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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71
2월19일[사순 제1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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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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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1DzalDa5F7k
[서울대교구 현종민 세례자요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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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는 과연 어느 쪽입니까? 왼쪽입니까? 오른쪽입니까?>
마지막 날에 전혀 다른 두 부류의 동물인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모든 사람을 갈라놓겠다는 예수님 말씀, 언뜻 들으면, 꽤 두렵고 섬뜩하게 들립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말씀을 절대 협박성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당신 양떼를 향한 사랑과 연민이 가득 담긴 격려의 말씀입니다. 달릴 곳을 열심히 달린 사람들을 향해서는 위로와 칭찬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이 땅에 강생하신 메시아께서 최초로 보여주신 모습은 아주 작은 아기의 모습이었습니다. 지상 생활 동안 보여주신 모습은 사랑으로 가득한 목자의 모습이었습니다. 마지막 날 그분께서는 위엄과 영광으로 가득한 만왕의 왕의 모습으로 당신 왕좌에 좌정하십니다.
목자로서 살아가실 때 예수님께서는 길잃은 양들을 불러 모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의 외침 앞에 어떤 사람들은 기쁘게 호응하였지만, 어떤 사람들은 콧방귀도 뀌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권능과 심판을 행사하시는 온 누리의 임금이신 그리스도 왕이십니다. 이제 그분은 쇠 지팡이로 모든 민족을 다스릴 것입니다. 커다란 쇠뭉치가 달린 긴 지팡이로 목자께서는 세상 모든 사람을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두 편으로 갈라 세우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양과 염소를 갈라놓은 기준이 과연 무엇인가를 눈여겨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곧바로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설명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세상 속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헐벗고 떠도는 이들, 병들고 갇힌 이들을 기꺼이 형제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위한 구체적인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오른쪽에 앉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왼쪽에 앉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백번 천번 기억해야 할 진리 하나가 있습니다. 종말에 가서는 이 세상 사는 동안 우리가 실천한 이웃 사랑이 맏형이신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이라는 것이 명백해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져보니 오늘 우리가 별것 아니라고 여기는 작은 사랑의 실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작은 친절과 봉사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엄청난 것이 분명합니다.
오늘 우리가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거룩하고 깊은 믿음이 이웃 사랑의 실천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울리는 종과 같이 허망한 것일 뿐입니다.
우리가 오늘 지닌 신앙이 아무리 고고하고 수고한 것이라 할지라도 허리를 깊이 숙이고 겸손하게 작은 사람들에게 봉사하지 않을 때,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될 것입니다.
작고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거부와 배척은 곧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에 대한 거부와 배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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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1-YAkYXDu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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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 마지막에 심판하셔야만 하는 이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은 이들은 당신도 그렇게 대한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사람이고 예수님은 예수님이라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신 선물을 생각하면 그 말씀이 맞습니다. 그 선물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사람을 사랑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타이완의 유명 인터넷 개인방송 진행자, 첸넝추안 씨는 지난 12일 캄보디아 남부 시아누크빌에서 생방송을 진행했습니다. 많은 타이완 청년이 납치 감금, 장기 적출 등의 피해를 본 국제 인신매매 조직의 본거지를 찾아 잠입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군복을 입고 총을 든 사람에게 들켰고, 붙잡히는 장면은 고스란히 생중계됐습니다.
방송은 그대로 중단됐고 첸 씨 가족들이 급히 나서 연락이 두절 됐다며 도움을 호소했습니다. 첸 씨는 몸 여기저기 상처를 입은 모습으로 다음날 방송에 등장했습니다. 전기 고문과 심한 구타를 당한 뒤 가까스로 탈출했다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사건은 크게 회자 됐고, 캄보디아 경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습니다. 이틀 만에 고문, 구타 사건은 자작극으로 드러났습니다. 첸 씨가 동료 한 명과 함께 군복과 가짜 총, 대본 등을 준비해 조회수를 올릴 목적으로 가짜 영상을 찍었던 겁니다. 현지 경찰 브리핑에 수갑을 차고 나온 이들은 뒤늦게 사과하고 선처를 호소했지만 소용없었습니다. 캄보디아 1심 법원은 사회불안 조장과 국가 이미지 훼손 혐의로 이들에게 각각 징역 2년의 실형을 선고했습니다.
형이 확정되면 현지에서 형기를 채운 뒤 추방될 예정인데 타이완에선 동정론보다는 국제적 망신이란 반응이 많습니다. 왜 타국의 이미지를 훼손하는 게 자국의 국가 이미지를 훼손하는 게 될까요? 왜 대부분의 타이완 사람이 부끄럽다는 반응을 나타냈을까요? 우리도 마지막 때에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으면 이런 심판을 받게 되지 않을까요?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다른 나라를 존중하지 않으면 자기 나라도 존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왜냐하면 나라의 이미지는 그 사람이 살던 나라가 준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어른들을 무시하면 그것은 그 부모도 그런 존재임을 보여주는 게 됩니다.
오늘 복음은 양과 염소로 나뉘는 최후 심판 이야기입니다. 양은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예수님 대하듯 살았고 염소는 자신도 모르게 가난한 이들을 무시하며 살았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생길까요?
사랑은 정체성에서 나옵니다. 아이를 가장 사랑하는 이는 부모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이유는 자신이 부모라는 정체성 때문입니다. 부모는 당신 사랑으로 자녀에게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자신이 부모로부터 당연히 받아야 했던 그 존중을 받을 대상임을 압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 사람으로 보이게 된 것은 모두 부모의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보고 대하는 것은 그래서 부모에게 보답하는 일이 됩니다.
반면 사람을 사람 취급하지 않으면 부모도 무시하는 것이고 모든 사람을 하느님 자녀로 대하지 않으면 그리스도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이웃에게 잘 대할 수 없고 이웃을 무시하는 사람이 부모를 존중할 수는 없습니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는 부모에게 받은 정체성 때문이고 부모를 존중하면 그 선물을 무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손웅정 씨가 한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성장한다.”
