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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 부패한 관료자본의 상징, 죽은 뒤 ‘청렴’ 인정받아 쑹쯔원(宋子文) 중앙SUNDAY |제107호| 2009년 3월 29일
▲1940년대 말 성장한 세 딸과 함께한 쑹쯔원 부부. 김명호 제공
1971년 4월 쑹쯔원(宋子文)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 최고의 부호가 사망했다며 유산이 30억 달러에서 5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이 무성했다. 예금을 한꺼번에 인출하면 월가의 금융시장이 40여 분간 마비된다고들 했다.
쑹쯔원의 부친은 성경을 쑤저우(蘇州) 방언으로 출판해 부를 축적한 선교사였다. 6남매를 모두 미국의 명문 사립학교에 유학시켰다. 쑹도 하버드에서 학위를 마친 민국 정부 최초의 국비유학생이었다.
쑹쯔원은 장(蔣介石), 쿵(孔祥熙), 천(陳果夫·陳立夫)과 함께 중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쑹(宋)씨 집안의 당주였다. 두 명의 누이와 한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영화와 소설에 자주 등장하는 ‘송씨 3자매’가 바로 그들이다. 쿵샹시, 쑨원, 장제스가 모두 매부였다. 『붉은 논객』 천보다(陳伯達)는 이들을 청대 소설 홍루몽의 무대인 4개의 집안에 빗대어 ‘4대 가족(四大家族)’이라고 불렀다. 부정적인 의미였다. 천씨 형제는 “천하는 장(蔣)씨가 먹었고, 국민당은 천(陳)씨가 장악했다(蔣家天下陳家黨)”는 말이 나돌 정도로 국민당의 조직과 정보기관을 장악했던 장제스의 측근이었다.
쑹쯔원은 20세기 전반 부패한 관료자본의 상징이었다. 40년대부터 부자 소리를 들었다. 49년 중공정권 수립 후 샌프란시스코에 은거했다. 독서와 산책으로 소일했다. 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은 “쑹이 43년 7000만 달러를 제너럴모터스(GM)와 듀폰에 투자했고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부자일지도 모른다”고 보도했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라고 단정했다. 미국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도둑놈이다. 국민정부에 보내준 전시지원금 38억 달러 중 7억5000만 달러를 가로채 뉴욕과 브라질 상파울루의 부동산에 투자했다”고 말했다. 23년 누이 칭링(慶齡)의 소개로 쑨원의 영문비서로 출발해 26년간 중앙은행 총재와 재정부장·외교부장·행정원장을 거치며 중국의 전시재정을 집행했으니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했다.
쑹쯔원이 세상을 떠나자 뉴욕 주 정부는 그의 재산상태를 조사하기 위한 팀을 구성했다. 상속세를 징수하기 위해서였다. 조사 결과 쑹은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아니었다. 부인에게 남긴 유산은 동산 100만 달러를 포함해 500만 달러가 채 안 됐다. 40년 그의 재산은 200만 달러였다. 집안이 원래 부자였다.
지난해 3월 팔순에 접어든 쑹쯔원의 맏딸이 상하이를 방문했다. 중국을 떠난 지 60년 만이었다. 스탠퍼드대 후버연구소에 장기간 보관돼 있던 ‘쑹쯔원 비밀당안’을 외부에 공개하겠다고 발표했다. 재산이 가장 관심을 끌었다.
쑹쯔원은 49년 이후 주식과 채권에 투자한 돈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매달 들어오는 이익금을 연필로 상세히 기록해 놓았다. 매부들과의 관계가 복잡했다는 것도 드러났다. “매부에게 이용당하는 처남은 많아도 덕 보는 처남은 드물다”는 중국 속담은 빈말이 아니었다.
