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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총리와 남편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의 삶은 한 편의 드라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며 연인이자 동지로 살아왔던 두 사람. 여성운동가에서 국무총리가 되기까지,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남편은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아내’라는 말로 아내를 응원했다. 한국 최초의 여성 총리와 헌신적인 외조로 일관한 남편의 아주 특별한 사랑 이야기를 전한다.
글 _ 류인홍 기자 사진 _ 서울신문 DB
한명숙(63) 총리의 인사청문회가 끝나고 국회에서 인준이 되어 그녀는 헌정사상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가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30년간 여성운동, 환경운동, 민주화운동에 진력해 온 데다 여성부장관, 환경부장관을 역임해 풍부한 국정 운영의 경험을 쌓았다’는 점을 고려해 그녀를 총리로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열린우리당 강금실 서울시장 예비 후보를 포함해 여성 정치인들의 활약이 두드러지고 있다. 한 총리가 국정 운영을 진두지휘하면 여성들의 사회 진출은 봇물처럼 터져 나올 것으로 예상된다.
한 총리의 인사청문회에서 특이한 점은 남편인 박성준(66) 성공회대 교수의 이야기가 적지 않게 나왔다는 점이다. 총리 될 사람의 거의 모든 것을 검증하는 인사청문회의 특성에 기인하기도 하지만 한 총리와 박 교수의 특별한 사연 때문이기도 하다. 더구나 최초의 여성 총리 남편이 어떤 사람인지 많은 이들이 궁금해하는 터라, 박 교수의 이력은 적지 않은 화제가 되고 있다.
한 총리의 남편 박성준 씨는 성공회대 NGO대학원 겸임교수이며 ‘비폭력평화물결’과 ‘아름다운 가게’ 등 시민단체의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그런데 그의 이력 중 한 총리 청문회에서 야당이 문제 삼고 있는 부분은 ‘통혁당 사건’으로 연루돼 감옥살이를 했다는 부분이다.
통일혁명당 사건은 1968년 당시 중앙정보부가 발표한 ‘통일혁명당 간첩단 사건’을 말한다. 서슬 퍼런 박정희 군부정권하에서도 민주화와 통일을 이야기하던 4·19세대와 진보인사들이 이 사건을 빌미로 많은 탄압을 받았다. 특히 지금은 중·고등학생 권장도서이기도 한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은 신영복 교수가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투옥 중 집필한 책으로 유명하다.
통혁당 사건은 한 총리와 박 교수가 결혼한 직후 일어났다. 두 사람의 신혼생활은 불과 반 년밖에 되지 않았던 셈이다. 그 후 박 교수는 13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부부가 결혼한 지 6개월 만에 헤어져 13여 년 동안 떨어져 살았던 셈이다. 스물일곱 청년의 모습으로 떠나 마흔한 살의 중년이 되어 돌아온 남편, 새색시에서 서른일곱의 여자가 된 아내. 두 사람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라고 할 정도 파란만장했던 것이다.
남편을 만난 후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했다
한 총리는 평양이 고향이다. 그곳에서 다섯 살까지 살다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부모와 함께 고향을 떠났다.
“부모님은 전쟁이 일어나자 몇 달만 지나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값나가는 집안의 전 재산을 고향땅에 묻어 둔 채 월남하셨어요. 그러나 그 짧은 몇 달은 평생의 한으로 남아 끝내 타향에서 망향의 넋이 되고 말았죠.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통해 분단의 한을 보고 느끼며 자라온 제가 통일과 평화 운동에 몸담게 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그녀가 처음부터 투철한 사명을 가진 통일운동가는 아니었다. 그녀는 오히려 학생시절에 자신은 꿈만 먹고 살던 소녀였다고 전한다.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며 아름다운 생을 노래하는 그런 문학소녀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기 전까지 현실과 세상 물정에 까마득하게 눈먼 청맹과니였어요. 여리디 여린 감성을 지닌 너무나도 평범한 문학소녀였죠. 그런 제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사람이 나타났는데, 그게 바로 지금의 남편이었어요. 그를 만나면서 평범한 삶에서 고난에 찬 삶으로, 문학소녀에서 맹렬한 여성운동가로 변해버렸죠. 남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변모시킨 키다리 아저씨였습니다.”