내가 이웃을 대하는 자세가 곧 부모의 인성을 보여줍니다. 이건 어쩔 수 없습니다. 부모는 이 정체성을 주기 위해 피와 땀을 흘렸습니다. 좋은 부모에게서 나쁜 자녀가 나올 수 없습니다. 부모는 좋은데 그 아이의 인성이 나쁘다면 그는 분명 다른 이를 부모로 선택한 것입니다. 성장하는 동안에야 괜찮겠지만, 끝까지 부모의 수준까지 사랑이 성장하지 않는다면 부모는 결국 그를 자녀로 인정할 수 없게 됩니다. 자기 자녀를 모기와 함께 살게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양과 염소가 나누어집니다. 먼저 우리가 하느님 자녀임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 모든 만물을 바라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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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저는 어린 시절에 공산주의는 함께 할 수 없는 집단이라고 교육을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반공 포스터를 그리면 그 구호가 섬뜩했습니다. ‘무찌르자 공산당, 때려잡자 김일성’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나중에 저는 그 시기는 ‘냉전’의 시대였음을 알았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세상은 두 개의 진영으로 나뉘었습니다. 하나는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아메리카, 서유럽, 남유럽, 북유럽이 함께 있었습니다. 아시아에는 남한, 일본, 대만이 함께 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러시아가 주도하는 공산주의였습니다. 그 깃발아래 동유럽, 중국, 북한, 베트남이 있었습니다. 미국과 러시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동맹국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념의 대립이 격화되면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1989년 동독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념의 대립은 자본주의의 승리로 마무리되는 것 같았습니다. 중국은 흰 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만 잡으면 된다는 논리로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 가난에서 벗어나는 선택을 하였습니다. 한국도 북방외교를 채택하면서 중국, 러시아와 수교를 하였습니다. 이념의 벽은 자본주의와 경제성장이라는 파도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국제질서는 자본과 자국의 이익이라는 논리에 의해서 어제의 적은 오늘의 동지가 되기도 하고, 오늘의 동지가 내일의 적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두 개의 깃발을 이야기합니다. 하나는 사탄의 깃발입니다. 사탄의 깃발은 화려해 보이고, 성공과 명예가 주어질 것 같습니다. 많은 사람이 사탄의 깃발 아래 모이지만 그 끝은 우리를 하느님과 멀어지게 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의 깃발입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은 초라해 보이고, 힘들고 외롭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깃발은 우리를 하느님과 하나 되게 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우리는 어느 깃발 아래 있어야 할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셈을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를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거룩하게 산 사람들, 이웃을 진심으로 사랑한 사람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지금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는 사람이 바로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지금 병들고 외로운 사람에게 위로와 희망을 주는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회는 장례미사 때, 오늘 복음의 말씀을 읽습니다. 지금 하느님 품으로 가는 마지막 길에 있는 고인이 생전에 어떻게 살았는지를 돌아보게 하는 말씀입니다. ‘평소에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과 함께했다면, 병들고 지친 이웃들과 함께했다면 하느님 품 안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릴 것이라는 말입니다. 생전에 자신만을 알고, 가난한 이웃들을 돌보지 않았다면, 병든 이들을 외면했다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고인이 된 사람은 장례미사 때 들려주는 이 말을 듣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장례미사 때 이런 복음을 읽는 것은 지금 살아서 이 복음을 듣는 우리가 복음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다시금 되새기는 것입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이냐시오 성인의 ‘두 개의 깃발’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사탄이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볼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깃발을 선택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느님 나라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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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5,31-46: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
예수님의 말씀은 이 사순절에 어떠한 마음으로 이 시기를 살고 부활을 맞이할 수 있는지를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부활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으려면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축복 받는 자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신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본성 안에서 굶주리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안에서 굶주리시고, 당신의 가난한 이들 안에서 목말라 하시고, 당신의 종들 안에서 헐벗으신 분이시다. 모든 병을 고쳐 주신 분은 당신의 종들 안에서 병드셨다. 모든 사람을 해방하시는 분이 당신의 신자들 안에서 감옥에 계시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혼자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 때문에 이 모든 일을 그들과 함께 겪으신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34절) 주님께서는 옳은 일을 한 그들을 칭찬하셨다. 아버지께 복을 받는다는 것! 이렇게 큰 영예를 받을 자격이 있다고 판단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35절). 얼마나 대단한 영예인가! 얼마나 큰 복됨인가! 그분은 그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드러내신다.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 임금은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41절) 하신다. 영원한 불은 악마와 그의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지, 인간들을 위하여 준비된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아버지께서는 사람들을 저주하시지 않는 분이시다. 그들의 행실을 단죄하신다.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한 것이 아닌데 그들 자신이 스스로 그 속으로 던져 넣었다는 것이다.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여기에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자기들이 세상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들이 단죄받는 이유는 그들이 저지른 악행 때문이 아니라, 주님께서 당신의 종들 안에서 굶주리고 목말랐을 때 보살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릇된 일을 저지르지 않은 자들이 이런 단죄를 받았다면 악마의 일을 행하는 자들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46절) 죄인들은 영원한 벌을 받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를 그분께로 인도해 주며, 그분을 닮고, 그분의 생명에 참여하게 할 것이다. 이웃 안에서 주님을 알아 모시고 사랑하는 사순절이 되도록 노력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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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최정훈 바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최후의 심판 장면을 들려주는데,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기준을 알려 줍니다. 심판관은 심판받는 이들이 살면서 무엇을 배웠는지, 무엇을 성취하였는지, 얼마나 노력하며 살았는지는 물어보지 않습니다. 심지어 무엇을 믿었는지 그들의 신앙과 종파도 묻지 않고, 그들이 어떻게 기도와 예배를 드렸는지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심판의 기준은 바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베푼 사랑과 자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베푼 모든 사랑과 자비가 곧 당신께 베푼 것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가장 작은 이들과 당신을 동일시하십니다. 이러한 동일시는 그리스도께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얼마나 특별한 사랑과 연민을 가지고 계셨는지 짐작하게 합니다. 이 본문은 교회가 누구를 우선적으로 선택하고 돌보아야 하는지 명백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의 가르침은 이처럼 가난한 이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바탕을 둡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초세기부터 가난한 이들, 병자들, 감옥에 갇힌 이들과 같이 가장 비천하고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을 그리스도로 여기고 그들에게 애덕을 실천하였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이유는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자비를 입지 못한 그들이 우리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고 위로를 받을 때 주님께서는 그 어느 때보다 더 기뻐하실 것입니다. 당신께서 거저 주시는 사랑이 우리를 통하여 드러나는 것이고, 그만큼 하느님 나라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길을 가다가 우연히 가난한 이들과 마주칠 때, 피하지 말고 그들에게 다가가 따뜻한 사랑의 손길을 내밀면 좋겠습니다. 이때야말로 주님께 선물을 드리고 사랑을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기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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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방종우 야고보 신부님]
+찬미예수님
첫 본당에 부임하고 약 1년여가 지나 본당 소속 신학생이 저에게 고백했습니다. 신학교에서 저를 선배로 만났을 때 유난히 무뚝뚝해 보였으므로, 제가 본당에 부임한다는 소식을 처음 듣고는 마음에 부담감이 컸다는 것이었습니다.
