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동건을 만나기 전 나는 그가 푹 삶은 시금치처럼 완전히 지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두밀령 전선만큼은 아니어도 배우로서 나름대로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 그는 지난 1년 동안 체력과 연기력뿐만 아니라, <태극기를 휘날리며>라는 영화 한 편에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고 했다. 폭탄과 총알이 쏟아지는 상황 속에서 집중력을 유지하며 연기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마 배우가 아닌 자는 짐작도 못할 것이다. 그는 광기 어린 캐릭터에 몰입하다가 마침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눈알이 까뒤집어지는 사태에까지 이르렀었다. 시사회장에서 영화를 보니 그 사태가 고스란히 화면에 배어 있었다.
그런데 전 국민이 그 아름다운 광기를 보기 위해서 꼬리에 꼬리를 물며 극장으로 몰려들 시각, 그는 조용히 우리와 이탈리아로 떠나기 위해 공항에 나와 있었다. 우리는 그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과 살아서 공항에 나와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감사하고 있었다.
“피곤하시죠? 그래도 예상처럼 푹 삶은 시금치 꼴은 아니네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검정색 야구모자 아래로 반쯤 드러난 얼굴엔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마크 제이콥스 가죽 재킷에 몸에 잘 맞는 디젤 청바지 때문인지 그는 아직 꽤 싱싱해 보였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끔찍했다. “지난 2주 동안 머릿속에서 벌 두 마리가 붕붕 날아다니는 것 같았어요. 전국을 돌아다니며 무대 인사만 60번을 했으니까. 게다가 그저께 중국에 갔다가 어젯밤에 서울에 도착했으니까 지금 여기 나와 있는 놈은 아마 제 정신이 아닐 겁니다.”
그런데 제 정신이 아닌 남자치고는 책 욕심이 너무 많은 것 아닌가? 티케팅을 끝내자마자 장동건은 서점부터 달려갔다. 내가 서점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한 손에 <세계를 간다> 이탈리아 편을 든 채 또 다른 책을 고르고 있었는데, <이야기 삼국야사>와 <7가지 역사적 대결>, 그리고 <미국 vs 유럽 갈등에 관한 보고서> 사이에서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7가지 역사적 대결>을 선택하는 것 같았다. 그리곤 어디론가 전화를 걸어 또 다른 새로운 책을 추천받았다. “형, 그거 소설이야? 역사물이야? 그래? 알았어.” 장동건은 전화를 끊고는 서점 점원에게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라는 책을 요청하여 받은 뒤 비로소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스타란 대중들로 하여금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게 하는 사람이다. 썩 유쾌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나는 이코노미 클래스에 앉아서 퍼스트 클래스의 장동건을 상상해보았다. 그는 무엇을 하며 10시간이라는 이 지루하고 고통스러운 비행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일까? 나처럼 <애니멀 플래닛>이라는 자연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을 보고 또 보고 있을까? ‘코끼리는 점프를 못한다’ ‘오랑우탄의 절반은 골절상을 입은 적이 있다. 나무에서 떨어져서.’ ‘흰수염고래의 노래 소리는 로켓 발사 소리만큼 크다’ 같은 <애니멀 플래닛>의 자막을 외울지언정 나는 동전짝만한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싶지는 않았다.
장동건이 내 비천한 상상에 답을 해준 건 경유지인 프랑크프루트 공항에서 독일식 정통 소시지를 먹으며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저는 비행기 안에서 영화를 잘 보지 않는 타입이에요. 직업상 보통 사람들처럼 영화를 보며 지루함을 달랠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니까. 영화를 보느니, 저는 차라리 와인 몇 잔 마시고 잠을 청하는 쪽을 택합니다. 사실 배우는 누구보다 편치 않은 상황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는 법을 익힌 자들이라, 그런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더 잘 버틸 걸요.” 그렇게 말하고는 시선을 곧바로 이제 막 읽기 시작한 책(<7가지 역사적 대결>) 쪽으로 내리깔았다.