부부는 대학교 3학년 때 만났다. 한 총리는 당시 이화여대 불문학과를 다니고 있었고 박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 학생이었다. 두 사람은 이대와 서울대의 기독교 학생연합 단체 ‘경제복지회’에서 처음 만났는데, 박 교수가 회장, 한 총리가 부회장이었다고 한다.
“서로 감정은 있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회장과 부회장인지라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가까워질 수 있었죠. 그러면서 서로의 마음은 충분히 전달되었어요. 누가 먼저 자신의 속내를 드러내느냐가 문제였죠. 꽁꽁 숨겨 놓은 감정을 은근슬쩍 고백한 것은 남편이 아닌 저였어요.”
이화여대에는 매년 개교 기념 축제가 있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쌍쌍파티’. 한 총리는 남편 박 교수에게 파트너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박 교수 역시 자신을 파트너로 신청해주기를 바랐던 터, 두 사람은 쌍쌍파티에서 첫 번째 데이트를 하게 된다.
“깡마르고 좁은 목에 빨간 넥타이를 맨 남편의 모습이 지금도 잊혀지지 않아요. 4년 동안 연애를 하면서 애틋한 만남을 가졌는데, 동시에 점점 사회 문제와 조국의 현실에 눈을 뜨게 되었죠.”
두 사람의 결혼은 동지와 동지의 연대였으며 믿음과 사랑의 결합이었다. 1967년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의 단꿈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지만 달콤한 시간은 6개월로 끝나고 말았다. 남편이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되었기 때문이다.
“남편이 그렇게 감옥에 가고 나니까 지구상에 저 혼자만 버려진 느낌이었어요. 슬퍼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욱 슬프게 했죠. 하지만 언제까지 슬퍼할 수만은 없었습니다. 차디찬 감방에서 젊은 꿈을 사장 당하고 있는 남편을 위해서라도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
남편은 당시 서울에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대전교도소에 수감되었다. 그녀는 일주일에 한 번씩 편지를 쓰고 한 달에 한 번씩 면회를 갔다. 남편 역시 일주일에 한 번씩 답장을 보내왔다. 부부의 옥중서신은 서로의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우리는 편지만으로도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고 서로에 대한 믿음과 철학까지 공유할 수 있었습니다. 전 남편의 편지를 먹고 사는 새댁이었죠. 그러면서 점점 더 본격적으로 사회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배가 고플 정도로 가난했고 남편이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독재정권은 점점 더 그녀를 옥죄어왔다. 그녀는 당시가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고 용감해지려고 노력했어요. 어머니가 사다주신 평화시장의 싸구려 티셔츠와 까만 바지를 입고 거침없이 사회활동을 했습니다.”
하지만 1979년 그녀마저 구속되고 만다.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고문도 받았다. 밤새도록 구타를 당하고 온몸은 피멍이 들어 부어올랐다. 그렇게 부은 피부는 스치기만 해도 면도날로 도려내는 듯한 고통을 주었다.
한 총리는 1981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2년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그렇다고 마음이 편하진 않았다. 그렇게 혹독한 감옥 생활을 남편은 그때까지도 견뎌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출옥 후 남편의 석방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남편의 석방을 요구하며 단식을 했어요. 5일째 되던 날 거의 몸을 가누지 못하고 자리에 누워있을 때, 중앙정보부에서 연락이 왔죠. 남편이 석방되니 가족이 교도소까지 마중을 나오라는 내용이었어요. 그러나 단식 탓에 기쁨을 표현할 기운이 없어 누워서 조용히 흐느꼈습니다. 석방 당일, 남편을 마중 나가야 하는데, 집을 나서기도 전에 쓰러졌습니다. 결국 그렇게 기다리던 남편을 맞으러 가지 못했죠.”
석방 후 남편은 경제학에서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또 한 총리는 여성운동에 투신했다. 그런 와중에 뜻밖의 선물을 얻게 된다. 바로 한 총리의 나이 마흔한 살에 얻은 아들이다.
“내심 딸이기를 원했어요. 딸은 제 평생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죠. 하지만 정말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이었고 주변의 환호와 축하로 그런 생각은 금세 사라졌습니다.”
