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3대 명강의라고 불리는 대학가 인기강좌가 있다, 고 한다. (필자는 직접 수강한 적이 없어 인용하겠다.) 우리나라에도 번역 출간되어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거니와 EBS를 통해 영상강좌로도 이미 유명한 마이클 샌델 하버드대 교수의 ‘정의’가 그 중 하나다. 두 번째는 역시 하버드대 교수로 정신의학자인 조지 베일런트가 강의하는 ‘행복’이다. 이 분의 책도 국내에 많이 출간되어 ‘행복의 완성’, ‘행복의 지도’, ‘행복의 비밀’ 등 행복 시리즈가 유행이다. 사회적으로 ‘정의’를 바라고, 개인적으로 ‘행복’을 바라는 것은 동서고금 공히 공통적인 인간의 욕구이니 이해가 가는 이야기다.
퀴즈. 그렇다면 3대 명강의 중 남은 하나는 무엇에 관한 것일까? 미국 명문대생이나 우리나라 대학생들이나 혹은 대한민국 국민들이나 지구촌을 살아가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들이나 결국 인간의 관심사는 대체로 비슷하지 않겠는가? 자유? 평화? 평등? 부? 건강? 성?
아이러니하게도 셸리 케이건 교수가 강의하는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 명강의인 나머지 하나는 바로 ‘죽음’이다. 국내 서점가에도 이미 그의 강의록이 ‘죽음이란 무엇인가’로 출간되어 있다. 2012년 겨울 국내에 출간된 이 책은 조용한 스테디셀러로 일 년도 안 되어 이미 21쇄를 넘기고 있다. 내용은 구입해서 읽으시고 제목을 넘기면 프란츠 카프카의 말 하나가 인용되어 있음을 알려드린다. “삶이 소중한 이유는 언젠가 끝나기 때문이다.”
최근, 그러니까 올 12월 들어와서 우리는 매체를 통해 장중한, 슬픈, 무거운, 심란한, 충격적인, 또는 아름다운 죽음의 행진을 목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하여 매우 선정적이고 잔혹한 처형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도를 넘어선 디테일한 죽음의 방법론까지 포함하여 들어야-들어줘야- 했다.
만델라와 김국태, 피터 오툴의 죽음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
남아공 넬슨 만델라 대통령, 북한 김국태 노동당 검열위원장, 영화배우 피터 오툴ⓒ자료사진
태어난 연대기로 이들을 나열해 보겠다.
넬슨 만델라, 1918년생,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그의 생애와 업적을 길게 나열하지 않겠다.
김국태, 1924년생, 북한 정치인,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이 사람의 죽음이 뉴스에서 화제로 떠오른 것은 북한 김책공대로 그 이름이 유명한, 그쪽에서는 나름 영웅 시 되는 김책의 아들이라는 점인가 보다.
피터 오툴, 1932년생, 아일랜드인, 영화배우, ‘아라비아의 로렌스’, ‘맨 오브 라만차’ 등 주연
올 겨울 이들이 세상을 떠난 순서로 다시 정리하면 12월 5일 넬슨 만델라 서거, 향년 95세, 12월 15일 장례식 거행. 12월 13일 김국태 사망, 향년 89세, 12월 16일 장례식. 12월 15일 피터 오툴 타계, 향년 81세, 장례식 관련 보도 및 기사 없음, 이다.
필자가 비슷한 시기에 세상을 떠난 이들을 언급하고 나열하는 것은, 각각 다른 시기에 태어나 각기 다른 사회적 환경조건에서 서로 다른 인생의 선택을 하고 살다 간 이 인물들의 삶과 죽음을 평가하고자 함이 아니다. 이들의 죽음이 지금 우리나라의 대중들에게 어떠한 뉴스가치가 있는 것인지가 궁금해진 것이다.