그런데 그 잠깐 동안 나는 장동건이라는 남자의 자의식과 야망을 본 것도 같았다. 그때 9년 동안 장동건과 함께 일한 스타일리스트가 말했다. “그 책 재밌어? 아까 아침에 동건 씨가 나보고 <아침형 인간> 같은 책을 읽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는데 나도 마찬가지야. 역사책 따위가 재미있을 리가 없잖아. 그거 진짜 재미있어서 읽는 거야?” 장동건은 침묵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건 아마 동건 씨가 누구보다 야망이 큰 남자라서 그럴 거예요. 아까 기내에서 <씨네 21> 이번 호를 보니까 박중훈 씨가 동건 씨에게 이런 말을 했던데, 저는 그게 장동건에 대한 가장 정확한 표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장동건이 오래 가는 힘은, 누구보다 야망과 자신에 대한 기대가 큰 사람이기 때문인데, 중요한 건 절차를 밟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장동건이 그제야 책장을 덮고 이렇게 대답했다. “야망이 크죠. 야망이 큰데,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이나 <돈을 끌어오는 마음의 법칙> 같은 책은 전혀 읽고 싶지 않아요. 그게 야망의 크기 때문인지, 아니면 절차 때문인지는, 그도 아니면 어떤 자의식 때문인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피렌체 Firenze
15시간 만에 피렌체에 도착한 날 밤에 장동건은 가위에 눌렸다. 잠이 살포시 들 무렵이었는데, 문 밖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들어보니 도둑놈들이 그의 방을 침입하기 직전에 나누는 대화였다. 하지만 몸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고 그는 헛기침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매니저에게 간신히 말했다. “홍아, 나 좀 깨워주라.” 자주 있는 일이었다. 장동건은 신체를 이탈하는 이 특이한 경험에 익숙해진 터라, 언제나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매니저를 찾았다. 그럴 때마다 그의 매니저는 늘 ‘그가 또 잠꼬대를 한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사실 배우만큼 스트레스가 많은 직업도 없다. 누군가 스트레스에 대한 실험을 했는데 배우가 공연을 앞두고 분비하는 아드레날린은 차 사고를 경험한 사람이 분비하는 아드레날린의 양과 같다는 결과를 본 일이 있다. 장동건은 말했다. “벼랑 끝의 삶이죠. 항상 위험을 감수해야 하고, 실패의 공포에 시달려야 하고, 많은 관객과 심리적으로 맞서야 하니까.”
우리는 그가 이번 여행에서 배우로서의 위치에서 잠시나마 벗어나 육신의 피로와 정신의 긴장을 풀기 바랐지만 장동건 같은 모범 배우에게 그런 해방은 그리 간단하게 주어지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하지만 여기는 피렌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 도시를 사랑했다. 거리마다 위대한 건축물과 회화가 즐비한 이곳은 도시 자체가 르네상스 문화가 창출한 완벽한 작품이다. 그러니 제 아무리 피곤에 지친 남자라 해도 몸을 일으켜 세워 무작정 걷게 해야 한다. 다행히 이 도시는 아주 작고, 골목도 아주 좁다. 도보 여행을 하기엔 안성맞춤인 것이다.
피렌체 도보 여행에 나서기 직전, 우리는 외출 준비를 하고 있는 장동건의 방으로 쳐들어갔다. 그는 남아용 세라복처럼 보이는 잠옷을 입은 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여성 스태프들이 그의 잠옷을 보며 웃음을 터뜨리자 그의 매니저가 ‘대한항공 퍼스트 클래스에 타면 공짜로 나누어주는 잠옷‘이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럼 그 전에는 뭘 입고 잤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장동건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그 전 대한항공….”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는 우리가 귀공자라고 알고 있는 이 남자는 화장대 위에 놓여 있던 사과를 집어들어 한입 깨물고는 이렇게 말했다. “맛이 없네. 그래서 누가 먹다 말았구나!”
피렌체 관광의 하이라이트는 꽃의 성모교회로부터 시작된다. <냉정과 열정 사이>라는 소설과 영화로 더 유명해진 ‘두오모’ 말이다. 당시 유럽 최대의 상업도시였던 피렌체의 위상에 걸맞게 ‘최대한 장엄하고 호화롭게’라는 취지 하에 1백75년에 거쳐 건설된 건축물이다. 이곳에 오는 여자라면 누구나, 절대로 뒤돌아 내려올 수 없는 것으로 유명한 464계단 위에 오르기를 열망하는데, 그 이유가 정상 테라스에 오르면 360도로 도시 풍경을 조망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은 그곳에서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영화 속 ‘기대감’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얘기는 장동건 같은 남자가 관심 가질 만한 내용이 결코 아니다. 산처럼 솟아올라 이 도시 어디에서나 다 보인다는 이 원형 지붕의 당시 기술력에 대한 얘기라면 모를까. 하지만 원형 지붕은 건축상으로도 기적이라는데 설계자 브루넬레스키가 아닌 다음에야 장동건에게 알아듣게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그 얘기는 그만두었다.
