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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이쿄신문(聖敎新聞)」을 읽다보면 공유하고 싶은 내용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지만 ‘프리기사’가 아닌 기사(유료회원 전용)를 게재하는 것은 ‘저작권 문제’가 있어 곤란합니다. 고민 끝에 이렇게나마 다이제스트(요약본)로 발췌, 내용의 마지막에 기사의 타이틀과 날짜, 링크(‘출처’ 확인용)를 표기하여 업로드를 간간이 하려 합니다. 많은 분이 함께 연찬을 통해 힘을 내실 수 있으면 무엇보다 기쁠 것 같습니다.
- MIDO(美道) 드림 -
근대 오륜(五輪: 올림픽)의 선구자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내가 이겨 보이겠다.”
이 일념(一念)이다. 이 투쟁정신(鬪爭精神)이다.
올림픽의 역사는 28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피아(Olympia)에서 열린 경기제(競技祭)가 기원으로 여겨지며 개최(開催) 전후(前後)에는 도시국가 간 모든 전쟁을 중단한다는 전통이 있었다.
이 이상(理想)을 계승해, “전 세계의 청소년을 위해, ‘인류의 봄’을 위해”라는 신념(信念)으로 근대 올림픽을 제창한 사람이 프랑스의 교육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Frédy, baron de Coubertin, 1863~1937)이다.
“다가올 미래를 만들고 과거와 미래의 조화(調和)를 도모(圖謀)하는 것은 그들 청년들의 손에 달려 있다.”라는 말을 남긴 쿠베르탱. (중략)
1896년 4월 6일, 기념해야 할 제1회 대회가 그리스 아테네에서 막을 올렸다. 쿠베르탱이 꿈꾸던 올림픽이 15세기의 공백(空白)을 거쳐 ‘고대 올림픽의 발상국(發祥國)’에서 선명(鮮明)하게 부활(復活)한 것이다.
14개국에서 241명의 선수가 참가한 것으로 알려진 대회는 10일간, 40개가 넘는 종목(種目)이 실시되었다. 꽃(花形[하나가타]: 꽃 모양, 꽃무늬, 인기 있는 화려한 존재)인 육상은 미국이 압승(壓勝). 현지 그리스도 다른 경기에서는 분투했지만 육상의 결과는 부진(不振)했고 국민은 마지막 날에 예정되어 있는 마라톤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당시의 그리스는 정치적·경제적 문제에 직면해 암운(暗雲: 먹구름)의 시대에 있었다. 사람들은 사회의 암운을 날려버릴 활약(活躍)을 기대(期待)하며 경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라톤 코스는 그리스의 고사(故事)를 참고하여 마라톤(Marathṓn) 마을에서 아테네의 경기장까지 약 40km. 연도(沿道: 도로의 양쪽)는 그리스 선수의 승리를 바라는 인파(人波)의 열기(熱氣)에 휩싸였다.
하지만 후반에 들어서도, 앞을 달리는 것은 다른 나라의 선수뿐. 관중(觀衆) 사이에 체념(諦念) 무드(mood: 분위기)가 감도는 가운데, 남은 7km에서 레이스(race)가 움직였다. 그리스 선수가 선두로 치고 올라온 것이다.
그의 이름은 스피리돈 루이스(Spiridon Louis, 1873~1940). 양치기(목동)인 무명의 젊은이였다. 목장에서 입는 소박한 복장 그대로 출전해, 2시간 58분 50초의 타임으로 우승. 일약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일찍이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이 사실을 통해 말했다.
-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끝까지 달렸다. 끝까지 싸웠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청년의 혼(魂)이 오체(五體)에 잠자고 있는 파워를 한없이 분기(奮起)시켰던 것이다.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내가 이겨 보이겠다.” - 이 일념(一念)이다. 이 투쟁정신(鬪爭精神)이다. (중략)
이름 없는 양치기 청년은 달리고 달렸다. 앞으로, 앞으로-.
각국의 유명한 러너를 차례차례로 추월해 갔다. 앞으로, 앞으로-.
오로지 아테네 경기장을 향해 돌진해 갔다.
그는 단지 골만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의 평판(評判) 따위는 안중(眼中)에도 없었다. 가슴속(胸中)에는 변명(辨明)도, 보신(保身)도, 도피(逃避)도, 두려움도 없었다. 오로지 달렸다. 오로지 승리를….
경기장에 그의 모습이 나타나자 7만 명이나 되는 대관중이 총립(總立: 모두 일어서서)해 맞이했다. 갈채(喝采) 또 갈채-.
