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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북릉 공원에서
자고로 백성은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다. 전쟁이나 반란은 배불러 심심해서 생긴 게 아니다. 배 고프고 억울하고 잘 사니까 배가 아파서 쳐들어 오고 때려 엎고 곡괭이 들고 더 이상 못살겠다 갈아치자를 외친 것이다. 역사 책 다 뒤져 봐라 내 말이 틀린가. 그 시대 이것이 충족되었다면 간도 깊숙이 들어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만 백성이 편안하게 산 세월은 역사적으로 볼 때 그렇게 길지 않았다. 요즘은 그에 비하자면 태평성대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그러다보니 요즘은 두둑한 배와 등으로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 만민이 평등하다는 민본위주의 삶이기 때문이다. 소위 말하는 민주생활이다. 욕구를 채우면 보다 더 큰 욕심이 생기는 게 누구든 당연지사다. 그로 과유불급이란 말이 요즘에서야 제대로 제 말 뜻을 찾았다싶다. 모자라고 부족해서 쩔쩔매던 때 극히 일부가 그럴지는 몰라도 이 말은 얼토당토 하지 않다,
내가 제일 궁금해 했던 것은 그들의 천안문사태에 대한 관점이다.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들이 제일 존경하는 사람은 등소평이다. 문화혁명으로부터 탈출해 기아로부터 그들을 구출하였다고 믿기 때문이다. 과거와 비교하면 이 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고 그들은 자조적으로 말한다. 바로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그만이지 뭘 더 바라겠냐는 것이다. 내가 아직 언론의 자유와 자율을 말하기에는 시기상조라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만개할 때가 무르익지 않았다.
통제 속에 경제자유면 그만이라는 논리다. 우리 여섯 명도 라면을 먹을 때까지는 그 정도 논리로 흡족하고 만끽한 셈이다. 하지만 이미 자율과 자유를 아는 처지들이다. 어디 그뿐인가, 방종에 허세도 게을리 하지 않으며 시기와 때를 노린다. 이제는 그 분야 도가 튼 분들이다. 그때부터 술을 들이켰다. 고단한 몸이라는게 핑게다. 고단하면 자야할 것인데 수고한 대가를 술로 찾겠다는 것이다. 나름 손해본 것 같은 심신에 보상을 해주겠다는 심산도 깔려 있다.
그야말로 큰 욕구충족이었다. 나는 몸이 안 좋아 술을 끊은 상태인데 영감님들은 오늘의 긴 여정에 스스로 탄복을 했는지 자화자찬을 해가며 술술 술을 불렀다. 인사불성 바로 그 밑 경지까지 그러니까 酒仙 바로 발끝까지 도달해 겨우 끝이 났다. 내일은 늦게 일어나도 되고 심양 시내를 돈다는 전제가 술 발에 큰 보탬이 된 모양이다. 나는 내일 일정을 꼽아 보았다. 비장 김이사는 마눌님의 특명을 받잡고 꼭 보이차를 사가야 한다고 했다. 이는 절대절명으로 사수해야 하는 그만의 사는 방식이다.
우린 또 이곳의 명물인 잣을 사러 견과류 시장도 들려야 한다. 그렇다면 동북아 최대의 시장이라는 오애시장(五爱市场 우아이쓰창)을 따로 찾을 명분이 없다. 시장만 돌다가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는 이른 새벽 오애시장을 혼자서 다녀오기로 했다. 7시 30분에 아침식사를 제공한다니 일찍 일어난다면 가능한 일이다. 더욱이 오애시장은 새벽 5시에 문 열고 오후 3시에 닫는다고 했다.
그런데 새벽녘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거처하는 민박집은 아파트를 개조한 숙박집이다. 큰 방에 침대가 3개 놓여 있고 작은 독방이 있으며 공동으로 쓰는 화장실 말고도 두 명이 자는 화장실 딸린 방이 하나 또 있다. 나는 화장실 딸린 방에 천하의 한량 비장 김이사와 동숙을 했다. 그는 침대, 나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잤다. 나는 먼저 잠이 들었는데 새벽녘 때 아닌 물벼락을 맞고 말았다. 술 취한 김이사가 잠결에 탁자 위에 놓인 물그릇을 손으로 쳐서 그만 내 얼굴에 와락 쏟아진 것이다.