시내의 중심부라고 할 수 있는 두오모 광장에서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우피치 박물관으로 향했다. 우피치는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 미술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르네상스 미술이 그러하듯이 이곳에 오면 누구나 몸의 관능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특히 보티첼리의 <봄>이나 <비너스의 탄생>에 나오는 그 관능적인 여신은 얼핏 들으니 장동건의 이상형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장동건은 단 한 번도 ‘몸’으로 승부한 적이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출신이라고 해봐야 <해안선>에서 웃통 벗고 훈련받는 모습이 고작이었다.
“배우가 된 이후에 몸관리라는 걸 거의 안 했어요. 학교 다닐 때 운동을 굉장히 좋아했는데 그때 했던 걸로 아직까지 버티는 것 같아요. 지금은 배가 나와서 벗고 싶어도 벗을 수도 없구요.” 장동건은 자신의 보잘 것 없는 ‘몸’을 탓했지만 나는 알 것 같았다. 그는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때문에 한동안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렸다. 그걸 극복하고자 그동안 댄디하고 말쑥한 자신의 외적인 이미지에 정면으로 반기를 드는 작품만 선택해 왔고, 그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온힘을 쏟아부었다. 말하자면 자기 얼굴을 지우는 데 12년이 걸렸는데, 그 몸 같은 건 아예 신경쓰고 싶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그의 전속 스타일리스트 말에 의하면 그는 오랫동안 배우가 요란하게 몸치장하면서 패션 리더처럼 보이는 것에 대해서도 반감이 컸다고 한다. 배우가 ‘뭔가 꾸민다’는 게 싫어서 소설도 읽지 않고, 옷도 일부러 약간 촌스럽게 입는다니 얼마나 역설적으로 재미있는 말인가? 장동건은 언제나 작품으로나 이미지로나 스타보다는 배우이기를 원했는데, 깎은 듯이 잘생긴 아이돌 스타로 시작했기 때문에 그 반동의 크기가 컸던 것 같다.
그런데 알고 보니 장동건은 밀레니엄을 맞아 단테의 <신곡>을 읽자고 결심한 남자였다.
‘단테의 집’을 지나칠 때 나는 장동건에게서 그 얘기를 들었고, 대중 스타답지 않은 그의 색다른 도전에 새삼 감탄했다. 물론 다 읽지는 못했다. <자본론>이나 <신곡>을 읽었다는 남자는 대부분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 만큼 어려운 책이다. 하지만 뭐 그건 결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건 ‘연기는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소모시키는 일이라, 아마 그때 뭔가 새로 채울 것을 찾고 있었을 거다’라는 장동건의 말처럼 ‘몸관리’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방식으로 그가 줄곧 ‘배우 장동건’을 관리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날 저녁 우리는 토스카나 요리를 잘한다는 레스토랑에서 오랫동안 저녁을 먹고 와인을 마셨다. 그리고 분위기가 좋았는지 호텔까지 30분도 넘는 거리를 걸어서 가기로 했다. 먹다 남은 와인을 챙겨들고 나간 장동건은 어두운 골목에서 휘파람을 불었다. 노래방에서 임재범의 ‘고해’를 즐겨 부른다는 이 남자의 휘파람 소리는 비 내리는 밤에 꽤 애수 어리게 들렸다.
누군가 그에게 배우가 돼서 못하는 게 있냐고 묻자, 그는 씩 웃으며 “연애요.”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서너 명의 여자 스태프들이 한 목소리로 묻었다. “왜요?” 장동건은 그 질문에는 대답하지 않고 대신 엉뚱한 얘기를 꺼냈다. “그건 그렇고, 요즘은 여자들이 밥 하는 게 드문 풍경이라면서요? 일전에 일간지 여기자들이랑 얘기하다가 깜짝 놀랐어요. 결혼해서 밥 못 얻어 먹을까봐 하는 소리가 아니라, 그런 얘기를 들으면 왠지 제가 시대에 뒤쳐진 인간 같다는 생각이 들 거든요.”
