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칠봉 씨는 그날 아침부터 사나운 마누라한테 코가 꿰어 어쩔 수 없이 콩밭을 매고 있었다.
한낮이 되자 땡볕은 더욱 기승을 부리며 등덜미를 푹푹 찌기 시작했다. 연신 흘러내리는 팥죽 같은 땀으로 눈이 따가웠다.
목은 마르고 막걸리 생각은 간절했지만 중참 챙겨 줄 사람도 없었다. 제풀에 화가 나서 호미질이 거칠어졌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억지로 하니까 온갖 잔꾀가 떠올랐다. 엉뚱한 생각을 하니 머리와 손이 따로 놀았다.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라고 호밋날이 손등을 쪼고 말았다. 이얏! 손등에서 피가 번지기 시작했다. 피를 보는 순간, 정칠봉 씨의
머릿속에는 바로 이거다!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며칠 전에 반상회에서 동네 구장이 하던 말이 생각났던 것이다.
-간첩을 신고하면 500만 원, 간첩선을 신고하면 3.000만 원!
- 본 넘도 없는데 끝까지 우기면 언넘이 알끼라고? 밑져 뵈야 본전이다!
정칠봉은 망설일 틈도없이 호미를 내팽개치고 일어섰다.
"밭 매다가 갑자기 또 어디로 내빼욧!"
마누라의 쩨지는 지청구에는 한마디 대꾸도 하지 않고 쉰 콩밥 얻어먹고 설사만난 거지처럼 허릿춤을 싸안으며 콩밭을 벗어났다.
그때 나는 해군 중위로 한국함대 1전단 11전대 소속 호위구축함 DE-73 충남함 보수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충남함은 그날 제주도 근해에서 순항속력으로 통상적인 초계경비를 하고 있었다. 오후 3시 경이었다. 함대사령부로부터 긴급
전문이 왔다.
- 전문 수령즉시 거문도 외곽 XX해역으로 달려가 간첩선 도주로를 차단하고 의아선박을 검색하라!
상황이 발생한 것이다. 충남함은 부랴부랴 보일어 증기압을 최대로 올리며 전속으로 달려갔다. 속력을 올리자 함수에 새하얀 물갈기를 세우며 경주마처럼 껑충껑충 뜀박질을 했다. 도주하는 간첩선을 갑작스럽게 조우할 것을 대비해서 함장은 멀리서부터 각종 장비를 점검하고 전투배치 명령을 내렸다. 거문도가 가까워질수록 승조원들도 긴장해서 눈빛이 빛났다. 함교 외벽에 자랑스러운 간첩선 격침 마크 하나 더 다는게 아닌가 하고. XX해역에 도달할 때까지 의아선박은 한 척도 없었다.
이 작전에 동원되었던 해군 함정은 구축함을 비롯해서 초계함, 고속정 등 십여 척이나 되었다. 간첩이 출몰했다는 거문도에는 경찰 및 해병대 일개 중대가 투입되었다고 했다. 섬 외곽으로는 함정들이 겹겹이 에워싸고 경찰과 해병대가 만 이틀 동안 섬 전체를 이 잡듯이 들쑤셨으나 간첩의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햇다. 결국 이 작전은 아무런 성과 없이 사흘 만에 종료되고 말았다. 당시 매스컴에는 일절 보도되지 않았다.
십여 년 세월이 흘렀다. 내가 외항선 기관장으로 근무할 때였다. 조기장이 거문도 출신이었다. 함께 근무하면서 조기장의 입을 통해 그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되었다.
대간첩작전은 함대사령부에서 지휘했지만 군경합동 수사본부는 전남도경찰국에 있었다. 수사본부에 파견된 해군보안대 소속 허 소령은 물샐틈 없는 수색작전에도 아무런 성과가 없자 아무래도 신고자의 태도가 의심스러웠다. 목격자는 신고자 한 사람밖에 없었다. 정칠봉은 신고한 후 귿바로 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수사본부로 이첩되었다. 평소에는 범접도 하지 못할 높은 사람들 앞에서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받은 칠봉은 이제 겁에 질려 벌벌 떨고 있었다. 거문도 토박이인 그는 사건이 이렇게 커질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수사 경험이 많은 허 소령은 흔들리는 정칠봉의 눈빛을 쏘아보며 자상한 목소리로 달랬다.
"이 봐요, 정칠봉 씨.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바른대로 말해 봐요. 내가 책임지고 상부에 보고해서 조금도 벌을 안 받게 해 줄 테니. 당신의 신고로 대간첩작전에 동원된 함정이 몇 척이나 되는 줄 알아요? 구축함 한 척을 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데 드는 비용이 얼마나 되는 줄 알아요? 당신 논밭 재산 다 팔아도 어림도 없어요. 그러니 일초라도 빨리 바른말 하는 것이 대한민국을 돕는 길이요!"
겁에 질려 실토도 못하고 불안에 떨던 정칠봉은 허 소령의 회유에 구세주라도 만난 듯 바른말을 하기 시작했다.
"사실은 콩밭을 매다가 날씨는 덥고 목은 마른데 헛손질을 해 손등에 흐르는 피를 보자 갑자기 간첩신고 포상금이 생각나서....
일이 이렇게 커질 줄 모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콩밭에서 달려나와 마누라 시야에서 벗어나자 칠봉은 제 손으로 옷을 찢고 흙바닥에 뒹굴었다. 뾰족한 돌맹이로 얼굴을 때려 피투성이로 만들었다. 가쁜 숨을 흘떡거리며 파출소로 달려갔다. 파출소에 들어선 칠봉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밭 매다가 똥이 마려워 똥 누러가는데 바위 뒤에서 낯선 놈이 불쑥 나타나.... 깜짝 놀라서 당신 누구요? 뭣 하는 사람이요? 하고 물었더니 그 새끼가 불쑥 단도를 꺼내들고 소리도 없이 날 죽이려고...그래 치고받고 싸우다가 겨우 도망쳐왔어요. 내가 거문도 토백이인데....그 새끼 가가 ...간첩이 틀림없어요. 콩밭에는 내 마누라 혼자 밭은 매고 있는데....그 놈이 혹시...."
신고를 받은 경찰은 처음에는 칠봉의 어슬픈 연기를 믿지 않았다. 그렇지만 함부로 묵살할 수도 없었다. 거문도에서는 그때까지 간첩 출몰 사건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진짜 간첩이 잡히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신고한 대로 관할 경찰서에 보고했다. 군경합동 대간첩작전은 그렇게 시작되었던 것이다.
허 소령의 약속 대로 정칠봉은 아무런 벌칙도 받지 않았다. 지금 같으면 여러 사람이 줄초상을 당하겠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정칠봉은 중국집에서 푸짐한 식사대접까지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난리를 치고도 멀쩡한 몸으로 돌아온 칠봉을 보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여보게 칠봉이, 자네 장한 일 했다고 도경에서 높은 사람 만내고 칙사대접까지 받았다면서? 우리 동네 인물 하나 났네그려. 그래 포상금은 을매나 받았능가? 한 턱 쓰야것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