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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7월 9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마태오 9,18-26)
"Courage, daughter!
Your faith has saved you."
말씀의 초대
호세아 예언자는 북부 이스라엘에서 예로보암 2세 통치 말기부터 사마리아가 함락되기까지(기원전 750-722년) 활동하였다. 호세아는 자신의 슬픈 혼인 생활의 체험으로 주님과 백성 사이의 관계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호세아는 아내를 잊으려 해도 잊을 수가 없다. 사랑은 받은 상처보다 더 위대한 법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당신 백성을 그렇게 대하신다(제1독서). 소생과 치유의 두 가지 기적이 일직선 위에서 이루어진다. 주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려고 가시는 길 위에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를 고쳐 주신다. 예수님에 대한 야이로와 여자의 믿음이 딸을 구하고, 앓던 병을 낫게 하였다. 믿음은 주님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탁을 뜻한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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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야이로는 회당장으로서, 고을에서 제법 권위와 덕망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딸의 죽음 앞에서는 인간의 권위나 덕망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문을 들었지만, 회당장으로서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 놓고 인정할 수 없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그저 무덤덤하게 자기 직분이나 수행하면서 살았을 겁니다. 그런데 느닷없는 딸의 죽음에 그는 주저하지 않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처지를 고백하고 청원을 드립니다.
혈루증을 앓던 한 여인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벌써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부정을 탈까 봐 그녀를 멀리합니다. 같은 동네에 살지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당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마을에 오신다는 소문을 듣습니다. 그러나 감히 나서지 못합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자기 곁으로 지나가실 때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기만 해도 자기 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한 가닥 믿음뿐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끝없는 사랑을 알게 모르게 체험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 체험이 주님의 은총이었다는 사실을 잘 인정하려 들지 않거나, 인정하더라도 곧 잊어버리고 맙니다. 하찮은 것에서도 주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다가오신다는 것을 언제나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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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 나오는 야이로는 유다교의 회당장입니다. 예배를 주관하고 행정 업무를 책임진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체면을 버리고 예수님 앞에 엎드립니다. 딸을 잃은 아버지였기에 애절하기 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아마 그는 울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없이 그를 일으키십니다. 그의 겸손과 열정을 보시고 방문을 결심하신 겁니다. 그때의 장면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하혈하는 병에 걸린 여자도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녀 역시 부끄러운 병으로 고생하고 있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을 테지.’ 이론이 필요 없는 순간입니다. 믿음만이 힘을 발휘하는 순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에게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분의 따뜻함입니다. 그녀는 평생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죽은 소녀를 지키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출현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회당장을 만류했을 것입니다. 이미 끝났는데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가느냐며 붙잡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끝났다고 믿지 않은 사람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끝났다고 체념하면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방해 받으시는 예수님
- 강신모 신부-
복음서를 읽다 보면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방해를 받으시는 장면이 종종 나옵니다. 가르치고 계실 때 중풍 병자와 그 친구들이 방해를 합니다. (마르 2, 4) 휴식도 방해받습니다. (마르 6, 33) 제자들이 기도를 방해하기도 합니다. (마르 1, 36)
오늘 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혈루증을 앓는 여인으로부터 방해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죽어가는 회당장의 딸을 치유하시기 위해 서둘러 그 집으로 발걸음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입니다. 그녀의 병은 만성질환입니다. 시급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에게 화를 내지 않으십니다. 바쁜 발걸음을 멈추시고 그녀를 격려해 주십니다.
미사 전에 고해성사를 주다가 시간이 다 되어 서둘러 제의방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저의 발걸음을 막아서는 신자들이 가끔 있습니다. 별로 시급한 일도 아닌 “축성 좀 해주세요.” 라고 하면서. 새 신부 때는 그런 신자들에게 “지금 내가 미사 시간에 쫓기는 것이 안 보이십니까 ?” 라고 퉁명스럽게 면박을 주곤 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참 잘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면박을 줄 시간이면 충분히 축성을 해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끊임없이 방해를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기쁜 마음으로 방해하는 사람들을 환대하신 예수님을 생각합시다.
“나는 생애 내내 내 일이 방해 받는다고 불평해 왔다.
그러나 마침내 나는 알았다.
방해 받는 것이 바로 내 일임을” (헨리 뉴엔)
우리의 부족한 기질도 이용하시는 하느님
-이준석 신부-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을
경축 이동하여 지내는 날입니다.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로 알려진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어린 나이에 머나먼 타국에서 온갖 고초를 견디며
사제품을 받으셨고 체포되신 후에는 온갖 고문과 회유에도 굴하지 않고
약관의 나이에도 담대하게 신앙을 증언하다가 삶을 마감하신 한국천주교회의
대표 성인이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훌륭한 면모 뒤에는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그분의 약점도 있었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신학 공부를 가르쳤던
스승들은 김대건 성인이 신중하지 못하며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평했습니다.
한마디 의논도 없이 위험을 무릅쓰고 국경 지역을 넘나드는 김대건 성인을
보고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들은 ‘행동이 주의 깊지 못하다.’는 평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김대건 사제를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훌륭한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고초를 당할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결국 일하시는 분은
우리가 아니라 우리를 통해 역사하시는 하느님의 영이십니다. 그러니
스스로 돌아보기에 자신이 한없이 어리석고 모자라고 초라해 보일지라도
실망하지 말고 기쁘게 주님과 이웃을 위해 봉사합시다.
사랑의 기, 생기
-김찬선신부-
저를 요즘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아프리칸 바이올렛이라는 꽃입니다.
이것이 꽃을 피운 것입니다.
꽃 하나 피운 것이 뭐 그리 기쁨이 될까 생각하는 분도 계시겠지만
저에게는 이것이 일생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꽃을 피운 적이 없습니다.
축일이나 어버이날 꽃이 핀 화분을 받아도
그 꽃이 지고나면 다시 꽃을 피우지 않습니다.
잎은 무성해도 꽃은 피지 않는 것,
그것이 제가 지금까지 꽃을 키우는 식이었습니다.
저의 사랑은 이 정도,
즉 죽이지 않고 잎만 무성하게 하는 정도인가보다 하고
매번 저 자신의 사랑에 대해 실망을 했었지요,
이렇게 실망을 했던 이유는 사랑의 기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요.
꽃도 음악을 좋아하고 사랑을 느낀다는 실험결과를 저는 믿습니다.
