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5일 완전해지기 하느님께서 말씀하셨다.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 모습으로 사람을 만들자(창세 1,26).” 우리는 하느님을 닮았다. 하느님은 당신을 ‘우리’라고 부르셨다. 하느님은 삼위일체 하느님이시다. 세 분이 하나가 되도록 서로에게 완전하게 종속되신다. 사랑이다. 하느님은 완전한 사랑 그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도 사랑인 하느님을 닮아서 사랑하기를 바란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이 세상 모든 것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이 짧은 삶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처럼 완전해지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 앞서 설명하신 대로 하느님의 이 신성한 완전성은 아무도 빠뜨리거나 제외하지 않고 원수와 나를 박해하는 사람까지 모두를 사랑함이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루카 5,32).” “이와 같이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잃어버리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마태 18,14).” “내가 정말 기뻐하는 것이 악인의 죽음이겠느냐? 주 하느님의 말이다. 악인이 자기가 걸어온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사는 것이 아니겠느냐?(에제 18,23)”
서양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한다. 아기가 만들어질 때인지 세상으로 나올 때인지 하느님이 그 영혼을 사랑스럽게 쓰다듬어주시는데, 사람은 그것이 너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서 그것을 잊지 못하고 세상 속에서 그것을 찾아 헤맨다는 것이다. 친구를 사귀고, 결혼하고, 부모와 자식에게 집착하는 모든 게 그 하느님 사랑을 찾는 거란다. 참 그럴듯하다. 그런데 우리는 사람에게서 그리고 다른 피조물에게서 그 사랑을 찾지 못한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의 고백처럼 하느님 안에 쉬기까지, 하느님과 하나가 될 때까지 우리 마음은 늘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서로 다른 두 계명이 아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나의 이웃사랑은 나의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다. 나는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만큼만 하느님을 사랑한다. 그만큼만 자유롭다. 나의 이웃사랑은 하느님처럼 완전해져야 한다. 그것은 결점과 실수가 없음이 아니라 전부라는 뜻이다. 빠뜨리거나 제외나 소외시키지 않음이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사랑하는 나를 상상하면 가슴 뛰지만 내 현실은 그 상상을 바로 깨뜨린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고 노력한다. 좋아하면 사랑하게 되지만 사랑한다고 다 좋아하는 건 아니다. 내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 거처럼 나와 잘 맞지 않는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거 같지 않다. 그는 모르겠지만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렇기는 해도 있는 힘을 다해, 간절함은 없어도 그를 위해 기도할 수는 있다. 그를 미워하는 게 아니라 불편한 것이고, 함께 있고 마주하는 게 불편하지만 참는다, 하느님을 사랑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인내가 커져 그런 불편함도 익숙해질 거다. 나는 하기 싫지만 하느님이 바라시니 그렇게 하고, 나는 못하지만 하느님께는 불가능이 없으니 주님께 도와달라고 청한다.
예수님,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하느님 백성과 하느님 자녀가 되고, 하늘나라 시민이 되는 게 어떤 것인지 더 깊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그러면 이웃사랑이 훨씬 더 수월해질 겁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무한을 응시하는 어머니 눈을 따라 저도 그곳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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