자세히 그 이유를 물어보니 신학교에서 지나칠 때 제가 인사를 받지 않은 적이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 공동체의 대표였던 만큼 이런 저런 일로 앞에 나서는 일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어려운 사람으로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며 저는 적잖이 당황했습니다. 기억 속의 저는 타인에게 친절했고 서글서글한 편이었으며 인사를 받지 않은 적도 없었는데 어린 후배의 기억 속에는 그렇지 않았음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아마 그 신학생과 제가 본당에서 만나 관계를 쌓지 않았다면 그 오해는 결코 풀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평생 저는 어려운 선배, 무뚝뚝한 선배로 남았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을 하며 제 자신에 대해 깊이 반성했습니다. 나도 모르는 사소한 행동 한 번 두 번이 나의 삶으로 남는 것은 아닐까, 내가 모르는 사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거나 불쾌함을 주지는 않았을까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학교에서 신학생들에게 강의하는 입장이다 보니 이러한 것이 더욱 신경 쓰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저의 사소한 가르침 하나가, 혹은 제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내뱉는 가벼운 말 한 마디가 영적으로 풍족하게 성장해야 하는 신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더욱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본당에서 사목하면서도 이러한 오해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누군가에게는 무뚝뚝하거나 편향된 사제로 느껴지기도 하고 따뜻함이 부족한 사제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고 이러한 오해 하나 없이 사제 생활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리라 생각하지만 혹시라도 제가 모르는 사이 어떤 분들께 상처를 주거나 불쾌감을 주지는 않을지 걱정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러한 걱정이 문득문득 드는 까닭은 좋은 평판을 유지하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적잖은 오해를 안고 살아가는데, 그것은 당사자의 생각일 뿐 하나하나 오해가 쌓이다 보면 그것은 결국 저의 삶이 될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해야 하는데 저도 모르게 벌어지는 일이니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님은 자명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실 때 무엇을 기준으로 삼는가를 보게 됩니다.
이 기준은 굶주리고 목마른 이들, 나그네인 이들을 얼마나 따뜻하게 맞이했느냐에 있습니다. 그야말로 오늘 독서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게 베푸는 삶을 살았는가, 혹은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삶을 살았는가가 최후의 심판 때의 명확한 기준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해 보면 일상생활 속에서 남을 도와주는 일, 이해타산 없이 도움을 베푸는 일이 매우 중요함을 인식하게 되고 조금 더 선한 삶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의 와중에 드러나는 한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를 굉장히 위축시키는데, 오늘 복음의 심판 받는 이들이 자신이 왜 복을 받는지 혹은 벌을 받는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의인들이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린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습니까?”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습니까?”
악인들 역시 이야기합니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린 것을 보고 (...)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의인들과 악인들의 “저희가 언제”라는 말은 결코 단순한 기억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의인들의 말에는 뜻하지 않은 놀라움의 감정이 있으며 악인들의 말에는 당혹스러움과 억울함이 잔뜩 스며들어 있습니다.
의인들은 자신의 부족했던 점을 상기하며 그런데도 구원받을 수 있음에 의아한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반면 악인들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사람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면 자신들도 악인이 되지 않았을 것이라 주장하며 억울해할 법합니다. 또한 나름대로 가난한 이들에게 잘 해준 적이 있음을 항변하고 싶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서두에서 저의 경험을 말씀드렸듯 자신도 모르게 하나하나 쌓아 올린 실수와 오해는 결국 자신의 인생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한두 번쯤 타인에게 잘해주었다고 자신할 것이 아니라, 혹은 백번을 잘해주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할 때 우리는 부족하게나마 주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을 쌓아 올리게 될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은 예습과 복습을 성실히 하는, 즉 시험 준비를 미리미리 하는 학생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은 시험 때가 되더라도 여유 있게 좋은 결과를 냅니다.
반면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은 시험 때에 다다라서 공부하느라 밤을 새우며 진땀을 뺍니다. 그리고 시험을 못 보면 ‘나는 최선을 다했지만, 문제가 어려웠네’, ‘배운 데서 나오지 않았네’ 하며 이런저런 변명을 하기 일쑤입니다.
그렇다면 죽음 이후, 주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성적표를 손에 들게 된 우리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겠습니까?