실제로 어느 수녀님이 같은 꽃을 두 개 키우면서
하나는 매일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서 키웠고
다른 하나는 그저 물만 주면서 키웠는데 차이가 있었답니다.
일부러 그렇게 키웠기에 처음서부터 다 컸을 때까지
수녀님은 그 성장의 차이를 사진으로 찍어 보여줬답니다.
저는 그 실험결과를 믿습니다.
그러니 저는 사랑으로 키운다고 하지만
저에게서 사랑의 기 또는 生氣가 나가는 것이 아니라
미움의 기 또는 殺氣가 나가는 것이 아닌지,
적어도 無生氣가 나가는 것이 아닌지 자못 심각하게 생각해왔지요.
이것이 사실이라면 정말 심각한 얘기지요.
생기가 아니라 살기가 나가는 사람,
살리는 사람이 아니라 죽이는 사람,
이것이 저라면 심각하게 반성을 해야 마땅하지요.
오늘 복음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과 접촉하기를 원합니다.
회당장은 자기의 죽은 딸에게 손을 얹어주기를 주님께 청했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은 몰래 옷자락만 만졌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모르고 계셨고 그래서 의지적으로
사랑과 치유의 기를 불어넣어주지 않으셨어도
사랑의 기, 생기가 나가 여인의 오랜 병을 고치십니다.
어제 일이 생각납니다.
월례회를 하는데 어제는 유난히 여러분이 안수를 청하셨습니다.
저는 언제나처럼 의지적으로 열심히 기도하고 안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러는 저에 대해 비판적으로 반성한 적이 많습니다.
단 번에 기도의 응답이 있었던 엘리아와 달리
칼로 몸에 상처를 내고 오랫동안 기도를 해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던,
엘리아와 대결을 했던 거짓 예언자처럼
제가 존재는 그러지 못하면서 의지적으로 다시 말해 억지로
사랑의 기와 생기를 내려고 기를 쓰고나 있지 않은지.....
저도 오늘 복음의 주님처럼 의식하지 않고
그래서 의지적으로 사랑과 치유의 기를 발하려 하지 않아도
사랑과 치유의 기가 저절로 솟아나는 그런 존재가 되기를,
존재가 바로 그런 존재이기를 오늘 기도합니다.
죽어야 다시 산다는 믿음
-전삼용신부-
샌 프란시스코의 금문교라는 다리를 공사할 때의 일입니다. 다리가 너무나 높고 위험하므로 기술자들의 마음이 늘 불안했습니다. 일을 하다가 밑을 보게 되면 현기증이 일어나 불안과 공포심이 생겼습니다. 그뿐 아니라 다리도 부들부들 떨리고, 일의 능률도 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공사 도중에 다섯 명이나 다리 아래 바다로 추락하는 사고가 발생했습니다.
샌프란시스코시 당국에서는 기술자들의 안전을 지켜 주기 위해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생각했습니다. 그 방법들 중의 하나가, 공사가 진행되는 아래쪽에다가 철사로 만든 그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공사장 아래쪽에 그물을 치고 나니까 신기하게도 그물 위에조차 떨어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물이 쳐져 있으므로 일하는 사람들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그 뒤부터 일도 잘 할 수 있었고, 다치는 일도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이렇게 우리를 진정으로 죽이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공포입니다. 만약 죽어도 다시 살 수 있다는 믿음만 있다면 죽음의 공포 속에 떨면서 살아갈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마찬가지로 다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면 당신 목숨을 내어놓으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목전에 있는 것을 아시면서도 그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당당히 올라가셨고 그렇게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석사 논문 발표 때 그리스도론 교수님께서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믿음이 곧 구원이고 생명이라고 썼는데, 그렇다면 그리스도는 믿음이 있으셨나?”
그리스도께서 믿으셔야 했던 대상은 당연히 하늘에 계신 아버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하느님으로서 어떻게 같은 분을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톨릭 교리의 가장 중요한 획을 그으셨던,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은 ‘아들은 아버지와 같은 분이시고 항상 함께 계시고 항상 그 분을 보시기 때문에 아버지께 대한 믿음이 있을 수 없다.’라고 결론 내리셨습니다. 보지 못하는 것을 믿는 것이지 보이는 것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생명을 준다.’는 명제가 옳은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도 당연히 믿음을 지니고 계셨어야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한 신앙의 ‘모델’이 되셔야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아버지, 아버지,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는 아버지와 아들의 단절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죄를 지을 때 하느님을 보지 않았듯이, 완전한 죄의 보속은 하느님과의 단절된 상태에서 이루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다시 부활시키신 것은 바로 아들의 이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당신을 버리셔서 보이지 않는 아버지를 끝까지 믿고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그 생명을 다시 받으실 수 있으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죽이는 ‘믿음’이 없고서는 어떠한 ‘생명’도 얻을 수 없다는 진리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병에 걸려 예수님의 옷자락을 잡은 여인에게도,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바로 이렇게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는 믿음에서 비롯됩니다.
또 회당장의 딸도 비록 죽어있었지만 아버지의 믿음으로 부활합니다. 예수님은 통곡하는 이들에게 그 딸은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들은 비웃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곧 생명임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내쫓으십니다. 그럼으로써 죽은 이는 다시 생명을 얻고 그리스도를 믿기를 원치 않는 이는 생명에서 쫓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성당의 천지창조 중 아담의 탄생을 그릴 때 하느님과 아담이 서로 손가락이 마주치는 모습으로 그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그 두 손가락을 비교해보면 아담의 손가락은 힘이 없이 축 늘어져있고 하느님의 손가락은 힘 있게 곧게 펴져있습니다. 이는 사람의 모든 에너지와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혈병을 앓던 여인은 그리스도의 생명이 손을 뻗어 그분의 옷자락을 잡은 자신의 손을 통해 자신 안에 퍼진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만약 우리에게도 이런 믿음이 있다면 우리는 매 순간 결코 그분의 옷자락에서 손을 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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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장경선 수사-
우리가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 특히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지푸라기 하나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그 절망에서 빠져나오고 싶어 합니다.
그래서 아주 실낱같은 희망에도 큰 기대를 겁니다.
수치심을 자극해도 아랑곳 하지 않고 자신의 딸을 살려달라고 담대하게 외치던
가나안 여인과는 다르게, 오늘 복음의 이 여인은 용기없고 가냘픈 심정으로
군중 사이에서 떼밀려가시던 예수님의 옷깃 한 자락이라도 잡고자 했습니다.
