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원래 저희 12회 동기인 정소성 작가가 이번 저희 12회 가을 소풍에 함께하고서 자신의 문학 카페인 "정소성의 문학세계(cafe.daum.net/sosung5)"에 올린 것을 다시 저희 카페에 올렸고, 이것을 제가 다시 선배님 카페로 옮김니다.
************************************************************************************************** 군산, 새만금방조제 기행
- 정소성 -
나는 어제(10/18) 군산을 처음 가 보았다.
나는 젊었던 시절 전북대학과, 전남대학에서 강좌를 가지고 있어서 전주에서 잠시 산 적이 있었고, 광주에서는 대망의 대학교수로 정식 발령을 받았다(전남대학교 사대 외국어교육과).나는 광주에서 결혼을 하였고, 두 아들을 얻었다. 그러니 나는 영남출신이지만, 호남이 나의 제2의 고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광주에서 3년 6개월간 근무한 후, 나의 마지막 직장이었던 서울의 단국대학으로 옮겼다.
나의 이런 이력에도 불구하고 나는 군산을 한번도 가보지 못했다.
그러나 나의 머릿 속에는 언제나 군산이 차지하고 있어서 한번은 꼭 가봐야한다고 벼르고 있었다.
나의 고등학교 동기회(경북대학교 사대 부속고등학교 12회,구 대구사범)에서 마침 군산과 새만금 방조제 구경을 간다고하여 기꺼이 참석하였다. 참석자는 35명이었는데, 남성이 한 25명 부인이 한 열명이 되는 것같았다.
나의 집사람은, 정년했지만 여전히 대학에 강좌가 있어서 마침 이날이 강의가 있는 날이라 나 혼자만 참석하였다.
나의 뇌리에 들어있는 군산에 대한 지식은 극히 상식적인 것이었다.
즉 일제시 우리나라의 미곡의 생산량은 대략 1600만석인데, 약 800만석이 이곳 군산항을 통해 반출되었다는 것과, 군산은 일제전성기에 일본인들의 주민숫자가 조선인들보다 더 많았다는 사실이다. 이 두가지 상식은 내가 여러번 확인하였기 때문에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김제 평야와 옥구평야의 기름진 조선미곡을 수탈하여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장사 아닌 장사를 하여 엄청난 부를 축적하는 일본인들이 개미처럼 모여들었다. 그래서 이 지역에 기왕에 살던 조선인들의 월명공원을 중심으로 하는 주거지를 허물고 그들을 야산지역으로 몰아냈다. 그것이 지금 해망지역이라 하여 재개발지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벚꽃이 아름다운 전주-군사간 가도도 아름다운 길을 만들기 위해서 만든 것이 아니라, 수탈한 조선 미곡을 군산항으로 실어나르기 위해 만든 것이다. 그러기에 그때 일인들의 수탈의 흔적인 조선은행이나 세관 그리고 각종 일인들의 문화시설이 남아 있는 조금은 낯설고 어두운 도시인 것같다.
그러나 최근에 군산 항 앞에서 남쪽으로 부안을 향해 33.9 킬로 달하는 세계 최장의 방조제를 완성하여 이 지역이 민족의 어두운 역사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를 향해 힘차게 도약하고 있다.
이런 조선미곡 수탈의 현장을 소설로 쓴 것이 채만식의 탁류이다. 군산에 대해 이 정도의 지식을 나는 가지고 있었다.
8시에 서울 종합운동장 앞에서 35명을 태운 리무진은 경쾌한 출발을 했다.
나는 그야말로 오래간만에 고교 동기생들을 만난다고 생각하니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여름 교통사고를 당해 죽지 않고 살아남았기에 이런 기회도 오는구나 하는 이상한 생각도 들었다.
더군다나, 문리대를 같이 다니고 서울의대로 진학해 졸업하고 도미하여 미국에서 일생 의사생활을 하다가 은퇴한 김홍서가 온다고 해서 기대가 컸다. 녀석은 수십년 전, 나의 대학으로 편지를 하나 띄웠는데, 이락 전에 강제적으로 징집되어 떠나는데 어쩌면 생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좀 비장한 내용이었다. 비행장에서 급히 쓴 흔적이 역력한 편지였다. 녀석이 그런 일이 있고난 후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것이다.
리무진은 금강하구둑을 지나자 말자, 좌편에 널직하게 펼쳐져 있는 가창오리 도래지 앞에 멈쳤다. 군산권 관광자료의 제일로 치는 철새도래지이다. 그러나 가창오리들은 겨울에 날아오기 때문에 지금은 제철이 아니다. 우리는 철새없는 철생도래지를 바라보았다. 이들 철새들이 여기로 날아오는 이유는 물론 김제, 옥구평야에 떨어져 있는 낙곡들을 줏어 먹기 위해서다. 일인만 여기로 곡식을 획득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가창오리들도 찾아왔던 것이다.
