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교동 전통가양주 비법
우리 어머니는 젊어서부터 음식 솜씨가 좋으셨고 특히나 경주 교동 전통주 법주 비법은 우리 대소가 며느리 중에서도 알아주었다. 한국전쟁이 나기전, 내가 초등학교 4,5학년때쯤(1948년) 교동 윗마을에 살 때 가정의 부업으로 법주를 큰단지로 담구어두면 경주시내 일류 권번 기생 요리집에서 초저녁마다 몰래 사람을 보내 몇되씩 사가기도 하였다. 그 시절에는 쌀로 술담는 것은 불법이기 때문에 세무서 직원들이 술 추러도 자주 나오고 감추고 숨바꼭질도하고, 벌벌 떨고 들키는 날에는 다된 술단지와 누룩도 몰수되고 살기도 어려운데 벌금도 물어야 하고 갖은 곡절이 많았다. 그때 법주 밀주로 종자돈을 조금 모아 작은 송아지 한 마리를 삿는데 그놈을 내가 주로 마을앞 南川내를 건너 앞산 도동산으로 몰고가 풀뜯어 먹이고 노을이 질때면 몰고와 남천내 깨끗한 물을 먹여 돌아오곤 하였다. 풀을 뜯는 사이에 우리는 큰바위에 앉아서 옆집에 사는 “강용환”형에게서 “찔래꽃”. “가거라 삼팔선” 제목은 잊었지만 “임진강 나루터에 소먹이는 아해야 오늘도 삼팔선에 파수병이 섯드냐” 이런 가요를 그때 배웠다. 찔래꽃의 작사가는 지금 보니까 “김영일”로 되어있으나 나는 옛부터 “林 華”가 아닌가 생각한다. 임 화는 해방될 시대에 우리나라 유명한 시인이였으나 한국전쟁때 자진 이북으로 월북한 사람이다. 찔래꽃은 한때 금지곡으로도 뭇껴있었다. 가사중에 “남쪽나라 내고향” 과 일절 마지막에 “못잊을 동무야”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작사가가 월북한 시인이였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어느땐가 kbs퀴즈에 사회주의 시인 “임 화”에 대한 문제가 나왔는데 출연자 다섯명 모두 맞추지 못했지만 나는 속으로 단번에 맞춘 일이 있었다. 옛 자유당 시절부터 한 동안에는 반공이 국시가 되고 빨강색만 보면 모두를 빨갱이 첩자로 인식되어 그때부터 우리사회에는 빨강색이 없어질 정도가 되었다. 완장도, 간판도, 플랑카드도, 심지어 초등학생들 운동회때 머리띠 조차도 원래는 “홍군 백군“이였으나 그것도“청군 백군”으로 바뀌었다. 그르나 예외 하나는 있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의 명찰 하나만은 빨강색이었다. 참 이해 못할 일이었다. 이렇게 빨강색은 꿈도 못꾸던 시절도 있었다. 찔래꽃의 마지막 가사 “못잊을 동무야”는 “못잊을 사람아 또는 못잊을 친구야” 이렇게 바꾸어 부르기도 하였다. 그르나 시대가 바뀌어 요즈음에는 간혹 젊은 가수들도 원 가사인 “못잊을 동무야”라고 가요무대에서도 부르는 것을 종종 보게되니 옛날 사람으로 기쁘기도 하였다. 하다기 보니 얘기가 다른 곳으로 흘르갔는데 어머니 별세하시기 몇해전 시골 갔을때 어머니에게 구술로 전통 법주 비법을 적어온 것이 나에게 있었다. 정말 소중한 자료이다.
첫째 밑술 : 찹쌀 (큰되로) 반(半)되로 흰죽을 끊이고 그기에 누록 반(半)되 조금 넘게 혼합시켜 약 5일쯤 숙성 시킨다.
본술(本酒) : 찹쌀 큰되로 5되로 꼬두밥을 하여 누룩은 半 되 정도 넣고 밑술과 같이 혼합시켜 약 15일 정도 숙성 시킨다. 물은 끊여서 식힌후 량은 손 복성씨 바로위까지 채운다. 용시는 위에 물끼가 하나도 없을시 약 15일 정도 무거운 돌로 눌러 넣는다. 온도는 단지를 이불로 둘러 덥어서 따뜻하게 해준다. 뽀글 뽀글 궤는 소리가 난다. 적당히 봐 가면서 이불을 벗겨 주면서 온도를 조종해준다
결과 : 前酒 5되 정도로 뜨고 後酒는 물을 끊여 식힌후 적당히 한다. 전후주 섞는다.
2006년 04월 06일 어머님에게서 구전 전수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