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法頂·78) 스님이 2010년 3월 11일 오후 1시 51분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입적(入寂)했다. 법정 스님은 '무소유'의 저자로 잘 알려져있다.
1932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법정 스님은 1954년 당대의 선승(禪僧) 효봉(曉峰)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고, 송광사·쌍계사·해인사 등에서 참선수행했다. 1960년대에 불경의 한글번역 사업에 참여했으며, 1970년대 들어서는 에세이와 저서를 통해 불교적 가치관을 독자들에 전하며 많은 영향을 끼쳤다. 1996년 김영한 보살로부터 서울의 대표적 요정이었던 대원각을 기증받아 2007년 길상사(吉祥寺)를 창건하고 시민운동단체 '맑고 향기롭게'의 근본 도량으로 삼았다.
법정 스님은 수필집 '버리고 떠나기', '무소유', '산방한담(山房閑談)', '아름다운 마무리', '산에는 꽃이 피네' 등 20권이 넘는 대중저서를 출간해 불교계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자리매김했다. 1997년 창건한 길상사에서는 2003년까지 회주를 맡기도 했다.
생전에도 '무소유'를 강조하던 법정 스님은 '사리를 찾지도, 탑을 세우지도 말라.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 있다면 모두 맑고 향기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활동에 사용해 달라.'는 마지막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졌다.
법정 스님은 지난 2007년 폐암으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2009년 재발해 그동안 삼성서울병원에서 투병해 오다가 이날 서울 성북동 길상사로 거처를 옮겨 열반에 들었다./조선
[2009년] 독일 학교총기참사…16명 사망
2009년 3월 11일 독일 남서부의 한 실업계 중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 범인을 포함해 모두 16명이 사망했다.
'팀 크레취머'로 알려진 17세의 범인은 학교 수업이 시작된 직후인 오전 9시33분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빈덴넨에 위치한 '알베르빌 레알슐레'에서 9㎜ 베레타 권총을 난사한 뒤 도주했으며 추격에 나선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자살했다.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헤리베르트 레흐 내무장관은 이번 사고로 14-16세인 학생 9명, 교사 3명, 일반인 3명이 목숨을 잃었다고 밝혔다.
뉴스 전문 N-TV는 목격자들의 말을 인용, 지난해 이 학교를 졸업한 범인이 전투복과 마스크를 착용한 채 교내에 진입해 총기를 무차별 난사했다고 보도했다.
범인은 한 교실에 난입한 뒤 총격을 가해 현장에서 학생 8명과 교사 3명이 사망했고 부상한 학생 1명은 나중에 병원에서 목숨을 잃었다. 범인이 학교를 떠나 도주할 때 학교 앞 정신병원 정문에 서 있던 이 병원 직원 1명에게도 총격을 가해 살해했다.
학생들은 총격사건이 발생하자 공포에 휩싸여 건물 창문으로 뛰어내리기도 했으며 사건 후 학부모들은 아이들을 찾기 위해 학교로 몰려들었다. 경찰이 출입을 봉쇄한 이 학교에는 약 1천명의 학생들이 다니고 있다.
경찰특공대가 최소한 10대의 헬기와 탐색견을 동원해 범인 추격에 나서자 범인은 인근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폴크스바겐 샤란 승용차를 탈취한 뒤 뒷좌석에 앉아 운전자에게 고속도로가 있는 남쪽으로 차를 몰도록 지시했다. 운전자가 경찰의 검문을 보고 도로에서 이탈하자 범인은 차에서 뛰어내려 학교에서 약 30㎞ 떨어진 벤들링겐 시의 공단 지역으로 도망쳤다.
그는 자동차 대리점에 들어가 영업사원 1명과 고객 1명을 살해한 뒤 다시 밖으로 나와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다 결국 자살했다.
이 과정에서 경찰관 2명도 상처를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전해졌다.
경찰은 학교에서 12㎞ 떨어진 로이텐바흐에 있는 범인의 집에서 사격클럽 회원인 아버지가 합법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16정의 총기를 확인한 결과 권총 한 정과 상당량의 총알이 없어진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범행 동기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학교 관계자들은 크레취머가 특별히 눈에 띄는 학생이 아니었으며 성적도 중간 정도였다고 밝혔다.
레흐 장관은 "범행을 예견할 수 있는 어떤 경고나 징후도 없었다"면서 "단지 희생자 대부분이 여성이라는 점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경찰은 희생된 학생 9명중 8명, 교사 3명은 모두가 여성이라면서 대부분 머리에 총격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동네에서 범인과 함께 탁구를 하곤 했다는 '미하엘'(19)이라는 청년은 로이터 통신에 범인이 공포영화 수집광이었으며 외로움을 많이 타는 편이었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2002년 이후 최악의 학교 총기사고가 발생한 빈덴넨은 슈투트가르트에서 북동쪽으로 약 25㎞ 떨어진 소도시로 인구는 약 2만7천명이다.
2002년 4월 튀링겐주 에르푸르트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19세 소년이 총기를 난사, 교사 12명을 포함해 모두 17명이 목숨을 잃었고 2006년에는 독일 서부 엠스데텐에서 소총과 폭탄으로 무장한 범인이 유혈난동을 부리면서 11명을 다치게 한 뒤 자살했었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이번 사건이 끔찍한 범죄로 큰 충격을 받았다면서 "오늘은 독일 전체에 애도의 날"이라고 말했다.
메르켈 총리는 TV를 통해 발표한 성명을 통해 "짧은 순간에 많은 학생들과 교사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희생자 가족과 친지들에 애도를 표시하는 한편 필요한 지원을 약속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는 이날 1분간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묵념을 올렸으며 주제 마누엘 바로수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도 애도 성명을 발표했다. (연합뉴스)
[2006년] 밀로셰비치(Milosevi Slobodan) 감옥 수감 중 사망 ←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1941년 8월 20일 ~ 2006년 3월 11일
‘발칸의 도살자’, ‘세르비아의 영웅’이라는 극단의 엇갈린 평가를 받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 네덜란드 헤이그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의 수감소에서 3월11일 숨진 채 발견되었다.
