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전 미주통일방송이 탈북 장교의 증언을 인용하여 방송하였던 동영상입니다.
그런데, 북한군 장교의 증언이 사실이라는 증거를 몇해전 임수경씨가
"임수경의 편지: 386의원들의 단란주점추태"라는 글에서 살며시 드러내었다.
이 편지는 5.18 전야제 때 성희롱한 386의원들의 추태에 대한 폭로였는데,
이 편지에 공개된 인물들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다.
우리가 알기로 임수경 본인은 광주사태와 별 상관이 없다.
그럼에도 해마다 5.18 전야제 때 임수경은 VIP 인물이요, 그 이름이 약방 감초처럼 인용된다.
임수경 자신은 단지 주사파의 지시를 받고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남한대표로 참여하였을 뿐이다.
그러면, 도대체 5.18 정신이 무엇이기에 5.18 기념행사 때 임수경을 영웅으로 떠받드는 것일까?
먼저 임수경이 월북하고,
1991년 3월 윤기권이란 광주사태 주동자가 보상금 2억원 수령하고 영구 월북하였다.
1991년 3월8일자 광주의 일간지들은
[3월4일, 광주 5.18항쟁 부상자인 윤기권(광주 두암동)이 위대한 수령님과 참조국을 찾아
의거 월북했다...] 고 평양방송을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한국 현대사 사료 연구소'(광주 소재. 소장 송기숙)에서 펴낸
『광주 5월 민중 항쟁 사료 전집』(1990)에는 윤기권의 사상이 증언 형식으로 채록돼 있다.
그런데, 그 당시 개인이 2억원이란 거금을 들고 혼자서 북한에 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가 어떻게 월북할 수 있었까의 질문이 바로 북한과 광주사태는 무슨 관계였느냐에 관한 질문이다.
그리고, 시민군이란 용어의 어원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를 말해 준다.
시민군은 본래 월맹이 월남을 공산화하기 위해 동원하였던 무장 시민군을 말한다.
정면에 무장 시민들을 내세워 시민군으로 위장하되 그 배후에 월맹군이 끼어있는 전법이었다.
그리고, 시민군의 등장이란 미군의 참전을 불가능케 하는 것이기에
그들은 이런 방법으로 월남을 침략하였다.
따라서, 시민군이란 말이 광주사태 때 어디서 유래하였느냐가 북한과 광주사태의 관계에 대한 실마리이다.
이해찬의 행동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다.
김대중 정권 때 그는 5.18 유공자 포상을 자기가 하고 자기가 받았다.
그리고 지금 자기와 반대 편에 있던 분들의 서훈은 취소시킨다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김대중 가문의 가신으로서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을 담당하였던
당시 중앙정보부 김대중 담당 수사관이었던 이기동 씨는
그의 신동아 기고문에서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의 민주정권을 무력으로 붕괴시키고
자기가 스스로 대통령이 되려 하였다는 사실과 왜 이해찬이 5.18 유공자 포상 대상인지를 상세하게 증언한다.
(http://www.donga.com/docs/magazine/new_donga/9907/nd99070020.html)
이해찬이 자기가 5.18 유공자 포상하고 자기가 포상받았을 때
수십 명의 386정치인들을 무더기로 포상하였는데,
바로 임수경씨가 5.18전야제 성희롱 사건의 주역들로 고발하는 이름들이다.
그리고, 임수경씨의 이런 정의감과 정직성이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아주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임수경씨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된다: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 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
여기서 박노해 시인이 누구던가?
역시 그의 정직성을 가지고 광주사태 배후에 김대중이 있었다는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한 이가 아니던가?
시인 박노해가 1989년에 쓴 『윤상원 평전』에 따르면
윤상원은 시민군 지도자를 넘어 혁명투사였다.
박노해는 이 평전에서 윤상원이 1980년 5월 18일 이전부터 무장봉기를 준비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멀쩡한 직장을 그만 두고 광주에 내려가 공장에 위장 취업한 사실,
들불야학에서 노동자 계급 의식화에 앞장서고
전민노련(전국민주노동자연맹)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한 사실 등을 미뤄
그가 노동 해방을 꿈꾸는 사회주의 혁명투사였다고 주장한다.