만델라가 위대한 인물이라는 것은 그가 남아공에서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백인우월주의-즉 반대의 입장에서는 국민의 대다수인 흑인을 억압하던 오랜 정책-에 저항하면서 겪은 고통의 과정, 투옥기간, 그리고 그 모든 절망적 상황을 극복하고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될 때의 감격과 환호를 듣고 보아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따라서 그의 죽음을 세계인이 함께 애도하는 것이야 매체를 통해서 동참하는 것에 동의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북한의 김국태라는, 내가 살아오면서 만난 적은커녕 본 적도 들은 적도 없고, 나와 주변의 삶에 전혀 영향을 준 바 없는 인물의 죽음을, 그의 선친이라는 김책 또한 ‘김책공대’가 북한에서 명문이라고 들어본 사실(그나마 필자는 공과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에 조금 더 관심이 있었던 수준) 외엔 아는 바도 관심도 없음에도, 하물며 그의 아들까지를 이렇게 열심히 보도해주는 언론에 대해, 북한 내부사정에 대한 그 뜨거운 관심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반면에 비록 우리나라 사람은 아니지만 내 부모세대부터 적어도 우리세대까지는 영화 ‘벤허’의 찰톤 헤스턴 급 스타인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그 로렌스 역으로 각인된 피터 오툴의 죽음에 대한 매체의 인색함에는 섭섭함을 금할 길 없는 것이다. 과거엔 이정도 세계적 영화계 명사의 죽음은 단신으로나마 많이 다뤄졌고, TV 뉴스에서는 흘러간 영화의 명연기 몇 대목을 깨알같이 편집해서 보여주곤 하지 않았던가. 우리나라 모 영화에 보면 평소 헐리웃 명배우들의 작품을 모아 편집해두었다가 별세와 타계 소식에 써 먹는 방송기자의 애환이 등장하기도 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한때 그의 남편이었던 리처드 버튼, 오드리 햅번, 에이즈로 사망해 충격을 주었던 록 허드슨 등 은막의 스타가 타계한 소식은 특히나 흘러간 영화를 텍스트 삼아 청춘기를 보냈던 기성세대, 속칭 어르신 세대에게 향수를 불러일으킬 매우 유용한 뉴스이기도 한 것이다.
필자는 올 12월 매체가 북한 김국태의 장례식과 영화배우 피터 오툴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을 보면서 이제는 우리 대한민국의 매체에 북한의 영향력이 헐리웃 보다 커진 것 아닐까, 하는 음모론까지 상상해본다. 그런데 문제는 주로 북한뉴스에 열광하는 매체들이 많은 이들이 보수 편향적이라고 비판하는 종편매체들이라는 점이 의아하다. 그렇다면 종편이 종북이란 말인가? 믿기 힘든 이런 가설을 자꾸만 지지해주는 증거들이 나타났으니... 하필이면 종편 3사가 북한 조선중앙통신에서 내보내고 있는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를 거의 실시간으로 생중계하다시피 하며 특보 및 속보를 내보낼 때 유독 JTBC만 정규편성에 따라 버젓이 예능과 드라마를 틀고 있었다.
그러더니 아니나 다를까 덜컥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JTBC를 중징계 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표면적으로는 손석희 보도부문사장이 앵커로 진행하는 9시뉴스에 대한 것이라고는 했지만, 또 내란음모 재판과 위헌정당으로 해산이 청구된 통합진보당에 대한 보도 때문이라는 소식은 돌지만, 그래도 필자는 아무래도 북한 조선중앙TV의 김정일 2주기 추모대회를 생중계하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죄가 아닐까, 하는 음모론적 상상이 가지를 뻗는 것을 어찌 할 길 없는 것이다. 아이고, 궁금하다, 궁금해. 정말 궁금해.
장성택 처형과 JTBC를 둘러싼 음모론
장성택 고문 의혹을 보도한 종편 채널Aⓒ화면캡처
이런 음모론 가설에 불을 활활 지피는 확정적 사건에 대한 보도‘사건’이 하나 더 투척되었으니 바로 북한 장성택 처형 관련 보도행태들이었다. 필자에게 장성택이 어떤 인물인지는 김책과 그 아들 김국태나 마찬가지이다. 아는 바가 통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도 어렵다. 물론 이 장성택이라는 인물은 우리나라 보도에 종종 등장했었다. 심지어 서울도 방문했었단다. 하지만 최근, 바로 올 상반기까지 그 역시 김정은의 고모부이자 측근으로 국방위 부위원장으로 과연 실세냐 아니냐 정도 서열과 위치를 따지며 북한정권의 일원이었을 뿐이다.
