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來亭 보물 지정 문화재위원회 회의록(카페).hwp
18. 경주 귀래정(歸來亭).hwp
귀래정 보물 지정 예고 개요
□ 종 별 : 보물
□ 문화재명 : 경주 귀래정(慶州 歸來亭)
□ 지정내용
ㅇ 소 재 지 :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 천서길 7(다산리 1074)
ㅇ 구조/형식 : 목조 / 이익공계 5량가 팔작지붕, 육각형 정자
ㅇ 수 량 : 1동
ㅇ 조성연대 : 조선시대(1755년 건립)
ㅇ 소유자(관리자) : 여주이씨 지헌공파문회
ㅇ 지정면적 : 89.96㎡
□ 지정사유
ㅇ 경주 귀래정은 <천서가숙상량문(川西家塾上樑文), 1755>에 의하면 지헌공파에서 공부를 하기 위한 공간이 없자 이를 의논한 결과 가숙을 지을 터를 정리하고 그 자리에 숭정기원후삼을해(崇禎紀元後三乙亥)인 조선후기 1755년(영조 31)에 천서가숙을 건립하였다고 전함.
ㅇ 육각형의 평면 형태를 갖는 정자로 정면 방향은 마루, 배면 방향은 온돌방과 출입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육각형 정자 중 이러한 공간구획을 갖는 경우는 드물어 유래를 찾기가 어려움. 육각형 평면을 교묘하게 처리하여 온돌방과 누마루를 매우 짜임새 있게 배치하고 자투리 공간을 최대한 이용한 매우 놀라운 평면 활용의 기지가 돋보이는 정자임.
ㅇ 평면은 육각인 반면 지붕은 모임지붕(하나의 꼭짓점에서 지붕골이 모이는 지붕)을 하지 않고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여 몸체와 가구 연결부가 독특하게 구성된 보기 드문 건물임.
ㅇ 귀래정은 온돌방 정면에 외여닫이 세살창(세로살은 꽉 채우고 가로살은 위아래와 중간에 3~4가닥만 붙인 살창)과 들어열개문(문짝 전체를 걸쇠에 들어 걸게 만든 문)을 사용하며, 들어열개문은 세살창을 접고 위에 있는 걸쇠에 걸면 방과 대청이 트여있어 공간의 경계를 없애 한 공간으로 구성할 수 있음. 일반적인 들어열개 문은 1:1로 분합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귀래정의 들어열개문은 2/3의 들어열개문과 1/3의 세살창으로 보기 드문 독특한 창호 구성임.
우복종택 대산루 분합문
귀래정 분합문
ㅇ 봉화 청암정(명승 제60호)처럼 연지가 건물을 감싸는 특이한 형태로 조성한 경우는 흔치 않은 사례이며, ㄴ 자형의 연지와 정자의 구성 그리고 독특한 조경구성 등 전통 정원 및 별서를 연구하는 데도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어 학술적 가치가 높음.
ㅇ 귀래정은 육각형 평면에 마루, 온돌방, 벽장 등이 교묘하게 분할 구성된 점, 원형과 방형의 기둥이 조화롭게 사용된 점, 마루의 바닥높이에 차이를 두어 외부공간과 자연스럽게 연결을 추구한 수법과 더불어 육각 평면위에 팔작지붕을 꾸미는 독특한 목구조결구방식 등 다양한 부분에서 전통건축의 구조기법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됨.
ㅇ 이처럼 귀래정은 조선시대 정자 건축과 별서정원의 뛰어난 수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역사적, 학술적, 예술적, 건축적 가치가 뛰어나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하기에 충분함.
