟁터에 무기를 휴대하기를 거부했고, 이 때문에 동료들은 그의 용기를 의심했습니다. 위생병으로 훈련을 받은 이 젊은 그리스도인은 아무 거리낌 없이 눈앞의 전투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목표는 생명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ᜊ Doubts about Doss would change, however, when his military unit faced combat. During the World War II Battle of Okinawa, he ducked under machine gun fire to pull the wounded to safety. He prayed, “Lord, give me the strength to save just one more wounded soldier.” Eventually he lowered more than 70 injured men down a hill for further medical attention. For his efforts, Desmond Doss was awarded the Medal of Honor—the highest honor his country could bestow.
도스에 대한 의구심은 그의 부대가 전투에 참여했을 때 풀렸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오키나와 전투에서 그는 기관총 세례를 피해가며 부상병들을 안전하게 끌어냈습니다. 그는 “주님, 부상병을 한 사람 만이라도 더 구하도록 힘을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결국 그는 70명 이상의 부상병을 언덕 아래로 끌어내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용기있는 행동으로 인해 데스몬드 도스는 국가가 수여하는 최고의 영예인 명예훈장을 받았습니다.
ᜊ Scripture tells of another Christian who took great personal risks to help others. Of Epaphroditus, Paul wrote, “Hold such men in esteem; because for the work of Christ he came close to death, not regarding his life” (Phil. 2:29-30).
성경에는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큰 위험을 감수한 또 다른 그리스도인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였다”(빌립보서 2:29-30).
ᜊ Around the world today, many believers risk their lives for the cause of Christ. Let’s pray that our God will protect them as they serve Him under threatening circumstances.
오늘날 전 세계에서 많은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위해서 목숨을 걸고 일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위협적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동안 하나님이 그들을 보호해주시도록 기도합시다.
ᜊ O Lord, listen to our cry for mercy; in Your faithfulness come to the relief of those who are in danger because of their faith. For Your name’s sake, preserve their lives; in Your righteousness, bring them out of trouble.
오 주님, 자비를 구하는 저희의 간구를 들어주소서.
당신의 신실함으로 믿음 때문에 위험에 처한 이들이
구조 받게 하소서. 당신의 이름으로 그들의
생명을 보전하소서. 당신의 의로움으로
그들을 어려움에서 건져주소서.
ᜊ Courage is not having strength to go on—it is going on when you don’t have the strength.
용기란 전진할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
힘이 없어도 전진하는 것이다.
ᜊ We make it our aim . . . to be well
pleasing to [God]. —2 Corinthians 5:9
우리는......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고린도후서 5:9
ᜊ In a children’s ministry in my church, we hand out cards to the kids when we notice their good behavior. They collect the cards and receive prizes for the good choices they’ve made. We are trying to reinforce good behavior rather than focusing on bad behavior. 내가 출석하는 교회의 주일학교에서는 어린이들이 선행을 한 것을 알게 되면 카드를 나눠줍니다. 아이들은 그 카드를 모아 나중에 그들의 착한 행동에 대해 상품을 받습니다. 우리는 나쁜 행동에 초점을 맞추기 보다는 선행을 강화시키려고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ᜊ When one leader handed a card to 11-year-old Tyree, he responded, “No, thanks. I don’t need one; I want to behave well, and I don’t need a reward for that.” For him, doing the right thing was its own reward. He definitely has good values ingrained in him, and he wants to live them out—prize or not.
주일학교의 한 리더가 11살 난 타이리에게 카드를 주자, 그 아이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아니에요, 저는 필요 없어요. 저는 착한 일을 하고 싶은 것이지 그에 대한 보상은 필요 없어요.” 그에게 있어서 선행은 그 자체가 보상이었습니다. 그에게는 분명히 좋은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고, 보상에 관계없이 그렇게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ᜊ As believers in Jesus, we will receive rewards one day. Second Corinthians 5:10 says that everyone will “receive the things done in the body, according to what he has done, whether good or bad.” But to get a reward should not be our motivation for right living. Neither is it to earn salvation. Living out of love for God and pleasing Him should be our heart’s desire.
