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만5000년 전에 제작된 플루트를 연주한다고 생각해보자. 입을 대는 곳인 취구를 따라 아래로 길게 이어진 공간이 있는데, 악기가 지상에 있는 이상 이곳엔 늘 공기가 채워져 있다. 연주자가 취구에 바람을 불어넣으면 이곳에 형성되어 있던 공기 기둥이 진동한다.
바로 그 순간 이후 악기 외부의 공기도 더불어 진동하고, 그 진동을 인간이 귀와 뇌를 통해 감지한다. 소리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이 이야기는 현대의 악기에도 들어맞는다.
▎키네틱 아트는 움직임이 있는 예술이다.
모든 소리는 플루트 내부의 공기 기둥이나 바이올린의 현 같은 특정한 물질의 진동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떤 물질이 지상에 있으면 그 물질의 진동은 공기의 진동을, 수중에 있으면 물의 진동을 초래한다. 호랑이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호랑이의 발성기관이 초래한 공기의 특정한 진동에 대한 느낌이며, 고래의 외로운 노랫소리는 바닷물의 진동에 대한 느낌이다.
공기나 물은 물질의 진동에너지를 전달하는 매질(medium)의 예다. 땅이나 기차선로, 공기보다 가벼운 헬륨 같은 것들도 매질이다.
음악회장이 헬륨으로 채워진다면 우리는 연주되는 곡을 원래의 조보다 더 높은 소리로 들을 것이다. 헬륨은 공기보다 가볍기 때문에 연주자의 운동에너지에 의한 (악기의) 진동에너지는 무거운 공기보다는 가벼운 헬륨을 더 많이 진동시킨다. 헬륨의 더 많은 진동은 공기의 더 적은 진동보다 우리 귀에 더 높은 소리로 들린다.
헬륨이 공기보다 가볍다는 것은 헬륨가스가 들어 있는 풍선이 날아오르는 현상을 보면 알 수 있다. 헬륨가스를 마시면 평상시보다 더 높고 경박한 목소리를 낸다. 헬륨가스를 마시고 높은 소리를 내게 되는 현상을 도널드 덕 효과(Donald Duck effect)라고 부른다. 월트 디즈니의 만화 캐릭터인 도널드 덕이 내는 소리와 비슷하기에 붙여졌다.
수중에서 음악회를 한다면 악기의 진동에너지는 다양한 파도를 일으킬 것이다. 물속 파도는 볼 수 있지만 공기의 파동은 볼 수 없다. 공기의 파동을 볼 수 없어 생명이 귀를 발명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득한 옛날, 수중 파동을 일상적으로 봐왔던 물고기들에게서 귀가 처음 생겨났으니 말이다.
물고기의 몸통 양측에는 측선기관이라는 일련의 세포가 있는데, 이 세포들은 물속 압력의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해왔다. 포식자가 다가올 때 발생하는 물속 압력의 의미 있는 변화가 물고기와 원시 양서류의 옆줄, 즉 측선기관에 포착되다가, 이후 이 기관이 속귀로 진화되었다는 설이 있다.
생명이 처음 탄생했다가 30억 년이 지나고 나서야 생긴 원시적 귀에 대한 이야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지상에서 공기의 진동 그 자체를 맨눈으로 본 생명은 없다. 생명은 공기의 진동을 귀를 통해 소리로 듣고, 눈으로는 다른 물질들에 비추어진 빛의 진동을 본다.
공기의 진동을 볼 수 있을까
▎기타 내부에 스마트폰을 넣고 기타 치는 모습.
독일의 과학자이자 음악가였던 클라드니(Ernst Chladni, 1756~1827)는 소리를 낳는 물질의 진동을 보고자 했다. 클라드니는 수평으로 놓인 널빤지나 막(膜)에 마른 모래를 뿌린 후 그 널빤지나 막의 한 지점에 손가락 하나를 대고 바이올린의 활로 널빤지나 막의 가장자리를 긋는 실험을 했다. 손가락 하나를 특정 지점에 대는 이유는 특정 주파수를 만들어내기 위함이다. 즉 널빤지나 막이 특정한 진동수로 진동하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실험 결과 모래가 특별한 모습들을 만들어냈다. 널빤지나 막이 특정한 주파수/진동수를 가지면 그 위 모래는 널빤지나 막의 특정 부분에 모였다. 이렇게 형성된 모래(혹은 소금이나 설탕 등)의 다양한 도형들을 클라드니 도형(圖形) 혹은 클라드니 패턴이라고 한다. 이 도형들은 널빤지나 막과 같은 물체가 어떻게 진동하는지를 알려준다.
널빤지나 막을 비롯한 모든 물체는(대부분의 악기를 비롯해) 마디(node)라고 불리는 부분들로 연결되어 있는데, 이 부분들은 진동하지 않으며 다른 부분들만 진동한다. 모래는 진동하지 않는 마디들로 모이며, 진동하는 부분들에는 모래가 없게 된다. 클라드니 도형들은 널빤지나 막이 특정하게 진동하며 만들어내는 특정한 소리의 시각적 등가물일 수 있다.
막이 진동해 소리를 내는 대표적 악기에는 오케스트라의 뒤쪽에서 볼 수 있는 팀파니가 있다. 오케스트라가 절정을 향해 갈 때, 혹은 긴장된 음향을 만들어낼 때 어김없이 등장하는 타악기다. 팀파니스트는 적당한 장력(tension)으로 조인 둥그런 막을 말렛(mallet)이나 스틱이라 불리는 막대기로 가격하거나 빠르게 연타(roll)한다. 팀파니가 강한 장력으로 조여 있다면 고음을 낼 것이고, 약한 장력으로 조여 있다면 저음을 낼 것이다.