(문화재청, 보도문)
歸來亭
경주시 강동면 다산 2리의 歸來亭이 있는 蓮塘은 ᄀ자형이다. 연못가의 歸來亭은 평면이 6각으로 미묘한 구성이다. ᄀ자형 연못은 남북면과 동서면이 서로 다른 형상을 하여 정확한 ᄀ자형은 아니다. 남문으로 들어서면 바로 정면에 못이 있다. 돌다리를 지나야 정자로 오르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데, 다리 좌우에는 크고 작은 괴석들이 있어 운치가 그윽하다. 연못가에는 향나무, 석류나무, 회화나무, 느티나무, 무궁화들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어 더욱 윤기있는 분위기를 이루고 있다. 남문에서 시작된 낮은 맞담은 歸來亭을 감싸는 방형 윤곽에 연결되는데, 완전히 一廓을 이루어 안채와 구분되어 있다.
歸來亭의 평면구성은 흥미롭다. 보통 亭子는 마루를 깐 다락으로 구성되는 것이나, 이 장자는 방 두 칸을 들여놓고 있다. 평면을 둘로 나누어, 앞쪽에 마루를 깔고 뒤편에는 방을 들였다. 마루는 밖에까지 전개되고 있고, 끝에는 난간을 둘렸다. 육각형의 1/2이 이루는 사다리꼴에 내접되는 장방형을 반으로 나누어 두 칸의 방을 들여놓았다. 이 반분된 방은 각각 정방형인데, 이렇게 구성하는 데에는 기하학적인 지식이 있어야 한다.
사다리꼴에 내접하는 최대한의 정사각형을 만들려면, 밑변의 중심점에서 좌우 45°의 직선과 사다리꼴의 양변과 만나는 점을 구하여 이에서 수직과 수평으로 직사각형을 만들고, 그것을 중심으로 수직으로 나누면 두 개의 정사각형이 된다. 이때에 45°선상의 방 모서리 부분은 平柱와 隅柱와의 사이에 정확한 중앙이 된다. 제한된 넓이에서 최대한 정방형 공간이 구해졌다. 이보다 방의 크기를 약간 키우기 위하여 平柱와 隅柱 사이의 柱間 1/3에 해당하는 선까지 확장하였다. 이 같은 확장으로 인하여 그만큼 벽면이 귀접되었다. 두 칸의 방으로 벽으로 구획되지 않고 네 짝의 미닫이로 여닫게 되어 있다.
방의 측면에 삼각형의 좁은 공간이 남아, 이곳을 반침처럼 이용하였는데, 平柱에 의지한 벽에서 마감되었다. 그 남쪽과 앞부분은 모두 마루로서 우물마루를 원칙으로 하였으며, 귀틀이 이루는 네모진 부분 이외의 삼각형에도 넓이에 따라 길이가 다른 청판을 사용하여 역시 우물마루를 짰다.
방을 들임으로서 마루의 높이가 위치에 따라 차이가 나게 되었다. 즉 방 좌우의 귀마루는 낮고 앞쪽 마루와 난간을 두른 툇마루는 같은 높이가 되도록 꾸며져 있다. 방의 뒤쪽으로 깔린 툇마루는 앞의 마루와 같은 높이가 되도록 하였으므로, 귀마루에서 앞이나 뒤로 한 단씩 딛고 올라서도록 되어 있다.
천장은 內外陣으로 구성된다. 주심도리에서 들보 위의 중도리까지는 仰土바르기를 하였고, 중도리 안쪽에는 폭 61cm, 경사 높이 31cm의 빗반자를 하고, 그 내진에 우물반자를 하였다. 빗반자를 한 칸은 개폐식으로 되어 있다.
內陣의 반자틀은 중도리 장여에 의지하고 있을 뿐 윗면은 허공에 떠 있다. 여섯 개의 추녀가 중앙으로 집합되었다면 추녀에 의지할 수 있었을 터이나, 추녀는 중도리에서 끊겼다.
반자틀 등에서 쌍사쳐서 장식하고 부재가 서로 만나는 부분에 쇠못을 박아 고정시켰는데, 여기에 사용된 못은 장식적인 효과를 고려하여 菊花釘을 썼다.