만약 부족했다면 사순기간, 주님의 말씀에 따라 가장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사랑을 베풀어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나도 모르게 상처를 준 이는 없는지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하루하루 쌓이게 된다면 종국에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의인들에게 하는 말을 우리에게도 똑같이 속삭여 주실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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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심판>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마태 25,31-33)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보면,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고(37절-39절), 왼쪽에 있는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44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래서 그 심판은 ‘신앙인들을 대상으로 한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급한 상황이라면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겠지만, 이야기의 전체 흐름과 내용을 보면, 그것은 아닌 것 같고, 신앙인들이 오른쪽과 왼쪽으로, 양과 염소로 갈라지는 심판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다음 말씀에 연결됩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이 말씀은, 믿는다고 말만 하지 말고,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생활과 생각만 하는 신앙생활은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믿는 대로 사는 것”이 곧 신앙생활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는 “‘작은 이들’에게 사랑 실천을 했느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이 유일하게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은 이미 전제되어 있고, “하느님의 뜻을 실행하는 ‘살아 있는 신앙’인가? 아니면 실행하지 않은 ‘죽은 신앙’인가?”를 심판한다고 생각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이야기는 세례자 요한의 다음 말에도 연결됩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그리고 ‘우리는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모시고 있다.’고 말할 생각일랑 하지 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다.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아 있다.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 나는 너희를 회개시키려고 물로 세례를 준다. 그러나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더 큰 능력을 지니신 분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닐 자격조차 없다. 그분께서는 너희에게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다. 또 손에 키를 드시고 당신의 타작마당을 깨끗이 하시어, 알곡은 곳간에 모아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 버리실 것이다."(마태 3,8-12)
이 말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라는 말은, “삶으로 실천하는 회개, 삶이 근본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변화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 ‘알곡’은 올바르게 회개하고 제대로 믿고, 믿는 대로 실행하면서 살다가 구원받는 신앙인들이고, ‘쭉정이’는 겉으로는 신앙인으로 보이지만, 제대로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탈락하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최후의 심판 이야기에서 ‘오른쪽의 양들’은 ‘알곡’이고, ‘왼쪽의 염소들’은 ‘쭉정이’입니다.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에 대한 심판은 어떻게 이루어질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주님께 사랑을 드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도대체 ‘작은 이들’은 누구일까? 재산이 없거나 적어서 가난한 사람들은 무조건 전부 다 ‘작은 이들’인가? 단순히 가난하다는 이유만으로 주님께서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40절)라고 말씀하신 것일까? 가난하기만 하면 다른 모든 것이 다 용서되고 면제되는가? <매일미사 책을 보면 ‘가난한 이들’을 ‘그들’이라고 표현했는데, ‘가난한 이들’이 ‘그들’이면, ‘그들’과 구분되는 ‘우리’는 누구인가? 가난한 이들과 구분되는 사람들이라면 부유한 사람들일 수밖에 없는데, 그러면 매일미사 책은 부자들만 보는 책인가?>
사랑은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누구는 주기만 하고, 누구는 받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모두 하나가 되어서 함께 나누는 것, 그것이 사랑입니다. 함께 먹든지, 함께 배고프든지, 그것이 사랑입니다. 따라서 ‘작은 이들’은 곧 ‘나’이고, ‘우리’입니다. <실제로 모두가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은 하지 않고, ‘그들’과 ‘우리’를 구분하면서, ‘그들’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말만 하는 것은, 사랑이 없거나 부족하거나,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 위한 모금에 관해서 바오로 사도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은 예루살렘으로 성도들에게 봉사하러 떠납니다. 마케도니아와 아카이아 신자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가난한 이들에게 자기들의 것을 나누어 주기로 결정하였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빚을 지고 있어서 그렇게 결정하였습니다. 다른 민족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의 영적 은혜를 나누어 받았으면, 그들도 물질적인 것으로 성도들을 돌볼 의무가 있습니다."(로마 15,25-27) 이 말에는, 사랑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영적 은혜도 나누고, 물질적인 것도 나누는 것이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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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 레위기의 이 표현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삶의 기준이자 목표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께 맞갖은 생활을 하고자 모든 면에서 최선을 다하였습니다. 하느님의 계명도, 서로 관계를 유지하고 함께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여러 제도도 이것을 목표로 합니다.
수많은 율법과 규정들도 하느님의 거룩함에 맞게 살아가려는 방편이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율법은 많은 경우에 부정적으로 표현됩니다. ‘하지 마라.’ ‘하면 안 된다.’ 구약의 백성은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그릇된 것을 피하는 것으로 하느님을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조금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이 전하는 최후심판에 대한 내용은 우리에게 또 다른 기준을 상기시킵니다. 우리가 목표로 해야 할 것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작고 보잘것없는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예수님께 한 것이라는 말씀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이 ‘작은 이’를 일상 안에서 어렵지 않게 만납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며 걷는 길은 그나마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 곁에 구체적인 모습으로 계시는 하느님을 찾기란 절대 쉽지 않습니다. 최후심판의 이야기는 우리의 눈이 저 높은 하늘을 향하기 전에 낮은 곳으로, 이웃에게로, 한 명의 작은 이에게로, 우리 곁에 계시는 하느님을 향하게 합니다. 일상에서 마주한, 때로는 무심하게 지나친 그 하느님을 생각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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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정진만 안젤로 신부님]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적 선포의 마지막 자리에 있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다섯 개의 긴 담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24-25장은 마지막 담화 부분입니다. 이 담화의 중심 주제는 마지막 날과 심판이며, 청자는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제자들의 질문(24,3 참조)에 대한 예수님의 응답으로 시작하는 이 마지막 담화는 26-27장의 수난 이야기를 준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소개되는 ‘최후의 심판’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먼저, 심판 준비 상황이 묘사됩니다.(25,31-33 참조) 마지막 날에 영광스럽게 오시어 옥좌에 앉으시는 사람의 아들은 심판자이시며, 그 앞에 모인 “모든 민족들”은 심판받을 대상입니다. 그다음으로, 심판 과정이 이어집니다.(25,34-45 참조)