▎소리를 낳는 물질의 진동은 특정한 패턴을 갖는다.
오늘날 팀파니나 북(drum) 위에 모래를 뿌리고 그 악기들을 한두 번 정도 치는 실험을 하여 클라드니 도형을 재현하는 과학자는 많지만, 클라드니 도형을 계속 만들어가면서 연주하는 이는 없다. 팀파니스트가 수십 분간 연주하며 만들어내는 클라드니 도형의 연속적 변형과정을 모래가 아닌 어떤 과학적 조치를 통해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면 흥미로울 것이다.
클라드니의 방법으로는 기타나 바이올린의 현이 진동하는 모습을 볼 수 없다. 20세기의 과학적 발전은 이것도 가능케 했다. 현악기 현이 진동하는 모습은 이미 오래전부터 과학적 도구를 이용해 볼 수 있었다. 최근에는 일상의 도구인 스마트폰으로도 현의 진동을 촬영할 수 있게 되었다. 2015년, ‘rtists’라는 필명을 쓰는 한 기타리스트가 자신의 스마트폰을 기타 안에 넣고 기타를 쳤다.
롤링 셔터(Rolling Shutter) 방식을 사용하는 그의 스마트폰 속 이미지 감지기(sensor)는 기타의 현들이 진동하는 놀라운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롤링 셔터 방식은 동영상 이미지 전체를 한 번에 포착해 기록하는 글로벌 셔터와 달리, 좌우 혹은 위아래로 스캔해서 이미지를 기록한다. 이 방식 덕분에 맨눈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미세 진동이 잘 강조되어 촬영되었다.
▎클라드니 도형들. 서로 다른 크기와 모양의 금속판 위에 모래와 같은 알갱이들이 특정한 모양을 이루며 퍼져 있다.
널빤지나 막, 기타의 현들이 진동하는 모습 말고, 이 진동체들의 진동이 만들어낸 공기의 진동은 시각적으로 포착될 수 없을까. 음악회장에서 하나의 교향곡이 연주될 때 발생되는 모든 공기의 진동 양상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전부 포착할 수는 없을까. 아쉽게도 아직까지 이런 시도를 한 사람은 없다.
다니엘 뷔르첼(Daniel Wurtzel)은 스위스 공기 재단(Air Foundation)의 지원을 받아 독특한 조각 작품들을 선보인다. 뷔르첼은 전시회장에 음악을 틀어놓고 그 음악이 발생시키는 공기 진동을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고 싶었다. 음악이 들려지면서 무대 위에 설치된 아주 가벼운 천이나 연기 따위가 음악으로서의 공기 진동으로 인해 시간의 흐름을 따라 다양하게 모습을 바꾼다. 뷔르첼은 이것을 ‘공기 조각’(Air Sculpture)이라고 부른다.
흥미롭기도 하고 황홀하기도 한 이 시도는 사실 오래전부터 있어왔던 키네틱 아트(kinetic art)의 일종이다. ‘키네틱’은 그리스어로 ‘활동적인’이라는 뜻이며, 키네틱 아트는 움직임이 있는 예술이다. 어떤 수단이나 방법을 통해 모종의 움직임이 있다면 키네틱 아트인 셈이다.
기존의 키네틱 아트가 주로 자연적이거나 인공적인 바람으로 인해 전시된 어떤 물체가 움직이는 상황을 만들어낸다면, 뷔르첼은 바람에 다름 아닌 공기의 특정한 진동으로 인해 커튼과 같은 물체가 움직이는 상황을 만들어 낸다. 그의 작품에서 공기의 특정한 진동 연쇄는 커튼을 계속해서 특별하게 조형하기도 하지만, 관람자에게는 특정한 음악으로 들리기도 한다.
물리적 진동은 합쳐지지만, 소리는 마음속에서 분리될 수 있다
▎공기나 물은 물질의 진동에너지를 전달하는 매질의 예다.
뷔르첼의 작품 속 커튼은 놀랍지만, 우리 인간보다 확실히 지능이 떨어진다. 우리는 뷔르첼 작품 속 커튼을 보며 우리가 커튼보다 지능적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하나의 융합된 음향 속에서 선율과 반주 등을 구분하는 등 적극적인 인지과정을 거치지만, 커튼은 그 융합된 음향에 우리처럼 지능적으로, 분석적으로, 자유롭게 반응하지 못한다.
바이올린과 클라리넷이 같은 선율을 동시에 연주할 때 우리는 두 음색을 구분하지만, 이 음향은 하나의 융합된 공기 진동을 만들어내며, 뷔르첼의 커튼은 이 융합된 진동 덩어리에 역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뷔르첼이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려는 의도를 가졌는지는 잘 모르겠다).
공기의 진동을 우리 귀가 포착하여 뇌가 처리한 것이 소리라는 감각이며, 소리의 의미 있는 연쇄가 감상자에게 음악이 된다. 공기 없이 음악 없다. 공기는 인간을 숨 쉬게 하고 살리게 하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소리와 음악의 전령(傳令)이다. 사실 소리가 곧 공기의 특정 상태다.
따라서 노래를 잘하기 위해서 ‘소리반 공기 반’을 취해야 한다는 주장은 비과학적이다. 그것은 마치 바닷가에서 물 반, 파도 반을 보았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파도가 곧 물의 특정 상태 아닌가.
김진호 국립안동대학교 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