1989년 세르비아공화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밀로셰비치는 91년 유고연방에서 분리,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와 전쟁을 감행했고, 92년에는 회교도들의‘인종청소’를 목적으로 보스니아 내전을 일으켜 7000여명의 이슬람인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2차 대전 이후 유럽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보스니아 내전을 끝낸 데이턴 평화협정의 당사자로서‘발칸의 피스메이커(peacemaker)’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98년 코소보사태를 일으켜 100만 명 이상의 알바니아계 주민들을 고향에서 내쫓는 등의 악행을 저질렀다.
2000년 10월 국민의 저항에 부딪혀 권좌에서 물러난 밀로셰비치는 국제여론에 따라 2001년 6월에60여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집단 살해죄 혐의로 ICTY에 기소됐고, 이듬해 수감됐다. ICTY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이 사망함에 따라 4년여를 끌어오던 그에 대한 전범 혐의 재판을 공식 종료한다고 14일 발표했다. 4년여를 끈 재판 결과 그는 종신형이 선고될 예정이었다.
밀로셰비치는 지금까지 ICTY의 정당성과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인해 왔으며, 단 한 번의 사죄도 없었다. 2001년 폭스TV와의 인터뷰에서 그는“내가 내린 결정은 모두 합법적이었으며 유고슬라비아 헌법과 자위권에 기초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은 그의 지지자 8만 명의 애도 속에 18일(현지시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 열렸으며, 시신은 80km 떨어진 고향으로 운구됐다. 그의 묘비에는 그의 이름과‘1941~2006’이라는 생몰연도만이 기록됐다. 한편 이날 장례식에 부인 미라 마르코비치와 딸 마리아 등 밀로셰비치의 직계 가족들은 신변상의 이유로 불참했다.
[2003년] 영국 맨체스터법원, ‘남자의 넥타이 착용 강요’는 性차별이라고 판결
반드시 와이셔츠와 넥타이를 착용해야 했던 한 공무원이 직장을 상대로 제기한 성차별 소송에서 승소했다.
매튜 톰슨은 자신의 직장인 맨체스터 구직사무소의 동료 여직원들은 자신과 같은 복장을 착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내복장규정은 인권을 침해한다고 말했다. 톰슨은 "여직원들에게는 티셔츠나 축구유니폼 상의를 입는 것이 허용되는 반면, 나는 반드시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착용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자신은 행정직원이기 때문에 고객들을 만나러 구직민원센터에 가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영국 PA 통신은 톰슨이 맨체스터 노동법원의 판결을 통보 받고 "매우 기쁘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여성에게는 기대되지 않는 기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한 남성으로서, 나에게는 차별이다."
그의 고용주인 노동연금부는 법원의 판결에 대해 "실망스럽다"며, 이에 대한 이의를 제기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톰슨(32세)은 자신의 인권이 침해 당했다고 주장하며, 이에 대한 정신적 피해배상을 요구해왔다. 하지만 피해배상 명령이 내려질 지에 대한 즉각적인 판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피해배상에 대한 판정은 근무 중 와이셔츠와 정장차림을 해야 하는 것이 성차별이라고 주장했던 엑세터 교도소의 교도보안직원의 사례를 포함한 기타 유사사례의 판정과 반대되는 것이다.
지난주 노동법원에서는 교도보안직원인 마크 칼디코트(34세)의 경우에는 차별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정을 내린 바 있다. /google
[1996년] 전두환-노태우,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제1차 공판
전두환(全斗煥, 1931~ ) 노태우(盧泰愚, 1932~ ) 두 전직 대통령이 나란히 법정에 섰다. 12.12 군사반란과 5.18 내란사건에 대한 첫 공판이 1996년 3월 11일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 심리로 열렸다. 이날 공판에는 전-노 피고인을 비롯, 황영시 허삼수 피고인 등 12.12와 5.18 관련자 8명, 박준병 장세동 피고인 등 12.12관련자 5명, 정호용 피고인 등 5.18관련자 3명 등 모두 16명의 피고인이 나왔다.
이날 재판에서는 검찰과 변호인측이 5공 정권의 정통성 문제와 12.12사건의 군사반란 여부를 놓고 치열한 법률 공방을 벌였다. 또 전씨 변호인이 모두 진술내용이 담긴 책자를 배포하자 이종찬 서울지검 특별수사본부장도 기자간담회를 열어 "변호인측이 법정을 정치 선전장화하고 있다"고 비난하는 등 ‘장외공방’도 벌였다.
검찰은 이날 기소장 낭독을 통해 "전-노 피고인 등 신군부측이 대통령의 재가없이 정승화 총장을 연행한 뒤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짓밟아 권력을 찬탈하는 등 쿠데타를 자행했다"고 밝혔다. /조선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으로 선출 ← 취임 후 `페레스트로이카(개방)`와 `글라스노스트(개혁)`을 부르짖었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 전 서기장
1985년 3월 10일(이하 현지시간) 재임 13개월 만에 사망한 소련 공산당 서기장 체르넨코의 뒤를 이을 후임자 선출을 위한 임시 당중앙위원회 총회가 다음날 11일 열려, 위원가운데 최연소인 미하일 고르바초프(54)가 새 서기장에 선출됐다.