온돌의 천장은 高柱 위의 上引枋에서 구성되었다. 쌍사로 장식된 우물반자이다. 반자 위로 알매흙을 얹었는데, 이는 바람과 먼지를 막기 위한 수단으로 보인다.
알매흙이 밖에서 보이지 않도록 上引枋 위로 널빤지를 끼웠다. 그 부재에도 쌍사를 쳐서 장식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申榮勳, <한국의 살림집> 상, 열화당미술신서37, 悅話堂, 1983, pp.368~371)
귀래정기
경주 북쪽 오십 리 川西村에 지세가 평탄한 곳이 있다. 거기에는 숲이 울창한 가운데 네모난 둑 위에 날아갈 듯한 집이 있으며, 그 안에 구부러진 난간이 서있는데 그것을 이름하여 歸來亭이라 하니 止軒 선생 이공(李哲明)께서 거처했던 곳이다. 선생은 아주 화려한 솜씨로 서당을 지었으며 높은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뽑혔다. 또한 그는 承文館에 천거되어 兵禮博士와 檢校知製를 지냈으며 홍문관에 천거되어 前途가 밝았다. 그러나 서울거리를 활보하다가 차문의 화를 당하여 일시에 현인이 제거되는 위태로움을 당했다. 공이 이때에 사건의 큼을 알고 드디어 고향에 돌아가서 ‘賦’를 지어 그 뜻을 대략 드러내어 말하기를 ‘세상길의 험난함을 근심하니, 장차 어디로 가서 멀리 바다 구름을 보며 살 것인가? 장차 어느 동구 밖에서 의지할 것인가? 오직 성현이 서로 만나 국가의 다스림을 당함에 있어 대저 어찌 작은 무리들의 아름다움과 임금의 은총에 혹함이 있겠느냐? 하물며 지금 세상에 있어서랴. 아 哲人이 사라짐을 어찌 기다릴 것인가? 구름 아스라이 있는 곳에서 날마다 부르짖으며 젊음을 무릅쓰고 기뻐하고, 또한 부와 귀는 편안함을 구하는데 족하지 못하다. 형세가 좋지 않음을 슬퍼하며 종을 불러 앞길을 인도하게 하고 杜牧(晩唐 시인)의 松菊을 찾고 들과 밭을 간다. 오직 나의 진실된 업은 先代 哲人의 교훈집을 읽는 것이고 性命의 근본을 미루어 가는 것인 즉 卽日로 南下하여 다시는 黨勢의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것이 공히 급히 물러날 수 있는 용퇴의 뜻인 것이다. 공의 후손이 되어 현명한 조상의 뜻을 미루어 기술한 즉 당일에 이 정자를 지었고 이곳에서 휴식하며 산 것이다. 머리를 돌려 천리를 내려오니 나에게 기록하기를 물었다. 잊지 않고 가만히 생각하기를 우리의 己卯士禍의 잔혹함이 東漢의 당과의 변과 흡사하니 초연히 홀로 죽임과 형벌의 화를 면하였다.
오직 신도반과 곽임종 등 數人을 후세인이 항상 논하건대 신과 곽이 李杜(이백과 두보)보다 현명하고 겸손하지 않다 하는 것은 그 기미의 밝음을 본 것이다. 공이 조용한 가운데 선생에게 청하여 함께 제휴하며 같이 돌아가자는 뜻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단지 만난 바의 지역의 다름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집에는 노모가 계셔서 자신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함이 있은 즉 조용히 기러기가 멀리 날아가는 것과 같은 부를 쓴 것이다. 주살이 그 행장에 미치지 못하고 돌아가 쉬는 것이 그 옳음을 얻은 것은 역시 東漢의 신과 곽 때문인 것이다. 삼가 이런 말로 돌이켜보건대 정자에 기록한 제일의 뜻은 이 亭子에 오르는 자만이 공의 마음 자취를 알 수 있을 것인저.
또 하나의 귀래정기
* 오래되어 자료의 출처를 잃어버렸음 -옛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