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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 라인홀드 니버 (문예출판사, 2006) (1932년 출간)
9장 정치에서 도덕적 가치의 보존
- 탐욕, 권력 의지, 이기적 욕구 같은 자연적인 충동은 이성에 의해 결코 완벽하게 제어되거나 승화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정치철학은 필연적으로 자연의 충동에 맞설 수 있는 또 다른 자연의 힘을 이용함으로써 자연을 제어하려고 시도하는 정치적 전략들을 보완해야 한다.
- 지나치게 일관성 있는 정치적 현실주의는 사회를 영속적인 전쟁 상태에 내맡기는 것처럼 보인다. 사회적 결속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강제력의 사용이 불가피하고, 사회적 불의를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더 강한 강제력의 사용이 필연적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끝없는 사회적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 아닌가.
- 만일 사회의 합리적 요인과 도덕적 요인의 힘에 대한 정치적 현실주의의 불신이 가중되면, 그 사회는 기껏해야 권력의 불안정한 균형 정도를 지상의 목표로 삼는 수준에 머물고 말 것이다. 지난 30년 동안의 세계사는 갈등을 갈등으로 해결하려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조급한 노력이 가져다준 비극적인 결과를 그대로 상징해주는 듯하다. 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기 전의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라 힘의 균형에 의해 불안하게 유지되어온 휴전 상태였음이 입증되었다.
- 정치적 현실주의가 초래한 이 같은 불행한 결과들은 도덕가들의 충고를 정당화해주는 듯싶다. 그들은 이성과 양심을 더욱 발전시킴으로써 평화를 이룩할 수 있다고 믿는다. 진정한 평화는 오로지 이익과 이익, 권리와 권리를 이성적이고 합리적으로 조정하고 타협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고 한다. 이 같은 조정과 타협은 이기심에 대한 이성적인 견제 및 다른 사람이 이익에 대한 이성적인 양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확신하고 있다.
- 이들은 사회 문제를 영원히 해결하는 방법은 사회적 지성과 도덕적 선의지를 확충하는 길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도덕가도 정치적 현실주의자 못잖게 위험스러운 안내자이다. 도덕가들은 종종 현대의 모든 사회적 평화에 내재되어 있는 불의와 강제력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
- 도덕가들은 강제력의 진정한 성격을 충분히 깨닫고 있지 못해서, 은밀하고 교묘한 형태의 강제력에 의해 강압적으로 유지되는 평화를 파괴하기 위해 폭력적 방법을 사용하는 진보적인 세력에 대해, 정당화하기 힘든 도덕적 부담을 지운다. 또한 도덕가들은 평화를 깨려는 사람들의 욕망에 대해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평화의 배후에 은폐되어 있는 불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회적 불의는 역사와 전통이라는 이름하게 정당화되는 불평등과 한 몸이기 때문에 쉽사리 인식되지 않는다.
- 협력과 상호성을 무비판적으로 지나치게 찬양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전통적으로 내려온 불의를 인정하게 될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형태는 아니더라도 은밀한 형태의 강제력에 대해서는 무조건 수용하는 태도를 취하게 된다.
- 올바른 정치적 도덕성이라면 도덕가들과 정치적 현실주의자들의 통찰들을 모두 정당하게 다루어야 한다. 이렇게 되면 인간사회가 사회적 협력의 범위를 아무리 확대하더라도, 사회적 분쟁은 불가피하다는 너무나도 엄연한 사실을 정확히 인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올바른 정치적 도덕성은 인간사회에서 강제력을 완전히 없애기보다는 최소화함으로써, 인간사회에 있는 합리적 도덕적 요소들에 가장 잘 부합될 수 있는 유형의 강제력을 사용하도록 권고함으로써, 갈등의 악순환에 빠져있는 사회를 구원하고자 할 것이다.
- 아마도 합리적인 사회라면 강제력과 갈등의 제거보다는 강제력이 사용되는 목적의 정당성 여부에 더 큰 강조점을 둘 것이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우리에게 계속 강요하고 있는 결론은, 평등한 정의란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장 합리적인 궁극 목적이라는 사실이다. 만일 이 결론이 올바르다고 인정되면, 더 큰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사회적 분쟁은 특권의 영구화를 목적으로 하는 제반 노력을 거부해도 되는 도덕적 정당성을 갖는다.