고르바초프는 1980년 정치국원에 임명돼 농업, 경제, 이데올로기, 당인사정책 등 요직을 담당, 체르넨코 정권하에서 2인자의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우수한 지도력과 정력적인 활동, 뛰어난 연설, 매력적인 용모로 국내외의 기대를 받아왔다. 그는 최연소 정치국원일 뿐 아니라 스탈린 시대 이후에 성장한 첫 지도자였다.
취임후 그는 이중의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의 소련은 지속적인 생산성 저하와 관료사회의 동맥경화현상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바향을 잃고 있었다. 우선 ‘페레스트로이카(재편)’에 의해 부분적으로 비밀투표가 실시됐고, 시장경제를 한정적으로 도입해 지방분권을 꾀하는 한편 ‘신사고’의 기치 아래 탈이데올로기, 탈군사화가 추진됐다. 또한 ‘글라스노스트(개혁)’에 의해 해빙무드가 시작됐다. 소련의 정치, 문화, 역사의 재평가가 시작됐으며 스탈린시대의 공포정치와 브레즈네프시대의 정체를 비난하며 경직된 구간부를 정치국으로부터 추방하는가 하면 정치범을 석방하기도 했다.
특히 고르바초프는 외교에서 거침없는 행보로 세계사를 다시 써 내려갔다. 레이건과는 '중거리핵전력(INF) 폐기조약'(1987년 12월)과 '전략무기감축협정(START)'(1991년 7월)에 조인하고, 유엔에서는 병력 50만 감축선언(1988년 12월)을 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동유럽을 옥죄던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의 구정권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을 묵묵히 받아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대안없이 도입한 자유경제는 기존의 통제경제와 마찰을 일으키며 그의 발목을 잡았고, 결국 고르바초프를 따라가기 벅찼던 보수파들은 쿠데타(1991년 8월)를 일으켜 고르바초프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강압적인 소비에트 연방을 느슨한 연방으로 바꾸려 했던 노력도 수포로 돌아가 이미 고삐가 풀린 연방구성국가들은 독립의지는 소련마저 해체시켰다.
결국 개혁을 추진하면 할 수록 그 개혁을 가능하게 했던 자신의 절대권력이 무너져 내리는 딜레마를 극복하지 못한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를 통해 이루려던 자신의 이상을 실현 시키지 못했다./조선
[1955년] 페니실린 발견한 세균학자 플레밍 사망 ← 영국 미생물학자 플레밍.
1928년 9월3일, 휴가를 마치고 영국 세인트 매리 병원 연구소로 돌아온 알렉산더 플레밍의 눈에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목격됐다. 부스럼의 원인인 포도 모양의 병균을 배양하던 많은 접시 가운데 유독 한 배양접시에서만 병균 무리가 죽어있었던 것. 플레밍은 곧 푸른 곰팡이(Penicillium notatum)가 병균을 죽인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 물질을 ‘페니실린’으로 명명했다.
페니실린이 ‘기적의 약’ 반열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11년 뒤인 1940년 옥스퍼드대 병리학자 플로리와 체인이 등장하면서였다. 둘은 1년여의 노력 끝에 페니실린 정제에 성공하고 이듬해 대량생산의 길까지 열어 30%에 불과하던 수술환자의 생존율을 80% 이상으로 끌어올렸다.
폐렴에 걸렸으나 페니실린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한 처칠은 “페니실린이야말로 연합국이 2차대전을 승리로 이끈 숨은 공로자”라며 약의 효능을 격찬했다. 세 사람은 페니실린의 발견과 제조로 1945년의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안았다. 플레밍은 1955년 3월11일 심장병으로 숨졌다. /조선
[1954년] 정비석 소설 ‘자유부인’ 퇴폐논쟁 ←소설가 정비석씨의 1954년작 ‘자유부인’ (정음사), 한국 최초의 베스트셀러이기도 했다.
작가 정비석이 서울신문에 연재한 소설 ‘자유부인’은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이 소설은 1954년 1월 1일부터 8월 6일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됐고 연재 완료와 동시에 정음사에서 단행본으로 간행됐다. 대학교수 부인이자 선량한 주부인 오선영이 우연히 대학동창을 만나게 되면서, 남편의 제자와 춤바람이 나고, 유부남과 깊은 관계에 빠져 가정 파탄의 위기에 처하지만, 남편의 아량과 이해로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런데 서울대 법대교수인 황산덕씨가 1954년 3월 1일 대학신문에 정비석을 비난하는 글을 쓰고, 정비석이 이를 반박하는 글을 3월 11일 서울신문에 게재함으로써 전 사회적 논란거리가 됐다. 6.25피난시절 대구와 부산에서는 춤바람이 거세게 불었고 가정파탄에 이른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러한 세태를 꼬집기 위해 작가는 대학교수 부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불륜행각과 타락상을 그려나가다 황산덕 교수로부터 `중국군보다 더 무서운 적`이란 공격을 당했다.
이러한 논쟁은 삽시간에 일반인에게로 비화되어 대학교수단과 여성단체 등은 관계당국을 찾아가 연재금지를 요구하기도 했다. 심지어 ‘북한에서 남조선 부패상을 알리는 교양물로 이용된다’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당시 일부 여성들의 허영심을 잘 꼬집은 세태소설이므로 ‘용기를 갖고 계속 집필하라’는 격려가 쏟아졌다. /조선
[1941년] 루스벨트 미대통령, 무기대여법에 서명함으로 전쟁중립을 포기
1930년대 미국의 일반적인 여론은 유럽의 분쟁에 또다시 휘말려 들지 말자는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1935년에 '중립법'이 제정되어 미국은 교전국에 대한 융자나 무기판매를 할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1940년 대통령선거에서 3선에 성공한 루스벨트(Roosevelt, Franklin D., 1882~1945)는 전쟁에서 군수품과 무기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영국을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이에 대해 여론도 루스벨트의 편을 들었고, 마침내 의회는 많은표 차이 로 '무기대여법'을 통과시켰다. 루스벨트는 한발 더 나아가 소련에도 무기대여 혜택을 주기 위하여 의회를 설득하였다.
