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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살짜리답게, 나는 하나님이 어떤 식으로든 돌아가신 아버지와 계속 만날 수 있게 해주실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 해주십사 기도했지만 당연히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의식보다 더 깊은 내 안의 상처받고 분노한 무엇인가가 하나님 없이 살기로 선택한 것이다. 나는 스스로 앞가림을 하고자 했으며 자립하고자 했다. 내 바람, 즉 내 사랑이 나를 상처 입혔기 때문에, 내 안의 무언가가 너무 많은 것을 원하지 않기로 결심해 버린 것이다. 나는 열망을 억압했다. 아버지가 의식에서 서서히 사라져 갔던 것처럼, 하나님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한 욕구도 그렇게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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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약물에 중독된 사람들이 영적인 체험을 하도록 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는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중독 혹은 어떤 다른 질병에 대해서도 치료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나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돕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점점 더 이해하게 되면서 조금은 더 겸손해졌다. 또한 모든 사람이 중독자이며, 알코올이나 다른 약물들에 대한 중독은 다른 종류의 중독들에 비해 그저 좀더 명백하고 비참한 중독일 뿐이라는 것을 배웠다. 살아 있다는 것은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므로 우리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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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창조하신다. 혹은 아마도 14세기 독일의 신비주의자 마이스테 엑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말한 대로, 삼위의 웃음으로 창조하신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이 사랑 -우리는 이 사랑으로부터, 이 사랑을 위해 창조되었다 ㅡ 이 완전하다고 선언한다. 나는 이 완전한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것이 우리의 가장 깊은 욕구를 이용해 우리를 그 사랑으로 이끌어 주리라고 확신한다. 나는 또한 이 사랑이 우리가 자유 의지를 갖는 것을 원한다는 점도 확신한다. 우리는 자유로운 선택을 하도록 예정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조건화에 의해 완전하게 결정되지 않는다. 우리는 꼭두각시나 자동 인형이 아니다. 영적으로, 자유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가 바라는 대로, 하나님, 생명,사랑을 선택하거나 혹은 그에 대항하도록 허락한다. 우리를 창조한 사랑은 늘 우리를 따라다닐 것이나 우리를 노예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영원히 존재하면서도 끝없이 열려 있다.
자유 의지는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진 것처럼 보인다. 바로 우리가 외부의 강압이나 조종 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 마찬가지로 완전한 방식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은 우리 마음속 가장 깊은 곳의 욕구다. 다시 말하자면, 우리는 사랑에 의해, 사랑 안에서, 사랑을 위해 창조된다. 이 창조적 사랑에 전적으로 참여하는 것은 우리의 타고난 권리이며 진정한 운명이다. 이 사랑에 참여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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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초탈은 무미건조하고 방임적인 상태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정반대로 작용한다. 초탈은 욕구에서의 해방, 열정의 증폭, 전 존재를 다해 사랑하기 위한 자유 그리고 그런 사랑이 가져올 고통을 기꺼이 견뎌내려는 마음을 추구한다. 오늘날 어떤 영적 집단들에서는 이러한 낡은 오해들을 일부 조절하기 위해 초탈이라는 단어 대신에 비집착(nonattachment)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려 한다. 이 용어는 어떤 경우에는 유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욕구가 노예가 되어 중독을 초래하는 과정인 집착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정반대 과정인 욕구에서의 해방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초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정확하다. 해방에 이른 상택를 비집착 상태라고 일컫는 것은 적절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자유라고 일컫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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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대신에 나는, 중독과 은혜의 경험이 가르쳐 줄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사실을 마음에 새겨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는, 비록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삶으로 나아갈 것을 요구하시지만, 우리는 그 완전한 상태에 개인적으로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분투하면서 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으며,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러나 또한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둘째로, 우리 안의 불완전성과 인격의 불충분함이 우리를 하나님이 용납하실 수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만 한다. 오히려 우리의 불완전함은 하나님과 사랑을 향한 갈망의 빈 공간이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로 그리고 서로에게로 이끌리는 것이다. 만일 우리 생각을 죄책감과 자기 정죄로 채우지 않는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이 은혜의 물결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일종의 광장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원한다면 자신의 불충분함을 끔찍한 결함으로 여기고 자신을 혐오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것을, 은혜의 능력이 우리 삶 속으로 들어오는 통로로서 긍정적으로 여길 수도 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타고난 사랑스러움에 감사하기 시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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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중독으로 인해 중대한 계명을-우리 스스로-지킬 수 없다. 우리는 대부분 끊임없이 계속해서 노력해 봤지만 실패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계명들이 정말 자신의 가장 깊은 욕구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했다. 우리는 이 계명들을 위해 삶을 헌신하려 애쓰지만 여전히 실패하고 만다. 나는 이 실패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실패와 무력감 가운데서 가장 정직하게 그리고 전적으로 은혜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은혜는 중독을 다루기 위한 유일한 희망이며, 중독의 파괴력을 진정으로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은혜는 꺾을 수 없는 자유의 옹호자며 완전한 사랑의 절대적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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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신 종교들은 하나님 안에서 궁극적인 안전을 찾을 수 있다는, 또 그래야만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예수님은 심지어 재산을 모으거나 미래를 대비하는 실제적인 필요들에 대해서까지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을 정도다. 그분은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 관심을 갖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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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할 수 있어"가 나타나는 곳 어디에서는 추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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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만 힘겨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사를 통해, 영적 거장들의 저서를 보면 그들도 자신의 복잡한 동기들 가운데서 순수한 생각과 온전한 사랑을 찾기 위해 끝없이 투쟁했다는 것이 드러나고 있다. 더구나 그들의 순수성이 자라날수록, 그들은 자신의 집착에 분명한 끝이 없다는 사실로 인해 더욱더 겸손해졌다. 이것은 진정한 영적 성장이, 자신을 거룩하다고 생가하고 교만해질 때가 아니라 그 자신이 하나님의 긍휼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점점 깨닫게 될 때 일어나는 이유 중 하나다. 그것은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단순하고 정직한 세리의 기도를 칭찬하신 이유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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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스트레스에 대한 집착이 가장 확실히 드러나는 영역은 영적인 훈련의 영역이다. 침묵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자세는 기도와 묵상 그리고 대다수의 다른 영적 생활들에서 필수적인 부분이다. 그런 상황에서는, 가벼운 스트레스 중독도 즉시 그리고 고통스럽게 명확해질 것이다. 많은 현대의 영적 순례자들에게는 매일 기도 시간을 갖는 것조차, 화학물질 중독에서 일어나는 의지의 싸움에 상응할 만큼 심한 괴로움을 연상시키는 의지의 싸움이 될 수 있다. 그저 마음을 열고 있는 그대로 존재를 내어놓는 일 대신에 무언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생각은 놀라운 변명거리들을 만들어 낼 수있다. 존재와 행위 사이에 계속되는 투쟁은 무시무시할 정도다. 지배와 의지력, 항복과 패배에 관한 주제들은 모든 진정한 영적 전투의 드라마에서 고조에 달한다.