얼마나 술을 드셨으면 그런 지도 모르고 헛소리까지 해대며 잠에 취해 있다. 졸지에 당한 나지만 화는커녕 오히려 나는 감탄했다. 바로 그 시각이 내가 일어나야 할 새벽 4시 반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파트 키를 들고 작은 가방을 챙겨 살그머니 민박집을 빠져나왔다. 그곳은 나가든 들어오든 키가 없으면 엘리베이터도 탈 수 없고 1층에 따로 있는 현관문을 열 수도 없다. 날은 이미 환하고 택시는 많았다. 만약을 몰라 나는 오애시장과 서탑 도문로라는 한자어를 따로 큼지막하게 써 달래서 휴대하고 있다. 급하면 글자를 들이밀 속셈이었다.
아파트 정문 앞에 택시기사가 마치 나를 기다리듯 서 있다. 나는 한자를 보여주고 오에쓰찬 중국 발음도 덧붙였다.그런데 운전기사가 재밌다. '밍주삥관(명주민박집) 오케이~' 하더니만 한국? 하며 말을 건다. 중국어를 전혀 못해도 알아들을 행위이다. 호감을 보이는 것이다. 한국하더니 엄지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중국 하더니 역시 똑같은 시늉을 한다. 그러더니 일본을 지칭하며 엄지손을 거꾸로 내린다. 금세 둘 사이가 和氣靄靄 해 졌다.
그러자 그는 TV는 삼성 것이고 냉장고는 LG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더니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재빨리 쓸 것을 찾아서 내게 들이민다. 가만 보니 자신의 휴대폰 번호다. 그러더니 공항 80원을 외친다. 그의 호의는 다분히 자기 영업 확장에 있었다. 나는 당연 이용할 것처럼 받아서 챙겨놓았다. 그는 도착지에 거의 오자 다시금 전화를 가리키며 '밍주삥관 공항' 이라고 재확인시킨다. 기분 좋게 접근해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그의 능숙한 기법. 이것이 바로 전형적인 중국 스타일이 아닌가. 새벽녘 정신이 번쩍 든다. 허튼 게 하나도 없어 보이는 자신에 충실한 중국인들이다. 그로부터 얻은 data, 공항까지 80원이라는 단서는 다음 날 나의 추진 사업에 꽤 유용했다.
오애시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건물 한 동이 우리나라 남대문시장만한데 그 한 곳에서는 옷만 취급하고 다른 동에서는 신발만 취급한다. 나는 옷에 질리고 신발 냄새에 질려 이내 밖으로 나왔다. 이상한 게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는 5층까지 깔려 있는데 내려오는 에스컬레이터는 없다. 우리 일상에 쓰는 일상품들이 이제는 대개 중국산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겠다. 우리뿐이 아니다. 일본 TV에서 일상품 비교를 했더니 중국산이 85%였고 고작 15%가 일본산이었다. 아마 우리는 더한 결과가 나올 것이다. 학용품을 취급하는 곳에서 본 물건들은 거의 우리나라에서 흔히 보는 물건들이었다.
예전 중국에서 우산을 하나 샀는데 돌아올 때쯤 망가졌었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나는 35원 달라고 하는 접는 우산을 30원 주고 하나 샀다. 필요도 했지만 나름 품질을 알아보자는 것이었다. 등산용품 가게에 들러 작은 스테인리스 술잔 넷이 들어간 컵 세트를 샀다. 우리나라에서는 만원이 넘는데 20원밖에 안한다. 이 역시도 중국제를 들여와 이문을 챙긴다 싶다. 그리고 붉은 색 봉투에 福이라 쓴 봉투를 한 첩 샀다. 새해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줄 때 써먹을 요량이다.
그럭저럭 둘러보니 벌써 해가 중천이다. 나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오는 길 중산대로에서 쓰던 물건 사고팔고 하는 바자 모임이 길게 펼쳐진 것을 보았다. 상해에서도 공자사당에서 일요일 날 중고 책을 사고팔고 하던데 유사한 풍경이다. 우리도 이제는 있는 물건을 아껴 쓰고 나누는 것을 일상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한 번 쓰고 그냥 버리던지 아니면 어느 것은 아끼고 아끼다 한 번도 안 쓰고 때 지났다고 팽개치고 마는 경우도 많다.