장제스는 급할 때만 쑹쯔원을 등용했고 발등의 불이 꺼지면 못 본 체했다. 쑹은 실제로 네 차례 관직을 떠난 적이 있었다. 카이로 선언을 위해 이집트를 방문했을 때도 외교부장인 쑹쯔원을 대동치 않았다. 미국을 등에 업고 자신의 자리를 넘볼까 봐 항상 긴장했다. 쑹이 암살을 모면한 것도 6차례였다. 제일 친한 친구가 장쉐량이었다.
쑹쯔원은 알려진 것처럼 직위를 이용해 재산을 증식하지 않았다. 부패한 공직자로 매도당할 때 변명한 적이 없었고 평범한 생활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았다. 멸사봉공(滅私奉公)을 실천한 청렴한 공직자였다. 부인도 평범한 건축가의 딸이었다. 모든 게 평범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쑹쯔원의 흔적들을 복원시키느라 분주하다.
<107>色에 빠진 雜技의 달인 … 사형장서도 ‘사진 잘 찍어달라’ 추민이(楮民宜) | 제108호 | 2009년 4월 5일
◀외교부장 시절 일본의 동물원에서.
1927년 북벌에 성공한 국민당은 난징(南京)에 국민정부를 수립했다. 희망과 욕망을 분간 못 하는 국민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지방도시에 당 중앙위원이나 각료들이 나타나면 온 도시가 들썩거렸다. 제1의 도시인 상하이(上海)도 마찬가지였다.
왕징웨이(汪精衛)의 심복이던 추민이(楮民宜)는 상하이를 방문한 최초의 중앙위원이었다. 전국의 문화와 교육을 총괄했다. 공설운동장에서 거행된 운동회에 참석해 축사를 했다. 버릴 말이 한마디도 없었다. 운동장에 내려와 멋진 제기차기로 관중의 갈채를 받았다. 며칠 후엔 한 사립중학교에 나타나 태극권에 관한 강연을 했다. 자신이 만들어 낸 태극체조를 선보였다. 학교마다 이 새로운 체조를 교과목에 포함시켰다. “운동을 열심히 하는 것이 구국의 길”이라는 구호도 만들어 냈다. 고관 티를 내지 않고 누구에게나 겸손해 호감을 샀다.
두 번째 상하이를 방문했을 때는 “사회의 깊숙한 면을 알아야 한다”며 장샤오린(張嘯林)을 만나려고 했다. 장은 상하이의 비밀결사인 청방(靑幇)의 3거두 중 한 사람이었다. 생각과 행동이 거칠고 조잡했지만 노는 방면에서는 스케일이 가장 컸다. 중앙에서 내려온 고관이 자신을 지목했다는 연락을 받자 “이런 영광이 없다”며 가장 호화로운 서양요리 집으로 추민이를 초대했다. 프랑스 조계의 명사와 청방의 중간급 두령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다.
추민이는 “프랑스 유학 시절 상하이에 장샤오린이라는 호걸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를 보기 위해 상하이에 왔다”며 장을 추어올린 후 “격식에 구애받지 말자”고 점잖게 말했다. 장은 눈치가 빨랐다. 혹시 몰라서 대기시켜 놓았던 기녀 100여 명을 순식간에 몰고 들어왔다. 추는 싱글벙글했다.
기녀들이 먼저 노래를 한 곡씩 뽑는 것이 관례였지만 그럴 겨를이 없었다. 추민이가 먼저 한 곡을 부르자 장샤오린이 뒤를 이었다. 이러기를 새벽 2시까지 반복했다. 악기도 직접 연주했다. 다음 날에는 아예 기원(妓院)으로 자리를 옮겼다. 며칠을 계속하자 초청객들은 진이 빠졌지만 추민이는 점점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백년지기처럼 죽이 맞은 두 사람은 항저우(杭州)로 이동해 사창가를 통째로 빌렸다.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받았지만 틈을 낼 수 없었다.