그의 증언을 따라가 보면, YH사건의 주동자도 바로 윤상원이었으며,
따라서 부마사태의 배후에도 김대중이 있었던 것이다.
(http://www.digitalmal.com/news/read.php?idxno=10052&rsec=MAIN
당시 윤상원은 김대중 조직에서 이해찬과 쌍벽을 이루는 인물이었다.
이해찬이 학생 운동권 중의 김대중 홍위병들을 대표하였었다면 윤상원은 노동계의 간판 스타였다.
광주사태가 시작될 무렵 윤상원은 팡주지역 청년운동의 핵심으로 활발히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재야단체 민족회복국민회의(의장: 김대중, 윤보선. 함석 헌) 전남지부의 실무를 맡아 뛰었으며
민주청년운동협의회 전남지부(윤한봉 김상윤 등 광주지역 민청세대가 주축)에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처럼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조직의 핵심 인물이었던 윤상원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열흘 전에 경찰서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을 때 과연 독단적인 행동을 취하였겠는가?
도대체, 그러면 윤상원은 어느 정도 규모의 시민 무장을 생각하고 있었느냐가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관한 질문의 관건이다.
도대체 그는 그런 무모한 무장 봉기에 승산이 있었다고 생각하였는가?
바로 이 물음에 대한 결정적인 단서를 5.18측이 영웅시하는 박남선씨가 그의 증언록에서 공개한다.
박남선씨는 본디 성품이 아주 정직한 이로 보이며,
따라서, 그는 그가 본 그대로 증언한 것이 분명하다.
광주사태의 미스테리는 폭동 초기부터 시민군이 장갑차 부대를 편성하였다는 사실인데,
대한민국 국군도 창군 이후 장갑차 한 대 운전하는데 몇년 걸렸는데,
어떻게 광주시민군은 첫날부터 8대로 편성된 장갑차 부대를 가질 수 있었는가?
"光州市民은 왜 銃을 들었나"라는 제목의 그의 기고문에서
시민군 대장 박남선씨는 시민군이 장갑차 부대를 편성하여
도청을 공격하는 과정을 자세히 진술하는바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06.html ),
여러 탈북자들과 위의 동영상에서 인용된 북한군 장교 증언은
그 장갑차 운전병들은 북한군이었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따라서,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는 광주사태 때
누가 장갑차를 몰고 도청을 공격하였느냐의 질문에 귀결된다.
당시, 시위대 장갑차가 도청을 공격하는 장면은 1996년 5.18 검찰의 보고서에도 진술되어 있다: <검찰측 자료:(5월21일) 13시경 공수부대가 철수하지 않는 데 항의하며
시위대가 화염병을 투척하여 계엄군 장갑차에 불이 붙는 순간
시위대의 장갑차 1대가 갑자기 공수부대쪽으로 돌진했다.
공수부대 저지선이 무너지면서 공수부대원들은
장갑차를 피해 좌우로 갈라져 부근 전남도청, 상무관, 수협 도지부 건물 등으로 산개하였다.
미처 피하지 못한 공수부대원 2명이 장갑차에 깔려 1명이 사망했다>
<월간조선 88년 7월호 「공수부대의 광주사태」:당시
현장에 있던 11공수여단 소속 통신병 경기만씨 증언에 의하면
시위대 장갑차 돌진으로 사망한 대원은 11공수여단 소속 권용문 상병이라고 한다.
권상병은 머리가 장갑차 바퀴에 눌려 짓이겨진 채 즉사했고, 다른 사병은 가볍게 다쳐 곧 일어나 달아났다>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한 또 하나의 질문은
난동자들이 도청을 점령한 5월 22일에
누가 광주시 전체를 한순간에 쑥대밭으로 만들 만한 폭파 장치를 도청에 했느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용감한 대한민국 군인들이 자기 생명을 바치면서 폭탄 뇌관을 제거하지 않았더라면
언제 광주시가 대한민국 지도에서 영영 사라질지 모를 뻔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과연 광주시민에게 그런 폭탄물을 설치할 능력이 있었겠는가?
바로 그 사건에 대하여 1996년 10월 10일자 광주일보는
http://altair.chonnam.ac.kr/%7Ecnu518/data/news/sagun/b/kwangju_961010.htm에서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고 있지만 과거사 조사위가 밝혀내야 할 사건이다.