- 따라서 국가나 민족 혹은 계급의 해방을 위한 전쟁은 제국주의적 지배나 계급적 지배의 영구화를 위해 사용되는 권력과는 다른 도덕적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대영제국 통치하에 있는 인도인, 미국 사회의 흑인, 모든 산업국가의 공업노동자들과 같은 일체의 피억압자들은 압제자들이 폭력으로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해 갖는 정당성보다는 더 고차원적인 도덕적 권리를 갖는다.
- 폭력적인 분쟁이 자유와 평등을 획득하는 최선의 방법은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평등이 평화보다 더 높은 사회적 목표라는 사실이다. 완전한 평등은 불가능하겠지만, 그것은 정의로운 평화의 이상에 대한 하나의 상징이다. 이 이상은 현대의 평화적인 상황 속에 얼어붙은 권력과 특권의 불균형을 근본적으로 제거해야 한다는 요구를 나타낸 것이다.
- 한 사회집단이 기만에 의해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는 곳에서, 자신의 권리를 되찾기 위한 주장에 특별한 도덕성을 부여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이는 사실상 일정한 평등을 이룩한 인간사회의 한 부분에 의해 불변적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행해지는 것이다. 억압받는 민족들, 터키에 항거하는 아르메니아인, 영국에 저항하는 인도인, 미국에 항거하는 필리핀인, 에스파냐에 저항하는 쿠바인, 그리고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인 등은 언제나 중립적인 사회들로부터 특별한 공감과 도덕적 인정을 받았다.
- 모든 사회에 사회 문제를 흐리게 하는 편파성과 편견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지성은 일반적으로 점차 증대해가면서 사회적 특권 세력의 요구를 억제하고 비특권 계층을 지원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이런 의미에서 이성 자체는 더 평등한 권력의 균형을 이룩하는 경향이 있다.
- 모든 사회적 힘은 부분적으로 경제력이나 군사력과 같은 물리적인 강제 수단을 현실적으로 소유하는 데서 생겨난다. 이러한 사회적 힘은 대개 논리적으로 설명되지도, 설명할 수도 없는 복종과 존경, 충성심을 확보하는 능력에 따라 좌우된다. 이성이 사회적 힘의 이 같은 원천들을 파괴하는 경향을 갖는 한, 이성은 강자의 힘을 약화시키고 약자의 힘을 강화하는데 기여한다.
- 사회 내에서 이성의 힘은 완전한 힘의 평등을 가져올 만큼 충분히 강력하지 못하다. 다만 목적을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일 뿐이다. 이성적인 사람들이 국제 전쟁의 무익성을 세차게 비난하고 억압된 민족과 계급의 투쟁을 정당하게 보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은 왜 필연적으로 이성이 사회 정책의 궁극 목적들을 구별해야 하는지, 그리고 평등한 사회적 정의를 가장 합리적인 목적으로 인정하는데 이성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를 명백하게 보여준다.
- 만일 이성이 강제력을 도덕적 이상의 실현도구로 삼는다면, 이성은 이를 최고의 목적을 위한 봉사에 사용할 뿐만 아니라 사회의 합리적, 도덕적 세력에 가장 잘 어울리고 위험성이 가장 적은 형태의 강제력을 선택할 것이다. 도덕적 이성은 어떻게 강제력의 희생이 되지 않고서 강제력과 동맹을 맺을 것인가를 배워야 한다.
- 강제력의 사용에 대해 가장 합리적인 견제를 하기 위해서는 이기적인 목적에서 사용하려는 유혹을 견딜 만큼 공정한 재판소의 관할 아래 강제력을 두는 것이다. 그래서 사회는 강제력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주장하지만, 개인이 이런 권리를 사용하는 데 대해서는 단호히 반대한다.
- 사회적 정치적 강제력의 공정한 사용과 불공정한 사용을 구별하는 것은 물론 정당한 일이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것은 이론이 구상하는 것과 같은 완벽한 공정성을 기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정부는 결코 완전한 공동체 전체의 통제하에 있을 수 없다. 경제 재벌이건 정치 고위 관리건 간에 정부의 각급 기관들을 자기들의 특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계급들은 언제나 존재한다. 이는 국가내에서 뿐만 아니라 국간들 간의 공동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전자에서는 특권 계급이 정의의 지배권을 독점하고, 후자에서는 강대국이 그렇게 한다.