임금이 오른쪽과 왼쪽에 있는 이들과 각각 대화를 나누며 심판의 권한을 행사합니다. 임금의 질문에 대한 양쪽의 대답은 뚜렷이 대조를 이룹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심판의 기준은 똑같으며 분명합니다. 심판자인 임금에게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자선을 베풀었는지 그 여부가 가장 중요합니다. 누군가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풀었다면, 그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의인’이라 불릴 것입니다. 반면에 그러지 못하였다면, 그는 영원한 벌을 받고 ‘저주받은 이’라 불릴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저마다 임금이신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게 될 마지막 날의 상황을 그려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 날의 심판은 우리를 두려움으로 몰고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심판은 주님의 오심을 믿고 늘 깨어 자선을 베푸는 이들에게는 희망을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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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우리는 <사순 첫 주간 월요일>을 미사를 봉헌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마지막 날의 심판에 대한 말씀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이 심판에서 묘한 것은 사랑과 자비를 베풀지 않는 이든 베푼 이든, 그들은 자신들이 행한 사실조차 알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예수님께 한 것인지조차 더욱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이 둘은 정반대의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사랑을 베풀지 않은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마치 부자와 라자로 이야기에서처럼, 그들이 자신에게 빠져 타인에게 무관심하여 회개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반면에 사랑을 베푼 이가 자신이 행한 것조차 모름은 이기적인 자신을 떠나 온전히 이타적인 사랑을 베푼 까닭에, 자신의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른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다시 말해서, 전자는 자신에게 빠진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온 결과의 차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곧 전자는 자신에게 푹 빠져 어둠에 갇혀 눈이 멀어져 버린 경우요, 후자는 자신에게서 빠져나와 자신이 사라지고 빛이 되어버린 경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비를 베풀지 않은 이들은 왜 자신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자비를 베풀지 않았을까? 결국, 그것은 그들이 죄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와 가파르나움이 심판 날에 불행하게 될 것이라고 꾸짖으실 때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1,21-24; 루카 10,13-15)
그들이 회개하지 못했음은 죄를 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회개는 죄를 깨닫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한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회개란 죄의 깨달음보다, ‘먼저 베풀어진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죄란 다름 아닌 하느님 사랑을 벗어난 것을 의미하기에 죄보다 앞서 있는 하느님 사랑을 보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난 것이 죄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약 죄를 보면서도 하느님의 사랑을 보지 못한 채 죄만 본 것이라면 결국, 죄에 대한 뉘우침은 있을지 모르지만 하느님 사랑으로 돌아옴이 없기 마련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란 “뉘우침‘과 ”돌아옴’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죄의 뉘우침은 죄가 없는 진공상태나 죄의 공백 상태에 이르게는 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지는 않습니다.
결국, “회개”란 하느님 사랑에로의 되돌아옴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회개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넘어 하느님 사랑에 대한 깨달음입니다. 곧 죄 없는 상태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입은 사랑으로 돌아가 그 사랑을 베푸는 일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결국, 먼저 입은 자비를 베푸는 것이 회개의 표시가 됩니다.
그리하여 회개하는 이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것같이 자비로워지는 것이요,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진정한 의미의 회개인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기도>에서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저희를 구원하시는 하느님, 저희를 천상의 가르침으로 회개시키시어, 사순시기에 올바른 마음으로 선행을 하도록 이끌어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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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솟은 기도 -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준 것이~”(마태 25,40)
주님!
누구에게나 무관심하지 않게 하소서.
누구든지 하찮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나에게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가 존귀하기에 귀중하게 여길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의 선물을 보잘것없이 여기지 않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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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25,40)
주님은 세상의 굶주리고, 목마르며, 외롭고, 헐벗으며, 아파하고 갇힌 이들을 내 형제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에게 해 준 것이 곧 당신께 대한 사랑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러기에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사랑이 필요한 사람들 가운데서 나의 돌봄과 보살핌을 필요한 작은 이들에게 대한 나의 행동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횟수에 상관없이, 가장 작은 이들에게 대한 사랑의 실천이 바로 마지막 심판 날의 심판 기준이 된다고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강조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이냐도 중요하지만 나 자신답게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합니다. 아빠 하느님께서 거룩하시고 자비로우신 것처럼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 가운데 가장 작은 이들에 대한 나의 처신과 행동이 바로 구원과 축복을 아니면 멸망과 저주의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례 여부와 그 기간, 기도와 신심 행위의 횟수에 좌우되지 않으며 사랑의 실천 여부에 좌우된다는 사실을 다시금 사순시기에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보시기에 우리 역시도 당신의 형제이며, 형제인 우리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 것처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 (레19,18)하라고 당부하십니다. 사랑하기가 쉽지는 않지만, 아빠 하느님과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사랑하기를 거듭해서 실천해야 합니다. 사랑은 이론이 아닌 행동이며, 작은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더 큰 사랑을 실천할 수 있기에, 어떤 면에서 저와 같이 머리로 살아가는 성직자들보다 어쩜 글도 모르시는 시골 할머니나 할아버지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더 실행하고 하느님 나라에 더 가까이 다가서 있는지 모릅니다.
