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고향은 서산갯마을. 비릿내 나는 바닷가 그곳에는 그리움보다 슬픔이 많은 곳입니다. 서울에서 시집온 엄마가 살아야 했던 바다 생활은 거칠기만 했지요. 막내였던 저를 낳고 엄마는 애를 봐줄 사람이 없어 혹시 바다에 빠지지나 않을까 싶어 영전 기둥에 저를 묶어 놓고 물질을 하셨다고 지금도 눈물을 글썽이십니다. 고등어 장사. 남자도 힘들다던 경운기를 운전, 소를 먹여 키웠던 그 힘들 나날들. 그래도 그 세월을 다 견딘 건 저희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저희가 자자고 어머니는 결심을 했습니다. 물려 줄 돈이 없으니 자식 공부라도 시켜야한다구요. 경기도 초등학교 기능직공무원으로 취직을 하셨던 아버지... 우리는 무일푼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살았지요. 엄마는 야간작업까지 마다 하지 않으셨기에 아버지가 숙직이라도 있는 날은 밖으로 문 잠그고 나가시면 우리 삼남매는 그 안에서 아버지가 오실 때까지 나올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우리 삼남매 다른 건 다 용서하셔도 토닥거리며 싸움이라도 하는 날이면 부모님은 용서를 하지 않으셨지요. 그러다 아버지께서 용인으로 발령을 받으셨고 이때도 월세로 전전 해야했습니다. 당시 저희 어머니 소원은 매달 집세 걱정 없는 전세에서라도 살아보는 것이었지요. 그래도 가난했던 삶이었던 부모님 덕분에 허튼 길로 가지 않을 수 있었고, 부모님의 똑바른 마음을 보고 클 수 있었던 건 저희에겐 축복이었습니다. 그러다 뜻밖에도 저희 집에 다시 또 큰 일이 생기고 말았지요. 집주인의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집을 비워야했는데 그 추운 겨울. 마땅히 갈 곳이 없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대로 아이들을 데리고 거리로 나 앉아야만 하나? 그 망막한 상황 속에 그런데 그때 희망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저희 집 옆집의 아주머니. 그분이 그러셨지요. "이 추운 겨울에 어딜 가겠어요? 그냥.. 저희가 집을 지어드릴께요. 돼지 키우는 축사옆이라 냄새는 나겠지만 대강 집을 지을테니.. 우선 봄이 될 때까지만 살아요.. " 어머니는 그때 마치 하늘에서 동아줄이라도 내려온 듯 그렇게 기뻤다고 했습니다. 그 엄동설한에 그 분이 아니였으면 어쩔 뻔 했느냐고. 그런데 그렇게 추운 겨울을 합판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지내고 있을 즈음. 어느 때와 같이 학교에 가서 도시락을 열었는데 그런데 이상한 냄시가 났습니다. 순간 도시락 뚜껑을 닫고 친구들에게는 속이 안좋다고 점심을 굶었지요. 그리고 "이상하다' 고 생각을 했는데 집에 돌아와 언니도, 오빠도 똑같이 도시락에서 이상한 냄새가 났다고 하더군요. 알고 보니 그건 바로 축사에 흘러나온 물이 지하수에 섞여서 난 냄새였습니다. 그 축사에서 흘러나온 물에 아무것도 모른채 우리는 그 물로 밥을 짓고, 얼굴을 씻고 있었던 거지요. 그때 정말 저희가 먹지 못해 다시 싸들고 온 도시락을 끌어안은채 통곡하는 어머니를 봤습니다. 어머니의 울음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옆집까지도 그 소리가 들렸을까요? 며칠 후. 그 이야기를 들은 이장님이 찾아왔습니다. "지행 어머니... 동네에 전세 거리가 나왔다는데 보증금이 2천만원이라는데 다는 마련 못하실테고 천만원은 우리 마을에서 어떻게 해볼테니. 나머지 천만 좀 마련을 해보시지요." 정말 너무나 고마운 이장님의 말씀이었지만 그러나 그 천만원 마저도 마련할 길은 없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차마 죽어도 친척들 신세지는 일을 안하시겠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가장 살기 좋아보였던 고모네로 전화를 하셨지요. 