그 여린 믿음을 알아채신 예수님께서는 “꺼져가는 심지처럼 깜박인 듯한
그 작은 믿음을 알아보겠다”라는 듯 여인에게 용기를 내라고 하십니다.
남에게 드러내기조차 부끄럽고 변변찮은 믿음. 마치 어느 깊은 산골 바위틈
사이에 피여 있는 이름모를 작은 야생초이지만 그를 외면하지 않으신
주님의 눈길로 인하여 한 생명이 살아 있고 또한 살 수 있다는 용기를 주십니다.
주위에 수많은 군중이 있었지만 그들 눈에 드러나 보이지 않던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속삭여줍니다. “너 안에 담긴 그 작은 희망의 불씨, 그 믿음이
너를 살렸다. 나에겐 그것도 소중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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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손
-송동림 신부-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 계실 때의 이야기입니다.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는 누워 계실 때가 많았는데, 제가 방학 때 인사를 드리면 가만히 웃으며 제 손을 잡아주셨습니다. 그리고 한동안 놓지 않으셨습니다. 건강에 관한 이야기 등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건네면서 제가 방을 나설 때까지 손을 잡고 계셨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제가 찾아뵐 때마다 변함없이 보여주셨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 느낌이 남아 있는데, 아흔이 지난 할머니의 손이 거칠어도 저는 그 손에서 늘 할머니의 따스한 마음을 읽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한 회당장이 예수님께 와서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으로 가 누워 있는 소녀의 손을 잡으시자 소녀가 일어납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소녀를 살린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힘없이 축 늘어진 연약한 손에 예수님의 생명의 손길이 닿자 소녀가 살아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잡는 행위를 통해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인간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히실 그 손으로 인간을 치유하십니다.
손은 능력입니다. 사랑을 전달하고 눈으로 보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주며 말을 못하는 사람에게는 언어가 되어줍니다. 영국의 과학 잡지 「네이처」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길과 손은 자녀의 신경조직을 자극하여 정서적 안정과 신체적 발육을 촉진한다.’고 했습니다. 특히 어머니가 아이의 머리나 얼굴 등 몸을 쓰다듬는 신체적 접촉이 피부의 신경세포를 따라 대뇌에 전달되어 아이들의 정상적인 발육에 긍정적인 도움을 준다고 합니다.
태초의 하느님의 손을 생각해 봅니다. 아담과 하와는 그들의 손으로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음으로써 세상에 죄를 가져왔고, 카인은 아우 아벨을 그의 손으로 죽임으로써 이 땅에 폭력과 살인이 발생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손을 들어 자손을 축복하셨고, 모세의 손을 들어 전쟁에서 승리하게 하셨으며 사무엘의 손을 들어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게 하셨습니다. 종종 인간의 손은 상처를 주지만 하느님의 손은 상처를 치유해 줍니다.
주님의 따스한 손길이 사람들의 폭력적인 손을 붙잡아 주시고, 우리 손을 축복의 도구가 되게 하시며 우리 손이 주님의 손처럼 쓰일 수 있도록 우리의 손을 만져주시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의 손이 아닌, 주님의 손에 의지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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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불행 앞에서>
-양승국신부-
거듭되는 탈선과 비행으로 갈 데 까지 간 청소년의 어머니들이나 고질적인 알콜 중독자 남편을 마지못해 견뎌내고 있는 자매님들을 만나게 되면 참으로 괴롭습니다. 뭐라고 위로의 말도 건네기 힘듭니다.
만일 제가 이런 말로 위로를 했다면 잘 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자매님,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자매님께서 겪고 계신 지금의 고통은 하느님께서 자매님에게 주신 십자가입니다. 힘들 때 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인내와 사랑으로 그저 묵묵히 십자가를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한편으로 제대로 된 충고 같기도 하지만, 최선의 충고는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내가, 그리고 이웃이 겪고 있는 견딜 수 없는 고통, 인간의 모순, 구조적인 악 앞에서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며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일까요?
물론 때로 체념, 포기, 수용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고통과 악과 모순을 퇴치하기 위한 적극적 대응입니다.
그 자매님께서 문제 청소년 자녀나 알콜 중독자 남편을 인내와 사랑으로 감싸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자세가 있습니다. 그들을 그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 해보는 것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시켜야 할 것입니다.
많은 분들, 자신에게 다가온 불행이나 기막힌 사건 앞에서 원인을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하기보다는 넋 잃고 앉아 있다가 최종적으로 하시는 말씀, “이 모든 게 다 하느님의 뜻이겠지.”
인류 역사상 가장 정직하고 소신 있었던 신학자 중에 한분이셨던 본 회퍼 목사님은 폭군 히틀러의 명령을 거부했기에 나치들에 의해 교수형에 처해졌습니다. 산살바도르의 로메로 대주교님은 군부독재 체제 아래서 끔찍한 고통에 시달리던 민중 편에 서셨기에 제단에 서신 채로 암살당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인류의 고통 앞에서 적극적으로 대처하신 분들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각자의 행복을 원하시는 분이시지, 우리가 끔찍한 고통 아래 짓눌려 살아가기를 원하시는 분이 절대로 아니십니다. 하느님이 고통을 통해 우리를 징벌하실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갖가지 고통 앞에 인내와 포기, 수용도 때로 필요하지만, 그에 앞서 더욱 필요한 자세는 적극적인 대응입니다.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난 데 없이 다가온 고통 앞에서 우리는 끝없이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이 고통이 내 힘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인가, 지금 이 지옥 같은 상황이 내 능력으로 바꿀 수 있는 상황인가, 지금 이 상처가 우리의 사랑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처인가?’
그리고 어쩔 수 없는 것들은 우리 주님께서 지신 신비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이미 죽은 회당장의 딸과 오랜 세월 혈루증으로 죽어가고 있는 한 여인을 되살려주시는 예수님의 치유활동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치유의 배경을 한번 눈 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겠지만 예수님 시대 당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매일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갖은 병고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두 사람은 어떻게 치유를 받았습니까?
이미 딸이 죽었지만 한번 살려보겠다는 회당장의 적극성으로 인해 딸은 죽음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건너왔습니다. 그분은 반드시 해낼 수 있을 거야, 라는 굳은 확신으로 인해 살아났습니다.
