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여자’라는 존재와 삶의 의미에 대한 해답이 있다. 이 책은 시집 「꿈을 꾸었다」 출간 이후 독자의 오랜 기대에 대한 임시욱 작가의 성실한 응답이자 상실과 회복에 관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미사여구를 배제하고 언어의 낭비 없이 담백하게 써내려간, 그리고 쉽게 읽히면서도 섬세하고 중량감 있는 문장들로 독자들에게 ‘여자’라는 삶의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다. 우리에겐 그런 날이 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난 사람인 것 같은 날 이제 내게는 살아갈 희망도, 살아야 할 이유도 없는 것만 같은 때가! 그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해본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렇게 밑바닥에 다다르고 나서야 비로소 제대로 보이는 것들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된다. 즉, 내 곁에 누가 머물고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 장편소설 「여자라서」 본문 중에서
친척이 별로 없다는 건 조금 커서 알게 됐다. 아빠의 형제들이 없으니 사촌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엄마는 할아버지 얼굴도 모른다며 끝을 흐려갔다. 덧붙이지도 않았다. 찾아오는 손님이 없어 물어보고 알게 됐지만, 그런 것도 서운했다. 못 보던 이들이 동네에 들어오면 어디로 가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과자를 들고 다니는 아이들이 부러웠다. 표현하지 못한 채 백 원이나 오십 원 받는 거로 만족했다. 많다 적다 따진다는 건 어림없는 짓, 받았다는 그 자체만을 즐겨야 했다. 아껴 쓰라는 당부는 늘 머릿속에 담아놨다. 여자라 세배는 다니지 않았다. 욕심쟁이만이 아빠를 따라 성묘 다니고 이웃에게 다녀오고는 했다. 받은 걸 꺼내놓고 자랑했지만 달라 해도 주지 않았다. 저리 가라며 숨겨놓기만 했다. 부러워하며 남자로 태어나지 못한 게 서운해 따지기도 했다. 엄마는 물어보는 것마다 대답을 주기는 했지만, 길지는 않았다.
“엄마, 난 왜 여자야?”
“여자라서….”
꼬치꼬치 캐묻지도 못했다. 쓸데없이 물어본다는 핀잔을 당했다. 나중에는 여자가 싫다고,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고만 했다. 속상해도 이거 때문에 울지는 않았다. 동네 애들과 비교하며 너희 둘은 이쁘게 태어나서 고마운 줄 알아라, 다독임을 받으며 위안으로 삼기도 했다. 아빠의 쉬는 시간은 많지 않았다. 일을 끝내면 다른 집에서 찾으러 왔다. 간혹 그날은 맞췄다며 다른 날로 미루기도 했다. 이렇게 맨날 바쁘니 다정한 관심을 주지 못하는구나, 어려도 이해하려는 했지만, 오빠는 하는 것도, 받는 것도 달랐다.
‘대를 이을 아들이다.’
엄마가 들려줬다. 이래서 편들어주는 걸 알게 됐다. 한자의 뜻풀이는 엄마에게서 많이 받았다. 사당 같은 곳의 벽이나 현판에 새겨진 삐뚤삐뚤한 글씨도, 아빠가 해석하지 못한 것들도 주저 없이 풀어냈다. 사서삼경이 뭔지도 그 내용도 설명해줬다. 어디서 배웠냐 물어보면 어렸을 때 할아버지에게서 배운 거라기만 했지, 무슨 말도 덧붙이지는 않았다. 한학을 공부한 외할아버지는 훈장님으로 지냈다. 동네 젊은이들을 모아놓고 천자문도 명심보감도 논어도 가르쳤다. 농사일이 없으면 너나없이 서당을 찾았다. 주로 겨울에 이뤄졌지만, 일주일 내내 쉬지 않았다. 별도로 보상은 하지 않았다. 차별하지도 않았다. 어두워질 때까지, 오후 내내 글 읽는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
이 책은 책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한 여자의 일생을 통해 단지 여자라서 겪을 수밖에 없었던 처량하고 아픈 현실을 그린 장편소설이다. 주인공 박경애는 어렸을 적부터 이쁘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뭇남성들에게 관심을 많이 받아왔다. 이로 인해 겪게 되는 상처와 고통으로 그녀의 삶은 여의치 않았다. 영원할 것만 같던 사랑도 언젠가는 빛이 바래고, 그토록 소중하던 꿈도 정신없이 살다 보면 잊게 마련이다. 삶의 고단하고 퍽퍽한 순간순간마다 힘이 되어주는 건 누군가의 따뜻한 말 한마디와 진심 어린 위로일 것이다. 날로 메마르고 거칠어가는 이 시대에 여자를 배려하고, 따뜻이 감싸주고, 대가를 바라지 아니하고, 사랑을 주는 사람들을 보면 그 마음씨가 아름답다고 생각하곤 한다. 또한 자기가 받은 사랑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마음씨도 참으로 아름답다. 우리는 어떻게 서로에게 좋은 사람이 되어 살 수 있을까?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며 다투는 현실이지만, 결국 서로 돕고 기대어 살 때 희망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임시욱 저 / 보민출판사 펴냄 / 304쪽 / 신국판형(152*225mm) / 값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