(오! 예 할 정도로 입이 딱 벌어진다. 너무 커서..이런 건물이 몇 채)
민박집에 들어오자 이미 다들 식탁에 몰려 있다. 적절하게 새벽 쇼핑을 한 셈이다. 김치찌개로 해장을 했다. 아마 호텔이었으면 빵 조각에 난감했을 테다. 오늘은 어디로 갈까. 여기 오자고 선동한 사람이 나니 책임이 있다. 5시 이전 문을 닫는 곳부터 챙겨보아야 한다. 먼저 북릉공원을 들르고, 그 다음 랴오닝성 박물관에 가고, 그곳에서 가까운 보이차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아줌마가 가르쳐 준대로 231번 버스를 타자고 길을 나섰다. 나는 조선족 시장골목에 들려 잣하고 송이버섯을 살펴보았다. 굳이 사갈 필요가 없을 듯 했다. 나는 인절미와 송편을 샀다. 어제 안중근의사 제사 때 가져갔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또한 한민족만이 즐기는 제 맛이 아닌가. 여기에 때때옷만 입는다면 고릿적에도 그러하였듯 영락없는 우리의 고유 풍속이다.
그런데 가도 가도 231번 버스는 보이지 않는다. 역관은 당황하고 있다. 길 가는 이에게 물었다. 가다가 꺾어지라는 데 없다. 또 물었다. 딴에는 친절한 양 큰소리로 설명하는 데 표정이 무섭기 까지 하다. 그러고는 가는 우리가 제대로 가는지 시종 쳐다보고 있다. 감정 표현이 우리와는 차이가 난다 싶기도 하고 사람 나름 어디서든 한 성격은 존재 한다 싶기도 하다. 누구는 걸어서 가라는 투다. 어느새 등줄기에 땀이 흠뻑 젖었다. 그때였다.
북릉공원 4 킬로라고 적힌 안내판을 김이사가 발견했다. 민박집에서 8 킬로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벌써 4 킬로를 걸어온 것인가. 결국 231번은 못 찾고 대신 281번인가 버스에 올랐다. 나이든 할아버지가 눈에 띄었다. 역관 말로는 97세라 한다. 원체 사람이 많으니 그렇겠지만 의외로 나이든 사람들이 이곳에 많다. 내릴 때 공손히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맞은 편에 앉은 할아버지가 흐뭇해한다. 그 분 역시 82세. 유교가 폐단도 있지만 인간으로서 해야 할 마땅한 도리와 역할도 잘 적시해 놓았다.
아직 이곳은 젊은 친구들이 어르신을 보면 일어서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양보를 한다. 어릴 적 당연 그런 것이라고 살았는데 요즘은 그렇지가 않다. 자는 척 하든지 봐도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 무표정하다. 거기에 핑계 삼을 좋은 물건이 나타났다. 휴대폰에 열중이라는데 뭐라 할까. 나는 휴대폰을 볼 때 편리한 만큼 세상도 망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어느 사물에 대해 이치에 대해 굳이 알려고 하지 않는다. 스마트 폰이 알아서 잘 챙겨주니 그럴 필요성이 없는 것이다.
문맹률은 세계 최저라고 하지만 문장력은 형편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실기하고 있다. 세상은 이해하고 생각하고 묘안을 짜내며 협상하고 타협하며 소통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다워지려면 정작 말의 맵시가 중요하고 그에 걸맞은 사고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자기중심의 획일적인 의식만 가득한 아이들이 내심 걱정되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요즘 들어오는 내 직장의 젊은이들도 그런 안타까운 점이 꽤 많다. 공부만 했지 자기 손해는 기를 쓰고 안 보려 하며 인간적인 면모는 현저히 어설프다는 생각을 할 때가 많다. 인문학이 쇠퇴하면 자연 문화수준도 뒤처지고 말 것이다.
우리는 북릉 동문에서 하차했다. 북릉 역시 일흔이 넘으신 분들은 입장료가 무료다. 공원엔 나이든 분들이 꽤 많았다. 그들의 공원은 우리와는 이용하는 방식이 아주 다르다. 우린 아베크족들의 데이트 코스나 소주를 들고 찾는 곳이지만 그들은 운동도 하고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고 그야말로 다양한 취미생활이다. 공원 입장료는 6원이지만 안에 들어가 청 태종의 능을 보려면 30원인가를 더 내야 한다. 우리는 안 들어가고 무료입장이 되는 도박사님만 대표로 그곳에 들어가셨다.