나도 병에서 말끔히 치유되어 사람답게 한번 살아보겠다는 간절한 마음, 적극적 의지가 혈루증 환자의 말끔한 치유와 구원으로 이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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접촉, 그것은 사랑
-김찬선신부-
20년도 더 전
제가 결핵 환자들의 아픔에 조금이나마 함께 하려고 하던 때
그분들은 숨 한 번 쉬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가래 한 번 뱉어 내는 것이 그렇게 힘들고
기침이 시작되면 멈추지 않아 그렇게 힘들고
밥 한 술 넘기는 것이 그렇게 힘들어 하였고
누울 수 없어 밤새 베게 껴안고 그렇게 잠 못 들어 하였습니다.
그분들에게 안수 기도할 때
저는 진정 저의 안수로 그분들이 치유되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바랐는데도
치유의 은총을 받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지금까지도 제가 안수 기도하여 치유된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지금도 안수 기도를 해드리고
치유해주시기를 기도하지만
제가 안수 기도하는 더 큰 목적은 치유가 아닙니다.
치유는 저의 영역도 저의 역량도 아니기에
저는 그저 함께 하고자 하는 저의 마음과 저의 작은 사랑을
피부 접촉적으로 전하고자 함이었습니다.
어린 시절 골치가 아플 때 어머니께서 이마에 손을 대시면
저의 이마의 열이 한결 떨어지고
배가 살살 아플 때 어머니가 배를 쓰다듬어 주시면
정말 기적처럼 아팠던 배가 나았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때 바랐던 것은
아픈 것이 물리적으로 낫는 것도 있었지만
나의 아픔을 알아주는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쁠 때 같이 기뻐해 줄 사람이 없으면 도리어 슬퍼지는 것처럼
아플 때 그 아픔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으면
물리적인 아픔보다 훨씬 더 마음이 아프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외로움, 고독이라는 병은 정말 인간을 시들게 하고
말라 죽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수녀님에게 직접 들은 얘기입니다.
버려진 갓난아이들을 돌보는 소임을 하고 계셨는데
아이를 낳아 키운 적이 없는 수녀님이기에
아이들이 왜 우는지 알아채는 데 늘 애를 먹었답니다.
하루는 한 아이가 계속 울어서
배가 고파서 우는가 하고 우유를 줘도 먹지 않고,
기저귀가 젖어서 우는가 하고 기저귀를 봐도 괜찮고,
잠투정을 하는가 하고 잠을 재우려 해도 잠도 자지 않고
계속 우는 것이었습니다.
달래다, 달래다 안 돼 나중에는
‘아, 이놈이 왜 계속 우는거야!’하고 살짝 꼬집어 주니
오히려 울음을 그치고 배시시 웃더랍니다.
아이가 고팠던 것은 우유가 아니라 사랑이었고
누군가의 손길이 그리웠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두 가지 기적이 소개됩니다.
하나는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의 치유 기적이고
다른 하나는 죽었던 회당장 딸의 소생 기적입니다.
두 기적의 공통점은 접촉입니다.
혈루증의 여인은
그저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것만으로 치유되었고
아이는 주님께서 손을 잡으시자 살아났습니다.
주님께서는 여인과 애비의 믿음이 기적을 낳았다고 하시지만
손을 얹어주기를 청하고 옷자락만이라도 만지려 했던 그 마음을
주님께서 어루만져 주심으로
사랑의 힘이 통하여 낳은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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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애틋한 사랑
-이제민신부-
오늘부터 며칠 동안 우리는 호세아의 예언에 대해 듣는다. 호세아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몰락(기원전 722)할 무렵 활동했던 예언자이다. 그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펼쳐지는 사랑의 드라마를 감명 깊게 들려주는데, 이를 자기의 혼인과 가정생활로 묘사한다. 호세아는 고멜과 혼인을 하였는데 고멜은 바람을 피운다. 바람난 자기 아내 고멜을 이스라엘 백성으로, 아내를 끝까지 사랑하는 자기를 하느님의 역으로 내세운다. 이 드라마는 이렇게 시작한다. “호세아를 통하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시작.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창녀와 창녀의 자식들을 맞아들여라. 이 나라가 주님에게 등을 돌리고 마구 창녀 짓을 하기 때문이다.’”(호세 1,2) 여기서 창녀 짓이란 야훼 하느님을 버리고 바알을 숭배하는 행위를 말한다. 이로써 호세아는 자기 아내 고멜이 남편을 버리고 다른 애인과 놀아나는 것처럼 이스라엘이 주님을 버리고 다른 신을 찾아가 놀아나고 있는 것을 고발한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고발로만 끝나지 않는다. 이 드라마의 클라이맥스는 이스라엘은 하느님과의 관계를 파기하였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을 버릴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이스라엘은 고멜처럼 하느님을 저버리는 큰 죄를 범했지만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한번 맺은 저 시나이의 계약 때문에 끝까지 이스라엘에 충실하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사랑을 간음으로 배신했지만 하느님은 그런 이스라엘인데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포기할 수 없다. 사랑에 충실하신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매달리며 호소하신다. “이제 나는 그 여자를 달래어 광야로 데리고 가서 다정히 말하리라. 거기에서 그 여자는 젊을 때처럼, 이집트 땅에서 올라올 때처럼 응답하리라.”(2,16-17) 그뿐이 아니다. 이스라엘도 자기를 사랑하리라고 믿으며 이스라엘에 대한 사랑을 견지한다. 언젠가는 이스라엘이 자기의 사랑을 느끼고 돌아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그날에는 네가 더 이상 나를 ‘내 바알!’이라 부르지 않고, ‘내 남편!’이라 부르리라.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2,18.21-22)
주님께서 호세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다시 가서, 다른 남자를 사랑하여 간음을 저지르는 여자를 사랑해 주어라.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해 주어라. 그들은 다른 신들에게 돌아서서 건포도 과자를 좋아하고 있다.”(3,1)
다시 찾은 이스라엘에게 주님이 말씀하신다. “당신은 오랫동안 내 곁에서 지내야 하오. 창녀 짓을 해서도 안 되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어서도 안 되오. 나도 당신에게 그렇게 하겠소.”(3,3)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눈물겨운 사랑이다.