예수님을 믿는 자로서 우리는 훗날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장 10절은 우리가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보상을 받는 것이 올바른 삶을 살려는 동기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해서 구원을 얻으려 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살고 그분을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우리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ᜊ When we love God, we make it our aim to please Him who first loved us (1 John 4:19) and to serve Him with pure motives (Prov. 16:2; 1 Cor. 4:5). The best reward will be to be with Him!
나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현실입니까!
ᜊ In all I think and say and do,
I long, O God, to honor You;
But may my highest motive be
To love the Christ who died for me.
오 하나님, 생각하고 말하고 행하는 모든 것을
통해 당신을 높여드리기를 갈망합니다
그러나 나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
그것의 가장 큰 동기가 되게 하소서
ᜊ Our desire to please God is our
highest motive for obeying Him.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우리의 갈망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가장 큰 동기이다.
ᜊ (당신이 주님에 의해서 사용되게 될 때 개인적인 까닭이 전혀 아닌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은 당신이 어떤 어려운 일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을 주님에게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기회들을 이미 많이 주셨지만, 당신은 그러한 방법들이 시간 낭비인 것으로 생각하고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고개를 돌렸던 것입니다.) If you are going to be used by God, He will take you through a number of experiences that are not meant for you personally at all. They are designed to make you useful in His hands, and to enable you to understand what takes place in the lives of others. Because of this process, you will never be surprised by what comes your way. You say, “Oh, I can’t deal with that person.” Why can’t you? God gave you sufficient opportunities to learn from Him about that problem; but you turned away, not heeding the lesson, because it seemed foolish to spend your time that way.
ᜊ (주님께서 일상생활 속의 우리에게서 무엇을 추구하고 계시는가를 알려면 주님과 좋은 관계를 맺고 있어야 합니다.) The sufferings of Christ were not those of ordinary people. He suffered “according to the will of God” (1 Peter 4:19), having a different point of view of suffering from ours. It is only through our relationship with Jesus Christ that we can understand what God is after in His dealings with us. When it comes to sufferings, it is part of our Christian culture to want to know God’s purpose beforehand.
ᜊ (교회의 역사를 보면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겪으셨던 고난을 피하면서 예수님을 말씀과 명령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방법은 언제나 고난을 통해서, 지름길이 아닌 먼 길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In the 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the tendency has been to avoid being identified with the sufferings of Jesus Christ. People have sought to carry out God’s orders through a shortcut of their own. God’s way is always the way of suffering—the way of the “long road home.”
ᜊ (우리는 주님의 고난에 참예하는 자입니까? 우리는 주님이 우리 자신들의 인간적인 결정을 무너뜨리고 초자연적으로 바꾸시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이것은 우리가 갈 바를 모르고 주님을 따라가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 결과를 아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교만하게 만듭니다.) Are we partakers of Christ’s sufferings? Are we prepared for God to stamp out our personal ambitions? Are we prepared for God to destroy our individual decisions by supernaturally transforming them? It will mean not knowing why God is taking us that way, because knowing would make us spiritually proud. We never realize at the time what God is putting us through—we go through it more or less without understanding. Then suddenly we come to a place of enlightenment, and realize—“God has strengthened me and I didn’t even know it!”
ᜊ (오늘의 idiom) (말은 값 싸다) talk is cheap = it’s easy for someone to boast or make promises when he doesn’t have to prove his words or put them into practice
ጬ Masters, give your bondservants what is just and fair,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Colossians 4: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골로새서 4:1
ጬ Working conditions in England during the 19th century were abysmal. Men, women, and children labored in dangerous factories during the day and went home to dirty tenement slums at night. Many of the factory owners cared little for the well-being of their employees.
19세기 영국의 노동환경은 최악이었습니다. 남자, 여자, 그리고 어린아이들이 낮에는 위험한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더러운 빈민 공동주택으로 돌아갔습니다. 많은 공장 주인들은 자신들의 근로자들의 복지에 대해 거의 관심이 없었습니다.