(우리는 대표로 70세 이상인 분만 들여보냈다. 공짜니까.)
이곳은 청태종, 그러니까 병자호란의 주역인 홍타이지 무덤이 있는 곳이다. 전략 전술로 명나라를 물리친 그다. 그가 죽자 순치제와 강희제가 이 무덤을 꾸몄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자금성에서 본 건축구조가 옮겨 온 듯, 그제 본 심양고궁의 팔각정이나 대성전 모습과는 많이 다르다. 워낙 사냥을 좋아한 만주족답게 그들은 조선인을 끌고 올 때 사냥감 다루듯 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이조시대 중 제일 안타깝게 생각하는 인물이 둘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광해군이고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소현세자다. 광해군이 노론들에게 시달림 안 받고 득세를 했다면 우리와 청나라 관계가 극으로 치닫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현세자는 볼모로 잡혀 자금성에 있을 때 천주 교리를 이해한 사람이다. 서양 문물을 받아들일 태세가 된 사람이었다.
나는 일국의 리더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들을 보고 생각한다. 세상은 때를 잘 만나야 하고 한 시대는 바로 지도자 역량에 달려 있다. 조선은 백성들을 위해 해준 게 거의 없었다. 유성룡이 부국강병과 고른 인재등용을 외치며 임진왜란을 버텨냈는데, 이후 신분차별은 더욱 거세졌으며 급기야 추노가 생겨나고 정통성을 말하는 족보 순종주의는 더욱 활개를 쳤다. 청나라는 그 무렵 한족과 만주족의 차등을 없애려 안간힘을 쓰고 저 멀리 라마교를 장려하며 티베트까지 끌어들여 그야말로 거센 오랑캐를 얌전하게 만들고 태평세월을 구가 했었다. 우리는 늠름하게 생긴 홍타이지 동상을 뒤로 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지하철을 타고 이제 유람을 시작 할 차례다. 그런데 거기서 실수가 또 발생한다.
(북릉에 홍타이지 동상, 우리로선 철천지 원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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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구요동기를 보면 심양, 요동 격전지를 돌며 청나라와 명나라가 혈전을 벌이는 상황과 누루하치와 홍타이지의 용맹함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우리가 제일 싫어하는 홍타이지지만 그의 용맹성은 알아주어야 한다. 그 대목을 옮겨 본다.
<명(明) 천계(天啓) 원년(1621) 3월에, 청인(淸人)이 이미 심양을 빼앗고 또 군사를 옮기어 요양으로 향하였다. 이때 경략(經略) 원응태(袁應泰)가 세 길로 군사를 내어서 무순(撫順)을 회복하려던 차에, 청인이 이미 심양을 점령하고 요양으로 향한다는 것을 듣고, 드디어 태자하(太子河) 물을 끌어다 해자에 채우고 군사를 성 위로 올라가 빙 둘러서서 지키게 하였다.
청인이 심양을 함락시킨 지 닷새 만에 요양성 밑에 이르렀다. 누루하치[奴兒哈赤]란 자는 이른바 청 태조(淸太祖)다. 그가 스스로 좌익(左翼)의 군사를 이끌고 먼저 이르니, 명(明)의 총병(摠兵) 이회신(李懷信) 등이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성에서 5리 되는 곳에 나와서 진을 쳤다. 이때 누루하치가 좌익(左翼) 군대에 속한 사기(四旗 만주군 편성 단위)로 왼편을 공격했다. 청 태종(淸太宗)이란 자는 우리나라에서 이른바 한(汗)이라고 부르니, 그의 이름은 홍타이지(홍타시[洪台時])우리나라의 병정록(丙丁錄) 중에 너저분하게 실려 있는 ‘紅打時, 또는 紅他詩’는 모두 발음이 비슷한 대로 적은 것이다. 마치 영알대[英阿兒臺]를 용골대(龍骨大)로, 마부타이[馬伏塔]를 마부대(馬夫大)로 쓴 것이 모두 이와 같다. 하였다. 그가 날랜 군사를 이끌고 싸우기를 청했으나 누루하치가 허락하지 않다가, 홍타시는 굳이 가서 홍기(紅旗) 두 개를 세워 두고 성 옆에다 매복시켜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누루하치가 정황기(正黃旗)ㆍ양황기(鑲黃旗)를 보내어 홍타시를 도와서 명(明)의 군영(軍營) 왼편을 치게 하였다. 또 사기(四旗) 군사가 뒤이어 이르니 명병(明兵)이 크게 어지러운지라, 홍타시가 승리를 얻어서 60리를 추격하여 안산(鞍山)에 이르렀다. 이 싸움에 명병이 요양의 서문으로 나와, 앞서 청인이 성 곁에 세워 두었던 두 홍기(紅旗)를 뽑으니, 복병이 일어나서 이를 맞아들여 쳤다. 명병이 다시 성으로 도망하여 들어가느라고 저희들끼리 짓밟혔다. 총병 하세현(賀世賢)과 부장(副將) 척금(戚金)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이튿날 아침에 누루하치가 패륵(貝勒 만주군의 벼슬 이름)의 왼편 사기 군사를 거느려서 성 서쪽의 수문(水門)을 파 호수의 물을 빼고, 또 오른편 사기 군사로 하여금 성 동쪽의 진수구(進水口)를 막게 하고, 자기는 우익(右翼) 군대를 성 밑에 늘어놓고는 흙을 넣고 돌을 날라서 물길을 막았다.