하느님의 이 사랑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다시 하느님에게 돌아오리라. 그러나 역사는 말한다. 이스라엘은 끝내 망하고 말았다. 기원전 722년의 일이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드라마는 이것으로 끝이 나지 아니 하였다. 호세아의 이야기는 계속된다. “그 마지막 날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두려워하며, 주님과 그분께서 베푸시는 좋은 것을 향해 돌아올 것이다.”(3,3)
이 드라마는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삶의 무대로까지 이어진다. 이스라엘에게 그러하신 것처럼 하느님은 오늘도 우리들을 사랑하신다. 부와 권력과 명예와 인기와 바람을 피우는 우리들을. 언제 인류는 애틋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는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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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 : 하느님의 마음을 알며 살아가는 신앙인
-경규봉 신부-
하느님께서는 예고하신 대로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지 않고 다시 한 번 당신 백성의 사랑을 구하신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시어 광야생활을 하도록 하시면서 당신 사랑을 보여주셨던 것처럼 이들을 들로 데리고 나가 사랑해주시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하여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의 내적인 관계가 회복되면,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을 그 어떤 외적인 위협에서도 다시 지켜주실 것이다.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부부의 관계를 맺는다는 표현은 하느님께서 이 백성을 얼마나 깊이 사랑하시는가를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신부에게 주시는 선물은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 정의와 공평, 진실이다. 이처럼 모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시며 사랑을 구하신다.
사람은 자신이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며,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하느님께 간구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사람의 청을 들어주시지 않고, 침묵만 지키신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을 사랑하여 열심히 살지만, 하느님께서는 전혀 응답하시지 않는다고 믿는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어떻게 하느님을 믿을 수 있을까? 인간의 청을 외면하시고, 침묵만 지키시는 하느님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그러나 하느님을 체험한 이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의 손을 잡아 이끌어주시고, 함께 계셨음을 고백한다. 하느님을 체험한 후에야 비로소 자신이 어리석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컸는가를 고백한다.
욥기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하느님께서 욥을 가리켜 “그만큼 온전하고 진실하며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악한 일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1,8; 2,3)고 두 번씩이나 말씀하실 정도로 욥은 의로웠다. “나에게는 아무 잘못도 없다네.”(6,29) “내가 죄 없다는 주장을 굽힐 성싶은가?”(27,6)라고 말할 정도로 욥은 의롭게 살았다.
그러한 욥이 사탄으로 인하여 건강, 자식, 재산이라는 세 가지 축복을 모두 잃었다. 부인까지도 욥을 비난했으며, 욥은 잿더미에 올라앉아 토기조각으로 몸을 잃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상태에 놓인다. 그는 “내가 태어난 날이여, 차라리 사라져 버려라. 사내아이를 배었다고 하던 그 밤도 사라져 버려라.”(3,3) 하고 자신의 생일까지도 저주한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망치셨고 자신의 옳음을 거부하시고고 고통을 주신다고 생각했다(27,2).
그는 하느님께서 아무런 응답도 없으시고 보고만 계신다고 생각했다(30,20). 그는 자신이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의롭게 살아가는 의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의로 인하여 마땅히 건강, 자식, 재산의 축복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의로운 자신이 받는 고난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한 그가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비로소 “아, 제 입이 너무 가벼웠습니다. 무슨 할 말이 있겠사옵니까? 손으로 입을 막을 도리밖에 없사옵니다.”(40,41) “부질없는 말로 당신의 뜻을 가리운 자, 그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이 머리로는 헤아릴 수 없는 신비한 일들을 영문도 모르면서 지껄였습니다. 그리하여 제 말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티끌과 잿더미에 앉아 뉘우칩니다.”(42,3.6)라고 고백한다.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비로소 자신이 의인이 아니라 잿더미에 앉아 죄를 고백할 수밖에 없는 죄인임을, 하찮은 미물이요 티끌과 먼지 같은 존재임을 깨달은 것이다. 하느님이 얼마나 크고 좋으신 분이며, 얼마나 사람을 사랑하시는가를 깨달은 것이다.
제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얼마나 당신 백성을 사랑하시는가를 말씀하신다. 그처럼 사랑하시는 당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하시며 사랑을 구하신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줄로 생각한다. 하느님을 열심히 믿고 의지하며 사는 의인이라고 착각한다. 그러나 욥처럼 하느님을 체험했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똑바로 알게 되고,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가를 알고, 하느님의 마음을 알게 된다.
오늘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하느님의 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시기를 간구하는 하루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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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믿음의 행동
-박재구 신부-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장마와 함께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건강에 유의하셔야 하겠지요?
인간이 살아가면서 바라는 것 중에 제일 으뜸은 병나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생로병사 이것은 인간이면 누구나 자기에게는 해당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약, 좋은 음식을 찾아다니며 그 희망을 조금이라도 채워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찌 이것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이러한 고통과 슬픔과 절망을 해결해 주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죽었다고 생각되는 어린 딸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회당장의 간청, 오랫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몸부림을 예수님은 측은한 마음으로 그들의 갈망을 채워 주십니다. 좋은 약이나 좋은 음식으로가 아니라 당신의 따뜻한 손으로 마음으로 치유해 주십니다.
그런데 이들의 기적같은 회복의 이면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을 향하고 있는’ 믿음의 행동입니다. 이 믿음의 대가가 생명이요, 회복인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 없이는 기적이 일어날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믿음 속에서 드러나는 행동들을 본받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회당장을 봅시다. 회당장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신심도 깊고 재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살아가는데 아쉬움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어린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를 반대하는 주위의 따가운 눈총도 의식하지 않고, 또 그 뒤에 일어날 자신의 불이익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전부를 던져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즉, 악의 세력과 도전에 굴복하지 않고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다음 여인의 모습을 봅시다. 열 두해 동안 병마와 싸우며 지내는 고통의 여인입니다. 그동안에 병을 치유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겠습니까. 아마 재산까지도 바닥이 났을 것입니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은 죄 많은 여인이라고 업신여기고 가족과 친지, 친구들도 이제 다 떠나갔을 것입니다. 외로움과 병마와 싸우는 이 여인의 모습은 참으로 애처롭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남은 기진맥진한 몸둥아리를 있는 힘을 다해 예수님께 내어 던집니다. 주위 사람들의 저지와 냉혹한 비웃음 속에서도 옷깃이라도 스쳐 볼려고 안간힘을 다 씁니다. 이렇게 회당장이나 여인이나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투신이 새로운 삶의 기적을 덤으로 받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며 자기가 바라는 것이 이루어지기를 간청합니다. 그렇지만 회당장이나 여인의 모습처럼 적극적인 투신과 신뢰를 바탕으로 주님께 다가가고 있는지요?