- 정치 공동체의 책임 있는 지도자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제력 사용이 불가피하다. 책임 있는 사람이라면 간디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도구를 정신적 이상의 통제 아래 두려고 온갖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 지도자는 폭력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때로는 정치적 효과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 도덕적 순수성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
- 악한 사회 제도와 이를 유지하고 있는 개인의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책임을 완전히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공정한 도덕 교사라면 사회적 범죄에 대한 개인적 책임의 원리를 주장하지 않을 수 없을 것. 하지만 이에 반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도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현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가 반대자에게 가질 수 있는 회의의 장점은 증오심을 약화시키고, 현재 논란의 초점이 되고 있는 문제들을 평가에서 합리적 객관성을 유지할 수 있는 데 있다.
- 사회적 분쟁에서 분노를 최소한도로 축소시키려 한다고 해서, 분노가 무의미하다거나 완전히 악하다는 뜻은 아니다. 로스 교수가 간파했듯이, 분노란 불의에 대한 감정의 이기적 측면이다. 따라서 분노가 전혀 없는 상태란 사회적 지성이나 도덕적 활력의 부재를 의미한다. 자신의 인종에 대해 가해진 불의에 분노하는 흑인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불의의 고통을 감수하는 흑인에 비해 흑인의 해방에 훨씬 더 큰 기여를 하는 것이다.
- 하지만 분노에서 이기적 요소가 사라질수록 그 분노는 정의를 달성하는 더욱 순수한 매개가 될 수 있다. 분노에 담긴 이기적 요소는 객관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분쟁에서 반대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 분노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으며 또 다른 자신의 이기심만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 비폭력의 정신과 방법은 기득권의 그럴듯해 보이는 도덕적 기만을 여지없이 파괴해버린다. 만일 비폭력 운동이 현실적으로 기존 사회 질서를 위협할 만큼 위태롭게 한다면, 반역과 폭력이라는 비난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비폭력은 공동체 내의 중립적인 집단들을 그렇게 쉽게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을 것이다.
- 비폭력적 강제력과 저항은 사회생활에서의 도덕적 합리적 요소들과 조화로운 관계를 수립할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제공해주는 강제력이다. 이런 비폭력적 방법은 저항하는 과정에서도 상충하는 이해관계의 도덕적 합리적 조정 과정을 완전히 파괴하지 않는다.
- 비폭력적 방법이 갖는 장점은 대단하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사회적 환경을 고려한 상태에서 실용적으로 고찰되어야 한다. 간디조차도 실용적이고 편의주의적인 요소들이 중요성을 거듭 확인하면서, 비폭력적 방법의 장점들은 특히 지배 집단보다는 저항집단의 요구와 한계에 딱 들어맞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이 함축하는 의미는, 만일 영속적인 전쟁의 위험을 제거할 수 있을 만큼 빨리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있다면 폭력도 도덕적 선의지의 수단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곧 비폭력은 피억압 집단의 특수한 전략적 수단임을 뜻한다.
10장 개인의 도덕과 사회의 도덕 사이의 갈등
- 인간사회의 문제들을 현실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해보면, 사회의 요구와 양심의 요청 사이에는 화합되기 힘든 지속적인 모순과 갈등이 발견된다. 정치와 윤리의 갈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모순과 갈등은 도덕 생활의 이중적 성격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것인데, 그 하나는 개인의 내면적 생활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생활의 요구이다.
- 사회를 중심으로 보면, 최고 도덕적 이상은 정의이다. 그리고 개인을 중심에 놓고 보면, 최고의 도덕적 이상은 이타성이다. 사회는 어쩔 수 없이 이기심, 반항, 강제력, 원한 등과 같은 방법을 사용하게 될지라도 종국적으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 이 두 도덕적 입장은 서로 배타적이지도 않으며, 양자 사이의 모순도 절대적이지 않다. 그렇다고 쉽게 조화되지도 않는다.
- 개인의 도덕적 상상력이 동료 인간의 요구와 이익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진정한 정의는 달성될 수 없다. 또한 정의 달성을 위한 비합리적 수단이 도덕적 선의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면, 사회에 엄청난 위험을 가할 수 있다.
- 정치인의 현실 감각은 도덕적 선지자의 어리석음의 도움을 빌리지 않는다면 정말로 어리석게 되고 말 것이다. 역으로 도덕적 선지자의 이상주의는 인간의 현실적인 집단생활과 교류하지 않으면, 정치적으로 아무런 가치도 없을뿐더러 도덕적 혼란만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 사회는 이타심보다는 정의를 최고의 도덕적 이상으로 삼는다. 사회의 목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회균등을 부여하는 것이다. 만일 이런 평등과 정의가 이기심의 상호투쟁에 의해 달성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이웃의 권익을 침해하는 사람들의 이기심을 억제함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라면 사회는 이기심에 대한 제재를 승인할 수밖에 없다.