그리스의 황태자도 너무나 감격(感激)해 귀빈석에서 달려 나와 마지막 200m를 나란히 달리기 시작했다.
입장을 초월한 ‘인간’끼리의 감동적(感動的)인 광경(光景)이다. 그리고 하늘까지 닿을 정도의 대환성(大歡聲), 만뢰(萬雷)와 같은 대박수 속에서 청년은 당당하게 골인.
그때까지의 모든 굴욕(屈辱)을 한 번에 날려버리고 그리스의 위대(偉大)한 영광(榮光)이 훌륭하게(멋지게) 되살아난 순간이었다. (중략)
운동능력(運動能力)만도 아니다. 기술(技術)만도 아니다. 그는 정신(精神)의 힘(力)으로 승리(勝利)를 손에 쥐었다.
광포(廣布)의, 그리고 인생(人生)의 레이스도 마찬가지다. 학력(學歷)도 아니고, 지위(地位)도 아니다. 신심(信心)의 힘이야말로 근본이다. 능력(能力)도 아니고, 계책(計策)도 아니다. 위대(偉大)한 정신의 힘이야말로 자신의 인생과 광포에 ‘승리의 영관(榮冠)’을 가져다준다.
한 청년의 승리는 그리스의 민중에게 헤아릴 수 없는 자신감과 용기를 선사했다. 그 후, 오랫동안 그리스의 사기(士氣)를 계속 고무(鼓舞)시켰다고 한다. 또한 마라톤이 ‘올림픽의 꽃(華)’으로 불리게 된 것도 이 감동의 드라마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모든 것은 한 명의 청년(靑年)의 싸움으로 결정된다. 한 서민(庶民)의 승리가 일체(一切)를 바꿔간다. 사회(社會) 속에서, 생활(生活) 속에서, 현실(現實) 속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발랄하고, 씩씩하게 톱러너로서 끝까지 달려 나간다. 거기에 우리 학회(學會)의 새로운 승리(勝利)가 탄생한다. 영광(榮光)과 희망(希望)이 태어난다. 개선(凱旋)의 만세(萬歲)가 울려 퍼진다. 〈1991년 8월 4일, ‘’91현(県)·구(区)하계연수’ ‘제2회 나가노현(長野県)총회’의 스피치에서, 『이케다 다이사쿠 전집(池田大作全集)』 제78권 수록〉 -
쿠베르탱은 말한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싸우는 것이다. 본질적으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다기지게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정신에 통하는 이케다 선생님의 말에는 창가벗(創價友)의 투혼(鬪魂)을 고무(鼓舞)시켜 마지않는 힘이 있다.
“경기(競技)에는 승자(勝者)와 패자(敗者)가 있지만, 인생(人生)의 올림픽에 패자는 없다. 있다면, 그것은 ‘도전(挑戰)하지 않은’ 사람뿐이다. 도전하고, 도전해, ‘100퍼센트, 힘을 쏟아낸’ 사람은, 정말, 모두가 ‘인생의 금메달리스트’인 것이다.” 〈2004년 8월 14일자 본지(本紙) ‘인생은 훌륭하다’〉
「〈히어로즈(HEROES) 역경(逆境)을 승리로 넘은 영웅들〉 제44회 근대 오륜(五輪)의 선구자」
2024년 7월 21일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A5F141374975622CA1139D3A7DA8F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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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청년의 해(年)’ ㊦
지금, 이때를 놓치지 말고 격려를
4월 첫 〈이케다 다이사쿠 사진전>
이케다(池田) 선생님은 사진에 대해 말했다.
“‘사진(寫眞)’ 즉 ‘포토그래프(Photograph)’란 원래 ‘빛(光)으로 그린다’라는 의미(意味)다. 나는 새로운 희망(希望)을 갖고, 사진이라는 ‘빛(光)의 시(詩)’를 그리기 시작했다.”
일본사진가협회(日本寫眞家協會) 회장을 맡아 선생님의 사진을 높이 평가했던 미키 준(三木淳, 1919~1992) 씨도 “당신이 찍은 사진으로 사진전을 해야 한다.”고 강하게 권(勸)했다.
그러한 기대(期待)에 응해, ‘평화(平和)와 문화(文化)를 그리다(寫)’라는 제목으로 첫 〈이케다 다이사쿠 사진전(池田大作寫眞展)〉이, 1982년(昭和57年) 4월 2일에 개막(開幕). 이후, 선생님의 사진전은 〈자연(自然)과의 대화(對話)〉라는 명칭(名稱)으로,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어 갔다.