◀1946년 4월 법정에 출두하는 추민이(楮民宜). 김명호 제공
1920년 제1회 전국운동회가 열렸을 때 추는 매일 운동장에 나타나 여자 선수들과 행동을 함께했다. 출발신호를 기다리는 여자 육상선수들의 근육을 풀어 준다며 일일이 마사지해 주는 바람에 경기가 지연되기도 했다. 폐막식 날에는 연날리기를 직접 연출했다. 제2회 운동회 때도 빠지지 않았다. 양슈충(楊秀충)이라는 미모의 수영 선수가 있었다. 별명이 ‘미인어(美人魚)’였다. 일거일동이 뉴스거리였다. 추민이는 양슈충을 보물단지처럼 뒷자리에 모시고 직접 마차를 몰았다. 주책이라며 흉보는 사람도 많았고, 재미있어 하는 사람도 많았다.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고위 인사들 대부분이 상하이를 떠났지만 추민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중국 최초의 누드 사진가와 어울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새로운 모델들을 잘도 구해 왔다. 회원제 댄스홀에 주주로 참여해 부인과 동반하는 사람의 출입을 엄금했고, 공업학교를 설립해 교장에 취임했을 때는 밤마다 파티를 연 후 회의실에서 독일과 프랑스의 포르노를 상영했다. 영화가 끝나면 직접 써서 인쇄한 『효경(孝經)』을 한 부씩 선물했다. 그가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이유는 순전히 유흥 때문이었다.
추민이는 프랑스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지만 환자를 진료해 본 적도 없고 의학에 관해서는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토끼의 성생활이 그의 학위 논문이었다. 왕징웨이가 행정원장 시절에는 부원장이었고, 중앙당 주석 시절에는 비서장이었다. 왕의 괴뢰정부에 참여해 외교부장과 해군장관, 광둥(廣東)성 주석을 지냈지만 적극적인 친일 활동을 하거나 부정한 돈을 챙기지는 않았다. 노느라고 그럴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일본 패망 후 한간(漢奸) 재판에 회부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유학 동기인 전 베이징대 총장 리스쩡(李石曾)이 장제스(蔣介石)를 찾아가 사형 집행을 연기하라는 명령서를 겨우 받아 냈지만 추민이의 딸이 분실하는 바람에 수포로 돌아갔다. 부녀가 모두 산만했다.
추민이는 처형당하는 날 아침에도 수인들에게 태극권을 강의했다. 형장으로 가는 도중 사진기자들을 만나자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잘 찍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108>청렴 부르짖던 ‘대만의 아들’이 ‘대만의 치욕’으로 천수이볜(陳水扁) |제109호| 2009년 4월 12일
▲인권 변호사 시절인 1987년 무고죄로 8개월간 복역한 후 교도관들에게 둘러싸여 출옥하는 천수이볜(왼쪽 안경 쓴 사람). 김명호 제공
소년 천수이볜(陳水扁)의 점심은 항상 고구마였다. 친구들이 볼까 무서워 두 팔로 가리고 얼굴을 파묻은 채 먹었다. 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빈농이었다. 천의 모친은 문맹이었지만 현명한 여인이었다. 돈을 빌린 날과 갚을 날을 벽에 분필로 적어 놓았다. 갚아야 할 날이 다가오면 또다시 돈을 빌려 막았다. 이러기를 되풀이했다. 벽마다 아라비아숫자 투성이였다.
천은 신동이었다.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를 전교 1등으로 졸업했다. 69학번으로 대만대학 상학과에 합격했지만 후일 민진당 창당 주역의 한 사람이 된 황신제(黃信介)의 유세를 듣고 생각을 바꿨다. 자퇴한 후 다시 법학과에 입학해 변호사 시험을 준비했다. 학부 3학년 때 수석으로 합격했다. 22세의 대만 최연소 변호사였다. 대학도 1등으로 졸업했다. 이듬해 봄, 중학교 동창생인 우수전(吳淑珍)과 결혼했다.