ጬ But during that time, the owners of the Cadbury chocolate company were different. Quakers by conviction and business entrepreneurs by giftedness, they focused on improving the working conditions of their 200 workers. The Cadburys built a state-of-the-art factory with heated dressing rooms, a kitchen, and recreational areas. And to care for the employees’ spiritual needs, the workday started with Bible study.
그러나 같은 시대의 캐드베리 초콜릿 회사의 주인들은 달랐습니다. 신앙적으로는 퀘이커교도들이며 기업가로서 뛰어났던 그들은 자신들의 공장에서 일하는 200여명의 근로자들의 작업환경을 개선하는데 역점을 두었습니다. 회사 주인 캐드베리가의 사람들은 따뜻한 탈의실, 부엌, 그리고 오락실 등을 갖춘 최첨단 공장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직원들의 영적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하루 일과를 성경공부로 시작했습니다.
ጬ Colossians 4:1 tells us: “Masters, give your bondservants what is just and fair, knowing that you also have a Master in heaven.” Certainly the Cadburys sought to give their employees what was just and fair. But their heavenly orientation motivated them to go a step further to meet physical and spiritual needs.
골로새서 4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캐드베리가 사람들은 분명히 직원들에게 의와 공평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심은 그들로 하여금 한걸음 더 나아가 직원들의 물질적, 영적 필요까지도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ጬ Though we may not own a company, we do have regular contact with a variety of people. As believers, it is important to be ethical in our dealings. We can also, with God’s enablement, care about others’ well-being through prayer, encouragement, and the meeting of physical needs (Gal. 6:10).
우리가 비록 기업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을지라도, 다양한 사람들과 규칙적으로 접촉하며 살아갑니다. 신자로서 우리가 사람들을 도덕적으로 대하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더 나아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도와 격려, 물질적인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의 복지를 돌아볼 수도 있습니다(갈라디아서 6:10).
ጬ Lord, thank You for loving us and meeting our
needs. Often You bring people into our lives
who need Your love and care. Give us wisdom
to creatively reach out a helping hand that
we might share Your kindness.
주님, 저희를 사랑하시고 저희의 필요를 채워주심을
감사합니다. 주님은 자주 주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필요한 사람들을 우리의 삶속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어떻게 그들을 도와 주님의 선하심을 함께 나눌 수
있을지 창조적인 지혜를 허락해주옵소서.
ጬ God blesses us so that we can bless others.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축복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신다.
ጬ 옷과 관련하여 영어로 알고 있는 단어 중 상당수가 콩글리시이다. 그 중 대표적인 몇 가지만 살펴보자.
팬티(속어로 빤쓰)는 underpants 또는 drawers라고 한다. 사각팬티는 boxer shorts라고 해야 한다.
[예문 1] He was caught at the airport with $100,000 in his underpants. 그는 팬티 속에 10만 달러를 넣어 둔 혐의로 공항에서 체포되었다.
[예문 2] She came into the room and picked up the underpants and vest that the child had peeled off. 그녀는 방에 들어와 아이가 벗어 놓은 속옷 바지와 상의를 집어 들었다.
흔히 운동복을 추리닝이라 많이 부른다. 이것은 연습이라는 training을 일본식으로 발음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것에 해당하는 정확한 단어는 sweat suit 또는 workout suit이라고 해야 한다.
[예문] He bought his wife a Barney sweatsuit. 그는 아내에게 바니가 그려진 운동복을 사 주었다.
와이셔츠 역시 Y자로 생긴 셔츠라고 해서 이렇게 부르지만, 정확한 표현은 dress shirt가 맞다.
[예문 1] When he shops for a dress shirt, he doesn’t look at price tags. 그는 와이셔츠를 살 때 가격표를 보지 않는다.
[예문 2] Can you recommend some dress shirts that will go well with this suit? 이 양복에 어울리는 와이셔츠를 추천해 주실래요?
러닝셔츠(속어로 난닝구)라 불리는 속셔츠는 undershirt라고 해야 한다. 여성들이 주로 입는 배꼽이 드러나는 러닝셔츠는 tank top이 정확한 표현이다.
[예문 1] I was eight years old when I wore my first little undershirt. 나는 8살 때 처음으로 작은 속셔츠를 입었다.