그 아들이 벌써 장성해서 군복무 중이다. 그녀가 총리로 내정되자 아들의 군 보직 문제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별다른 이슈가 되지 못하고 넘어간 상황이다.
여성운동가로 활동하던 한 총리는 이후 여성부, 환경부 장관을 역임한 후 경기도 일산구 갑에서 6선의 홍사덕 전 의원을 밀어내고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아내 한명숙이다
그녀의 남편 박성준 교수는 ‘가장 존경하는 인물이 바로 한명숙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아내에 대한 신임이 대단하다.
“아내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는다는 것은 듣기에 따라서 웃음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만, 저는 진심으로 아내를 존경합니다. 아내와 40년 가까이 살아왔는데, 여성운동과 시민운동의 지도자로서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았고, 국회의원과 초대 여성부장관을 거쳐 환경부장관으로서 국정을 수행하는 구체적인 일들을 세세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 없습니다.”
박 교수는 요즘 청문회에서 자신의 사상 문제가 거론되는 것에 대해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나는 통혁당과 관련이 없고,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 선생에게서 자본론 등을 빌려본 게 전부”라는 말을 전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총리가 된 아내에 대해 “진실하고 순수한 외유내강형이고 정치 쪽에서 아내의 이런 덕목이 소중하게 작용할 것”이라며 “정말 국민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겸허한 자세로 경청하는 사람이 되어 달라”는 말을 덧붙였다.
박 교수는 ‘한명숙’이라는 인물에 대해 ‘소신과 원칙을 지키면서도 화합을 통한 조정 능력이 탁월하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장점이 우리 사회가 당면한 문제인 양극화를 해소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다.
박 교수의 아내를 위한 외조는 각별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특히 최근에 공개된 한 총리의 가족사진에는 박 교수가 아들을 업고 있는 사진이 공개되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한 총리가 국내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되는 과정에는 분명 남편인 박 교수의 사랑과 헌신적인 외조가 함께했음이 분명하다.
사랑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한명숙,박성준 저
고통을 딛고 피어난, 아름답고 감동적인 연애편지.
이 책은 결혼 6개월 만에 남편을 감옥에 보낸 한명숙이 남편 박성준과 13년 반 동안 주고받은 연애편지 모음이다. 손바닥만 한 봉합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를 적으며 어둠과 고통의 밑바닥에서 기적 같은 행복을 길어 올린 한명숙·박성준 부부의 사랑과 신앙과 희망의 기록이 담겨 있다.
결혼 6개월의 짧은 신혼 뒤에 찾아온 13년 반의 긴 이별
한명숙 전 총리와 그의 남편 박성준 교수가 박 교수가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되어 대전교도소에 있는 동안 주고받았던 편지를 엮은 서간집을 냈다.
1968년, 28살의 청년이던 박성준은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 수감되어 15년 형을 언도 받았다. 하지만 박성준은 통일혁명당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었으며 단지 사건에 연루된 신영복(박성준의 서울대 경제학과 1년 선배였다)으로부터 당시 금서였던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을 빌려 읽고 또한 노트에 옮겨 후배들과 함께 읽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군사정권은 고문과 조작으로 그를 15년 징역형에 처하였다.
결혼한 지 불과 6개월여가 지났을 뿐인 스물네 살의 새색시 한명숙은 박성준이 1981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 특사로 석방되기까지 13년 반 동안 남편의 옥바라지를 했다. 그 와중에 한명숙 또한 1979년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투옥되어 2년이 넘는 기간 동안 감옥에 있었다.
강제로 헤어져 있어야 했던 두 사람은 편지 서신이 허락되는 기간 동안 50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았다. 손바닥만 한 봉합엽서에 깨알 같은 글씨를 눌러 적으며 그들은 사랑과 신앙, 희망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그들의 편지에는 단순한 부부로서의 사랑만이 아니라 서로를 성숙시켜가는 생의 진정한 반려자로서의 모습이 생생하고도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그동안 소문으로만 간간이 회자되던 그들의 편지는 2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라면박스 속에 깊이 잠들어 있다가 이번에 드디어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 것이다.