우수전의 부친은 지역에서 행세깨나 하던 부자 의사였다. 딸이 여섯 살 되던 해 외국에서 피아노를 수입해 딸에게 주었다. 집 한 채 값이었다. 타이중(臺中)의 중싱(中興)대학 1학년 시절 타이베이(臺北)에서 열린 중학교 동창회에 갔다가 천수이볜을 만났다. 한 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 남녀관계였다. 천을 본 다음부터 다른 사내들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부모가 반대하건 말건 빈농의 아들 천수이볜과 결혼식을 올려 버렸다. 천은 법률사무소를 개업해 집안의 부채를 모두 처리했다.
1979년 12월 10일 대만 제2의 도시 가오슝(高雄)에서 메이리다오(美麗島)사건이 발생했다. 세계인권선언일을 기념하기 위한 집회에서 시위자와 경찰들이 충돌한 사건이었다. 1949년 계엄령이 선포된 이래 가장 격렬한 반정부 시위였다. 주동자 36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됐다. 10년 전 천수이볜에게 감동을 줬던 황신제도 그중 한 명이었다. 황은 천에게 변호를 의뢰했다. 고생만 하고 수임료도 제대로 챙기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는지 천은 머뭇거렸다. 대형 선박회사의 고문변호사로 돈맛을 알기 시작했을 때였다. 우수전은 “이런 사건을 맡지 않을 거면 변호사를 뭐 하러 하느냐”며 남편을 닦아세웠다. 천은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렸다. 변론을 하면서 민주화 운동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메이리다오 사건은 한 명의 청년 정치가를 탄생시키는 계기가 됐다.
천수이볜은 타이베이 시의원 선거에 나가 최고 득표로 당선됐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의원직을 포기하고 고향인 타이난(臺南)현의 현장 선거에 출마했지만 패배했다. 그러나 유권자에게 인사를 다니던 우수전이 하반신이 마비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천은 평생을 써도 남을 정치적 자산을 확보했다. 사고를 낸 사람은 타이난의 평범한 화물차 기사였지만 천은 ‘비열한 정치테러’라며 울분을 토했다. 모든 책임을 정부 쪽에 떠넘겼다. 동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들 부부는 박해받는 민주화 운동의 상징이었다. 글과 말이 거칠었던 천은 무고죄로 8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사이 우수전은 입법위원에 당선됐다. 동정표처럼 무서운 것도 없었다. 출옥한 천수이볜은 입법위원에 선출되기 전까지 우수전의 보좌관을 했다.
천의 의정활동은 민의의 대표자로 손색이 없었다. 대정부 질문은 가혹할 정도로 엄격했고 직위를 이용한 부정과 부패의 폭로에 앞장섰다. 국민당의 금권통치를 비판할 때마다 국민은 속이 후련했다.
타이베이 시장 선거에서도 국민당 후보를 눌렀다. 교통과 치안 방면에서 시민에게 점수를 얻었지만 각박하고 편협한 시책을 펼 때가 많았다. 장제스의 별장을 헐어 버리고 대만의 한 일간지에 시정(市政)을 비판하는 기사가 실리자 시에 예속된 모든 기관에 구독을 금지시켰다. 광고도 못 하게 했다. 청렴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행동이 뒤를 받쳐 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결국 연임에는 실패했다. 우수전이 한마디 했다. “총통 하면 될 거 아냐.”
천수이볜은 총통 선거를 준비했다. 우수전의 휠체어를 밀며 대만 전역을 누볐다. 두 팔에 장애인 부인을 안고 나타나면 모두가 숙연해졌다. 2000년 총통 선거에서 천은 승리했다. 국민당의 분열 덕을 단단히 봤지만 최고의 공로자는 우수전이었다.
천은 대만의 아들(臺灣之子)임을 자처했다. 청렴과 도덕성을 견지하며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국민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이었다. 다른 말들은 한 귀로 흘려들어도 좋았다. 취임 3개월 후 지지도가 79%였다.