[예문 2] Finish the look with a fitted tank top and lace-up sandals. 딱 붙는 탱크톱이나 끈으로 묶는 형태의 샌들로 마무리하자.
겨울이 되면 잘 입는 롱코트는 overcoat가 정확한 표현이며, 반코트는 short coat 또는 jacket이 맞는 표현이다.
[예문 1] She was wearing a black overcoat. 그녀는 검은색 롱코트를 입고 있었다.
[예문 2] She doesn’t wear an overcoat even during the coldest winter. 그녀는 아무리 추운 겨울에도 외투를 입지 않는다.
ጬ 외국 기업에서는 'pink slip'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핑크색 종이의 통보서인데 해당 직원이 자리에 없는 동안 책상 위에 올려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것을 받은 직원은 상자에 개인 물품을 담고 직장을 떠나야 하는데, 왜냐하면 'pink slip'은 바로 '해고 통지서'이기 때문입니다. 질문한 “My friend got a pink slip.”은 “내 친구가 해고됐어.”입니다. 친구가 해고됐다고 이야기하는데 'love letter' 받았느냐고 되물으니 그 외국인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예문 1] I received my pink slip last week and am now looking for a new job. (지난주에 해고되어 버려서, 지금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고 있다.)[예문 2] The pink slip is the official notice that you have been fired from your job. (핑크 슬립은 직장에서 해고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공식 알림장이다.)
ጬ I have uttered what I did not understand,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did not know. —Job 42:3
나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욥기 42:3
ጬ As our plane began its descent, the flight attendant read the long list of arrival information as if she were reading it for the thousandth time that day—no emotion or interest as she droned on about our impending arrival. Then, with the same tired, disinterested voice, she finished by saying, “Have a wonderful day.” The dryness of her tone contrasted with her words. She said “wonderful” but in a manner completely absent of any sense of wonder. 우리가 탄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면서, 승무원은 착륙하면 알아야 할 사항들을 마치 그날 하루에 천 번이나 읽은 것처럼 읽어 내려가면서, 아무런 감정이나 관심도 없이 우리의 임박한 착륙에 대해 단조롭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피곤하고 무관심한 음성으로 “아주 멋진 날을 보내세요.”라고 하면서 말을 마쳤습니다. 그 승무원의 무미건조한 말투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주 멋진”이라고 말했지만 멋진 느낌은 정말 조금도 없었습니다.
ጬ Sometimes I fear that we approach our relationship with God in the same way: Routine. Bored. Apathetic. Disinterested. Through Christ, we have the privilege of being adopted into the family of the living God, yet often there seems to be little of the sense of wonder that should accompany that remarkable reality.
나는 가끔 우리도 그와 같이 형식적이고 지루하고 무관심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특권을 갖고 있지만, 그 놀라운 사실에 수반되어야 할 감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ጬ Job questioned God about his suffering, but when challenged by Him, Job was humbled by the wonder of His Creator and His creation. Job replied, “You asked, ‘Who is this who hides counsel without knowledge?’ Therefore I have uttered what I did not understand,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did not know” (Job 42:3).
욥은 그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질문으로 그를 깨우치시자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물의 경이로움에 스스로 낮아져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기 42:3).
ጬ I long for the wonder of God to take hold of my heart. Adopted by God—what a wonderful reality!
나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현실입니까!
ጬ How marvelous! How wonderful!
And my song shall ever be:
How marvelous! How wonderful
Is my Savior’s love for me!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놀라운가!
내 영원히 그것을 노래하리라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놀라운가!
나를 향한 구주의 사랑!
ጬ Nothing can fill our hearts more than
the wonder of our God and His love.
경이로운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보다도 더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다.
ጬ (우리들의 죄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없어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인간을 주님이 동정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고 인간과 동일시된 것이었습니다.) The modern view of the death of Jesus is that He died for our sins out of sympathy for us.Yet the New Testament view is that He took our sin on Himself not because of sympathy, but because of His identification with us.He was “made ... to be sin...” Our sins are removed because of the death of Jesus, and the only explanation for His death is His obedience to His Father, not His sympathy for us.