기독학생 동아리 ‘경제복지회’를 통해 동지이자 연인이 된 한명숙과 박성준
한명숙이 박성준을 처음 만난 것은 대학 2학년 때,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였다. 그 후 두 사람은 이화여대와 서울대의 기독학생 써클인 ‘경제복지회’에서 회장과 부회장이라는 관계로 자주 만나게 되면서 점점 가까워졌다. ‘경제복지회’는 성서를 공부하고 기도하면서 신앙의 힘을 바탕으로 현실의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토론하는 순수하고 열정적인 젊은이들의 모임이었다. 불문학도이던 한명숙은 ‘경제복지회’를 통해 시대와 현실의 아픔에 서서히 눈뜨기 시작했다.
한명숙이 대학축제의 쌍쌍파티 파트너로 박성준을 초대하면서 두 사람은 연인관계로 발전했다. 늘 대학 교복만 입고 다니던 가난한 복학생 박성준은 이날 생전 처음으로 양복에 빨간 넥타이까지 하고 나타났다. 친구에게서 빌려 입은 옷이었다.
박성준은 열한 살 되던 해에 벌어진 6.25전쟁으로 전쟁고아가 됐다. 5남매의 셋째였던 그는 당시 바로 아래 동생과 함께 통영의 친가에서 살고 있었는데, 두 형제를 돌봐주시던 할머니가 서울에 있는 아들 내외와 다른 손주들이 보고 싶다며 잠시 서울에 다니러 가신 사이 전쟁이 터진 것이다. 전쟁 통에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를 비롯한 서울의 다른 가족들과도 소식이 끊어졌다. 박성준은 학교에서 급사 노릇을 하며 초등학교를 마쳤고, 졸업 후에는 삼천포의 한 중고등학교에서 급사로 일했다. 동생을 건사하기가 어려워 고아원에 보냈는데, 그곳에서 동생이 학교에 다니는 것을 보고 나중에는 그도 고아원으로 갔다. 그 것만이 공부에 전념할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4년간의 연애 끝에 둘은 1967년 12월 23일 결혼식을 올렸다. 가난한 사람에게 예수를 전하며 독신으로 살겠다는 남자를 결혼식장까지 끌어냈으니 한명숙의 승리였다. 한명숙의 아버지는 맏딸의 결혼을 위해 멋진 아리아를 축가로 불렀다.
그런데 결혼 몇 달 후 이상한 조짐이 일었다. 경제복지회에 와서 강의를 했거나 가까이 지냈던 선배들이 하나 둘씩 어디론가 연행되어 가서 조사를 받았다. 신혼의 단꿈에 빠져있어야 할 시기인 어느 날 박성준은 한밤중에 끌려갔다. 선배에게 빌려다 읽은 책들이 화근이 되어 통일혁명당 사건에 연루된 것이다. 이것이 13년여에 걸친 긴 이별의 시작일 줄은 새댁 한명숙은 꿈에도 몰랐다.
사랑과 신앙은 물론 여성, 철학, 사회문제까지 넘나들며 내면의 성숙과 정신적 결속을 키워가는 진정한 생의 동반자
6남매의 맏딸이었던 한명숙은 남편의 옥바라지를 하는 한편 집안의 생계와 어린 동생들의 학비를 책임지는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했다. 남편은 혼자서 그런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하는 아내가 안쓰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들의 편지에는 서로의 힘든 처지를 위로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정, 상대방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이 절절히 녹아있다.