그의 실각설을 국정원이 갑자기 제기한 후 국방부와 외교부, 통일부는 혼란스럽게 움직이더니 며칠 후 북한 언론이 실각을 확인시켜준다. 가택연금이네 체포네 뉴스가 호들갑을 떨더니 북한 언론이 정치국 확대회의 중 체포 장면을 내보내 확인시켜 준다. 또 체포 직후 처형설이 국내 언론에 등장하여 들썩이더니 며칠 후 바로 북한 언론이 처형을 확인시켜준다. 그 이후 군사재판과 처형방식에 대한 기존 언론의 일반적 태도를 뛰어넘는 디테일 보도가 쏟아지더니 이젠 장성택 측근 망명설 공방이 한창이다. 필자가 살아오며 접하고 대하며 알던 우리나라 언론매체의 습성 상 가장 놀라운 것은 북한 관련 보도의 정밀성, 보도의 빈도와 시간분량 뿐 아니라 북한 매체와 시차를 두고 직접 주거니 받거니 하는, 마치 제휴사 관계 아닌가 싶을 정도의 패턴이다. 정말 놀랍다.
이 지경에 이르러서는 음모론이고 가설이고 다 집어치우고, 우리나라의 매체들이 거의 두 주 동안 거의 절반 이상을 북한 뉴스와 관련 해설, 대담으로 채워나가고 있었던, 아니 그래야만 했던 이유가 궁금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매체사의 뉴스 게이트키퍼들은 과연 시청자들이 너무너무 궁금해 하는 이슈여서 자본주의 시장논리로 시청률을 잡기 위해 파헤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할까? 만약 그렇지도 않다면 왜? 정말로 왜?
필자는 그 이유를 두 가지의 상호작용이라고 분석한다.
첫째, 북한 뉴스가 매체를 점하고 있는 동안 나가야 할 뉴스가 나가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나열해보자. 가장 기초적인 추리기법이다. 국정원 대선개입 재판의 과정, 내란음모사건에 관한 재판과정, 여기에는 임시국회 내에서 다뤄지고 있는 2014년도 정부예산안과 관련된 법 개정, 그리고 무엇보다 코레일의 수서 고속철도 주식회사 설립 및 출자에 관한 밀어붙이기, 이로써 촉발된 철도 민영화를 비롯하여 의료 민영화 등 각종 민영화에 대한 국민여론의 저항을 분산시키고, 무엇보다 철도노조의 파업을 불법화, 무력화시키기 위한 정부 차원의 강경제압 분위기 조성 필요성, 그리고 제18대 대통령선거 1년째 되는 12.19 전후 정부의 정통성, 정당성에 대한 비판 분위기 고조 등 청와대가 머리를 싸매고 골머리를 앓을 이슈들이 산적한 가운데 대안 마련의 숨통이 필요했던 것 아니겠는가 하는 합리적 의심과 추론이다.
그렇다면 둘째로 북한 발 이슈들로 국내 갈등 이슈들을 덮을 때 어떤 기획이 필요했겠는가 하는 점이다. 왜냐하면 북한 발 이슈는 우리나라 청와대가 만들어낼 수 있는 영역 밖이다. 필자는 이를 ‘왝더독(Wag the dog)’ 전략으로 추정해본다. 이는 1997년 헐리웃에서 베리 레빈슨 감독이 만든 영화제목 그대로다. ‘꼬리가 개를 흔드는’ 현상을 일컬으며 이미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널리 쓰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기획자와 실행자가 존재하는데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이 연출자와 시나리오 작가들이다. 그래서 원하는 틀을 이미 설정해놓고 수많은 데이터를 ‘편집’해서 원하는 스토리의 흐름을 조성한다. 그리하여 현실은 가상 시나리오를 따라가게 되고, 흐름이 만들어지면 ‘가상’이 ‘사실’로 둔갑하게 되는 것이다. 이미 ‘미제’로 남겨진, 하지만 주최 측은 원인과 결과가 밝혀졌다고 주장한 수많은 사건이 같은 방식에 의해 전임 정부 동안 구축되어 있기도 하다.