피렌체에서 우리는 페라가모의 갤러리 아트 호텔에서 묵고 있었다. 방마다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품을 찍은 사진 작품이 걸려 있고 호텔 로비에서는 조르디 라반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지만 전시 수준은 호텔 이름에 걸맞는 구색 맞추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로비 양 옆에 자리잡은 레스토랑과 트렌디한 퓨전 바만큼은 분위기가 꽤 괜찮았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7시쯤 만나서 저녁을 먹기 전에 비노(이곳에서는 와인을 이렇게 부른다)를 한 잔 걸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걸 ‘아뻬르띠보’라고 부른단다. 우리는 저녁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 아뻬르띠보 시간을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하지만 말이 대화지 여자 스태프들이 두서없이 장동건에게 질문을 해대고 그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여자들: 개인적으로 가장 애착이 가는 작품은?
장동건: 당연히 <친구>. 나로서는 최고의 모험이었으니까. 사투리도 그렇고, 대중이 좋아하는 내 이미지를 처참하게 무너뜨렸으니까.
여자들: 그럼 <인정사정 볼 것 없다>는?
장동건: 사실 그건 멋도 모르고 한 거야. 시나리오를 읽어도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겠더라. 그냥 박중훈, 안성기 두 선배만 믿고 한 거지. 그런데도 연기 잘했다는 평을 듣는 건 아마 대사가 적어서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여자들: 어떤 기준으로 작품을 선택하는데?
장동건: 내가 잘할 수 있는 역! 그리고 악역! 예를 들면 개인적으로 <올드 보이>에서는 최민식보다는 유지태가 맡은 역이 더 흥미로워.
여자들: ‘태극기’가 승승장구하고 있긴 하지만 표절 혐의와 할리우드 콤플렉스에 대한 크리틱이 있는데, 그것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는데?
장동건: 이해와 해석이 다르다는 점은 인정하는데, 모든 사람들이 너무 너무 고생한 작품이라 솔직히 그런 얘기 들으면 화나지.
여자들: 그런데 장동건은 진수처럼 동생을 위해서 그렇게 희생할 수 있는 사람이야?
장동건: 최소한 머리로는 이해해. 그런데 진짜 나라면 자신 없지.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 하지만 진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입장이잖아.
여자들: 동건 씨는 동건 씨 왼쪽 얼굴이 좋아, 오른쪽 얼굴이 좋아?
장동건: 그야, 우열을 가릴 수 없지.
사실 나는 이번 여행이 두려웠다. 얼핏 근사하게 들리겠지만 유명 배우랑 9박 10일 동안 함께 여행을 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다. 여행이란 때때로 서로 잘 알고 있다고 믿는 절친한 친구조차 일순간 꼴도 보기 싫게 만드는 아주 피곤한 일이다. 그런데 그걸 배우와 함께하다니? 내가 아는 한 그들은 연기를 통해 지속적으로 자기 도취에 빠져야만 하는 직업을 가졌다는 점에서 거의 신경성 환자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유명 배우와의 여행은 내 인생 최악의 경험이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런데 장동건은 달랐다.
피렌체에서 베네치아로 떠나던 날은 여행의 피로가 슬슬 밖으로 드러날 시기였다. 우리는 베네치아로 가기 위해서 기차를 타야만 했다. 그런데 짐이 너무 많았다. 자잘한 짐을 빼고 대형 트렁크만 총 12개가 있는데 인원은 고작 8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기차를 놓쳤다. 짐 때문에 오도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다음 기차를 기다렸다. 모두들 배가 고팠다. 우리는 기차역 한복판에서 마른 오징어를 뜯고 햄버거를 먹었다. ‘장동건을 기차역에 세운 채 오징어를 먹인 잡지’는 우리가 처음일 거라며 다같이 웃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스타에 대한 융숭한 대접은커녕 우리는 그에게 걸핏하면 무거운 짐을 들게 했다. 그의 매니저는 지난번 ‘태극기’를 촬영하면서 크게 다쳤다는 장동건의 무릎 연골을 걱정했지만, 그는 누구보다 열심히 짐을 날랐다. 그리곤 피곤한지 기차역에서 트렁크 위에 누워 잠을 청했다. 이것이 촬영장 어디에서나 ‘열심히 하는 사나이’의 진면목을 보여준다는 장동건의 진가인가 싶었다.