이 숨 막히는 더위 속에서 직장일과 집안 문제로 포위되어 있을 당신에게 위문편지를 보내는 심정으로 펜을 드오. 내가 자유의 몸이라면, 귀한 당신을 그러한 곤경 속에 혼자 둘 리가 없는데, 생각하면 가슴이 끓어올라 34도의 무더위를 잊소. (54쪽, 1972년 7월 30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천 원짜리 외투 깃 속에 턱을 묻으면서 싱싱한 미소를 보내던 천진무구한 당신의 모습이 아른거립니다. 바로 그날 “이 여자가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하였소. 나 또한 당신에게 반해있는 모양이오. 우리 두 사람의 인생은 제법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드오. (47쪽, 1978년 12월 28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내일 추석에는 밥이 설어 콩이 설컹하게 씹히거나 떡밥이 되어 찐득찐득 입천장에 들어붙지 않는 포실포실한 밥이 나오기를 바라며 따뜻한 미역국이라도 드실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외로울 때, 당신이 제 곁에 오고 싶을 때 저 역시 그렇습니다. 당신의 그 그리움과 외로움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세요. (308쪽?313쪽, 1981년 가을에 보낸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이들의 삶을 지탱해준 두 개의 큰 축은 사랑과 신앙이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에서 처음 만나 기독학생 동아리 ‘경제복지회’의 회장과 부회장을 지냈던 두 사람은 기독교라는 종교적 토대 위에서 더욱 굳건한 유대를 다졌다. 남편을 감옥에 보낸 뒤 한명숙은 경동교회 강원룡 목사의 배려로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에서 일하는 한편 신학대학원 과정을 밟았다. 박성준 또한 감옥에서 성서연구반을 만드는 등 신학공부에 더욱 집중하였다. 이들의 편지에는 신학에 대한 서로의 의견을 나누며 깊은 신앙심을 다지는 모습이 보인다.
가슴에 묻힌 그리스도를 향한 간절한 기도의 불덩이가 남몰래 뜨거워 갈수록 우리들의 눈길을 더 착하고 어질고 겸손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고 기도드립시다. (146쪽, 1975년 10월 15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어떤 사람에게는 가장 비참할 수 있는 환경을 우리에게는 기쁨과 보람으로 변하게 해 준 주님의 은혜에 깊이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픔 속에도 주님이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165쪽, 1976년 4월 27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한명숙은 한국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여성사회 간사로 참여하면서 여성과 사회에 대한 더 깊은 문제의식을 갖게 되었다. 한때 그녀는 ‘크리스찬 아카데미의 무당’이라는 별명을 들어가며 헌신적으로 활동하였는데, 그의 이러한 행적은 1970년대 한국사회의 민주화운동과 여성운동의 근간이 되었다. 이들의 서간집 속에는 한명숙의 정신적, 사회적 성숙의 궤적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으며, 때로는 남편과 열띤 난상토론을 벌이는 모습도 보인다.
저는 해방된 여성이고 싶을 뿐만 아니라, 인간다운 인간으로 살고 싶은 강한 욕구가 저를 받치고 있습니다. 전정한 여성해방은 여성만이 아닌 남성과의 깊은 협력과 노력이 함께 할 때 양성 모두 해방되는 결과가 오지 않겠어요? (118쪽, 1974년 12월 11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숙이 씨가 지난번 편지에 쓰셨던 문제에 대하여 요즘 무척 생각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각자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것이며 인격에 있어서 독립과 주체성을 가지면서, 두터운 우정과사랑에 의해 결합된 부부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상적인 친구 사이에서 마땅히 있어야 하는 비판과 충고는 끊이지 않을 것이며 때로는 의견 대립과 다툼도 있을 것이지만 이것을 우리의 민주적 관계가 건전히 유지되고 있다는 표징이 될 것입니다. (121쪽, 1974년 12월 23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인간을 여성과 남성으로 나누어 대치시키는 이분법적 사고는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성을 포함한 인간의 문제를 먼저 이야기해야 하며 여성의 문제는 인간문제의 핵심을 해결한 사회적, 문화적 기반 위에서 논의되어야 합니다. (143쪽, 1975년 8월 5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이처럼 이들의 서간집 속에는 사랑과 신앙을 바탕으로 믿음과 행복을 나누는 부부의 모습만이 아니라 여성문제와 사회문제, 삶의 자세와 철학 등을 소재로 의견을 나누고 충고하며 서로를 성장시키는 진정한 반려자로서의 모습이 온전히 드러나 있다. ‘인간’ 한명숙의 내면의 힘이, 그리고 남편 박성준과의 정신적 결속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성숙해졌나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낸, 그들의 온기와 부드러움. 우리시대의 가장 감동적인 연애의 기록!