명병은 보병과 기병 3만 명을 거느리고 동문(東門)을 나와서 청병과 마주 진을 치고 서로 버티었다. 청병이 바야흐로 다리를 빼앗으려 할 즈음, 마침 수구(水口)가 막히어서 물이 거의 마를 지경이므로, 사기의 선봉이 해자를 건너 고함을 치면서 동문 밖으로 엄습하자, 명병도 이에 맞서 역전했으나, 청병 홍갑(紅甲) 2백 명과 백기(白旗) 1천 명이 내닫는 바람에 죽은 명병이 해자에 가득하였다. 청병이 무정문(武靖門) 다리를 빼앗고 양쪽으로 나누어 지키는 명병을 치니, 명병이 성 위에서 끊임없이 화포(火砲)를 터뜨리었다. 청병도 이에 용감히 맞서 서성(西城) 한 쪽을 빼앗고 민중들을 베니, 성 안이 요란하였다. 이날 밤 성 안에 있는 명병이 횃불을 들고 싸울 때, 우유요(牛維曜) 등은 성을 넘어 달아났다.
이튿날 아침에 명병이 다시 방패를 세우고 힘써 싸웠으나, 청 사기의 군사가 역시 성을 타고 올랐다. 경략 원응태는 성 북쪽 진원루(鎭遠樓)에 올라서 싸움을 독촉(督促)하다가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누(樓)에 불을 놓아서 타죽고, 분수도(分守道) 하정괴(何廷魁)는 처자(妻子)를 거느리고 우물에 빠져 죽고, 감군도(監軍道) 최유수(崔儒秀)는 목매어 죽고, 총병(摠兵) 주만량(朱萬良), 부장 양중선(梁仲善)과 참장(叅將) 왕치(王豸)ㆍ방승훈(房承勳)과 유격(遊擊) 이상의(李尙義)ㆍ장승무(張繩武)와 도사(都司) 서국전(徐國全)ㆍ왕종성(王宗盛)과 수비(守備) 이정간(李廷幹) 등은 모두 전사하였다.어사(御史) 장전(張銓)은 청병에게 사로잡혔으나 굴복하지 않으므로, 누루하치가 죽음을 내려 순국(殉國)하고자 하는 뜻을 이루게 하였다. 홍타이지가 장전을 아껴서 살리려고 여러 번 타일렀으나 마침내 뜻을 빼앗을 수 없었으므로, 부득이 목매어 죽이고 장사를 치러 주었다.>
(홍타이지 무덤/ 도박사님만 들어가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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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사진 감사합니다.
사진이 좀 크면.. .ㅎㅎ 더 좋을텐데~~요~~
스크랩은 사절합니다. 제발...
넵! 스크랩 안하겠씀다.
홈지기님!!! 부탁한다고 거듭 말을 했는데도 계속 누군가가 스크랩을 하고 있네요......고민됩니다...
# 스크랩을 방지하시려면~~ 글 [수정] 하시면서, 글칸 전체박스 보다 아래, 보시면 스크랩 금지에 체크하시면 되요~~
# 제가 수정할수는 없어서...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