그 결과 미국은 독일군과 맞서고 있는 두 전선에 군수물자를 제공하게 되었고 미 해군이 물자수송을 호위 한편 영국 선박에게 독일 잠수함들의 위치를 알려주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하게되자 41년 5월 독일 잠수함 들이 미국의 선박을 공격하여 격침되는 등 독일과 직접적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태평양에서 일어났다. 1937년부터 일본으로부터 침략당하고 있는 중국에 동정적이었던 미국은 중국에 재정적인 지원을 하는 한편, 일본에게는 매우 중요한 석유와 고철의 수출을 금지하였다.
일본은 미국에게 중국정부 지원을 중지할 것을 요구하고 미국은 중국침공을 즉각 중지할 것을 요구하는 등 미국과 일본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되어 있었다. 마침내 1941년 12월7일 새벽, 미국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시 작되었다. /google
[1906년] 응용화학자 안동혁(安東赫) 출생
↑ (중앙일보) 1981년 11월 11일 8면 하루 1만보 걷기운동
1906. 3. 11 서울 상왕십리~2004. 10. 14.
5세까지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읽고 6세 때 보통학교 과정인 왕신학원(旺新學院:지금의 무악국민학교)에 들어간 이후 휘문의숙(徽文義熟), 경성고등공업학교(지금의 서울공과대학)를 졸업했고, 특히 수학과 화학에 능했다. 수업중에 '과학기술진흥이 부국독립의 지름길'이라는 말을 듣고 유기공업에 관심을 갖게 되어, 1926년 일본 규슈[九州]제국대학 응용화학과에 진학했다. 1929년 〈유지(油脂)의 암모니아 감화〉라는 논문을 내고 졸업한 후 대공황의 어려움 속에서도 경성공업학교, 경성고등공업학교 등에서 교편을 잡았다. 1933년 중앙시험소의 기수로도 취직하여 곧 기사로 승진하고 소장에 취임했다. 1953년 상공부장관에 임명되어 전기·석탄·석유·시멘트·비료·유리·공업용수자원개발 등 에너지 및 기간산업건설을 적극 추진했고 과학기술연구소 설립위원, 경제과학심의회 과학진흥위원, 한국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 명예회장, 한국과학원 이사장, 한국과학기술진흥재단(지금의 한국과학문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하면서 한국의 과학기술 발전에 큰 기여를 했다. 주요 논문과 저술들은 대부분 유지와 공업용수에 관한 것들로 한국의 화학과 공업 발전에 공헌한 점이 인정되어 1962년 고려대학교에서 명예이학박사, 1963년 한양대학교에서 명예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54년 학술원 초대 회원에 선출된 이후 임명회원, 원로회원이 되었으며 문화훈장 국민장, 국민훈장 모란장,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수상했다./브리태니커
[1893년] 보은 장내리에서 동학 집회 개최 ← 보은집회 당시 동학 교주였던 최시형
1893년 3월 11일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리에서 동학 집회가 처음 열렸다. 4월 2일까지 계속된 이 집회를 계기로 동학교도의 교조신원운동은 외세배척운동으로 전환되었다. 1892년 11월 삼례집회와 1893년 2월의 복합상소(伏閤上疏)의 성과가 부진하자, 3월 10일 교주 최제우의 제례차 모인 간부들은 동학교도들을 보은 장내리에 집결시키는 통유문을 보냈다. 다음날부터 각처에서 수만 명이 몰려와 장내리를 비롯해 전라도의 금구·원평에 집결했다. 전봉준이 주도한 원평집회는 더 급진적이었다. 정부는 동학교도들을 해산하기 위해 관군을 주둔시키고 호조 참판 어윤중을 양호도어사와 선무사로 임명했다. 20일간 집결해 있던 동학교단은 정면충돌을 피하고자 해산을 결정하고, 교주 최시형은 상주 방면으로 떠났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고부민란을 계기로 동학의 주도하에 반봉건·반외세를 기치로 한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브리태니커
[1886년] 서양화를 개척한 최초의 화가 춘곡(春谷) 고희동[高羲東] 출생 ← 고희동이 캔버스에 유채로 그린 <자화상>(1915), 60.6×50.0cm 생애와 활동
조선 후기에 군수를 지낸 영철(永喆)의 셋째 아들이다. 서당에서 한문을 익혔으며 아버지의 부임지를 따라 경상도 봉화, 함경도 고원 등지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13세에 서울로 올라와 한성법어학교에서 4년 동안 프랑스어와 근대학문을 배웠다. 프랑스어를 가르쳤던 레미옹 선생이 초상화를 그리는 것을 보고 처음으로 서양미술을 접하게 되었다.
한국에 서양화를 선보인 최초의 작가인 네덜란드 출신 미국인 허버트 보스 다음으로 1900년 정부의 초청으로 온 작가가 프랑스인 레미옹이었다. 그는 원래 공예미술학교를 설립할 목적으로 왔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4년간 프랑스어와 서양미술을 보급했다. 1902년에는 도쿄 미술학교 출신의 일본인 아마쿠사[天草神來]가 서울 남산에 화실을 차려 어느 정도 서양미술이 알려졌다.