ጬ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해서 우리들의 죄가 없어진 것이 아니고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인한 것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 하나님을 보여주고 그의 사랑하시는 은혜를 보여주러 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죽으심과 보혈을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사하시러 오신 것입니다.) We are acceptable to God not because we have obeyed, not because we have promised to give up things, but because of the death of Christ, and for no other reason.We say that Jesus Christ came to reveal the fatherhood and the lovingkindness of God, but the New Testament says that He came to take “away the sin of the world!”(see John 15:22-24).
ጬ (주님께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을 나타내신 것은 주님의 제자들—그를 구세주라고 받아들인 사람들에게만 이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거치는 돌이 되셨습니다.) And the revealing of the fatherhood of God is only to those to whom Jesus has been introduced as Savior. In speaking to the world, Jesus Christ never referred to Himself as One who revealed the Father, but He spoke instead of being a stumbling block(see John 15:22-24). John 14:9, where Jesus said, “He who has seen Me has seen the Father,” was spoken to His disciples.
ጬ (주님께서 나를 위해 돌아가셨고 그렇기에 나는 벌을 받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해 돌아가신 것이지 나의 죽음을 대신하신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의 돌아가심에 동일시하여 대속함을 받고 주님의 의가 나에게 은혜로서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내가 주님을 내 안에 받아들이지 않으면 주님의 축복은 없다고 말합니다.) That Christ died for me, and therefore I am completely free from penalty, is never taught in the New Testament. What is taught in the New Testament is that “He died for all” (2 Corinthians 5:15)--not, “He died my death”--and that through identification with His death I can be freed from sin, and have His very righteousness imparted as a gift to me. The substitution which is taught in the New Testament is twofold—“For He made Him who knew no sin to be sin for us, that we might become the righteousness of God in Him.” The teaching is not Christ for me unless I am determined to have Christ formed in me (see Galatians 4:19).
ጬ (오늘의 idiom) (꼭대기에서 내리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다) take it from the top= to begin from the beginning.
ጬ I have uttered what I did not understand,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did not know. —Job 42:3
나는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 욥기 42:3
ጬ As our plane began its descent, the flight attendant read the long list of arrival information as if she were reading it for the thousandth time that day—no emotion or interest as she droned on about our impending arrival. Then, with the same tired, disinterested voice, she finished by saying, “Have a wonderful day.” The dryness of her tone contrasted with her words. She said “wonderful” but in a manner completely absent of any sense of wonder. 우리가 탄 비행기가 하강하기 시작하면서, 승무원은 착륙하면 알아야 할 사항들을 마치 그날 하루에 천 번이나 읽은 것처럼 읽어 내려가면서, 아무런 감정이나 관심도 없이 우리의 임박한 착륙에 대해 단조롭게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피곤하고 무관심한 음성으로 “아주 멋진 날을 보내세요.”라고 하면서 말을 마쳤습니다. 그 승무원의 무미건조한 말투는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과는 대조적이었습니다. “아주 멋진”이라고 말했지만 멋진 느낌은 정말 조금도 없었습니다.
ጬ Sometimes I fear that we approach our relationship with God in the same way: Routine. Bored. Apathetic. Disinterested. Through Christ, we have the privilege of being adopted into the family of the living God, yet often there seems to be little of the sense of wonder that should accompany that remarkable reality.
나는 가끔 우리도 그와 같이 형식적이고 지루하고 무관심하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지는 특권을 갖고 있지만, 그 놀라운 사실에 수반되어야 할 감격은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ጬ Job questioned God about his suffering, but when challenged by Him, Job was humbled by the wonder of His Creator and His creation. Job replied, “You asked, ‘Who is this who hides counsel without knowledge?’ Therefore I have uttered what I did not understand, things too wonderful for me, which I did not know” (Job 42:3).
욥은 그의 고통에 대해 하나님께 의문을 제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여러 질문으로 그를 깨우치시자 창조주 하나님과 그분의 창조물의 경이로움에 스스로 낮아져서 이렇게 고백하게 됩니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우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욥기 42:3).
ጬ I long for the wonder of God to take hold of my heart. Adopted by God—what a wonderful reality!