하느님께 영원한 생명을 원하지만, 주위 사람들의 눈치 때문에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고 오히려 세속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려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재물과 명예와 권력과 힘을 통해서 죽음을 극복할 수는 없습니다. 입으로는 하느님께 청하면서, 사실상 몸과 마음은 주위 사람들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엉뚱한 곳에 맡기고 생명을 연장하려고 발버둥을 치는 가련한 모습을 봅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포자기하는 모습입니다. ‘나는 죄도 많이 지었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기 때문에 하느님도 보살펴 주시지 않을 거야’라는 체념 속에서 더욱더 자신을 파괴하며 안타까운 삶을 이어가는 사람을 봅니다. 이러한 모습 속에서는 우리가 원하는 생명과 건강을 되찾을 수 없습니다.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주님의 사랑에 머무를 때 비로소 우리는 또 하나의 기적의 은총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건강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이제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시련과 슬픔과 절망의 모습을 주님께 다가가 보여주고 간청하며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기다립시다. 주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면 모든 것을 다 해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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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을 열며
넓고 깊은 강에서 살던 개구리 한 마리가 길을 가던 중에 우물을 발견했습니다. 마침 무더운 날씨에 몹시 목이 말랐기 때문에 우물 속에 풍덩 뛰어들었지요. 그런데 그곳에는 토박이 개구리가 있었습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토박이 개구리에게 자기를 소개했지요.
“저는 아주 큰 강에서 온 개구리입니다.”
그러자 토박이 개구리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큰 강? 큰 강이라니 그게 무슨 뜻이오? 도대체 그게 뭐요?” 라고 묻습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설명을 했지요.
“아하, 그건 말로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당신은 우물에서 한 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 우물은 너무나 자그마한 것입니다. 하지만 내가 한 번 설명해 볼게요.”
성격 급한 토박이 개구리는 껄껄껄 웃으면서 말합니다.
“이 우물보다 더 큰 게 있다는 소리는 처음이오. 당신이 말하는 그 강은 얼마나 크오? 이 만큼 되오?”
그러면서 우물 안 넓이의 삼분의 일쯤 펄쩍 뛰어 봅니다. 나그네 개구리는 “천만에요.”라고 답했지요. 이번에는 우물 안 넓이의 삼분의 이쯤을 펄쩍 뛰어 보이며 말합니다.
“이 만큼 되오?”
나그네 개구리는 “아무래도 도저히 설명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네요. 그건 양의 문제가 아니라 질의 문제요. 아주 넓고 크단 말이오. 아예 경계도 없소.”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토박이 개구리는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당신 미쳤소? 아니면 철학하는 개구리거나, 그것도 아니면 당신은 거짓말쟁이가 분명하오. 여기서 얼른 나가시오!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다니!”
누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일까요? 바로 소리를 지르고 있는 토박이 개구리이겠지요. 오히려 더 넓은 세상을 알고 있는 나그네 개구리가 바보가 되는 순간이 아닐까 싶네요. 바로 이런 모습을 오늘 복음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지요.
예수님께서는 불가능한 것이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신들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지요. 그래서 죽은 아이가 자고 있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비웃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 역시 주님의 손길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없으신 분인데, 그래서 사랑으로써 어떻게든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신데, 우리들은 그 사랑을 의심하고 판단함으로써 이천년 전에 예수님을 비웃던 이스라엘 사람과 똑같은 모습을 그러면서 앞선 이야기에서 등장한 토박이 개구리의 말을 반복해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당신 미쳤소? 말도 안 되는 소릴 지껄이다니!”
딸이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다가선 회당장,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기만 해도 구원을 얻을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보여준 혈루증을 앓는 여인. 바로 주님 앞에 철저히 다가서려 했던 사람의 모습이고, 우리 역시 이런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비웃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이정희 수녀-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어버이날을 맞아 홀로 계시는 아버님을 방문했다. 아버님은 어떻게 죽음을 잘 맞을 것인가가 큰 고민이라고 하셨다. 인간에게 가장 큰 두려움은 언제 닥칠지 모르는 병고와 죽음의 고통이 아닐까?
회당장의 딸을 되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신 이야기는 병고와 죽음의 권세를 물리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드러내 준다. 이야기의 전개는 한 회당장이 자기 딸이 죽었으니 가셔서 딸을 살려 달라고 예수님께 청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의 집을 향한다. 그때 열두 해 동안 하혈로 고생하던 부인의 이야기가 끼어든다. 이 여인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는지는 ‘열두 해 동안’ 병을 앓아 왔다는 표현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이 여인은 남모르는 고통 속에서 살아왔음을 잘 알 수 있다. 하혈하는 여인은 부정하게 취급되어 타인과 접촉이 금지되었다. 이 여인이 열두 해 동안이나 부정한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한다면 얼마나 오랫동안 고립된 생활을 해왔는지 상상할 수 있다. 이 여인은 어느 공동체에도 속할 수 없었을 것이며, 가족에게도 소외되었을 것이다.
병고에서 벗어나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녀의 열망은 예수님의 옷만 만져도 구원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했다. 여인이 예수님의 옷을 만지자 과연 출혈이 멈추고 병이 나은 것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의 능력이 빠져 나간 것을 알아채신다. 자신에게 일어난 놀라운 기적에 두려워 떨고 있는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치유가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확인시켜 주신다. 이제 더 이상 인간 세상에서 격리된 병자로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받는 딸로서 지위가 회복된 것이다. 이제 어엿한 인간으로서 새로운 생명으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이 옷자락이라도 만지려 하던 여인의 마음, 믿음으로 그분을 만나고 싶은 열망을 간직해야 하지 않을까?
태양이신 예수님
-강영구신부-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
그대에게
복음서는 예수님과 사람들과의 만남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을 받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서 파멸 당합니다.
예수님은 구원과 멸망, 행(幸)과 불행(不幸), 복(福)과 화(禍)를 가르는 기준인 셈입니다.
예수님께 귀의(歸依)하고 열린 가슴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그분 자비의 손길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닫힌 마음으로 예수님께 다가가는 사람들은 화(禍)를 자초(自招)합니다.
회당장의 딸이 죽었습니다. 죽음의 기운이 짙게 내려앉은 온 집안은 슬픔으로 가득합니다.
예수님은 그 가정에 가득 찬 죽음과 슬픔을 걷어내시고 생명과 기쁨을 심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장 집안의 태양입니다.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도중에 열두 해 동안 하혈하던 여인도 구원해줍니다.