- 사회적 차원을 넘어서 있는 가장 순수한 도덕적 이상이 갖는 사회적 타당성은 사회적 관계가 복잡하고 간접적이 되어감에 따라 점차 약화된다. 어떤 집단이 다른 집단에게 강력한 구원의 힘을 줄 만큼 일관되게 이기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서로 경쟁하고 있는 집단들이 상대방의 도덕적 역량을 높게 평가하여 자신의 현실적 이익을 포기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 개인은 대가를 바라건 받지 않건 간에 자신의 이익을 희생할 수 있다. 하지만 집단의 이해관계를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버리고 다른 집단에게 이익을 주는 행위를 어떻게 정당화할 수 있겠는가? 순수한 무욕의 도덕을 집단적 관계에서 실현시켜 보려던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음이 판명되었다.(남북전쟁 미국흑인, 이탈리아 파시스트에 대한 사회주의자들의 평화원칙, 톨스토이의 사랑이라는 종교적 이상으로서의 무저항의 무기력함 등)
- 개인의 도덕과 집단의 도덕을 구별 짓는 일은 복잡한 문제이다. 인간 집단은 도덕적으로 무디기 때문에 순수한 무욕의 도덕을 집단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 어떤 사회집단도 순수한 사랑이란 것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인간사회의 집단적 이기심은 불가피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런 이기심이 비정상적으로 확장될 경우에는 이에 맞서는 다른 집단들의 이기심에 의해서만 견제될 수 있다.
- 도덕적 요인들은 결과적으로 발생되는 사회적 경쟁과 갈등을 어느 정도 완화할 수는 있어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한다. 도덕적 선의지를 원리로 삼는 사람들은 집단의 특수 이익을 모든 인간의 총체적이고 궁극적인 조화라는 이상과 연결시키려 한다. 그런데 이런 노력은 특권 계급의 이기심을 제한하고 비특권 계급의 이익을 옹호할 수는 있으나, 어느 한 집단을 설득해서 그 집단의 이익이 전체적인 사회적 이상에 복속되도록 할 수는 없다.
- 한 사회집단에서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은 물론 처음에는 아무런 사심 없이 자기 집단의 이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겠다는 각오로 출발하지만, 집단 내에서 특권적 집단으로 전환함으로써 얻게 될 엄청난 개인적 보상으로 인해 유혹을 받게 될 가능성이 항상 생겨난다. 개인의 이익이 항상 그가 속한 집단의 이익과 합치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 서로 다른 공동체 간의 사회적 충돌이 아무리 중대하다 할지라도, 개인에 대한 도덕적 훈련의 필요성이 감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훈련을 통해 선의지의 감정과 상호 이해하는 태도가 개발되지 않는다면, 그 어떤 공동체도 통일과 조화를 달성할 수는 없다. 사회적 투쟁의 불가피성과 필연성을 그대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개인의 맹목적인 이기주의를 견제하고 서로 간의 이해와 협력을 넓혀야 하는 의무가 사라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지금 인격적 도덕적 이상주의가 위선이라는 혐의를 받고, 때로는 비난을 받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 시대는 정직성이 냉소주의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그런 시대이다. 얼마나 비극적인가! 왜냐하면 개인적 양심이 자연 세계와 인간의 정신을 자연에 묶어두는 집단적 관계를 넘어설 때 갖게 되는 벅찬 감정은 결코 사치가 아니라 인간 영혼의 필연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 하지만 우리의 비극에는 아름다움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환상적인 요인들을 어느 정도 제거했다. 이제 우리는 사회적 불의를 대가로 지불하고서 개인 생활의 만족을 추구하는 것이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다. 우리는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천국에 이르는 사다리를 세울 수 없으며, 인간사의 방탕과 부패를 그대로 방치해 둘 수 없다.
- 이런 일을 하는데 가장 적당한 사람들은 낡은 환상들을 새로운 환상으로 바꾼 이들일 것이다. 이 환상들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의 집단생활이 완전히 정의롭게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는 매우 가치 있는 환상이다. 왜냐하면 이런 환상이 사람들의 영혼을 부추겨 숭고한 광기를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정의란 결코 달성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광기를 갖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사악한 권력 또는 ‘높은 지위에 있는 정신적 사악’에 대항해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 환상이 위험한 것은 맹렬한 환상주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철저하게 이성의 통제하에 두어야 한다. 우리는 다만 환상이 그 긍정적인 역할을 하기에 앞서 이성이 그것을 파괴해버리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