베네치아 Venezia
무거운 짐을 끌고, 비를 맞고, 기차를 놓치는 우여곡절 끝에 베네치아 산타 루치아 역에 도착하니 모든 것이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게다가 미친 듯이 퍼부어대는 폭우 속에서 수상 택시를 타고 호텔에 도착했을 땐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가 된 기분이었다. 맙소사! 그곳은 저 홀로 18세기였다. 18세기 귀족처럼 화려하게 차려 입은 사람들이 홀에서 춤을 추고 있었다. 이들은 다 누구인가? 생고생을 하며 이곳에 온 우리들을 깜짝 놀래켜주려고 호텔 측에서 고용한 연기자들이 아닌가 싶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베네치아는 마침 축제 기간이었다. 그 유명한 베네치아의 카르네 발레(사육제) 말이다. 아침이 되어 산 마르코 광장에 나가보니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형형 색색의 가면과 환상적인 고전 의상을 입은 베네치아 사람들이 가는 곳마다 즐비하고, 그들과 함께 축제를 즐기고자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거리는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카니발 기간 중에는 누구도 가면을 쓰는 기쁨과, 변장한 옷을 입는 매력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다고 한다. 가면복장으로 참여하는 주민과 방문객들은 다른 사람에게는 가면복장 차림의 자신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 자신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타인의 가면복장과 행동을 지켜보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낯설고 혼잡한 도시에서 가이드 역할을 한 건 장동건이었다. “리알토로 가려면 여기서 우회전을 해야 해요.” 그는 한 번도 와본 적이 없다는 도시의 골목 골목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툼 레이더에 다 나오는 곳이거든요.” 한동안 툼 레이더 게임에 빠져 있었단다. 그래도 그렇지 정말 대단한 관찰력이다. 점심 식사를 하면서 하도 신기해서 그의 취미 생활에 대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원래 게임을 좋아하세요?” “한때 빠져 있었어요.” “그럼 스타 크래프트도 하세요?” “스타도 재미있지만 정신 건강에 안 좋은 것 같아서 잘 안 해요. 내가 애써 만들어놓은 게 부숴지면 무지하게 화가 나거든요.” “다른 레포츠는요?” “여름에는 주로 제트 스키를 타는데 겨울에는 집에서 꼼짝도 안 해요. 추운 게 싫어서. 그래서 요즘엔 이종 격투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어요.” 장동건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나 싶어 입을 벌리고 듣고 있는데 대체로 침묵으로 일관하던 그의 매니저가 한마디 거든다. “호기심이 많아요. 한 번은 TV 보다가 느닷없이 번지점프 하러 가자고 해서 제가 얼마나 진땀을 흘렸는데요.”
물 위의 도시, 베네치아는 경이로움으로 가득 찬 곳이었다.
이곳은 6세기, 이민족에 쫓긴 롬바르디아의 피난민들이 생사를 걸고 물 위에 수천만 개의 나무기둥을 박아 건설한 도시다. 그 생성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도심 한복판에 그들이 건설한 다양한 양식군의 건축물들을 보면 그야말로 입이 쩍 벌어지고 만다.
특히 비잔틴-로마네스크 양식의 산 마르코 성당과 우아한 베네치아-고딕 양식의 총독궁(팔라초 두칼레)을 중심으로 산 마르코 광장이 연출하는 오리엔트풍의 장려하고 환상적인 풍광은 압권이다. 장동건도 산 마르코 광장의 매력에 흠뻑 취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 여기가 너무 좋아요. 신기루 같잖아요. 뒤돌아보면 사라질 것 같고…, 안개가 끼니까 더욱더 지상이 아닌 것 같아요. 저는 좀 촌스럽지 않나 싶을 정도로 애국심이 많은 사람인데, 이런 장관을 보니까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줄어드는 것 같아요. 인간이 이런 걸 만들 수 있다니 정말 놀라워요.” 장동건의 마지막 말을 들으면 나는 베네치아를 두고 영국 작가 앤서니 버제스가 했던 찬사를 떠올렸다. “인간이 이런 도시를 세울 수 있다면, 인간의 영혼은 구원받을 가치가 있다.”
그 산 마르코 광장에서 비를 맞으며 본 플라멩코 공연은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였다.