열두 해 동안 부정(不淨)의 굴레 속에서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이웃과의 관계도 단절된 가운데(레위15,19-30) 지옥에 빠져있던 여인은 예수님을 만나서 새 삶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하혈하던 여인의 가슴 속에 떠오른 태양입니다.
새로운 한 주간의 첫 날입니다.
한 주간 내내 당신과 나는 스승 예수님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분께 귀의(歸依)하고 열린 마음으로 그분을 맞아들이는 한 주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어둠은 광명으로, 슬픔은 기쁨으로, 고통은 환희로 바뀔 것입니다.
태양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복된 한 주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딸아, 용기를 내어라.”
-양승국신부-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오기도 하는 사랑>
베네딕토 16세 교황님께서 첫 번째 회칙을 내셨네요. ‘하느님은 사랑이시다.’(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아 밑줄까지 그어가면서 열심히 읽고 있습니다.
걸출한 대 신학자답게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심오한 사랑에 대해, 특히 하느님과 우리 인간 사이의 사랑에 대해 심도 깊게, 그러면서도 명쾌하게 풀어내셨습니다.
특별히 제 눈길을 끈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인 에로스(eros)의 의의와 가치를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하신 것입니다.
에로스가 인간에게 단순히 순간적인 쾌락만을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절정, 곧 우리의 온 존재가 열망하는 지복(至福)을 어느 정도 미리 맛보게 해주는데, 이를 위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교황님께서는 그간 실추되었던 남녀 간의 사랑, 소위 ‘세속적인 사랑’인 에로스의 가치의 복구를 강조하시면서, 다른 한편으로 이런 걱정을 감추지 않으셨습니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에로스가 단순히 ‘성’으로 전락하여 상품화되었고, 사고파는 단순한 ‘물건’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간 자신이 상품화되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육체를 자신의 자유를 행사하는 무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음대로 즐기고도 문제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에로스는 상승과 극기, 정화, 치유의 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친 에로스는 새로운 모습을 지니게 됩니다. 비록 불완전한 남녀 간의 사랑이지만 보다 멀리 내다보기 시작합니다. 보다 궁극적인 것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결국 영원을 바라봅니다. 도취 순간의 황홀경에만 머물지 않고 앞으로 더 나아갑니다. 자기만을 찾는 닫힌 자아에서 끊임없이 벗어나 자기를 내어주기 시작합니다. 결국 자아를 해방시킵니다. 그리하여 진정한 자아를 발견합니다. 최종적으로 참 하느님을 발견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인간적인 사랑인 에로스를 잘 정화시키고 성장시키면 하느님에게까지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낱말이 에로스인 반면에 신앙 안에 뿌리를 박고 신앙으로 형성되는 사랑을 드러내는 단어가 아가페(agape)입니다.
“올라가는 사랑인 에로스와 내려오는 사랑인 아가페는 완전히 분리될 수 없습니다. 에로스가 처음에는 커다란 행복을 약속하는 매혹으로서 탐욕적이고 올라가는 사랑이라 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다가갈수록, 자신에 대한 관심은 점점 줄어들고, 다른 사람의 행복을 더욱더 추구하게 되며, 사랑하는 사람을 점점 더 염려하고, 자신을 내어주며, 다른 사람을 ‘위하여 존재하기’를 바랍니다.
인간은 내려오는 사랑, 주는 사랑만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언제나 줄 수만은 없으며,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사랑을 주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선물로 받기도 하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듯이, 분명히 인간은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오는 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샘이 되려면 그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새 물을 끊임없이 마셔야 합니다. 그 원천은 다름 아닌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창에 찔린 그분의 심장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이 흘러나옵니다.”
오늘 제1독서인 호세아서에서도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인격화시킵니다. 인간을 향한 당신의 사랑을 에로스적인 언어로 표현하십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인간이 정확하게 감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식을 표현하십니다. 혈루증을 앓고 있는 한 여인을 오랜 고통의 세월에서 해방시켜주시는가 하면, 죽었던 소녀를 일으켜 세우십니다. 그 과정에서 하시는 말씀.
“딸아, 용기를 내어라.”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처럼 구체적이었고 가시적이었습니다. 가시화와 구체화의 절정은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분의 육화강생이었습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구체화시키고 가시화시키는 도구로써 우리를 선택하십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의 사심 없는 이웃봉사를 통해, 대가를 바라지 않는 헌신을 통해, 이웃을 향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을 세상 안에 구체화시킬 사명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남녀 간의 사랑도 이토록 순수할 수 있으며, 이토록 지고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 앞에 보여줄 사명을 안고 있습니다. 에로스도 우리가 노력한다면 정화되고, 성장되어 아가페와 잘 융화될 수 있음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
-박상대 신부 -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마르코복음의 5,21-43에 보도된 복합기적사화를 옮겨 쓰면서 흥미거리 일화는 모두 삭제하고 그리스도론적 요점만 간추려 전하고 있습니다. 즉, 총 23절을 단 9절로 줄인 것입니다. 사실 많은 내용을 간단히 줄이는 데는 요약하는 방법도 있지만 그것으로 부족할 때는 수정하는 방법을 쓰는데, 물론 무턱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편집의도에 따르게됩니다.
오늘 복음을 마르코복음과 비교해보면, 마태오는 마르코가 야이로라고 하는 회당장(5,22)의 이름을 거명하는 대신 그냥 한 사람의 회당장으로, 회당장의 딸이 다 죽게되었다(5,23)는 부분을 "방금 죽었다"고 바꾸었고, 하혈증을 앓던 여인이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는 순간 병이 나았다(5,29)는 대목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고 난 뒤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는 예수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대뜸 여인의 병이 나았다고 바꾸는 등 여러 부분을 자신의 편집의도에 맞게 축소 수정시켰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비교적 상세히 보도하는 마르코복음사가는 기적사화의 주체인 예수님과 대상인물을 동시에 부각시키면서 기적을 유발시키는 "믿음"을 촉매제로 활용하고 있는 반면에, 마태오는 기적의 주체인 예수님만 부각시키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기적을 수행하실 수 있도록 그 마음을 움직여 주는 동기를 대상인물과 관계없이 중요하게 보고 있습니다.
