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6주년
6.10 독립만세운동 기념식
6.10 독립만세운동 기념비 전문 (중앙고 교정)
6.10만세운동은 일제 강정기이던 1919년 3.1독립운동에 이어 7년뒤에 다시 일어난 민족적 항일 거사였다, 이 운동은 서울에서 일어나 온 나라를 격동시키고 1929년 광주학생 운동과 서울학생항일 운동으로 이어지는 민족운동의 원동력이 되었다,
1926년 6월10일은 조선조 마지막 임금 순종의 인산(因山) 날 이었다, 임금은 망국의 한을품고 세상을 떠났지만 조선의 백성은 나라의 운명을 비탄하여 30여만 봉도민(奉悼民)이 서울에 모여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성들은 3.1독립운동 때를 떠올리며 폭풍전야같이 초조긴장 하였고 반면 일제는 무장군대까지 동원하여 무력을 시위하며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실제 이날을 계기로 한 만세운동은 세 갈레로 추진되었다, 중앙교우인 노공계의 권오설(權五卨)이 천도교 박내원(朴來源) 등을 포함하여 추진하던 전국규모의 만세운동은 일제경찰에 사전 발각되어 6월7일 주모자인 권오설 등이 피검됨으로서 수포로 돌아갔다, 이에놀란 일제는 사상단체 등을 압수수색 하는 등 더욱 경계를 강화했다, 권오설은 5년 형을받고 복역중 모진 고문을 받아 순국했고 권오설과 같이 활동하던 연전생 권오상(權五尙)역시 옥고를 치루던중 병보석으로 나왔지만 고문의 휴우증 으로 바로 세상을 떠났다,
6.10일 아침이 밝았다, 오전8시 봉도민의 호곡속에 대여(大與)가 창덕궁 돈화문 앞을 떠나 장지인 금곡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8시30분 종로3가 사거리에 도열해 있던 중앙고보 5년생 이선호가 도로 가운데로 뛰어나오며 격문을 뿌리고 "조선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이에 중앙학생과 봉도민이 호응해서 독립만세의 함성은 하늘을 뒤덮혔다, 대여가 지나가는 관수교, 을지로, 동대문, 동묘, 신설동 등에서 "조선독립만세"의 불길이 게속 타올랐다,
다급한 일제 군경은 만세를 부르는 학생과 군중을 짖밟으며 무자비하게 채포 구금하느라 서울 거리가 극도로 혼잡하였다, 이날 현장에서 중앙고보생 51명, 연희전문생 35명, 보성전문생 7명, 등
1백 수십명이 종로 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풀려났지만 주모자 11명은 경성 복심법원에서 징역1년의 선고를 받아 복역후 1927년 9월20일 출옥 하였다,
일제강경의 조사과정에서 학생운동은 사직동계와 통동(현제 통의동)계로 각각 추진 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사직동계는 중앙고보생 이선호(李先鎬), 류면희(柳冕熙), 청년학관생 박두종(朴斗鐘), 연정생 이병립(李炳立), 박하균(朴河均), 경성제대 예과 이천진(李天鎭), 등 조선학생 과학연구회 회원들이 주도하였고, 민족주의계인 통동계는 중앙고보생 박용규(朴龍圭), 이동환(李東煥), 중동학생 김재문(金載文), 황정환(黃廷煥), 곽대형(郭戴炯), 이 중심이 되었다, 서울시가 만세운동 현장에 세운 기념표지석에는 중앙고보생 이선호를 "조선독립만세" 의 선창자로 기록하고 있으니 따라서 중앙고보는 6.10만세운동의 선창학교로 자리매김 되었다,
이와같이 6.10만세운동을 추진한 세 계열이 모두 중앙고보 출신과 학생들에 의해 주도된 것은 중앙학교의 존재의미를 새삼 부각시킨다, 그 빛나는 역사를 밝혀 기념비를 세우니 선배들이 조국 광복에 끼친 공훈과 업적은 영원히 빛나리라,
2012년 6월 8일
중 앙 중. 고 등 학 교 (기념식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