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2022-11-19)
< 겸상을 한다는 것 >
-文霞 鄭永仁-
우리 집에서 아버지와 겸상해서 먹을 수 있는 식구는 장남인 큰형뿐이었다. 남은 형제들은 두레반상에서 같이 먹었다. 어머니와 누나는 개다리소반에서 같이 먹었다. 조반을 먹을 때는 밥상이 3상이 들어 왔다. 사실 한 상에서 같이 밥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보다 엄청난 일이다. 아무나 겸상하지 않는다. 재수 없는 사람과 누가 겸상해서 밥을 먹겠는가. 적어도 인간적으로 호감이 있을 때 겸상하기 마련이다. 동서양이 공통적으로, 상대방의 됨됨이를 알려면 밥이나 술을 같이 먹어 보라고 한다.
일주일에 두 번 모이는 모임이 있다. 한 테이블에 겸상해서 먹는다. 이렁저렁 이야기하면서. 월요일 모임은 자기가 먹고 마신 만큼 각자 계산을 한다. 이즘 자리 잡은 더치 페이다. 수요일 모임은 돌려 가면서 낸다. 평균적으로 따지고 보면 도낀개낀이다. 우선 일주일에 한 두 번 겸상해서 밥 한 술, 술 한 잔 하는 것이 중요하다. 말 반찬, 말 안주도 곁들인다. 그런 관계라는 뜻이다.
우리는 겸상을 통해서 대화, 유대, 우정 등을 나눌 수 있다. 독상을 하면 배는 부를지언정 삶은 고독하게 된다. 사극에서 보면 임금의 수라상은 항상 독상을 받는 것을 보면 외로움이 짙게 밴 그림자를 보게 된다. 하기야 군주는 외로운 존재이기도 하다.
결국 겸상은 듣고 말하는 것을 나누는 일이다. 밥 먹는 일이 나누어 먹듯이 대화도 나누는 일이다. 대화를 하다보면 편견에 가득 찬 친구, 눈치코지 없는 사람, 배려 없는 인간, 자기 의견을 한 치도도 바꾸려하지 않는 친구, 자기 속은 전혀 터 놓으려하지 않은 크렘린 같은 친구들과는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겸상을 하는 일은 주로 밥 먹는 일이지만 외부의 사물이나 사상을 내부로 받아드리는 엄청난 일이기도 하다. 따라서 겸상을 하려면 최소한도 밥상머리 예절은 갖추어야 한다. 먹을 만한 것은 자기만 독식하는 친구는 겸상의 기피 인물이 되기도 한다.
겸상(兼床)은 서로 밥 먹는 일이다. 이건 독상(獨床)도 아니고 혼밥이나 혼술도 어니다. 비대면의 코로나 시대에 점차 겸상은 줄고 독상, 혼밥, 혼술 등이 늘어만 가니 독단에 빠지는 일들이 늘어만 간다.
겸상(兼床)은 겸손(謙遜)과 일맥상통한다. 겸손하지 않으면 겸상의 좋은 의미가 바래지기 때문이다. 이규보가 말한 것처럼 여지어도(與之語道)처럼 함께 도를 말하는 사람이다. 겸상 또한 함께, 같이 밥을 먹고 대화하는 것이리라.
세월이 변하면서 아버지는 독상이나 겸상, 우리들은 두레반상에서 평등하게 대화하면서 먹었다. 이젠 맨날 집사람과 겸상해서 먹으니 식상(食傷)할 때도 있다. 그나저나 겸상할 상대가 있으니 어찌 기쁘지 아니하랴!
오늘은 친구들과 겸상하는 날이다. 소주 한 병 값 내가 내고 밭두렁 논두렁할 것이다. 엊그제 등진 친구 이야기 등 늙어가는 이야기, 아픈 이야기 등이 나올 것이다. 김장철이라 김장 이야기도 나올 것이다. 올부터 김장을 하지 않고 사 먹겠다는 친구도 두어 집 된다. 엊그제 갑자기 세상을 떠난 친구에 대한 속내를 털어 놓는다. 그 친구는 며칠 앓고서 갔다. 죽으려면 그렇게 죽어야하는데 하는 속마음을 떨어 놓는다. 오늘 신문에서 본 부고 기사에 102세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숫자상으로 102세지만 어떻게 102까지 왔을까? 다들 늙어서인지 신고려장(新高麗葬)이라는 요양원 이야기도 등장한다.
김장을 담그며, 절인 속고갱이 뜯어 김장배추 소에다 잘 삶은 수육 한 점 막걸리 한 잔! 거기에 구수한 된장 배춧국, 그런 두런두런 겸상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아직도 배추를 절여서 김장을 담근다는 회장님 댁은 존경심까지 든다. 올해부터 사 먹기로 한 우리 집에 비해……. 거기다가 조선배차 꼬랭이를 넣고 끓인 배춧국은 일품(逸品)이어라.
그나저나 오늘은 겸상(兼床)할 것인가, 독상(獨床)할 것인가 그것이 문제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