다만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왜 임금은 목자 역할을 하며, 왜 사람들을 두 그룹으로 구분하셨을까, 하는 의문이 듭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한 가족처럼 사랑하며 때론 미워하면서 만나고 살았는데, 그런데 죽어서 하느님 대전 앞에 나가서 둘로 갈라지게 되는가? 프랑스의 아베 피에르 신부는 가난한 이들과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하였기에 살아 있을 때 이미 살아 있는 성자로 불렸습니다. 그는 자신이 쓴 책 「단순한 기쁨」에서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구분은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구분은 홀로 족한 자와 공감하는 자, 곧 타인의 고통 앞에서 등을 돌리는 자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자 사이에 있다. 어떤 신자들은 홀로 족한 자들이며, 어떤 비신자들은 공감하는 자들이다.』오늘 복음의 핵심은 분명하지만, 여전히 의문은 남아 있습니다. 물론 복음 작가는 최후 심판을 좀 더 강조하기 위해서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익히 잘 알고 있는 목자들의 매일 하는 일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일상적으로 목자는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갈라놓는데, 염소는 추위를 타서 안에다 넣고 지붕을 마련해 주는 반면에 양은 한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참조하여 최후 심판 때에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25,3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는 낮에 양과 염소가 들판에서 함께 풀을 뜯어 먹다가 밤이 되면 각각의 우리에 드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복음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가 사람과 사람의 아들이신 예수님과의 관계를 실존적으로나 영성적으로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아들과 보잘것 없는 사람들 사이에 특별한 관계를 갖는다, 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수긍하는 것이 중요하지, 그 동기를 추궁하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양과 염소로 갈리는 기준은 이를 깨닫고 실천했든지 이를 모르고 실천하지 않았든 상관없이 사랑과 자비를 행함과 행하지 않음에 있습니다. 즉, 이웃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푼 의인들 가운데 어떤 누구도 그 이웃이 주님인 줄을 몰랐다고 말하고 있으며, 사랑과 자비를 베푼 적이 없는 자들은 도움을 받아야 할 이웃이 주님이었다면 모른 척하지 않고 기꺼이 베풀었을 것이라며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양쪽의 말을 다 일축하고 각각의 경우를 나에게 베푼 것과 나에게 베풀지 않은 것으로 구별하십니다. 결국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며(25,40),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25,46)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오른쪽(=영원한 생명)과 왼쪽(=영원한 벌)으로 갈라선 사람들은 누구도 이렇게 될 줄을 아무도 몰랐고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그런 기준을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복음은 비유가 아니라 최후심판에 실제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려 주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된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을 받는 곳으로 구분 짓는 기준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과 자비를 행한 것과 행하지 않은 것에 대한 보상으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모두 착각하지 않고 마음에 새겨 살아야 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와 영원히 벌 받는 곳으로 갈라지는 구분은 죽어 하느님 대전에 나가는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 지구 행성에서 살아가는 모든 날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것이 진실이고 자명한 진리입니다. 영생은 죽음 뒤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피에르 신부가 언급한 것처럼 이 땅에 살면서 우리가 타인의 기쁨과 고통에 공감할 것인가, 아니면 자기 자신에 만족한 채 매일 매일을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함으로써 바로 현재의 삶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일 내 삶의 보상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이며, 이것이 사순시기에 우리 모두 이를 깊이 깨닫고 참된 선행을 실천해 나가야 하리라 봅니다. 물론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을 갈망하고 고대하는 것이야 당연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 땅에 살면서 살아있다.’라는 이 기적과도 같은 실존을 감사하고,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랑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리라 봅니다. 주님은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요10,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생명을 충만히 누리는 길은 바로 내가 함께 살아가는 동안 만나는 모든 사람을 주님께서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며 살아가는 데 있음을 일찍 깨닫게 되었음에 감사하면서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그렇게 사는 사람이 진정 축복받는 사람입니다. “사랑이 없는 나는 나일 수 없기에, 작은 사랑의 몸짓일지라도 당신께 대한 나의 사랑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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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본당 교우들이 제게 늘 바빠 보인다고 하십니다. 단체 모임에 강복 주러 갈 때 거의 뛰다시피 다니는 모습을 보고, 또 무슨 일이든 서두르게 하는 모습을 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지금 제 책상을 보며 충분히 공감합니다. 빈틈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책상을 채우고 있는 책과 노트, 그리고 필기구들은 저의 바쁨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일정표를 두 달 치씩 확인하며 사는 것 역시 바쁘게 사는 모습일 것입니다.
부모님의 죽음 이후 그리고 아는 지인의 부고 소식을 계속 들으면서 제 죽음에 대해 오랫동안 묵상할 수 있었습니다. 오십 중반을 살았으니 분명한 것은 이제 살아온 날보다 죽을 날이 더 가깝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더 바쁘게 지금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겠다는 마음을 갖고 열심히 하려고 늘 집중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바쁘게 살던 중에, 운동하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허리가 아프니 다 힘들어졌습니다. 걷는 것도, 눕는 것도 심지어 양말 신는 것도 힘들었습니다. 앉았다 일어나는 가장 기본적인 것도 힘들어서 천천히 또 아주 조심스럽게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겸손하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면서 살았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도록 이제까지 나와 함께해 주신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맞습니다. 저의 능력과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뜻을 떠올리고 따른다는 것은 그만큼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영광스러운 심판관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어떻게 심판을 받게 되는지를 보여주시지요. 즉, 예수님께 대한 믿음과 가진 것 없는 이들에 대한 사랑과 정의의 실천에 따라 심판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성경이나 교리 지식, 신심 행위가 심판 기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보다 지금까지 믿고 고백한 신앙을 실제 이웃에게 어떻게 실행했는지가 그 기준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교만함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뜻을 묵묵히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나의 능력과 힘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과 자비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그분의 기준을 따르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어렵고 고통받는 이들을 위하여 정성껏 기도와 희생, 봉사해야 하겠습니다. 이를 위한 우리의 사랑이 결국 나의 구원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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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한 사람만이라도>
마태오 25,31-46 (최후의 심판)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와 함께 오면, 자기의 영광스러운 옥좌에 앉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 그렇게 하여 양들은 자기 오른쪽에, 염소들은 왼쪽에 세울 것이다. 그때에 임금이 자기 오른쪽에 있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들아, 와서,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를 차지하여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그러면 그 의인들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을 보고 먹을 것을 드렸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따뜻이 맞아들였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렸습니까? 언제 주님께서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찾아가 뵈었습니까?’ 그러면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그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자들에게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 부하들을 위하여 준비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내가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있을 때에 돌보아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저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시거나 목마르시거나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또 헐벗으시거나 병드시거나 감옥에 계신 것을 보고 시중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까?’ 그때에 임금이 대답할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한 사람만이라도>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잊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떠올리는 것이
잊힌 모든 사람을
소중하게 떠올리는 것이요
잊히신 하느님을
소중하게 떠올려드리는 것입니다
짓밟힌 한 사람을
정성스럽게 일으키는 것이
짓밟힌 모든 사람을
정성스럽게 일으키는 것이요
짓밟히신 하느님을
정성스럽게 일으켜드리는 것입니다
움츠린 한 사람을
푸르게 북돋우는 것이
움츠린 모든 사람을
푸르게 북돋우는 것이요
움츠리신 하느님을
푸르게 북돋아드리는 것입니다
외로운 한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
외로운 모든 사람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요
외로우신 하느님을
따뜻하게 안아드리는 것입니다
굶주린 한 사람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하는 것이
굶주린 모든 사람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하는 것이요
굶주리신 하느님을
넉넉하게 배부르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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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으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떠올려 봅니다. “가끔 나는 사람들에게 ‘거지에게 동냥을 줬느냐’고 물어봅니다. 그들이 ‘네’라고 대답하면, 나는 ‘당신은 동냥을 줄 때 그 사람의 눈을 바라봤나요? 아니면 그들의 손이라도 잡아주었나요?’라고 되묻습니다.