심장을 파고드는 구슬픈 플라멩코 음악에 맞추어 몸에 잘 맞는 검정 수트를 입은 남자 댄서가 춤을 췄는데 관객을 압도하는 힘이 굉장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카리스마 있는 배우로 한창 연구되고 있는 장동건조차도 빗속에서 1시간 이상 꼼짝 않고 서서공연을 봤다.
그는 말했다. “바로 저런 게 진짜 카리스마죠. 다른 여자들이 나와서 춤을 추고 있을 때조차도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 저 남자만 보게 되잖아요. 연극 무대에서도 그렇거든요. 무대 위에 배우가 아무리 많아도 항상 시선이 가는 사람이 따로 있어요. 영화나 드라마는 카메라가 관객의 시선을 정해주니까 어떤 면에서 배우의 카리스마를 운운하기에 무리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저는 아니죠.”
우리는 18세기에 머물러 있는 도시 베네치아의 경이로움에 완전히 압도되어 카페 플로리안으로 몰려갔다. ‘카페 플로리안’은 1720년에 문을 열어 수많은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곳으로 유명한 곳이니까. 우리는 그곳에서 장동건의 옛날 이야기를 들었다.
“초등학교 때는 정말로 대통령이 되고 싶었어요. 3학년부터 반장 부반장, 회장 같은 임원을 도맡아 했는데 그때는 그게 또 적성에 맞는 것 같더라구요(웃음). 아주 외향적인 아이였죠. 그런데 중학교 올라가서 갑자기 내성적인 타입으로 변했어요. 제대로 놀지도 못하면서 공부도 안 하는, 뭐 한마디로 별 볼일 없는 애였어요. 결국 삼수를 하더라구요. 첫해는 전기만 봤는데, 삼수할 때는 전기, 후기, 전문대, 체대까지 다 봤어요. 그러다가 우연히 광고기획사 사람이 내민 명함 한 장이 인연이 돼서 CF를 찍게 된 거예요.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아시고 기왕하려면 제대로 하라며 MBC 탤런트 시험 원서를 갖다주셨어요. 근처 여고에 제 팬클럽이 있긴 했지만 워낙 내성적인 타입이라 전혀 기대감도 없었거든요. 그래서 대본을 그냥 큰소리로 읽기만 했는데 2차를 통과하더라구요. 3차 카메라 테스트에서는 특기가 뭐냐고 묻는데, 옆 부스 아이가 태권도라고 대답하는 걸 듣고, 저는 ‘농구’라고 대답했어요. 농구를 좀 잘 하긴 했거든요. 그랬더니 다른 심사위원이 군대는 갔다 왔냐고 묻더라구요. 그래서 고3 때 기흉이라는 폐수술을 받아서 면제받았다 했죠. 그랬더니 합격시켜 주더라구요. 처음에 병무청 갔을 때 방위 받을까봐 수술 사실을 숨겼거든요. 군대까지 가서 어머니 도시락 싸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나중에 면제 대상이라는 걸 알고 재검을 받았어요. 어쨌든 굉장히 기뻤어요. 합격자 명단에서 6번이나 내 이름이 없는 패배감을 맛보았던 터라 합격의 기쁨이 대단했죠. 게다가 합격하자마자 <우리들의 천국<의 주인공으로 발탁됐으니까, 엄청 운이 좋았던 거죠.”
그리고 나서 그는 잠시 침묵했다가 한참 만에 말을 이었다.
“배우라는 직업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었거든요. 배우를 꿈꾼 적도, 배우가 되기 위해 도전한 적도 없었는데 그냥 운좋게 시작해서 배우가 됐어요. 그 전까지 삼수를 하면서 누구보다 가슴앓이를 심하게 했거든요. 내가 뭘 하고 싶은지도 몰랐어요. 그러다가 우연찮게 배우가 됐는데 그게 재미있더라구요. 행복했죠. 우연히 내 정체성을 찾은 거예요. 그러니 얼마나 소중하겠어요? 이 일이….”