천수이볜은 총통 시절에 온 가족과 주변 인물들이 합세해 행했던 뇌물 수수와 기밀비를 훔쳐 먹은 죄로 현재 수감 중이다. 대만의 아들이 대만의 치욕(臺灣之恥)으로 전락하는 날 천은 정치적 탄압 이라며 고래고래 “대만 만세”를 불러댔다. 그러나 민의를 강간당했던 대만인은 폭죽을 터뜨리며 “사법부 만세”를 외쳤다.
<109>최고 권력자가 딸에게 “무슨 일 있어도 연애결혼해라” 마오쩌둥(毛澤東)과 두 딸 |제110호| 2009년 4월 19일
▲1951년 여름 아버지와 함께한 마오쩌둥의 딸들. 오른쪽이 리민, 왼쪽이 리너. 김명호 제공
마오쩌둥(毛澤東)에게는 리민(李敏)과 리너(李訥)라는 두 명의 딸이 있었다. 리민은 마오와 허쯔전(賀子珍)과의 사이에 태어났다. 리너의 생모는 장칭(江靑)이었다.
리민은 1936년 겨울 산시(陝西)성 바오안(保安)현의 동굴에서 태어났다. 중국 공산당 중앙이 옌안(延安)에 정착하기 전이었다. 이듬해 말 임신 중이던 허쯔전은 마오의 만류를 뿌리치고 혼자 소련으로 떠났다. 소련에서 아들이 태어났지만 곧 세상을 떠났다. 낙심한 허쯔전이 적적해한다는 소식을 들은 마오는 네 살이 채 안 된 딸을 엄마 곁으로 보냈다. 허쯔전은 마오의 첫 번째 부인 소생인 마오안잉(毛岸英)과 안칭(岸靑) 형제를 돌보고 있었다. 리민은 이마노프에 있는 ‘국제아동보육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모습은 뇌리에서 점점 사라졌다. 보육원 강당에 국제주의자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주더(朱德)도 있고 마오쩌둥도 있었다. 리민은 훗날 “오빠들이 아버지의 초상화를 가리키며 우리 아버지라고 했다. 주석처럼 위대한 인물이 내 아버지라는 말을 믿지 않았다. 오빠들이 놀리는 줄 알았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모녀는 47년 귀국해 하얼빈에 2년간 머물렀다. 49년 봄 리민은 “사람들은 주석이 나의 친아버지이고 내가 주석의 친딸이라고들 한다. 나는 소련에 있었기 때문에 주석을 본 적이 없을뿐더러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뭐가 뭔지를 모르겠다. 주석이 내 친아버지가 확실한지, 내가 주석의 친딸이라는 말이 맞는지 빨리 알려주기 바란다. 사실이라면 주석이 있는 곳으로 가겠으니 나를 데리러 오라”는 편지를 마오 주석 앞으로 보냈다. 중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러시아어로 쓰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읽은 마오는 박장대소했다. 그 자리에서 “네 편지를 봤다. 너는 내 친딸이고 나는 네 친아빠다. 많이 컸겠구나. 생각만 해도 기쁘다. 빨리 아빠가 있는 곳으로 오기 바란다”는 전보를 보냈다. 갓난애기 때 부르던 자오자오(早早)가 수신자였다. “봐라, 우리 집안에도 외국어를 아는 사람이 생겼다”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한바탕 자랑을 늘어놓는 것도 잊지 않았다.
49년 초여름 마오는 허쯔전의 동생을 하얼빈으로 보내 리민을 데려오게 했다. 허쯔전은 당의 지시에 따라 상하이로 내려가 정착했다. 리민은 장칭의 소생인 리너도 처음 만났다.