고희동은 처음부터 서양화에 뜻을 두지는 않았다. 15세에 결혼한 그는 아버지의 권고로 1904년 궁내부(宮內部) 광학국(礦學局) 주사(主事)로 일했으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관직을 사임하고 안중식(安中植:1861~1919)의 문하로 들어가 전통적인 동양화를 공부했다. 안중식은 조석진(趙錫晉:1853~1920)과 더불어 고종의 초상화를 그렸던 어진화가(御眞畵家)로서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여 근대한국화를 개척했다. 그뒤 고희동은 좀더 새로운 서양화 기법을 배울 생각으로 23세 때 혼자 일본에 건너가 한국인 최초로 도쿄 미술학교에 입학했다 작품세계
도쿄 미술학교에서 졸업작품으로 남긴 3점의 유화가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였다. 〈자매〉라는 제목으로 두 젊은 여인상을 그린 것, 자화상으로 한복을 입고 콧수염을 기른 개화기풍의 청년상, 정자관(程子冠)을 쓰고 양반티를 낸 자화상으로 습작시기를 엿보게 하는 자연주의 화풍을 띠고 있었다(도쿄 예술대학 소장). 국내에서 그가 처음 선보인 것은, 당시 조선총독부가 한일합병 이후 식민통치를 합리화하고 선전하기 위해 열었던 '시정(施政) 5주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에서였다. 1915년 가을 〈가야금을 타는 여인〉은 서양식 유화작품이 일반대중에게 처음으로 소개되었다는 점과, 그리고 작품의 모델이 기생이었다는 점에서 장안의 화제가 되어 관람객들의 호기심을 끌었다. 그는 중앙학교의 미술교사가 되어 유화기법과 목탄 데생을 가르치는 신미술교육의 보급에 힘썼으나 유화물감은 비싼 수입품인데다가 전문적인 모델을 구하기 힘들었다. 또한 스스로도 유화기법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킬 역량을 키우지 못해 그의 후배인 김관호(金觀鎬:1890~?)의 명성에 압도당했다.
1920년대 중반 유화작업을 포기하고, 사회가 아직도 동양화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하면서 동양화로 바꾸었다. 작품활동보다는 미술단체를 조직하고 화단을 주도하는 운동에 힘을 쏟았다. 이때는 조선시대에 전문 화가를 양성했던 도화서제도(圖畵署制度)가 폐지된 이후로 작가들을 배출할 수 있는 교육기관이나 단체가 없었다. 1911년 안중식과 조석진이 힘을 합쳐 최초의 사설 미술강습소라 할 수 있는 서화미술회를 만들었지만 김은호(金殷鎬)·이상범(李象範)·노수현(盧壽鉉) 등이 서화전을 갖는 정도였을 뿐이다. 동·서양화 작가를 막론하고 작가를 모으고 근대 미술계를 조직적으로 키울 필요성을 절감한 고희동은 13명의 발기인을 모아 민족미술단체 '서화협회'(書畵協會)를 발족시켰다. 양화작가도 포함된 서화협회라는 명칭은 일본인 양화가들끼리 '조선미술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행세하고 있는 것에 대한 민족의식의 발동이었다. 그해 창립총회에서 안중식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고 고희동은 운영을 맡은 총무로 피선되었다. 서화협회의 목적을 보면 "본회는 신·구 서화계의 발전, 동서미술의 연구, 향학후진의 교육 및 공중의 고취아상(高趣雅想)을 증장케 함을 목적함"이라 했다. 곧바로 창립전을 열 계획이었으나 다음해에 3·1운동이 일어나 회원들이 검거되거나 죽어 미루어지다가 1921년 중앙학교에서 첫 전시회를 가졌다. 서화협회전은 1936년 15회까지 지속되었다.
고희동은 서화협회전의 중단 이후 '조선미술전람회' 출품도 거부하고 별다른 작가활동없이 침묵을 지켰다. 8·15해방 후 그는 민족미술의 새 건설을 위해 조선미술건설본부 중앙위원장을 맡으며 친일작가들을 거세하는 중심인물로 떠올랐다. 그러나 미술계가 좌우익이념의 대립과 주도권다툼으로 분열하는 양상이 심화되자, 그는 우익과 보수성을 대변하는 조선미술협회의 회장으로 취임했다. 1948년 제1회 서울시문화상을 수상했고 다음해 창립된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의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1953년 대한미술협회 회장으로 뽑혀 사실상 국전을 주도했으며 8회전까지 동양화심사부 위원장을 6차례 연임할 정도로 큰 힘을 발휘했다. 4·19혁명으로 장면정권이 들어서자 신민당에 입당하여 참의원에 당선, 5·16군사정변 전까지 정치활동을 했다. 국전에서 손을 떼었으나 79세의 나이로 타계할 때까지 화단의 원로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렸다. 평가
그의 화풍은 초기의 유화로서 자연주의 그림과 수묵담채의 실경산수풍(實景山水風)이 있으나 뚜렷한 창의성을 남기지 못했다. 주요작품으로 〈자화상〉·〈두자매〉(1915)·〈부채를 든 자화상〉(1915) 및 동양화작품 〈금강산소경〉(1939)·〈삼선암설경〉(1947, 개인 소장) 등이 있다(元東石 글)/브리태니커
[1867년]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 초연 ←베르디, Giovanni Boldini가 그린 초상화(1886)
1867년 3월 11일 주세페 베르디의 오페라 <돈 카를로스 Don Carlos>가 프랑스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프리드리히 실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와 그의 3번째 왕비 이사벨 1세, 그리고 이사벨을 사랑하게 된 첫번째 부인에게서 난 아들 돈 카를로스 사이의 관계를 다룬 비극이다. 이 작품은 원래 프랑스어 대본으로 만들어졌지만 나중에 이탈리아어로 개작되었다. 조제프 메리가 대본을 쓰던 중 세상을 떠나 카미유 뒤 로클이 5막 8장으로 완성했으며, 1867년 3월 11일 파리 오페라 극장에서 초연되었다. 1884년에는 이탈리아어로 개작해 밀라노의 라 스칼라에서 공연되었다. 기슬란초니가 대본을 4막으로 줄이는 등 음악적으로나 극적으로 좀더 베르디다운 작품으로 개작되었다./브리태니커
[1544] 이탈리아 시인 타소(Torquato Tasso) 출생 ← 타소, Federico Zuccari가 1594년에 그린 유화(부분), 개인 소장
1544년 3월 11일 태어남 / 1595년 4월 25일 죽음
타소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후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힌다. 18세 때 첫 서사시 <리날도 Rinaldo>를 써서 성공을 거두었고, 볼로냐·파도바 등지에서 법률과 시학을 공부했다. 1565년부터는 페라라에 살면서 에스테가의 알폰소 2세를 섬겼다. 당시 그의 행복한 생활이 전원극 <아민타 Aminta>(1573)에 그려졌다. 1575년에는 그의 대표작 <해방된 예루살렘 Gerusalemme liberata>을 완성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을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은 그리스도교 정신을 고양시키는 한편 서정적 요소를 부각시켜 서사시의 새로운 전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갈수록 심한 피해망상 증세를 보여 병원에 감금되었고, 풀려난 뒤에는 만토바·나폴리·로마 등지를 전전하다가 사망했다. 광기에 시달리며 방황하는 시인의 이미지는 바이런, 괴테 등 낭만주의 작가들에게 시적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브리태니커
[1444년] 피렌체의 초기 르네상스 화가 보티첼리 탄생
보티첼리가 그린 유화 〈비너스의 탄생〉(1485경), 피렌체에 있는 Uffizi 소장
본명은 Alessandro di Mariano Filipepi.