지금까지 이 사진전은 41개국·지역, 150개 이상의 도시를 순회. 감상(鑑賞)을 위해 방문한 전 세계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보내 왔다.
“사진(寫眞)이 한 순간(一瞬)의 진검승부(眞劍勝負)이듯이, 인생(人生)도 ‘지금을 이기는 싸움’” “‘지금, 이때를 놓치지 말고 연(緣)이 있는(연을 맺은) 한 사람의 생명(生命)에게 희망(希望)과 환희(歡喜)의 빛(光)을” - 선생님의 한 장 한 장 사진에, 이러한 생각이 강하게 응결되어 있다.
4월 간사이소카초등학교 개교
“우선 책을 많이 읽고 공부를 열심히 하세요. 다음으로 좋은 친구들과 함께 정직(正直)하고 정의(正義)로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 주세요.”
1982년(昭和57年) 4월 10일, 간사이소카초등학교(關西創價小學校)의 제1회 입학식이 실시되어 이케다 선생님은 만감의 메시지를 보냈다.
1982년 4월 12일, 선생님은 입학식으로부터 2일이 지난 간사이소카초등학교를 방문. 교사의 안내로 모든 반을 찾아간다.
“선생님이다!” 갑작스러운 내방(來訪)에, 아동들은 크게 기뻐했다. 선생님은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따뜻한 말을 건네 갔다.
“열심히 하는 거예요.”
“선생님과 어머니의 말씀을 잘 들어주세요.”
“아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 그것이 창립자의 생각이었다.
지난해 선생님은 동서(東西) 소카초등학교 입학식의 메시지에서 이렇게 당부했다.
“사이좋게 크게 자라(성장해) 일본, 전 세계에 ‘희망(希望)의 씨앗(種)’ ‘행복(幸福)의 씨앗’ ‘평화(平和)의 씨앗’을 뿌려주길 바랍니다.”
9·19 제2회 ‘세계평화문화제’
9월 18, 19일의 이틀, 사이타마(埼玉)의 세이부(西武)라이온스구장(당시)에서, 제2회 ‘세계평화문화제(世界平和文化祭)’가 개최되었다. 세계 37개국, 3개 지역의 대표 3000명을 포함해 4만 명의 젊은이들이 모인 나이터(Nighter: 야간) 행사다.
19일, 개회 1시간 전, 공연장에는 선생님의 모습이. 선생님은 빗속에서도 불구하고,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그라운드를 돌기 시작했다. 때로는 손을 흔들고, 때로는 머리를 깊이 숙여 청년들에게 만감의 격려를 보냈다. 스탠드는 대환성(大歡聲)으로 들끓었다.
청년부(靑年部)의 문화·평화운동의 역사. 그것은 스승과 불이(不二)로 창가(創價)의 혼(魂)을 끝까지 선양(宣揚)한 드라마이기도 했다.
선생님은 청년에게 이렇게 기대를 보냈다.
“국경(國境)을 초월한 청년의 스크럼이야말로 세계를 잇는(맺는, 연결하는) 희망(希望)의 무지개다리(虹橋)다.” “세계인의 마음을 잇고(맺고) 높여가는 것을 우리는 광선유포(廣宣流布)라고 부른다.”
「〈영광(榮光)의 공전보(共戰譜)〉 제25회」
2024년 3월 7일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A8932A3A52DC0F262ED7DD3A70F59D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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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용(地涌)의 실천(實踐)
[이케다(池田) 선생님의 지도(指導)에서]
지용보살(地涌菩薩)이 활약하는 본무대(本舞臺)는 사바세계(娑婆世界)로 정해져 있습니다. 고뇌(苦惱)를 감인(堪忍: 참고 견디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감인세계라고도 불립니다. 이 고뇌에 찬 현실에서 사는 일체중생(一切衆生)을 구제(救濟)하기 위해서 법화경(法華經)이 설해진 것입니다. (중략)
지용(地涌)의 생명에 눈을 뜬 사람에게 두려운 것은 어떤 것도 없습니다. 많은 사람을 구하는 사명(使命)에 일어서면 용기도 용솟음치고 힘도 나옵니다. (중략)
인류(人類)는 모두, 본래 지용의 생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 지용의 생명은 눈을 뜬 지용의 생명에 닿음으로써 반드시 촉발(觸發)되는 것입니다. 〈『승리(勝利)의 경전(經典) ‘어서(御書)’에서 배운다』 제17권〉
Q1 : 우리야말로 지용보살….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인지요.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께서는 “지용(地涌)의 보살(菩薩)의 선구(先驅)는 니치렌(日蓮) 일인(一人)이로다.”(어서신판1790·전집1359)라고 말씀하시며, 바로 어자신(御自身)이야말로 지용보살의 선구자로서 민중구제(民衆救濟)를 위해 사신홍법(死身弘法)의 대투쟁(大鬪爭)을 관철(貫徹)해 오신 어확신(御確信)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리고 대성인께 이어져 대성인과 같은 마음으로 묘법유포(妙法流布)에 살아가는 사람 또한 지용보살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학회가 창가교육학회(創價敎育學會)로서 탄생한 것은, 1930년 11월 18일. 초대 회장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께서는 “보살행(菩薩行)을 하지 않으면 부처가 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자행화타(自行化他)의 실천으로서 ‘보살행’을 강조하셨습니다.