나는 하나님의 경이로움이 내 마음을 사로잡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 받아들여졌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현실입니까!
ጬ How marvelous! How wonderful!
And my song shall ever be:
How marvelous! How wonderful
Is my Savior’s love for me!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놀라운가!
내 영원히 그것을 노래하리라
얼마나 경이롭고 얼마나 놀라운가!
나를 향한 구주의 사랑!
ጬ Nothing can fill our hearts more than
the wonder of our God and His love.
경이로운 하나님과 그분의 사랑보다도 더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줄 수 있는 것은 없다.
(아래 내용은 다음에서 인용함) http://bethelpress.org/dailybread.php
For I am a stranger with You, a sojourner, as all my fathers were. —Psalm 39:12 대저 나는 주께 객이 되고 거류자가 됨이 나의 모든 열조 같으니이다 —시편 39:12 I looked up the members of my seminary graduating class recently and discovered that many of my friends are now deceased. It was a sober reminder of the brevity of life. Three score and ten, give or take a few years, and we’re gone (Ps. 90:10). Israel’s poet was right: We’re but strangers here and sojourners (39:12). 최근에 신학교 동기생들을 찾아보고 나서, 내 동기들이 많이 세상을 떠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인생이 얼마나 짧은지를 냉철하게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다소 몇년간의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우리는 칠십세 전후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시편 90: 10). 이스라엘 시편기자의 말처럼 우리는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뿐입니다(39:12). The brevity of life makes us think about our “end”—the measure of our days and how fleeting they are (v.4), a feeling that grows more certain as we draw closer to the end of our lives. This world is not our home; we’re but strangers and sojourners here. 인생이 짧기에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에 대해 생각해보게 됩니다. 남은 날들을 세어보고 그 날들이 얼마나 쏜살같이 지나가는지를 생각하게 되는데(4절), 이 느낌은 삶의 끝이 가까워질수록 더욱 분명해집니다. 이 세상은 우리의 본향집이 아니며, 우리는 이곳에서 단지 이방인이요 나그네일 뿐입니다.
Yet we are not alone on the journey. We are strangers and sojourners with God (39:12), a thought that makes the journey less troubling, less frightening, less worrisome. We pass through this world and into the next with a loving Father as our constant companion and guide. We’re strangers here on earth, but we are never alone on the journey (73:23-24). We have One who says, “I am with you always” (Matt. 28:20). 그러나 우리는 이 여정을 홀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나그네요 여행자(39:12)라는 것을 기억하면, 이 여정에 대한 근심과 공포와 걱정을 한결 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지나 다음 세상으로 향하는 동안 사랑의 하나님아버지께서 항상 우리의 동반자요 안내자가 되어 주십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낯선 나그네이지만 절대 혼자서 가는 여정이 아닙니다(73:23-24). 우리에게는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태복음 28:20)고 말씀하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We may lose sight of father, mother, spouse, and friends, but we always know that God is walking beside us. An old saying puts it like this: “Good company on the road makes the way to seem lighter.” 아버지, 어머니,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을 더 이상 못 보게 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곁에서 함께 걷고 계신다는 것을 언제나 압니다. 옛 속담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좋은 길동무는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My times are in my Father’s hand; How could I wish or ask for more? For He who has my pathway planned Will guide me till my journey’s o’er. 내 사는 날은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니 어찌 더 바라고 구하리요? 내 삶을 예비해 놓으신 하나님이 삶의 여정이 끝날 때까지 나를 인도하시리
As you travel life’s weary road, let Jesus lift your heavy load. 피곤한 인생길을 걸어갈 때 무거운 짐은 예수님께 맡겨라. |
2013/11/19: 새벽기도회에서 베드로전서 1장 17절의 말씀이 레마의 말씀으로 다가왔고 매일 한 절씩 레마의 말씀을 print out 해서 외우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소년원 성경 마련을 위한 음악회 개최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마리아치 라틴 공연팀 (권용민 010-9123-4047: 경기 부천 원미구 중동 1104, 032-326-4469, cafe/daum.net/mariachilatin, yosoymin@daum.net) 초청 공연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