그때 어머니의 그 비장했던 얼굴은 차라리. 제겐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연락 주마고 전화를 끊었던 고모에게서는 그후 아무런 소식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후회하시며 그때 저희들에게 그랬습니다. "다시는 주변 사람에게 손벌리며 살지 말자. 대신 남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야한다. 이 받은 사랑 잊지 말아라. " 그러던 중 다시 한번의 기회가 왔지요. 집이 하나 있는데 우리집이 산다면 싸게 준다고 사라는 마을 분의 연락이 왔으니까요. 그때도 비록 얼마의 돈을 모았지만 턱없이 부족하기만 할뿐이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아저씨를 찾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전후 사정도 없이 그냥 고개를 숙인채 이 한마디를 하셨다고 합니다. "여보게. 나 돈 3천만원만 빌려줄 수 없겠나? 내가 언제 갚는다고는 기약도 못하네" 그때 아버지의 친구분 더 이상 묻지도 않으신 채. "내일 자네 집에 감세" 라고 말씀을 끊으셨다고 하지요. 그리고 다음날... 우리 식구 모두 아무리 그래도 친척 조차도 모른채 하는 이 세상에 그 아저씨가 기약도 없는 그 돈을 빌려주시러 올 것이라고는 솔직히 생각도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그날 아저씨는 조용히 늦은 오후 저희 집을 찾아오셨고... 그리고 마루에 신문지로 둘둘 말은 돈 3000만원을 내미시며 그랬습니다. " 편안히 쓰고 갚음세"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돈이 아저씨 집을 은행에 잡히시고 대출해오신 돈이라는 것을요. 그 돈으로 집을 장만했고, 그 후 아버지와 어머니는 정말 마치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나신 분처럼 열심히 돈을 모으셨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아버지는 그 돈을 말끔히 이자를 쳐서 갚으셨지요. 세월이 흘러 얼마 전 저는 결혼할 남자 친구를 집안에 소개했습니다. 그때 아버지와 어머니는 그러셨습니다. "여기 인사 끝나면 아저씨네 집에서 인사 다녀오너라" 저희 집에는 늘 아버지와 어머니 다음으로 아저씨네를 생각하는 것이 당연스러운 일이 되었지요. 남자 친구에게도 조용히 그 사실을 얘기했습니다. "우리 엄마와 아빠 그 다음에는 꼭 아저씨네야. 만약 엄마 아빠가 돌아가시면 아마 우린 아저씨네를 엄마 아빠 대신으로 생각할거고..." 남자친구는 많은 것을 다 이해한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우리 가족의 진심은 이해한 듯 싶었습니다. 아저씨와 아줌마께는 " 아이고 뭐하러 여기까지 인사를 왔어"라고 하셨지만 그 환한 미소가 기특해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지요. 아직도 부모님과 아저씨네는 이사를 하셔도 함께 하시고 옆에서 떠나질 않습니다. 피를 나눈 형제도 아니고 그렇다고 꼭 그래야한다고 빚을 진 사이도 아니지만 그렇게 그분들은 서로의 삶을 의지하고 계신거지요. 부모님의 말씀처럼 저희가 그분들의 은혜를 잊으면 절대 안되지요. 건강하게 그분들이 오래도록 함께 하시길 빕니다. 그리고 저 또한 누군가에게 그런 나누는 사람이 되어 살아가기 위해 열심히 노력할겁니다. "아저씨, 아줌마.. 정말 감사합니다." . . . 이글은 MBC라디오 지금은 라디오시대에서 스크랩한 글입니다...
첫댓글 내 모든 것을 줄 수 있는 마음은 흔치 않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요즘처럼 이기적인 세상에 흔치않은 감동적인 이야기네요...두분의 우정 영원하시길 바랍니다...
각박한 세상에 좋은 미덕의 글을 올려 주셨습니다../부디 두분의 사이가 계속해서 돈독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