이 서간집은 시대에 의한 강압적인 이별의 기록이면서, 또한 인간 내면의 성장에 관한 기록이기도 하다. ‘한없는 좌절로 빠질 수 있는 환경, 견딜 수 없는 지루한 단순성, 늘 부딪힐 수 있는 패배감을 생산적이고 창조적인 삶으로 대치시킨 용기와 신앙심’(165쪽)으로 그들은 함께 걸었다. 몸은 강제로 떨어져 있었으나 정신과 영혼의 동반자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한 걸음씩 힘들게 앞으로 나아갔다. 그들의 편지 속에도 비유하고 있듯이 단단하고 거대한 돌을 쪼아 마침내 어떤 형상을 만들어 내듯이, 어리석은 늙은이[愚公]가 산을 옮기듯이(223쪽) 하루하루를 이겨내고 마침내 13년 반의 세월을 이겨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의 편지에는 빛과 어둠이 공존하고, 차가움과 온기가 함께 있다는 것이다. 교도소 벽을 나고 흐르는 냉기 속에서도 스러지지 않는 희망과 신념이 사람의 체온과 같은 따스함으로 공존하고 있다. 그들에게 도덕성과 정의란 강철처럼 차갑고 단단한 것이 아니라, 일상의 자질구레한 것들에 대한 눈물겨운 감동, 어떤 고난조차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겸허함, 그리고 그것을 웃음으로 바꿀 수 있는 여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온기와 부드러움이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내게 했다.
문방구 할머니가 “색신 참 얌전해서 좋은 데로 시집가겠수” 하시더군요. 그래서 저는 속으로 ‘그렇지 않아도 저는 벌써 좋은 데로 시집갔는 걸요. 저는 썩 훌륭한 남편을 가졌고 그리고 또 행복하니까요. 할머니 정말 관상을 잘 보신는데’ 하고는 씩 웃었습니다. (30쪽, 1970년 1월 4일 한명숙의 편지 중에서)
나는 감옥에서 몇 해 사는 동안 보다 좋은 사람이 되어 나갈 것이다. 지금 나는 아주 멋지고 높고 험한 산을 오르는 산악인 같은 느낌으로 하루하루를 보낸다. 감옥이라는 묘한 계곡에 머물러서 갖가지 진귀한 풍경을 보면서 나 자신을 닦는다. (268쪽, 크리스찬 아카데미 사건으로 투옥된 한명숙이 1979년 12월 20일에 동생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대전까지 백 리 길을 달려올 예정이라는 마누라의 편지 받고, 까까중이(가막소쟁이) 남편은 이발하고 면도하고 ‘로숑’ 몇 방울 찍어 바르고 있는 폼 없는 폼 다 잡으면서, 쿵덕 방아 찍는 가슴 진정시키며 하루 죙일을 기다렸것다. 책상에 붙어 앉아 원고를 쓰는 척, 책을 읽는 척, 사람들과 농을 하는 척, 마누라쟁이 오건 말건 관심 없는 척, -척 -척 -척 이렇게 척척박사가 되어 쿵덕 방아만 찍고 앉아 있었으나 결과는 빌 ‘공空’, 기다려 ‘뻥’자라! 못 와도 좋아, 둘째 마누라인 당신일랑 천천히 오소. 다만 성님일랑 일쯕이 내려 보내시오. 앗따 못 알아듣소? 내 첫째 마누라(책) 말이오. (133쪽, 1975년 3월 23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이제는 슬슬 4,5년 묵혀두었던 영어책도 좀 거들떠보기로 했소. 당신이 보았다는 『22,000단어』도 한번 보아두고 싶소. 나가면 벌어먹고 살 직장도 구해야 하니까 참고로 알아두시오. 당신, 준이가 징역만 살아 세상물정 모른다고 너무 주눅들이지 말고 잘 가르쳐주구려. 선생님께 차렷, 경례! 하하! (317쪽, 1981년 12월 1일 박성준의 편지 중에서)
고난과 결핍 위에 풍요롭고 아름다운 사랑과 삶을 꽃피운 그들의 연애편지는 시대와 세대를 초월하는 감동을 담고 있다. 오늘을 사는 젊은이들에게도, 그래서 이 서간집은 소중한 삶의 교훈을 전해줄 것이다.