이렇듯 광주사태와 북한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광주사태 훨씬 이전에 김대중이 최규하 대통령을 무력으로 하야시키고
자기가 대통령이 되려 하였다는 그의 가신 이기동씨의 증언과 더불어
윤상원이 김대중 대통령 만들기 핵심 인물로 광주사태 열흘 전에
경찰서 무기 탈취조를 조직하였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증언한 박노해씨가
바로 5.18 전야제 성희롱 사건의 주역이었다는 임수경씨의 증언이
이렇듯 우리에게 광주사태가 어떤 인물들에 의하여 주동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요즘 최연희 의원의 취중 실수에 대하여 세상이 시끌시끌하다.
그런데, 만약 최의원의 취중 실수는
일차적으로 가까운 곳을 잘 보지 못하는 노안의 시력과 관계된 것이었다면,
임수경씨가 굶어가며 다섯시간씩 서서 전야제 사회를 보던 그 시간에
아가씨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던 386의원들의 성희롱 역시 취중실수였는가?
아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단체로 성희롱을 하였으며, 바깥에 알리지 않았을 뿐이다.
386의원들의 눈도 노안이었는가? 모두 취중 실수하였는가?
이런 질문을 품으며 임수경의 편지"386의원들의 단란주점추태" 전문을 읽어 보기로 하자.
임수경의 편지(386의원들의 단란주점추태)
문을 열자 송영길 선배가 아가씨와 어깨를 붙잡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더군요. 박노해 시인은 아가씨와 부르스를 추고 있었고 김민석 선배는 양쪽에 아가씨를 앉혀두고 웃고 이야기 하느라 제가 들어선 것도 모르는 것 같았습니다.
마이크를 잡고있던 송영길 선배님은 저를 보고 같이 노래를 부르자는 듯이 손짓을 하셨고 얼핏보기에 정범구 박사를 포함하여 김성호, 장성민, 이종걸, 김태홍, 이상수 의원 등이 있더군요.
저는 아가씨들이 있건 말건 선배들에게 인사나 하고 가려고 다가서는 순간 누군가 제 목덜미를 뒤에서 잡아끌며 욕을 하더군요.
야 이-년-아, 니가 여기 왜 들어와, 나가...
믿고싶진 않지만 이 말을 한 사람은 우상호씨였습니다.
술집 아가씨들은 놀라서 모두 저를 쳐다보았고, 저는 매우 당황했습니다. 우상호는 -미안합니다. 저는 이 사람에게 더이상 존칭을 붙여주고 싶지 않습니다.- 다시금 말했습니다.
이-놈의 기-집-애, 니가 뭔데 이 자리에 낄려고 그래? 미-친-년...
저는 일단 방을 나와 저와 함께 온 전야제팀이 앉아있는 방으로 갔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참외를 하나 집어들었는데 우상호가 들어와 앉더군요.
그는 다시 말했습니다.
아 그 기-집-애, 이-상-한 년-이네. 아니 지가 뭔데 거길 들어와, 웃기는 기-집-애 같으니라고...
한두번도 아니고 저는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참외를 테이블에 던지며 저도 욕을 한마디 했지요.
이런 씨-*, 어따대고 이-년 저-년이야. 나두 나이가 30이 넘었고 애기엄만데 어디서 욕을 해...라고요.
여러분, 정말 죄송합니다. 시정 잡배들의 오고가는 대화도 아니고 참 부끄러운 마음 금할 길이 없습니다. 어쨌든 계속 하겠습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사과를 하라고 했지만 그는 끝까지 사과를 하지 않았습니다. 술이 꽤 취해있긴 하더군요. 자리에 앉은 사람들은 우상호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의 불만은 이것이더군요.
서울에 온지 3주가 지났는데 제가 연락을 안 했다는 것, 5.18 전야제 사회를 본다는 소리를 듣고 임수경 이름 또 팔아먹는구나 하고 생각했답니다.
발언중간 중간 이-놈의 기-집-애, 저-놈의 기-집-애, 이-년, 저-년 소리는 계속 되었구요. 그러더니 마무리를 하면서 자리에 있던 광주의 김태홍 당선자에게 선배님, 죄송합니다...하더라구요.
