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강처럼 흐른다.
비가 오면 수위가 높아지고, 태풍이 불면 물살이 거세지고, 노을이 지면 노란 해를 띄운 채 변함없이 흐른다.
삶의 유속도 강의 흐름과 비슷하다.
가까이에선 속도감이 잘 느껴지지 않지만 잠시 힘을 뺴고 고개를 들어보면 주변 풍경이 달라져 있다.
어느덧 아이는 고등학생이 되었고, 거울 속 내 모습은 내가 알던 얼굴과 다르다.
부모님도 뵐때마다 할머니, 할아버지로 변해간다.
친정은 1년에 제사를 여덟 번 지내는 종갓집이었다.
맏딸인 나는 대여섯 살 무렵부터 엄마를 가들었다.
여성과 어린이의 노동력이 제사에 무한 동원되었다.
고되게 제사를 지내고 나면 남은 음식이 수북히 쌓였다.
데우고 데워서 겨우 다 먹을 즈음이 되면 또 제사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에너지를 적게 사용하며 사는 방식이 좋다.
이번 여름에도 에어컨을 한 번도 틀지 않는 방식으로 지구를 사랑했다.
음식도 간소하게 하거나 원재료를 그대로 먹는 걸 즐긴다.
아침에 일어나면 공복에 들기름 한 스푼 먹고 커피 한 잔을 마신다.
그렇지 않으면 당근을 얇게 먹고 사과 한 알을 열여섯 등분으로 썰어 브리 치즈, 파스타치오와 함께 먹거나
그릭 요거트에 블루베리와 잣을 섞어 먹는다.
그렇지만 가족들의 입맛은나와 달라서 메뉴를 따로 준비하곤 한다.
이유야 어떻든 내 인생을 1년에 여덟 번이나 제사에 쓰고 싶지 않았다.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그럴 것이다.
나는 조금이라도 더 뻔질거리며 어떻게든 제사에 관여하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무언가를 할 줄 아는 능력도 자주 꺼내 써야 녹슬지 않는법.
칼집이 점점 서툴어지고, 후프라이팬에 굽고 뒤집는 조리 실력도 무뎌져 초보자와 다르지 않게 되었다.
더 문제는 '수고를 덜 들이려고' 꾀부리는 마음이 평소 내 행동에서 숨길 수 없이 드러난다는 것이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실로 큰 마음이다.
그런 마음을 가진 분으로 박완서 선생을 손꼽고 싶다.
아이 다섯을 낳아 키우면서도 맛있는 것만 먹고 싶다며 요리를 즐겨 하셨다.
'정확하고 온전한 사랑의 기억'이라는 제목으로 엄마 박완서의 주방을기록한 호원숙 작가의 책에 따르면
선생은 주방에 (조선요리제법)이란 책을 두고 수시로 봤다고 한다.
(조선요리제법)은 방신영 선생이 집필한 최초의 근대식 한국 요리책인 (요리제법)에서 시작됐다.
당시 주부의 필수품이자 학교 교재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고, 1917년 (조선요리제법)으로 출간되었다.
이후 50여 년 동안 꾸준한 인기를 누린 스테디셀러다.
1933년 이 책의 저작권을 침해한 강의영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을 상대로 한 손해배상소송에서 승소했다.
누군가는 으 어떻게든하지 않으려는 요리에 누군가는 평생을바쳤다.
친정에선 그동안 맏며느리인 ㄷ루째 동생이 늘 전을 부쳐주었다.
시댁 차례를 모시는 김에 깻잎전, 육전, 꼬치전, 생선전을 한 접시씩 더해 친정엄마의 수고를 덜어주었다.
그런데이번 명절엔 사정이 있어 음식을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 엄마의 손은 류머티즘으로 마디마디가 울퉁불퉁하다.
마음이 쓰였다.
막내 남동생과 올케도 신경이 쓰였던 모양이다.
엄마께 연락드렸더니 할 거 하나도 없다고 걱정하지 말라 하셨다고 전해왔다.
엄마께 저노하를 드렸다.
비록 음식 솜씨는 없지만 '생선전과 육전을 조금 부쳐갈까요?'라고 물었더니 반색하셨다.
시어머니 생각도 나서 이번 차례 음식은 어떻게 하실 거냐고 전화드렸더니 그냥 조금씩 살까 생각 중이라고 하셨다.
'제가 전을 조금 해갈까요?' 어쭈자 뛸 듯이 기뻐하셨다.
몇 년 전만 해도 시어머니는 아파트 상가에서 전을 사서 차레상에 올리면 어떻겠냐는 형님의 조심스러운 제안에
그러는 거 아니라고 딱 잘라 말씀하셨다.
그때는 틀린 일이 지금은 맞는 일이 될 수 있다.
우리의 삶은 계속 흐르기고 있기 때문에.
내 주방엔 한국전통병과로 유명한 '호원당'의 창업자 조자호 선생의 저서 (조선요리법)이 있다.
책을 뒤적이며 생선전 하는법을 찾아 온라인으로 백후추와 실고추를 주문했다.
동태에 요리술을 바르고 백후추와 소금을 뿌렸다.
소고기는 정종에 살짝 담가 소금을 뿌렸다.
달걀을 꺼내 밑간하고, 재료에 밀가루옷을 입혔다.
생선 한 근 반, 소고기 한 근 붙치는데 두 시간이 넘게 걸렸다.
후드를 가장 강하게 틀어도 기름 냄새에 속이 울렁거렸다.
학원에 다녀온 아들에게 자투리를 모아 크게 부친 전을 내주었다.
아들은 정말 맛있다며 연신 엄지손가락을 치켜 세웠다.
'정말 그렇게 맛있는 걸까?
엄마의 수고를 해아려 그냥 그렇게 말해주는 개 아닐까?' 싶었다.
올 추석에 처음으로 김치를 홈쇼핑에서 주문하신 시어머니는 내가 만든 전을 드시곤 '고맙다.
예쁘게 잘 부쳤네'하고 칭찬해 주셨다.
그렇게까지맛있지 않아도 맛있다고, 할 일이태산이어도 하나도 없다고, 힘들어도 힘들지 않다고 그렇게
다들 선한 거짓말을 하며 보낸 또 한 계절 어느덧 강처럼 흘렀다. 정재경 에세이스트 겸 리추얼 멘토
* 이기적인 거짓말을 물리치는 루틴
발끈할 정도로 부아가 오르는 일을 만나거나, 너무 하기 싫은 일을 해야할 때는 시점을 멀리 두고 자문해 본다.
'지금 눈앞에 벌어진 일을 2,30년 후에 돌이켜봐도 이렇게까지 화가 날까?
아무것도 아닐 일에 이렇게 힘을 써야 할까?
곰곰이 답을 찾다 보면 더 많은 일들에 너그러워지면서 거짓말 하나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