Q2 : 니치렌 대성인께 직결해 간다. 이것이 창가의 영예로군요.
마키구치(牧口) 선생님과 함께 체포(逮捕)·투옥(投獄)된 제2대 회장 도다 조세이(戶田城聖) 선생님 또한 옥중에서 신앙(信仰)을 관철하셨습니다. 그 속에서 도다(戶田) 선생님께서는 철저한 창제(唱題)와 법화경의 정독(精讀: 뜻을 새겨가며 자세히 읽음), 사색(思索)에 의해 “나, 지용보살이니라.”라고 ‘오달(悟達)’하셨습니다. 그 자각(自覺) 위에서 정법(正法)을 유포(流布)하고 생애를 마칠 것을 결의하셨습니다.
이 ‘옥중오달(獄中悟達)’에 대해, 이케다(池田) 선생님께서는 “이 오달(悟達)이야말로, 니치렌 대성인(日蓮大聖人)께 직결(直結)해, 광선유포(廣宣流布)에 살아가는, 불의불칙(佛意佛勅)의 단체인 창가학회(創價學會)의 ‘확신(確信)’의 원점(原點)이 있다.”라고 쓰셨습니다.
홍교(弘敎)의 파도(물결)가 각지로 넓혀지는 가운데, 때때로 도다 선생님께서는 동지에게 “지용보살인 여러분, 하지 않겠는가.”라고 호소하셨습니다.
묘법유포(妙法流布)라는, 생명 본원인 지용의 사명에 살아갈 때, 모든 숙명(宿命)을 타개(打開)하는 힘이 넘쳐흐른다. - 도다 선생님께서는 이 확신을 전 동지와 나누어 가셨던 것입니다
Q3 :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법화경 사상을 전개하셨습니까?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니치렌불법(日蓮佛法)에 대한 법화경(法華經) 사상(思想)을 심화(深化)시키시면서 현대적으로 전개(展開). “모든 사람이 실은 근본(根本)에 있어서는 지용보살(地涌菩薩)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석존(釋尊)에서 시작해 대성인께서 계승하신 법화경의 사상과 실천은, 창가삼대(創價三代) 사제(師弟)의 사신홍법(死身弘法)의 투쟁에 의해 ‘생명존엄(生命尊嚴)’ ‘만인존경(萬人尊敬)’이라는 인간주의(人間主義)의 불법(佛法)으로서 현대에 되살아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케다 선생님께서는 묘법홍통(妙法弘通)에 바친 생애(生涯)를 통해 지용(地涌)의 서원(誓願)인 세계광선유포(世界廣宣流布)를 현실로 만드셨습니다. 즉, 사명(使命)에 눈을 뜬 지용보살이 영원히, 또 전 세계에서 용출(涌出)해가는 길을 확립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목표로 해 오신 ‘만인의 행복’ ‘전(全) 인류(人類)의 숙명전환(宿命轉換)’이라고 하는 지용의 맹세를 자신의 맹세로서 하여 학회 창립 100주년인 2030년을 향해 새로운 사제공전(師弟共戰)의 역사를 열어 나아갑시다.
「〈영지(英知)의 광원(光源) 희망의 철리(哲理)에서 배운다〉」
2024년 2월 6일
https://www.seikyoonline.com/article/766938C8AC1AC5726BCA247F11149FB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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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많은~감동의소식올려주셔서 너무너무 노고많으셨습니다
항상 노고에 진심으로 깊이 깊이 감사드립니다 ~힘드실텐데~~ ~바쁘실텐데~~
항상 존경합니다
더운날씨
가족모두 건강 하시고요 🌻🌻
노고 많으셨습니다^^
매일 정독하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