23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 민주노총 건물 앞에서 민주노총 철도민영화 반대, 민주노총, 철도노조 폭력탄압 규탄 민주노총 결의대회 평화대행진에서 참가자들이 구호를 외치고 있다.ⓒ김철수 기자
그리하여 우리는 넬슨 만델라라는 한 시대 지구적 위인의 죽음과 20세기 중후반 아름다운 작품을 남긴 명품배우 피터 오툴의 죽음은 곧 잊게 될 것이며 2013년 겨울의 죽음을 북한 김정일 2주기, 김국태라는 얼굴도 잘 모르는 인물의 사망, 그리고 장성택이라는 북한정권 수뇌부였던 인물의 숙청과 처형으로 기억하게 될 전망이다. 벌써 이런 혼돈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 TV조선은 ‘장성민의 시사탱크’라는 자사 데일리 프로그램을 ‘장성택의 시사탱크’로 착각하고 오타가 버젓이 방송에 나가기도 했다고 들었다. 웃지 못 할 해프닝의 연속이다.
금기가 된 한 사나이의 부활
그런데 본 칼럼의 마지막 결론부에 하나의 죽음을 덧붙이고자 한다. 이미 여권과 야권, 또 야권 내 야권들 간 지나간 참여정부에 대한 혹독한 나름의 숙청의 결과 한줌의 ‘친노’ 세력으로 축소 전락되어 암매장된 한 사나이가 이 겨울 갑자기 소환되어 다시 등장했다. 그 이름은 표면적으로는 ‘송우석’인데 마치 빙의와 접신이라는 무속이 개입된 판타지 영화 느낌처럼 실존했던 다른 한 인물의 이미지가, 아니, 사실은 영혼의 결이 물씬 느껴지는 사내이더라는 것이다.
당당히 대통령을 역임하고도 마치 그 이름이 금기처럼 되어 ‘노무현’을 호명하면 큰일 날 것 같이 되어버린 시대에, 왜냐하면 여권이 그 이름을 꺼내면 ‘부관참시’라 하고, 야권이 그 이름을 꺼내면 ‘관 장사’라는 험담이 쏟아져 묘한 상호 묵인 하에 명칭 없는 정부의 성명없는 지도자처럼 되어버린 사람, 그가 마침 대선 1주기 당일, 개봉(예정이었으나 실제로는 하루 전날 저녁 개봉)한 영화 속에서 송강호라는 배우의 몸을 빌려 마치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나타난 것이다.
필자는 이 영화 ‘변호인’을 언론시사에서 이미 한 번 보고, 개봉 다음날 다시 한 번 보았다. 볼수록 묘한 파괴력을 가진 작품이라 극중 주인공이 81년도로 설정된, 거짓투성이의 법정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1조 2항을 외칠 때 자꾸만 자꾸만 우리 내면 속의 그 어떤 힘이 느껴지더라는 신묘한 경험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쩌면 2013년을 마감하는 겨울, 2009년 봄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던 거침없었던 한 사나이의 삶과 죽음을 다시 대면해야 할지 모른다. 이미 네 해가 지났기에 올 봄을 보내며 사실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려 했던, 과거 한 때 사랑했었던 사람이라고, 추억 속 인물이라고 생각하려 했었다. 그런데, 그가 돌아온다면 다시 꺼내야 하는 사실들이 필자는 두렵다. 시대는 대충 묻어버리려 했으나 사실은 그를 두려워 한 세력에 의한 사회적 타살이었다는 점이 말이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당대 역사에서 그의 죽음은 장성택의 죽음보다 만 배쯤 더 중요한, 풀리지 않은 숙제였는지 모르겠다. 칼럼의 말미에 그저 툭 던지기엔 필자 개인에게 참으로 무거운 숙제이기에 함께 느끼고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노동자 투쟁을 지원하다 구속됐던 노무현 대통령과 '변호인' 송우석 역의 송강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