이어서 가까이 있는 채만식 문학관을 찾았다. 철새 도래지에서 군산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고 있다. 채만식이 오늘날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의 하나는 그의 문학이 뛰어나서라기 보다도, 그의 일제하의 행위가 뚜렷한 반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독림선언문을 기초한 이광수가 창씨개명하고 학도병자원입대를 권고하고 다니고 모윤숙이 가장 치사한 변절을 하여 일제에 붙어 민족말살정책에 부응하는 마당에 채만식 정도의 민족적인 지조를 지키기는 어렸웠을 것이다. 조선 미곡의 수탈로 흥청대고 꿀을 찾아 드는 엄청난 쪽발이 일인들과 섞여 흥청거리면서 돌아가는 군산의 썩어가는 풍경을 탁류는 그리고 있다. 채만식은 당시 민족 교육으로 이름높던 서울 중앙고보(현 중앙고등학교) 출신으로, 와세다 대학을 일년 반 다니다가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고 한다.
리무진은 소위 군산시내 중에서도 근대문화의 거리라는 지역으로 들어와서 한 시간 가량 점심을 먹었다. 이어서 이 지역에 흩어져 있는 그야말로 군산의 근대문화(일제문화)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그 첫번째 목적지가 동국사였으나, 가봐야 조그만 절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기사양반의 조언으로 포기하였다. 나는 꼭 가야한다고 주장했으나 다들 다음 행선지를 택해 나는 할 수 없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군산에 가면 동국사는 꼭 가봐야 한다. 왜냐하면 동국사야말로 조선에, 아닌 지금 우리 나라에 남아 있는 가장 크고 전형적인 일본풍의 절이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한국에 오면 꼭 군산을 찾아가고 여기 동국사에 가서 운다고 한다. 왜 우는지는 모르지만, 이 나라를 지배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울 것이다. 삼성전자에게 소니가 깨어지는 이 마당에 조선을 자기들 마음대로 요리해 먹을 수 있었던 옛 군산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점심을 먹은 후, 기사는 우리 단체의 실무책임자인 총무(김일두)를 동의를 얻어, 리무진을 계속 서해안 쪽으로 몰아가서, 곧장 새만금으로 갈 작정이었다. 귀경 시간이 그리 넉넉하지 않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여기 군산까지와서 동국사도 안보고, 일제하 군산 경제의 최고 갑부였던 구마모또의 흔적이 남아 있는 이영춘가옥도 보지 않고 간다면 좀 너무한 것 같았다.
나는 좀 건방진 생각이 들었지만 마이크를 잡았다. 그럴 수는 없다. 일제가 우리의 피를 빨기 위해 우리의 목을 물었는데 바로 그 목 부위가 여기 군산이다. 2차대전이나,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중국에게 동화되어버린 만주처럼, 놈들의 조선민족말살정책에 밀려 영원히 일인으로 변했을지도 모른다. 전국민은 창씨개명하고, 우리 말을 못쓰고 일어를 써야만 했다. 이광수 유치진 모윤숙은 변절하여 일제의 앞자비가 되었다. 누가 나라를 지켰겠는가! 아무리 바빠도 내려서 일제놈들의 흔적을 살펴보자. 나는 호소하였다.
다들 나의 호소를 들어 주었다.
가까이 있는 일인 포복상으로 거부가 되었던 후로쓰가 지은 일본식 건물의 탐방으로 들어갔다. 이 가옥은 군산뿐만아니라 전국적으로 보아도 일인이 지은 전통적인 일인 가옥으로 가장 완전하고 가장 크다고 한다. 지난 여름에 일인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는 포항 인근의 구룡포에 남아 있는 일본인 거리에서 역시 거부였던 이곳 일본인들의 가옥을 본 적이 있었는데, 군산의 호로쓰가옥보다가는 규모면에서 적은 듯했다.
그러나 문화해설사의 해설이 조금은 나의 기분을 잡쳐놓았다. 그는 문화해설사답게 이 집의 우수성을 극구 부각했다. 90년 묵은 묵조건물이지만, 아직도 끄떡 없다는 둥, 찾아오는 일인들이 감탄하면서 우는 사람도 있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이런 일인들의 문화의 흔적은 결국 조선민족을 착취한 그 착취의 발자취라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저들의 교활함은 가히 도둑놈의 기질이 아니고 무엇인가. 중국한테는 센카쿠 열도를 높고 깝빡 죽으면서 우리에게는 여전히 고자세이다. 자기네들의 식민지였던 나라라 깔보는 것이 틀림이 없다.
후로쓰 가옥을 돌아보고,나는 동국사나 이영춘 가옥, 그리고 가능하다면 조선은행 구건물같은 것을 리무진으로라도 한번 돌아보자고 요청했으나 총무는 시계만 내려다보면서 다음에 한번 더 오자고 나를 달랬다. 새만금 가는 것이 급하다는 것이다. 지금 떠나도 서울에 9시에 도착하기 힘들다고 사정을 했다. 나는 할 수 없이 양보하는 도리밖에 없었다. 단체 움직임에 어찌 나의 주장만을 할 수 있겠나.