1445 피렌체~1510. 5. 17 피렌체. 개요
그의 대표작인 〈비너스의 탄생 Birth of Venus〉(1485경)·〈봄 Primavera〉(1477~78)은 현대인에게 르네상스의 정신을 가장 잘 요약해 보여주는 작품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피렌체의 모든 주요교회들과 로마 시스티나 예배당의 종교화를 그렸다. 그의 이름은 일 보티첼로(맥주통)라고 불리는 전당포 주인인 형 조반니에게서 따온 것이다.
초기의 발전
보티첼리에 관한 믿을 만한 전기적 자료는 많지 않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1458년 당시 13세가 다 되어서도 여전히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에 관한 전기작가인 조르조 바사리에 의하면, 보티첼리는 처음에는 금세공 밑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후 화가 프라 필리포 리피 밑에서 공부한 것은 확실하다. 초기 대부분의 작품들은 리피나 그의 유파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보이는데, 결정적인 영향을 준 인물에 대해서는 아직 논란이 많다. 보티첼리는 리피에게서 피렌체 회화의 위대한 혁신자인 마사초의 웅장한 양식에 친밀감을 첨가한 그림을 배웠다. 그가 배운 양식은 마사초의 명암 처리법에서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마사초와 달리 세부묘사에도 큰 관심을 가졌으며 보다 부드러운 감정을 나타냈다. 초기 그림에서는 동시대 피렌체의 화가 안드레아 델 베로키오의 영향도 찾아볼 수 있다.
1470년 이전에 그는 자신의 작업실을 차렸으며, 그해 아르테디메르칸치아 회관을 위하여 〈불굴의 정신 Fortitude〉을 그렸고 1474년 1월 무렵에 〈성 세바스티아누스 St. Sebastian〉를 완성했다. 1470년대초부터 보티첼리의 그림은 부드러운 명암을 이용하여 형태를 완전히 3차원적 개념에 맞추어 표현하는 양식에서, 밝고 고르게 빛을 받은 형태를 흐르는 듯 율동적인 선으로 윤곽지은 평부조 같은 표현양식으로 꾸준히 발전했다. 〈성 세바스티아누스〉는 이러한 후자의 초기단계를 보여주고 있다.
활동의 전성기
아우구스티누스, Sandro Botticelli가 그린 프레스코(1480), 피렌체에 있는 Church of Ognissanti 소장
'봄의 비유'(Allegory of Spring)라고도 불리는 〈봄〉(1477경)은 보티첼리의 다음 발전단계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으며 〈비너스의 탄생〉(1485경)은 그 절정을 나타내고 있다. 이 두 그림은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 데 메디치의 별장을 위하여 그린 것이지만, 지금은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있다. 선명한 색채와 사실적인 세부묘사가 특징인 14세기 후반 국제 고딕 양식의 영향이 〈봄〉에 크게 나타나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표현이 더욱 부드러워졌고 고대 그리스, 로마 미술에 관한 새로운 이해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불굴의 정신〉·〈봄〉·〈비너스의 탄생〉은 가장 잘 알려지고 유명한 보티첼리의 작품으로서, 그의 미술을 평가할 때 16세기의 바사리가 묘사한 '우아함'이나 영국의 비평가 존 러스킨 이후 20세기의 미술사가들이 말한 '선의 율동' 등 항상 거론되는 그의 대표적 특성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는 교황 식스투스 4세의 초청으로 로마에 가서 1481년 여름부터 1482년 봄까지 머물며 교황의 초상화 몇 점과 시스티나 예배당의 벽면에 대형 프레스코 3점을 그렸는데 페루지노, 기를란다요, 코시모 로셀리, 시뇨렐리, 핀투리키오, 피에트로 디 코시모 등의 유명한 화가들도 이 일에 함께 참여했다. 〈코라의 처벌 Punishment of Korah〉을 비롯한 이 작품들에는 고대 로마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인식이 뚜렷하게 보이고 있는데 여기서는 로마 양식에 대한 핀투리키오 식의 현학적 표현이 자연주의 및 그 웅장함과 함께 융합되어 나타난다.