나는 이 시점에서 느닷없이 이렇게 묻고 싶어졌다. 전 생애를 통해 궁극적으로 니가 바라는 게 뭐냐고? 장동건은 대답했다. “어려운 질문이네요. 질문에 맞는 답인지는 모르겠지만, 일을 하면서 행복을 느낄 때까지만 배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예전에는 무턱대고 평생 직업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죠. 그런데 나라는 인간한테는 명예욕과 물욕이 동시에 있다는 걸 알았어요. 그 진실을 인식하면서부터 일하면서 내가 느끼는 행복이라는 이 원초적인 감정에 더 가치를 두게 된 것 같아요.”
밀라노 Milano
기차를 타고 다시 밀라노로 가는 날은 눈이 왔다. 기차역 입구에서 담배를 꺼내 물며 장동건이 말했다. “어휴, 서울에서도 안 맞아본 눈을 다 맞네.” 나는 웃었다. 기차역 한가운데 서서 햄버거를 먹고 트렁크 위에 잠을 청하던 장동건을 떠올렸다. 그에 비하면 밀라노까지 가는 길은 너무 순조로웠다. 유로스타 안에서 장동건은 내내 책을 읽었다. 출발하는 날 공항에서 전화를 걸어 박중훈에게 추천받았다는 책,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이었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데요. 갈매기들은 이혼 커플과 레즈비언 커플이 많대요. 동물들이 죽음을 애도하고 때로는 거짓말을 한다니, 정말 놀랍지 않아요?” 장동건은 그렇게 말하며 다른 사람에게도 읽기를 권하고 자신은 로모 카메라를 꺼내 사진을 찍었다.
밀라노에서의 시간은 생각나는 게 없다. 장동건이 구찌 쇼에 참석했던 일 빼놓고는 특별한 일이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 날이 왔다.
우리는 마지막 날 한식집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먹고 밀라노에서 가장 물 좋다는 ‘G 라운지’에서 춤을 췄다. ‘필 받으면 나도 춤을 춘다’던 장동건에게도 ‘필’이 왔다. 그리고 각자의 방으로 올라가기 전 장동건은 스태프들을 일일이 껴안으며, ‘98년 한재석과의 유럽 배낭 여행 이후 가장 끔찍한 여행이라 오래 기억에 남을 거라며, 중국 가기 전 3월 11일 날 서울에서 다시 한 번 뭉치자’고 말했다.
3월 12일은 장동건이 중국으로 떠나는 날이다. 첸 카이거 감독의 신작 <더 프라미스>의 주연으로 발탁되었기 때문이다. 3백억원 규모의 할리우드 자본으로 제작되고, <매트릭스>의 무술 감독과 <와호장룡>의 촬영팀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아시아 최고의 블록버스터 영화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우리의 장동건이 이 영화에서 일본 배우 사나다 히로유키와 함께 공동 주연을 맡은 것이다.
베네치아의 어느 허름한 중국집에서 장동건은 볶음밥을 먹으며 <더 프라미스>에 대한 얘기를 들려줬다. 국내 언론에는 ‘아직 공개할 수 없다’고 비밀에 붙이고 9박 10일 동안 동거동락한 <바자>에게만 특별히 공개한다는 얘기는 이렇다.
“첸 카이거 감독이 어느 날 전화를 해서는 <친구>를 아주 잘 봤다며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오랫동안 서로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이번에 결정된 거예요. 이 영화는 한마디로 중세시대를 배경으로 한 ‘판타지-액션-로맨스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제가 맡은 역은 노예고, 일본 배우가 장군이죠. 그런데 그 일본 배우를 만나보니 60년생인데 굉장히 멋진 배우더라구요. 그래도 저 엄청 대우받고 가요. 개런티도 한국 영화에서보다 많이 받고 저 한 사람을 위해서 한국 음식 해주는 요리사도 따로 붙여주거든요. 사실 그게 제일 고역이거든요. 몇 개월 동안 한국 음식 못 먹는 거.”
사람들은 지금 장동건 앞에는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어 보인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은 더 높이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는 일이다. 스태프들과 말도 안 통할 터이니 아마 더욱 힘들고 외로운 시간이 닥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그 벼랑 끝에서 아마 웃고 있을 것이다. 9박 10일 간의 여행을 통해서 알게 된 장동건은 그런 남자였다.
첫댓글 멋지다!
와~ 다 읽었다...-_-(얼마나 할일이 없었으면..) 그나저나 작년에 배낭여행 갔던거 생각나네요. 베네치아에서 쪄죽을뻔 했었는데...하긴 아름답고 멋진 도시임에는 틀림없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