마오쩌둥은 애칭으로만 불리던 두 딸에게 “쓸데없는 말을 적게 하고, 해야 할 일은 민첩하게 행하는 사람이 되라”며 논어(論語)에 나오는 민(敏)과 눌(訥)을 한 자씩 사용해 제대로 된 이름을 지어 줬다. 성은 마오(毛)가 아닌 리(李)를 쓰게 했다. 마오는 국민당의 체포를 피해 도망 다니던 시절 리더성(李得勝)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국민당의 최정예 부대의 맹공을 피해 옌안을 포기하고 철수할 때도 떠나면(離) 승리할 수 있다(得勝)는 의미에서 이 이름을 사용했다. 리(李)는 리(離)와 발음이 같다.
리너는 마오와 장칭의 외동딸로 40년 옌안에서 태어났다. 전쟁으로 날을 지새우던 시대였지만 아버지 옆에서 편안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마오는 한번 일을 시작하면 뜬눈으로 밤을 새울 때가 많았다. 어느 누구도 감히 휴식을 권하지 못했지만 리너만은 예외였다. “아빠, 우리 산보하러 가자”고 손을 잡아끌면 마오는 싱글벙글하며 따라나섰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을 때 리민은 13세, 리너는 9세였다. 두 딸은 중국의 최고 통치권자가 된 아버지와 함께 중난하이(中南海)에서 살며 정규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마오는 두 딸의 생활방식이나 학교 공부에 관해 엄격할 정도로 요구하는 것이 많았다. 그러나 결혼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연애결혼을 해야 한다고 틈날 때마다 주입시켰다. 리민은 대학 시절 사귀기 시작한 해방군 포병 부사령관의 아들과 결혼했다. 사귀는 남자의 부모가 뭘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 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의 딸이라는 것도 말하지 않는 바람에 남자 쪽에서 짜증을 낸 적이 많았다고 한다. 59년 마오는 리민의 결혼식을 직접 주재했다. 하객들에게 일일이 술을 따르며 평소 잘 마시지 않던 술이었지만 그날은 대취했다.
리너는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졸업했다. 아버지 옆에서 오래 생활한 탓에 시(詩)와 사(詞)에 능하고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서법도 마오와 장칭의 가르침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초대소 직원과 결혼했지만 문화의 차이로 오래가지 못했다. 73년 공산당 제10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만났다.
마오의 딸들은 아버지 생전에 특권을 누린 적이 없고 사후에도 물려받을 만한 유산이 없었다. 마오는 두 딸이 과학자나 정치가가 되기를 바라지 않았다. 문학가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노동자가 돼 자력 갱생하기를 희망했다.
<110>棺을 짜던 목수, 구시대의 棺을 짜다 리셴녠(李先念) |제111호| 2009년 4월 26일
▲1952년 후베이성 당서기 겸 성정부 주석 시절 배를 타고 우한(武漢)을 순시하는 리셴녠. 김명호 제공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래 수많은 풍파가 있었다. 집권과 동시에 시작된 권력투쟁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의심벽이 가장 큰 이유였다. 건국의 원훈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곤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두 번 실각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아슬아슬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의 입에서 “이게 어디 옛날에 한솥밥 먹은 사람들끼리 할 짓이냐”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리셴녠(李先念:1909∼1992)은 한 번도 실각한 적이 없고 문화혁명 시절에도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31년간 정치국원을 연임하며 부총리 15년에다 국가주석과 전국정협 주석을 역임한 3조(三朝: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 시대)의 원로였다.