즉 회당장의 경우에는, 아이가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달라는 "간청"(기도)이 중요한 동기가 되고 있으며, 하혈증을 앓고 있는 여인의 경우에는,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는 "생각"(믿음)이 중요한 동기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마르코는 회당장의 간청과 여인의 생각 자체에 상당한 가치를 부여하고 있으나, 마태오는 간청과 생각 자체가 기적을 유발하는 중요한 동기는 되지만 기적의 결정적인 요소가 아니라는 점에 유의해야 합니다. 마태오는 결국 기도나 믿음 자체보다 예수님의 권능을 더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이로써 예수의 그리스도론적인 측면을 부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구원받기 위해 기도와 믿음을 누누이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기도와 믿음 자체가 구원을 가져다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믿는 대상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행위가 구원을 가져다준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께서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21절) 하고 말씀을 내리시자 여인은 즉시 치유되었고, "다들 물러가라. 그 아이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잠들어 있다"(24절) 하신 예수께서 소녀를 잡아 깨우시니 소녀는 다시 삶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렇게 구원행위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흔히 방향을 잃어버린 채 그저 강렬한 기도와 믿음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접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든 기도와 믿음의 방향은 철저하게 그리스도 예수를 향해 있어야 합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제법 높은 지위를 가진 회당장이 예수의 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마르코에 의하면 회당장 야이로는 가파르나움의 회당장이었을 가능성이 크며, 그렇다면 이미 예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마귀 들린 사람을 치유하실 때(마르 1,21-28),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주었을 때(마르 3,1-5) 바로 그 자리에 있었을 것이고, 예배를 주관하고 감독하는 직책을 맡은 회당장 야이로가 다른 바리사이파와 헤로데 사람들과 함께 예수를 제거하려는 모의에 가담했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그가 예수께 자기 딸을 살려달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죽은 딸을 앞에 두고 아버지의 체면이 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혈루증을 앓는 여자>(마태 9,18-26)
-유광수 신부-
"그 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하고 이르셨다. 바로 그 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오늘 복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는 말씀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말씀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가? 나는 혈루증(하혈)을 앓고 있지 않은 건강한 사람인데 나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이다. 아마도 이 말씀은 오늘 날 하혈하는 병을 앓고 있는 여자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겠지 하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과연 그럴까?
복음에서 열두 이라는 숫자는 충만한 완전함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여자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는 어느 일정한 기간만이 아니라 평생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이 여자의 일생은 혈루증으로 시작해서 혈루증으로 인생을 끝내야하는 불행한 여인이다. 그럼 도대체 혈루증이란 무슨 병인가?
마르코 복음에서는 "큰 군중이 그분을 따르며 밀쳐댔다. 그 가운데에 열두 해 동안이나 하혈하는 부인이 있었다. 그 여자는 많은 의사의 손에 숱한 고생을 하며 가진 것을 모두 쏟아 부었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마르 5, 25-26)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니까 이 여자는 혈루증을 고치기 위해 안해 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를 더욱 절망스럽게 만든 것은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는 것이다.
도대체 혈루증이란 어떤 병인가? 복음은 이 혈루증이라는 병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혈루증이란 피가 밖으로 흘러 나오는 병이다. 피는 생명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생명인 피가 밖으로 계속해서 흘러나온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 나올 피가 없으면 죽는다. 피를 멈추지 않으면 이 여자는 죽는다. 따라서 혈루증이란 단순한 병이 아니라 사느냐 죽느냐 하는 병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다는 말은 평생 죽음의 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하혈한다는 것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루 하루 죽음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이 죽음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이다.
그 누구도 이 병에서 제외된 사람이 없고 또 그 누구도 이 병을 치료해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기 위해 좋은 음식, 좋은 약, 좋은 의사, 좋은 공기, 좋은 운동 등 모든 수단들을 다 동원해보지만 "아무 효험도 없이 상태만 더 나빠졌다." 이것이 인간이다. 인간의 상황이다. 나의 모습이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그렇다면 누가 나의 이 죽음의 행진을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하혈하는 피를 멈추게 할 수 있는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다 동원해보았지만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가능한 병이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르코 복음을 보면 이 여자가 절망 중에 있을 때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래서 이 여자는 군중에 섞여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에 손을 대었던 것이다.
이 여자는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면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만졌다.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내 병이 낳겠지."하지 않고 "구원을 받겠지"라고 말한 것을 보면 오늘 복음은 단순히 하혈병을 앓고 있는 여자를 치유시켜주셨다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 죽음의 병을 앓고 있기 때문에 언젠가는 죽을 수 밖에 없는 병에 걸려있지만 이 죽음의 병에서 치유받는 것이 곧 구원이다. 따라서 구원은 죽음에서 건져내어 살아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죽어가는 자를 살려내는 것이다. 구원은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길로 행진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단순히 우리가 앓고 있는 병을 치유시켜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죽음에서 살려내기 위해 오신 것이다. 즉 죽음에서의 해방을 가져다 주러 오신 것이다.
이 여자가 예수를 만난 것은 생명을 만난 것이요, 예수의 옷에 손을 댄 것은 생명수를 마실 수 있는 파이프를 댄 것이다. 이 여자는 파이프를 통해 생명수를 마심으로써 살아나게 된 것이다. 즉 죽음의 행진을 멈추고 생명의 행진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이 여자를 돌아보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고 하였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그 누구도 고칠 수 없는 병을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하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는 행위이다. 믿음이란 예수님 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분께 모든 것을 거는 것이다. 믿음이란 죽어가는 나를 살릴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이라는 진리를 깨닫고 그분께 자신의 병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어가는 나를 살리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여러 가지 중에 한가지를 선택하는 것이 아닌 오직 예수님만이 나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그분께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내 맡기는 믿음이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추상적인 믿음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옷을 만지는 믿음이어야 한다.
그럼 우리는 어디에서 예수님을 만질 수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몸인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미사 참례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지 못한다.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죄 사함을 받는 고해 성사를 보면서도 전혀 예수님을 만지지 못한다. 어쩌면 우리의 모든 신앙생활은 만지는 믿음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생활인지도 모른다. 모든 것이 수동적이요, 형식적이다. 가라니까 가고 오라니까 오고 참례하라니까 참례한다. 그렇지만 아무 느낌도 없고 감격도 없다.
예수님을 만지지 못하는 믿음이 과연 나를 구원하는 믿음일까?
우리는 복음을 읽으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고해성사를 통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하고 봉사를 하면서도 예수님을 만져야 한다.
추상적인 믿음에서 만지는 믿음으로 발전해야 한다. 모든 것에서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고 만져져야 하는 믿음으로 성숙되어야 한다. 그래야 나의 모든 것을 전적으로 예수님께 내 맡길 수 있고 죽음에서 나를 살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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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