요새 대통령감으로 누가 좋을까라는 글이 심심찮게 보이는데..
참여정부 인사들이 많이 거론이 되시더라구요.
근데 한명숙씨를 그냥 무난무난한 아줌마 정치인정도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의외로 많으셔서
관련 글을 찾아서 퍼왔습니다....ㅎ; 마침 보기 좋은 인터뷰가 있더군요..
그렇다고 제가 대통령감으로 꼭 이분을 생각한다는건 아니구요..ㅎㅎ;
다만 가능성을 조금 더 열어보자는 뜻에서요..
편하게 읽어주세요~
첫댓글 요즘 주위에서 보면 이번서거로 한명숙을 다시보게되었다는 분들이 많더라구요 우리나라에서 여자대통령이 나온다면 박근혜 전총재보다 더면저 될 가능성도 있다고봅니다 그리고 유시민전장관은 아직 어리게 보시는 어른분들도 꽤있더군요
지난 총선때 이런분과 악수했다는게 정말 영광스럽습니다.
그지같은 나라꼴만 아니라면....... 혹은 선거문화가 제대로 장착되었다면... 한명숙 전총리나 이해찬 전총리가 5년을 하고, 유시민전 장관님이 다음바통을 이어받는게 나라발전을 위해선 최고이겠지요...
이해찬 전 총리가 이해찬 1세대...때의 오명만 없더라도 대안이 될텐데...물론 그때의 의도는 매우 좋았고, 그때의 교육정책을 얘기하자는게 아니라 그것때문에 편견을 가진 사람이 많죠. 그 이면이나 재평가등은 편견을 가진 사람에게는 먹히지 않습니다. 게다가 '이해찬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학생 + 학부모들도 많거든요.
그니까요. 이해찬전총리는 딸문제만 어찌 잘 처신하셨어도 참 좋았을텐데 말이죠. 그리고 이해찬의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학부모들은 조금 이해가 되지만, 학생들은 참... 이해찬대는 서울대를 10%만 뽑은것도 아니고 수도권대학교 인원수를 반으로 줄인 것도 아니고, 어차피 잘한놈들 순서대로 대학가는건 마찬가지인데 말이죠..
우리가 만듭시다 !!!
제가 굉장히 좋아하시는 분이죠. 그런데 대선에 나오시면 질 것이 뻔합니다. 일단 유동적인 표를 다 잃게 될 것입니다. 왜냐면 여자니까요. 특히 40대 이상에 이쪽도 저쪽도 안좋아하시는 분들은 절대 여자는 안찍을 겁니다. 박근혜 정도 표심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구요. 강금실 전 장관도 투표당일까지 정말 선전했고 멋진 모습 보였지만 결국 '표'가 보여준 것은 참담했죠. 예상치보다 더 적게 나왔습니다. '여자'였기 때문인 것도 컸다고 봅니다. 한명숙 전 총리..정말 좋아하는 분이지만 이 분을 밀어주는 건 너무 힘든 싸움을 시작하는 것 같습니다...
박근혜의 위력을 못느끼셨나요. ㅎ 경상도 + 경상도 출신 수도권시민 + 경상도가 아니더라도 보수권 지지층의 대부분은 둘이 붙으면 무조건 박근혜 뽑을 거고, 그 뿐만 아니라 박근혜는 고정표로는 현재 그 누구보다도 많은 표를 확보하고 있습니다. 그 무서운 파워는 친박연대의 득표수로 증명했죠. 현재 상황에서 박근혜를 누르려면 굉장히 혁신적인 인물이나 기존의 인물이 혁신적인 변화를 가지고 나와야 합니다. 강금실 장관의 예를 든 것은 패배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 예상득표와의 차이를 얘기한겁니다. 유동표가 결국은 현재 우리나라에서는 남자쪽으로 갈 가능성이 높다는 거죠.
일단 이분은 떳떳하게 아들을 육군현역으로 군대에 보냈습니다. 그게 참 맘에 듭니다. 저랑 비슷한 시기에 복무했었죠.
예전 한명숙총리가 낸 책의 내용이군요.....이글 신문에서본적이 있는데....그때 제가 아는것보다 훨씬더 대단한 분이란것을 느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