저는 그랬죠. 국회의원이라고 선배님이고 죄송하냐고... 나는 내가 존경하던 선배에게는 술집 아가씨들 앞에서 이-년 저-년 소리 듣고 끌려나와야 하고, 같이 고생하던 후배에게는 사과 한마디 없이 국회의원한테만 미안하냐고...우리같은 사람들은 아가씨들 나오는 술집에서 양주마실 팔자가 안되니 나가서 소주나 먹자고... 그리고 나왔습니다.
모두 일어서는 순간 우상호가 테이불에 있던 양주의 병을 새로 따더군요. 그러거나 말거나 나왔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서 술을 한잔도 마시지 않았지만 계산대로 갔습니다. 이미 정범구 박사가 계산을 했다고 하더군요.
저는 명세서를 조목조목 써달라고 했습니다. 양주 두병에 음료수, 안주가 서너가지로 22만 7천원이 나왔고, .양주 한병과 안주 한접시는 서비스였답니다.
저는 술집 아저씨한테 물었죠.
난 이집에 처음으로 오는데 이집은 처음 오는 사람한테도 서비스를 주느냐, 우리는 서비스 받을 일이 없으니 모두 계산서에 넣으라고 말이죠.
그 아저씨는 그냥 서비스로 드시라고 했고, 저는 계산을 하겠다고 부득불우겼습니다. 그 아저씨는 좀 황당했겠지요. 서비스 주고 욕먹고...
아무튼 계산은 하되 다는 못 내겠다, 양주 한병은 우상호가 땄으니 저 사람에게 꼭 받아라,
이미 계산한 돈은 정박사에게 꼭 돌려줘라 당부를 한 후 20만원을 저와 함께 전야제 사회를 본 송선태 선배님의 카드로 계산을 했습니다.
계산대에서 실랑이를 하며 저는 그랬습니다. 낮에는 검은 넥타이 매고 망월동 참배하러 온 사람들이 밤에는 아가씨끼고 술 먹고 잘들 한다 등등... 술마시고 노래부르며 떠들던 그 방에서는 아주 조용했습니다. 아마도 제가 한 말을 다 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만 아무 반응이 없더군요.
가라오케 술집을 나서며 송선태 선배님에게 술값은 나중에라도 꼭 갚겠노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그때 저는 지갑을 갖고있지 않았습니다.
송선배님은 물론 괜찮다고 하셨지만 저는 정말 갚을 생각입니다. 그때 우상호가따라오더군요.
수경아, 이-놈의 기-집-애야, 너 거기 안 설래?? 아, 이 구제불능의 인간을 어쩌면 좋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저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우상호, 당신하고는 이제부터 끝이야, 우리서로 아는 척 하지 맙시다. 나 정말 당신하고 아는 척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저는 돌아섰습니다. 돌아서는데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제 친구들은 다 압니다. 제가 존경하는 선배 세사람을 대라면 그중에는 항상 우상호 형이 있었다는 것을...
저는 단순히 술취한 우상호에게 욕먹은 것을 이야기하고자 이글을 쓰고있지는 않습니다.
386, 사람들은 386이 어쩌구 하며 회의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지만 저는 386이라는 이름에 자부심을 그 386의기반은 바로 5월의 광주입니다.
80년대의 학생운동은 그것으로 부터 시작되었고, 지속되었습니다. 광주를 떠나서는 386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요. 저는 선배들이 아가씨 나오는 술집에서 술을 마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5월의 광주에서는 그래서는 안됩니다. 광주의 라디오방송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을 틀지도 않습니다.
그 커다란 가라오케에 그들이 유일한 취객이었다는 것이 말 해주듯이 광주 사람들은 5.18이 되면 먹고 노는 일을 자제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도 아니고 망월동 참배를 위해 광주에 내려왔다는 사람들이, 386을 내세워 국회의원 선거전에 나와 그것을 기반으로 당선되었다는 사람들이,
낮에는 망월동에서 광주의 영령을 추모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광주의 정신을 밟아버렸습니다.