눈을 맞추고 손을 잡아야 진정한 그들과 만남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은 단지 돈만 던져주고 가버리거든요.”
어느 날, 허름한 옷을 입고 술에 취한 상태로 성당 앞을 서성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행려자처럼 보였습니다. 내심 걱정되었습니다. 성당에 어떤 해가 되는 일을 하면 어쩌나? 마침 몇몇 신자들이 돈을 주어 보냈습니다.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어떻게 도와줄까? 생각하지 않고 귀찮은 존재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움이 큽니다. 저는 눈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아줄 생각은 하지 않고 지극히 인간적인 계산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과 가난한 사람들을 동일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그리고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구원과 심판의 기준을 구체적인 이웃 사랑의 실천에 두셨습니다. 굶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헐벗은 사람, 병든 사람, 나그네 등등 가장 작은 이들에게 베푸는 사랑이 곧 주님께 드리는 봉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이웃 사랑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 날 심판은 양 아니면 염소, 둘 가운데 하나입니다. 어중간, 양다리 걸치기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많이 사랑하면서 살았니?
막상 실천의 기회가 오면 머리로 계산하고 따집니다. 말로나 혀끝으로 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반대의 삶을 살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자선을 베푸는 사람은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하고 민첩하게 해야 합니다.”(성 그레고리오) 그래야 주님의 마음에 들 수 있습니다. 이리저리 재지 말고 그가 새 출발 하길 간절히 기도하면서 베풀면 주님의 평화가 함께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다가가는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글 모르는 시골 할머니가 신학 교수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할 수도 있습니다.”(성 보나벤뚜라)
“삶이 끝날 때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게 될 것”(십자가의 성 요한) 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행동으로 사랑하는 날 되길 희망합니다. 지금은 사랑할 때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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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나는 오른쪽인가 왼쪽인가?>
“우리는 모두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에 ‘한 사람’이다”
"주께서는 의인에게 복주시고, 사랑으로 방패삼아 감싸 주시나이다."(시편 5,13)
밤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날마다 무지의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은 강론 쓰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다산의 말씀과 공자의 말씀도 귀한 깨우침이 됩니다.
“배움에도 용기가 필요하듯, 용기에도 배움이 필요하다. 무모한 용기를 앞세우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을 어지럽힌다.”-다산
무지, 무식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그 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자기를 아는 것이 지혜요 겸손입니다. 끊임없이 배우고 공부하는 겸손한 자세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습니다.
“맨몸으로 범을 잡고 강을 건너려다 죽어도 후회하지 않는다는 자와는 함께하지 않겠다. 신중하게 계획을 세워 일을 이루는 사람과 함께 하겠다.”-논어
다산은 물론 공자 역시 얼마나 신중하고 합리적인지, 또 겸손하고 지혜로운지 깨닫습니다. 무모하고 용감한 어리석은 이들과는 거리가 먼 분들입니다. 무모(無謀)하고 용감하면 답이 없습니다. 새벽 일어나 열심하고 한결같은 사제 도반들의 매일 말씀을 바탕한 묵상글을 몇 편 대략 읽어봤습니다. 정말 다양하면서도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게 됩니다. 똑같은 복음과 독서 말씀을 기본으로 한 묵상글이지만 사제마다 참 다양합니다. 모두가 진리를 반영하나 진리의 한 부분만 반영할 뿐 진리자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이 참으로 겸허하게 합니다.
올해 사순시기 교황님 담화문은 얼마나 깊고 풍요로운지 사순시기 동안 독본(讀本)으로 삼고 싶습니다. 유다인들은 물론 초대교회 신자들의 전통적 수행인 기도와 자선과 단식에 대한 설명도 참 명쾌했습니다.
“기도와 자선과 단식은 서로 관계없는 세 가지 행위가 아니라, 우리를 짓누르는 우상들과 우리를 구속하는 집착을 쫓아버리는,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입니다. 그렇게 할 때 위축되고 외로웠던 마음들은 회복될 것입니다.”
‘개방과 자기 비움의 단일한 행위’로 요약되는 겸손과 사랑과 자유의 삶이요, 이래야 비로소 참된 자유인의 삶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겸손과 사랑, 그리고 자유에로 인도하는 죽음에 대한 묵상입니다. 성 베네딕도는 물론 사막교부들의 이구동성 권고 말씀으로 제가 참 많이 자주 인용했던 말마디입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
이런 가르침이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이자 마지막처럼 거품이나 환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게 합니다. 참으로 겸손히 사랑하며 자유롭게 살게 합니다. 결국 영원히 남는 것은 사랑뿐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하느님을 닮은 거룩한 삶이 사랑과 분리된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제1독서 레위기에서 주님은 모세를 통해 가르치시고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친히 귀한 가르침을 주십니다.
“나, 주 너희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거룩함은 추상적이고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 금령을 통한 사랑의 실천을 통해 이뤄짐을 봅니다. 한번 자신의 상태를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1.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2.속여서는 안 된다.
3.사기해서는 안 된다.
4.거짓 맹세를 해서는 안 된다.
5.이웃을 억눌러서는 안 된다.
6.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7.이웃에 줄 품삯을 다음 날 아침까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8.귀먹은 이에게 악담해서는 안 된다.
9.눈먼이에게 장애물을 놓아서는 안 된다.
10.재판할 때에 불의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11.가난한 이라고 두둔해서도 안 되고, 세력 있는 이라고 우대해서도 안 된다.
12.중상해서는 안 된다.
13.이웃의 생명을 걸고 나서서는 안 된다.
14.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15.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참으로 구체적 금령들로 표현된 섬세하고 자상한 실천해야 할 사랑의 내용들을 공부하는 마음으로 열거해 봤습니다. 새삼 디테일에 강해야 하는 사랑의 실천임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날 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될 사랑의 내용들입니다. 주님 친히 명령하는 다음 두 마디 말씀이 이 모두를 요약합니다.