서해안을 향해 시내를 빠져나가다가 금강변 쪽으로 펼쳐져 있는 근대문화의 거리를 지나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월명공원이라는 것이 있는데, 군산시의 심장부이다. 여기에는 일제의 신사라든가 보국탑등 일인들의 흔적이 가장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월명이라는 말자체가 일본식이다. 한국이나 중국식은 명월이다. 이 이름을 두고 군산 시민들이 공원이름을 고쳐야한다고 들고 일어서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그대로 쓰는 모양이다. 이영춘 가옥은 일인 최고 갑부였던 구마모도가 지은 것인데, 그는 이 월명 공원을 전부 사들여 사유화하려했다고 한다. 이영춘이란 사람은 조선의 최초의 의학박사라는 말이 전해지고 있는데, 구마모또에게서 이 집을 구입했다고 한다.
세계 최고 최장의 방조제인 새만금 방조제를 달렸다. 나는 어찌하다가 제일 앞자라에 앉게 되어, 전망이 최고였다. 나는 리무진이 서울을 떠날 때부터, 오늘 친구들을 만나면 불러야겠다고 새벽에 일어나 몇곡 애창곡을 준비한 것이 있어서, 벌써 뻐스 안에서 몇곡을 불렀다. 내가 부른 노래는 <아 가을인가>와 <제비>였다. 방조제 위를 달리면서 나는 <고향의 노래>를 불렀다. 인사말인지 다들 잘 부른다고 앙콜을 연발했다.
고교 동기생이란 녀석들은 정말 속일 수 없이 서로들 잘 아는 막연한 사이다. 취미라든가, 얼마나 열심히 공부하는 녀석인가. 얼마나 컨닝구를 잘하는가 담임은 몰라도 우리들은 서로들 잘 안다. 그가 좋아하는 음식이 무엇이며 무슨 술을 어느정도 마시고, 도시락 반찬으로 무엇을 잘 싸오는가도 잘 안다.
문리대 모임을 맡아 봉사하다 보니, 나는 고교동기생들과는 조금은 덜 만나는지도 모르겠다.오늘 나는 고교동기생들에게 나의 모든 정성과 정을 담아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그래서 자꾸 노래를 불렀다. 유행가 한 곡조를 또 불렀다.
하루를 같이한 나의 고교동기생들, 흔히들 영남의 수재들이라고 한다. 내가 다닌 고교의 전신이 바로 영남수재의 산실인 대구사범이다. 그런 이유로 우리도 그런 소리를 들을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내가 보아도 나를 빼놓고는 다들 수재들이다. 다들 현직에서 떠난 그야말로 잉여인사들이지만, 지난 한 세월 속에서 크게 활약했던 전력을 가진 분들이다. 머리가 허옇게 변하니 한결 더 위엄이 있어 보인다. 나는 그들에게 정과 존경의 마음을 언제나 가지고 있다.
서울에 가까이 오니까, 총무를 맡고 있는 김일두 일어나 무슨 말을 했다. 김용수와 배상인이가 여비에 보태쓰라고 약간의 성의를 내놓았다는 이야기였다. 다들 하하 거리면서 박수를 쳤다. 회비는 일만원이었는데, 휴게소에서 저녁 먹으라고 되돌려주었다. 다들 기분이 좋아 하하거렸다.항상 이랬으면 좋겠다. 동기생 좋은 게 뭔가. 이런 모임에서 자꾸만 뭔가를 내놓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는 게 아닐까. 서울을 떠나 멀리 여행을 하니 한결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같다.
그러니 나는 전부 네 곡의 노래를 부른 셈이다. 다들 집으로 돌아가 내가 부른 돼지 목따는 듯한 목소리에 귀가 멍멍할 것이다. 혹시 정소성 그 자식, 머리와 얼굴은 늙었지만 노래 부르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돼지 목따는 소리는 자고로 옌간히 높은 것이 아니다. 서울 집으로 도착하니 자그마치 10시였다.
조선인보다 일인이 더 많았던 착취의 도시 군산, 그중 가장 성공한 착취의 선두주자 최고부자, 구마모또가 살았던 집, 이후 한국최초의 의사박사라는 이영춘이 살았다고 한다.
군산 관광의 일번지인 금강 가창오리 도래지, 겨울이 아니라 철새 없는 철새 도래지의 모습은 쓸쓸하다.
<탁류>의 작가 채만식 기념관에서
소설을 집필하고 있는 채만식의 디오라마
채만식 기념관의 정원
신영광과 김홍서와 함께
김홍서와 함께(문리대, 서울의대 출신으로 도미하여 일생 의사 노릇을 하다가 정년하였다.)
광목 장사를 하여 폭리로 거금을 모았던 후로쓰 가옥, 헌국에 지금 남아 있는 일본 가옥으로는 가장 전형적이다.
새만금 방조제
동국사 대웅전 전경,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식 절로는 가장 크다.
< 출처 : 정소성의 문학세계(cafe.daum.net/sosung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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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자상한 설명에 얻을 것 많으나
한편으론 작가 특유의 독선이 엿보여 더욱 정감이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