봄
그는 1482년 10월경 페루지노 및 기를란다요와 함께 피렌체로 돌아갔다. 1483년 자노초 푸치와 루크레치아 비니의 결혼에 쓰일 2개의 결혼 예물함(카소니)을 위한 4점의 그림을 설계·감독했다. 비슷한 시기에 볼테라 근처에 있는 로렌초의 빌라 델라 스파달레토에 페루지노와 기를란다요 및 리피와 함께 중요한 프레스코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외에도 그는 1480년대에 피렌체의 예배당과 교회에 많은 프레스코와 그림들을 남겼다. 1491년 보티첼리는 피렌체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하는 위원회에서 일했다. 1494년에는 그의 형 시모네와 함께 산프레디아노의 입구에 집과 약간의 땅을 샀다. 1496년 여름 산프레디아노 근처에 있는 산타마리아디몬티첼리 수도원에서 〈성 프란키스쿠스 St. Francis〉를 그렸고, 1497년에는 몇 명의 조수들과 함께 카스텔로에 있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의 별장에 그림을 그렸다. 1498년에는 피렌체에서 산타마리아노벨라 교회 근처에서 살았으며, 그 다음해에 '아르테 데이 메디치 에 델리 스페치알리'에 들어갔다.
후기 양식 및 말년
보티첼리의 후기 양식, 즉 1490~1510년의 작품은 그 성격을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또한 참고자료가 되는 작품 제작 연대가 확실하게 밝혀져 있는 것이 드물기 때문에 후기 양식의 발전 과정을 밝히기도 어렵다. 1490년대 초기에 보티첼리는 그 규모와 개념에 있어서 전성기 르네상스 양식에 매우 가까운 웅장한 그림들을 그렸다. 틀에 박힌 감상적인 주제를 정성들여 각색한 보티첼리의 연작물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영향을 반영하고 있지만, 다 빈치가 밝은 부분과 가장 어두운 부분의 경계를 부드럽게 스푸마토식으로 처리한 데 반해, 그는 그러한 기법에는 흥미를 느끼지 않았다. 특히 이런 점에서 두드러지는 작품은 2점의 〈피에타 Pietà〉인데, 하나는 뮌헨(알테 피나코테크)에 있고 다른 하나는 밀라노(폴디 페촐리 미술관)에 있다. 이 작품들에서 보티첼리가 사용한 색채와 빛의 효과, 양감의 처리, 평부조 양식 등은 〈도니 마돈나 Doni Madonna〉에 뚜렷이 나타나 있는 것처럼 다 빈치의 양식보다는 미켈란젤로의 초기 양식에 훨씬 더 가깝다. 〈요한의 묵시록〉의 예언을 묘사하고 있는 수작 〈신비한 탄생 Mystic Nativity〉은 보티첼리의 발전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 그림은 규모는 작지만 이전보다 풍부하고 선명한 색채를 사용하고 있다. 붓놀림은 유연해지고 형태는 더욱 단순화되었다. 공간은 고전적이라고 할 수 있는 관습적인 방식으로 다루어졌으면서도, 또한 새로운 색채와 함께 북유럽 미술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심을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 1501년으로 연대가 적혀 있는 이 그림은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예언적 신학이론에 몰두했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로 인용되어 왔다. 이러한 주장은 그의 형의 일기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이론에 공감하고 있었다는 내용이 적혀 있는 점과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의 신봉자였다는 바사리의 진술을 근거로 강력하게 뒷받침되고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이 플랑드르의 화가인 휘고 반 데르 구스의 〈포르티나리 제단화 Portinari Altarpiece〉와 도상학적인 유사점을 지니고 있으며, 게다가 15세기 이탈리아 미술에서는 성모를 일종의 예언자로 여기는 경향이 많았기 때문에, 보티첼리가 사보나롤라를 본받아 신비한 양식을 만들어냈을 것이라는 견해는 논쟁의 여지를 남기고 있다.
자료에 따르면 보티첼리는 관례적인 길을 따르는 성공적인 생애를 보냈으며 강력한 후원자들을 통해 재정적으로도 상당한 도움을 받았음이 틀림없다.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적 불안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는 것은 보티첼리가 자신의 돈에 무관심했다는 바사리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그는 피렌체의 모든 중요한 교회로부터 작품을 의뢰받았으며, 마침내 교황의 명령으로 로마에 불려가 시스티나 예배당을 장식하는 일에 참여했다. 개인적으로 의뢰받은 작품으로는 피렌체의 행정중심지인 팔라초 델라 시뇨리아와 메디치가의 사람들을 위한 것들이 있다. 그의 주요후원자는 로렌초 디 피에르프란체스코였으며, 위에서 말한 작품들 외에도 후원자를 위해 단테의 〈신곡 Divina commedia〉에 붙인 뛰어난 삽화 연작들을 남겼다.
'장엄 양식'을 이루어나갈 무렵인 1490년대 중반, 보티첼리는 1495년경의 〈아펠레스의 명예훼손 The Calumny of Apelles〉을 시작으로 해서 그의 가장 말기 작품으로 알려진 성 제노비우스의 생애를 다룬 연작물까지를 모두 다시 손보았다. 그의 후기 작품은 규모가 점점 작아지고 북유럽의 양식과 그가 젊었을 때 배운 화가들의 전통에 따라 의식적으로 시대에 뒤떨어진 양식을 받아들인 것이 눈에 띈다. 그는 해부학적 사실과는 관계없이 표현적·장식적으로 형태를 왜곡하여 묘사했다. 후기 작품들에서는 또한 무지개 색조에 기초를 둔 보다 선명한 색조가 특징적이다. 그러나 성 제노비우스 연작에 나타난 특징은 이전의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그는 위에서 약술한 양식상의 특징들을 기본으로 하되 크게 수정을 가한 일련의 환상적인 장면들을 그렸다. 배경은 건축가인 루치아노 라우라나가 사용한 초기의 건축적 원근법의 명료함을 떠올리도록 묘사되어 있으며 완전히 추상적이고 비자연적인 색채는 15세기초 프라 안젤리코의 그림들과 비슷하다. 보티첼리는 목판에 그린 이 그림에 매우 단순하며 정감있는 인물들을 가득 그려넣었다. 1502년 11월 보티첼리는 남색(男色) 행위로 고발되었지만 결국은 혐의를 벗었다. 1504년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David〉를 놓을 곳을 결정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위원회의 일원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속한 종교단체인 '콤파냐 디 산 루카'에 낼 회비가 밀려 있었다(1503~05)는 사실은 생애의 마지막 10년 동안 그의 재정 형편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보티첼리는 1510년에 죽었으며 피렌체의 오니산티 교회에 묻혔다.