“너희는 하느님을 경외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참으로 거룩한 사람은 이런 하느님 경외와 이웃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임을 배웁니다. 오늘 복음의 최후심판 잣대는 더욱 구체적이고 현실적입니다. 기도나 전례, 계명의 준수도 아닌 사랑 실천이 최후심판의 잣대입니다. 오른쪽의 구원받은 양들과 왼쪽의 심판받은 염소들로 확연히 구분됩니다.
1.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2.너희는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3.너희는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4.너희는 내가 헐벗을 때에,
5.너희는 내가 병들었을 때에,
6.너희는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아주 구체적 사안에 어떻게 응답했느냐가 최후심판의 잣대라는 것입니다. 국적, 종교, 인종, 남녀노소를 넘어 곤궁한 이들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참으로 놀랍고 충격적인 주님의 말씀입니다. 하느님께는 전 인류가 구원의 대상입니다. 구체적 사랑을 실천한 오른쪽 양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응답 말씀에 이어 사랑을 실천하지 못한 왼쪽 염소들에 속하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과연 나는 어느 쪽에 속하겠는지요? 깊이 들여다보면 모두가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요 어느 누구 하나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됨을 배웁니다. 바로 이들 하나하나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주님이니, 이들은 그대로 주님의 현존이요 성체이기 때문입니다. 미사 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대하듯 살아있는 주님의 성체인 이웃 하나하나를 귀히 대해야 함을 봅니다. 바로 이런 사랑을 실천한 성녀 마더 데레사요, 성 샤를로 후고입니다. 참으로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사순시기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오늘 복음 말씀이요, 마지막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주어지는 영원한 화두입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
하루하루가 선물이요 심판과 구원의 날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와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최후심판과 구원은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님의 성체를 귀히 모시듯 오늘 하루도 만나는 하나하나 형제를 주님의 성체처럼 귀히 대하며 구원의 삶을 살도록 주님의 은총을 청합시다.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힘을 주시리라. 주께서 당신 백성에게 평화의 복을 주시리라. 하느님께서."(시편 29,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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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여김에 대하여>
“나, 주 너의 하느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위의 레위기와 복음의 말씀을 종합하여 생각하면 우리가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람이 되면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할 것이고, 하느님처럼 거룩한 사랑을 한다는 것은 우리의 주님처럼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오늘 레위기는 계명을 지키라고 하면서 “나는 주님이다.”라는 말씀을 후렴구처럼 반복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인 내가 너의 주인님인 것이 맞다면 너흰 내가 명령한 대로 실천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계명으로 실천하라고 하신 것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분이 하느님이신 것은 맞지만 나의 주님은 아닌 것이겠지요.
그리고 이것을 비유한다면 바이든이 대통령인 것은 맞지만 그가 나의 대통령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이고, 나의 대통령이 아니기에 아무리 명령해도 명이 서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기는가 그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나의 주인으로 여긴다면 이웃을 너 자신처럼 여기라는 하느님 말씀대로 우리 이웃을 나 자신처럼 여길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여김,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여기면 그것은 사랑입니다. 이웃을 주님처럼 여기면 그것은 거룩함입니다.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그것은 교만입니다.
그리고 이웃을 쓰레기처럼 여기면 쓰레기더미에서 살 것이고, 주님처럼 여기면 누구를 만나든 주님과 함께 살 것이며 자신처럼만 여겨도 이 세상 사는 동안은 행복할 것입니다.
그리니 이웃을 아무렇게나 여기지 말고 잘 여기며 살 것입니다. 여기기를 신중히 하고 소중히 하여 행복을 살고 천국을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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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40)
<심판의 기준!>
오늘 복음(마태 25,31-46)은 장례미사 복음으로 종종 듣는 '최후의 심판 기사'입니다.
우리의 여정은 끝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두 개의 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는 '죽음의 끝'이고, 또 하나는 '그리스도의 재림의 끝'입니다.
두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죽음 후에 맞이하게 되는 심판을 '사심판'이라고 하고, 그리스도의 재림 때 맞이하게 되는 심판을 '공심판'이라고 합니다.
'사심판'은 죽은 사람이 받는 개인 심판이지만, '공심판'은 세상 종말을 의미하는 최후의 심판으로써, 죽은 이와 산 이가 함께 받는 하느님의 심판입니다. 그리고 이 '심판의 기준은 사랑'입니다.
복음에 드러난 예수님의 가르침에 의하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사랑'입니다. 이는 나의 하느님 사랑은 반드시 나의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하고, 이웃 사랑은 하느님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입니다.
'반드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심판 때에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칭찬을 받을 것이고, 이 칭찬이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열쇠가 됩니다. 오늘 독서(레위 19,1-2.11-18)와 복음이 이 분명한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영원한 벌을 받는 곳으로 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곳으로 갈 것이다."(마태 25,45-46)
서로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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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NWnDPKhLZ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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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 25, 40)
예수님께서는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부터
준비된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사랑을
받아먹고
사는
우리들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혼자 있는 것이
아니며
결코 혼자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보살피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피와 살을
나누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빚진 목숨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삶입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쓰러진 자들을
가장 먼저
일으켜 세우시며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나라를
보여주십니다.
우리에게
밥을 주시고
물을 주시고
우리를
따뜻이
맞아들이시고
옷을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감옥에 있을 때
제일 먼저
찾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가장 작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소외된 이들을
더 다정하게
더 따뜻이
반겨주시는
사랑의 실천이
예수님께
해 드리는 것이며
영원한 생명의
참된 길입니다.
사랑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사랑이 필요한
가장 작은
이들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준비하신 나라의
삶입니다.
먼저
하느님 나라를
선택하는
우리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를 위해
준비된 나라는
여기 이곳입니다.
진심으로
사랑하는
진심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여기가 바로
준비된 나라
구원입니다.
실천을 잃어버린
우리에게
실천을
되찾아 주시는
사순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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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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