리셴녠은 매사에 근엄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 같았지만 복잡한 환경이 빚어낸 아주 복잡한 인간 관계를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원인을 찾는다. 리의 모친은 전형적인 농촌 여성이었다. 후베이(湖北)성 황안(黃安)현의 빈농이던 세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리셴녠을 낳았다. 나이가 많은 데다 영양실조였던 모친은 수유가 불가능했다. 큰누나의 젖을 조카와 함께 나눠먹으며 목숨을 유지했다. 아버지가 서로 다른 8명의 자녀들이 한 집안에 북적거리다 보니 억울한 일을 겪어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관대하고 후덕하지 않으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환경이었다. 불평은 하면 할수록 손해였다. 리는 인간이 하기에 가장 힘든 일을 어린 시절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 학교라는 게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감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12살 때부터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목수는 평생 굶어 죽을 염려가 없었다. 3년간 기술을 익힌 후 대패 하나를 달랑 들고 후베이 최대의 도시인 우한(武漢)으로 나와 관(棺)만 전문으로 짜는 집에 취직했다. 항구도시이다 보니 부두 노동자와 하층민들의 생활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빈농보다 나을 게 없었다. 평생 가난에서 헤어날 가능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하루는 거리에 나왔다가 북벌에 나선 국민혁명군의 대오와 마주쳤다. 그날 밤잠을 설쳤다. 죽은 사람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둥비우(董必武)라는 사람이 고향에서 혁명의 진리를 선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리셴녠은 대패를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세 때였다. 이듬해 겨울 공산당에 입당해 황안·마청(麻城)지구 농민폭동(黃麻起義)에 참여했다. 실패한 폭동이었다. 리는 유격대를 조직했다. 5년 후 300여 명의 청년을 이끌고 홍군에 가담해 구사회(舊社會)를 매장시킬 관을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1935년 6월 마오쩌둥을 처음 만났다. 마오는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너야말로 소년영웅이다”라며 즐거워했다. 리는 그 후에도 계속 전쟁터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지휘하던 30군이 홍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로 성장하자 마오는 “우리는 전쟁이 뭔지를 몰랐던 사람들이다. 전쟁을 하면서 전쟁을 배웠다. 대표적인 사람이 리셴녠이다”라며 대견해했다. 리는 22년간 전장을 누비며 혁명 근거지를 건설했다. 전쟁에 승리하는 것 못지않게 먹고 입는 것을 소중히 여긴 지휘관이었다.
1949년 초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당 중앙은 중요 지역의 책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내에 후베이 출신들이 많았지만 마오쩌둥은 후베이성 당서기 겸 성정부 주석에 리셴녠을 낙점하며 군구사령관과 정치위원을 겸하게 했다. 리는 5년간 후베이의 자본가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화약 냄새만 없을 뿐 눈에서 피가 튀어나올 것 같은 전쟁이었다. 전국의 재정과 경제를 주관하던 부총리 천윈(陳雲)과 재정부장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리셴녠을 신임 재정부장에 천거했다. 나이가 젊고 두뇌가 명석해 한번 본 경제수치들을 자유자재로 기억해 활용하고 늘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마오는 무조건 동의했지만 리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며 재고를 요청했다. 마오가 직접 나섰다. “네가 할 수 없고 할 생각이 없다면 국민당 재정부장이었던 쑹쯔원(宋子文)을 대만에서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 전쟁처럼 배우면서 해라.”
1960년 쿠바의 중앙은행장 체 게바라가 중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승리할 무렵 재정을 아는 사람이 전무했다. 간부를 배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쓸모가 없었다. 우리는 대병력을 장악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전국의 재정을 관장하게 했다. 이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라며 재정부장 리셴녠을 게바라에게 직접 소개했다.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
첫댓글 송씨왕조의 상속자 송자문은 매부인 장개석과 한통속이 되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막강한 권세를 휘두른 줄만 알았는데, 둘 사이엔 남모르는 알력이 있었네. 부패의 화신에서 청렴의 상징으로 재평가가 시도될 모양인데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될까? 또 첸수이볜을 보니, "才는 德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 실감나네. 그리고 모택동의 동료나 후배들은 그 자손이 대개 한자리 하던데 마오의 자녀들이 행세한다는 얘길 듣지 못했네. 다른 건 몰라도 이 점에 점수를 주고 싶음.
천수이벤....
어느 동네나
머리만 좋다고 까불 일은 아닌가벼....ㅎㅎ
송씨누이들 얘기는 많이 알려져있으나,딸얘기를 못들어 궁금한대 연재되는가요?
한번 보키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