만약 5.18 유족이 이 사실을 안다면, 386의 순수성과 역사성으로 그들에게 표를 던진 유권자들이, 그들과 거리에서 어깨를 겨누며 민주주의를 외치던 동지들이, 5월 17일 하루종일 아들의 무덤 곁에서 참배객을 맞고 계시던 이한열 열사의 어머님이 이 사실을 아신다면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요.
저는 감히 주문합니다. 386의 이름을 더이상 들먹이지 말던가, 망월동 참배가 아닌 놀러왔다고 하던가, 한때나마 그들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음을 자랑스러워 했던 나 자신이 부끄럽습니다. 더이상 믿음도 희망도 걸 곳이 없음에 앞이 캄캄합니다.
다음날 아침 신문에는 386 당선자가 망월동 묘역을 참배했다는 기사가 신문마다에 났더군요.
술에 취했던 그들은 다음날인 5.18 아침에 대통령이 참석한 기념식에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밤새 광주 영령을 진심으로 추모했다는 듯이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제가 밥도 굶어가며 다섯시간씩 서서 전야제 사회를 보던 그 시간에 내가 존경하던 선배들은 아가씨와 술마시고 춤추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으면서, 오히려 나보고 5.18에 이름을 팔아먹었다고 말한 사실 역시 용서할 수가 없습니다.
다음날 아침 10시경, 제 휴대폰 벨이 울리더군요. 저는 그들 중의 한명일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전화를 한 사람은 아이러니하게도 우상호와의 선거전에서 승리한 이성헌 선배였습니다.
망월동에서 만났는데 반가왔다는, 서울에 올라오면 꼭 한번 만나자는 전화였습니다.
이성헌 선배는 제가 미국에 있는 동안 두차례 만난 것이 전부인데도 우리나라로 귀국하실때, 또 귀국을 해서도 저에게 미국까지 수시로 전화를 하던 분입니다. 전화를끊으며 생각했습니다. 왜 이성헌이 당선되고 우상호는 선거에서 떨어졌는가를...
그후 며칠 동안 저는 그들로부터 단 한통의 전화도, 제3자를 통한 메시지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제 느닷없이 그 자리에 잇었던 김성호 당선자가 전화가 와서 저녁을 함께 먹자고 하더군요. 통화를 하던 중 자연스럽게 그날의 사건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저는 제 의사를 밝혔습니다.
우상호와 아는척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말이죠.
그런데 다음 날인 오늘, 우상호가 전화를 했더군요. 아마 김성호씨가 무슨 말을 했으리라 짐작합니다.
여보세요, 임수경씨 부탁합니다.
전데요.
수경아, 나 상호야.
누구시죠?
나야, 우상호.
저는 우상호라는 사람을 모르는데요...
수경아, 미안하다.
실례했습니다... 저는 모릅니다.
저는 이렇게 전화를 끊었습니다. 전화를 끊으면서 새천년 nhk 는 가라오케를 나설 때 처럼 왜 그렇게 가슴이 아프던지요...
한낮 버?봐ㅇ昰恙【? 땡볕을 받으며 버스를 기다리다가 받은 전화 한 통, 그것은 지금 이 시간까지도 저를 심란하게 만듭니다.
제 어머니는 우상호에게 그러면 안 된다고 하셨고, 저와 친한 선배언니는 아주 잘했다고말했습니다.
저는 잘 한걸까요, 잘못한걸까요...
긴 글을 마칩니다. 결국 개인적인 이야기를 한 셈이 되어버리긴 했는데, 제 개인적인 이야기라기 보다는 모두가 생각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네요.
임수경 올림
임수경 출생 : 1968년 11월 6일 학력 : 한국외국어대 신문방송학과 박사 직업 : 사회기관단체인 약력 : 1989년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 남한대표로 참여 후 3년 5개월 복역 1994년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부대변인 1995년 문익환목사기념사업회 사무국장 2001년 방송위원회 남북방송교류추진위원회 위원
http://cafe.daum.net/issue21
http://blog.paran.com/essaytown
사진 설명: 아직 계엄군에게는 공포탄조차 지급되지 않았던 5월 21일 20만발의 막강한 화력으로 전남도청을 점령한 시민군이 그 다음날 한가한 오후 한때를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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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생각하기도 싫소.
놀랍고 치사하다.
수고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