사후의 평판
보티첼리는 회화양식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았다. 그는 다음 세대인 전성기 르네상스의 거장들에 가려져 그가 죽은 뒤 몇 세기 동안 비평과 역사적 해설에서 소홀하게 평가되어왔다. 19세기 후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 같은 라파엘 전파 미술가들이 그의 공적을 크게 인정하고 찬사를 보냈다. 존 러스킨, 월터 페이터, 버너드 베런슨 같은 19세기 후반이나 그 이후의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그의 양식을 분석한 해설들을 썼으며, 이것들은 아직도 현대비평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20세기에는 보티첼리의 주제에 관한 복잡한 문제에 대한 학문적 관심이 크게 집중되었다. 학자들은 특히 시학 및 철학서적들, 그리고 이 저술들에 대한 메디치 가 인문주의자들의 이해방식에서 그 근원을 찾으려고 했다. 더 나아가 그들은 보티첼리의 회화양식에서 당대의 사고가 어떻게 표현되었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저술들에 나타난 사고체계를 분석함으로써 보티첼리의 미술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러한 접근방법의 가장 훌륭한 본보기는 독일의 미술사가인 아비 바르부르크가 쓴 평론으로, 그것은 그 자체로 미술사의 한 학파를 수립했다. 바르부르크는 보티첼리와 동시대 화가들의 선적인 양식에 들어 있는 역사적·심리적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봄〉과 〈비너스의 탄생〉이 그려진 시기의 글들을 문헌학적으로 정밀하게 조사한 뒤 그 연구결과를 르네상스 양식의 감정표현법을 분석하는 데 적용했다. 결국 이 연구를 통해 학자들은 그와 당대 인문주의자들의 시와 철학 및 학문 등에서 보티첼리 회화의 기초를 찾아냈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보티첼리의 그림들에 들어 있는 복잡한 이미지는 완전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파악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고전시대의 신화적인 주제를 다룬 그의 그림들, 특히 〈마르스와 비너스 Mars and Venus〉·〈봄〉·〈비너스의 탄생〉에 주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이 그림들의 주제가 나타내는 정확한 의미는 아직도 논란이 많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은 이 그림들에서 주제를 다루는 방법은 당대의 그 어떤 양식에 못지않게 새롭고 근본적인 혁신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이 그림들은 단순히 특정한 저술들의 삽화에 그치지 않고 여러 가지 저술들에 의존하면서, 묘사된 대상의 특성을 충분히 나타내려 하고 있다. 그리하여 〈아펠레스의 명예훼손〉에서는 고대 그리스의 풍자작가인 루키아노스, 루키아노스를 해석한 구아리노 베로네세, 그리고 루키아노스를 의역한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 등을 참고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다른 참고자료들도 확인된다. 따라서 보티첼리는 그림을 구상할 때 여러 자료를 모아 세밀하게 연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밖에
2001년 마르코스 멕시코 반군지도자, 3000km 평화대장정을 끝내고 멕시코시티 도착
2000년 칠레 대통령 리카르도 라고스 취임
1997년 한국이동통신, 말로 거는 휴대폰 서비스 실시
1997년 일본 핵재처리장 사고 발생
1995년 전 멕시코 대통령 카를로스 살리나스 미국으로 망명
1992년 SBS농구팀 창단
1986년 청주-중문간 고속화도로 개통
1985년 노태우 민정당대표, 현대통령 임기 중엔 대통령직선제개헌에 반대한다고 회견
1982년 수리남에 불발 군사 쿠데타
1978년 팔레스타인 게릴라, 텔아비브 해안 기습
1977년 브라질, 미국 인권외교에 반발, 대미 군사협정 폐기
1971년 유일한 박사 사망
1969년 미 공군 포커스레티나 작전 제1진 도착
1967년 스탈린의 딸 스베트라나 알리루예바 망명
1966년 인도네시아 수카르노 대통령, 수하르토 육참총장에 실권 이양
1964년 캄보디아, 반서방 데모
1963년 군일부 쿠데타 모의혐의로 김동하 등 19명 구속 발표
1963년 중-소 이념분쟁 해소회의 갖기로 합의
1961년 원내외 야당, 반공법 반대 극한 투쟁 선언
1960년 미국, 금성 로켓 파이어니어 5호 발사 성공
1959년 한국-스웨덴 국교 수립
1955년 페니실린 발견한 세균학자 플레밍 사망
1933년 서원섭 출생 - 한국의 교육자
193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신문발행인.언론기업가 머독 출생
1931년 독일의 영화감독 무르나우 사망
1926년 마틴 루터 킹의 수석 보좌관이자 흑인 민권운동가 애버내시 출생
1917년 러시아 3월혁명에 군부 가담, 병기고 습격, 정치범 석방
1912년 원세개,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
1908년 이탈리아 소설가 데아미치스 사망
1899년 덴마크의 왕 프레데리크 9세 출생 -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에 저항
1894년 독일 정치가 그로테본 출생
1838년 일본의 정치가 오쿠마 시게노부(와세다대학 건립) 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