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을 하면서
새벽 방선 후와 오후 방선 후에는 절을 한다.
좁은 공간에서 마땅히 할 운동도 없거니와
무문관에서의 최고 운동이 바로 절이기 때문이다.
처음 절을 시작할 때 어디를 보고 할까 하다가
횃대에 걸린 가사를 보면서 하기로 했다.
가사는 곧 삼보(三寶)의 상징이니 이만한 성물(聖物)이 또 있으랴.
절은 아주 천천히 한다.
무릎관절을 다친 후 제대로 절을 못 하기 때문이다.
학인시절 무리하게 산을 타다 다친 후 지금까지
부끄러운 얘기지만 백팔배 한 걸 헤아리면 아마 백 번도 안 될 것같다.
그만큼 절을 할 때 통증이 오기 때문이다.
당시 치료차 대구 불교 한방병원에 다닐 때 원장이 했던 말.
---" 스님은 앞으로 참선하기는 틀렸습니다.
무릎 연골은 한번 상하면 회복하기는 힘들어요"
이 말을 듣고 얼마나 낙담했는지 모른다.
출가수행자가 참선을 하지 못하면 뭘 한단 말인가.
지금이야 꼭 참선만이 전부는 아니며 선방에 가도
요령껏 다리를 조절해서 해서 견디기는 하지만
그때 원장의 말은 몸과 마음을 아주 힘들게 했다.
당시 심하게 아플 땐 예불공양을 참석 못 할 정도였으니
그것도 해인사 강당에서 얼마나 눈칫밥을 먹었겠는가.
군대 있을 땐 훈련 많기로 소문난
보병 8사단에서 완전군장 30킬로미터 산악 구보까지
선수로 뽑혀 나갈 정도로 건강한 다리였는데----.
한번 다친 다리는 그 후 영 회복되질 않았고
오죽하면 강원 졸업하기 전 가야산 마애불
한 번 참배하고 가는 것을 원으로 세울 정도였다.
결국 엉금엉금 기다시피 마애불을 참배하긴 했지만
그때 마애불 앞에서 흘린 눈물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찌 보면 내 수행의 과정은 무릎관절염과의 싸움이었는지 모른다.
해인사에서 첫 철을 나면서 요령껏 앉지도 못한 채 쉬는 시간만 되면
지대방에서 아픈 무릎을 주무르느라 구참 스님들 눈치도 꽤 보았다.
남의 속도 모르고 첫 철 나는놈이 산심이 그 정도밖에 안 되냐하며 얼마나 흉봤을까.
그 후 계속 선방에 다니면서 나름대로 자세를 터득했다.
혼침(昏沈) 이 오거나 신심이 퇴굴하면 결가부좌로 앉는 것이 제일이나
그렇게 십 분만 했다간 까딱하면 한 철 내 고생한다.
그냥 좀 졸더라도 평좌나 반가부좌가 내 다리 사정으로 제격이다.
또 해인사 선방은 새벽 방선 후 꼭 백팔배를 하는데 그것 또한 보통 고역이 아니다.
눈치껏 천천히 하긴 해도 대중들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무릎이 시원찮으니 그렇게 좋아하던 산도 제대로 탈 수 없다.
산을 너무 좋아하다
무릎을 다쳤으니 지금의 답답함이야 어찌 말로 다 하랴.
그래도 지금 이 정도나마 조심조심 다닐 수 있고,
그럭저럭 선방도 무릎 사정 봐가며 다닐 수 있고
최소한 부처님께 예불 정도는 거뜬히 할 수 있으니 감사한 마음이다.
절을 하다가도 아픈 신호가 오면 즉시 그만해야 한다.
참고 했다간 아주 고생을 한다, 아주 천천히, 무릎과 대화를 하면서.
그러면서 온 정성을 다해 절을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나면 온몸에 땀까지 난다
절을 하면서 내 무릎의 역사와 수행의 여정까지 들추게 됐다.
6. 3 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