누구나 기도하기를 꺼리는 일들이 많이 있다. 우리는 자기 지배 감각을 포기하지 않으려 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듣지 않으려 하며, 침묵 가운데 찾아오는 자아 성찰을 피하려 한다. 게다가 이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평안한 상태의 불편함을 경험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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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중독의 한 국면은 영속성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집착을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다. 중독된 행동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끝없이 계속되는 과제이기 때문에, 알코올 중독자 모임의 사람들은 스스로를 "알코올 중독을 극복한 사람"이라고 부르기보다는 "알코올 중독을 극복해 가고 있는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중독에 대응하여 행동을 조절할 수 있으며, 또한 은혜에 힘입어 중독의 속박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중독의 끌어당기는 힘은 약해질 것이다. 그러나 전 생애를 통해, 그 재발 잠재력은 우리 안에 계속 존재할 것이다. 뇌는 잊어버리지 않는다. 심리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우리가 결코 경계를 풀 수 있을 만큼 제대로 교정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신경학적 관점에서, 이것은 우리의 가장 선의의 시스템의 세포들도 결코 셀 수 없이 많은 다른 중독된 시스템들을 뿌리뽑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영적인 관점에서, 이것은 하나님이 얼마나 많은 은혜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든지,우리는 영원히 계속적인 은혜의 흐름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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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구체적으로 영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선천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열망을 만족시키기 위해 가장 덜 위협적인 방식 즉, 개인의 능력에 대한 감각을 보호하고, 최소한의 희생이 필요한 방식들을 추구한다. 심지어 우리의 열망이 오직 하나님에 대한 것임을 알고 있을 때조차도, 여전히 빠져나갈 구멍을 찾으려 한다.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으려는 심산으로, 하나님과 더 친밀한 교제를 나누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다른 일들과 사람들에 대한 집착도 유지하는 것이다. 우리가 악하거나 알고도 모른 체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타고난 본성 때문에, 즉 본능적으로 가능한 덜 고통스러운 삶을 원하기 때문에 타협을 찾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상식적 관점에서, 이것은 더할 나위 없이 합당하다. 우리는 창조 세계를 꿰뚫어 숨겨지 창조주의 사랑스런 얼굴을 보는 대신, 만질 수 있고 설명할 수 있는 하나님의 창조 세계 안에서 우리의 궁극적 만족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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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하나님에 대한 욕구를 다른 것으로 대체하는 것은 하나님의 관점에서도 타당할 것이다. 결국 우리를 중독될 수 있는 존재로 만드신 분은 하나님이다. 사실상 내게는 하나님이 실제로 그런 대체를 조장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이 장의 말미에서 좀더 신학적으로 논의하겠지만, 여기서 간략하게 설명해 보고자 한다.대부분의 경우, 하나님은 어느정도 우리로부터 숨어 계신다. 왜일까? 한 가지 이유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에게 객관적 대상이 되기에는 이미 너무나 가까이, 너무나 친밀하게 우리와 하나가 되어 있으며, 초월하시는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너무 크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한 바울의 말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시는 더 중요한 또 다른 이유를 보여 준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온전하고 자유롭게 선택하기 위해서는, 찾고 모색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만약 우리를 사랑하시는 완전하신 하나님이, 모든 의심이 사라질 만큼 객관적 대상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신다면, 우리의 자유는 어떻게 될 것인가? 분명히 우리는 일종의 사랑을 경험하겠지만 그것은 무조건 반사 같은 사랑일 것이다. 거의 아무 생각 없이 우리는 이 신적 대상에게 모든 욕구를 고착시키고, 그것을 붙잡고 소유하려 하고, 그것에 중독될 것이다. 나는 하나님이 중독이 아닌 완전한 사랑을 원하시기 때문에 집착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신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자유 안에서 태어난 사랑, 집착에서 자유로운 사랑은, 하나님이 자유로이 우리에게 손을 뻗으시는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심화하기 위해 애쓸 것을 요구한다.
게다가 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일들로부터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선택하고자 한다면, 우선 다른 유혹들을 맛보고 그것들을 우리 신으로 삼지 않으려는 고통스러운 선택을 해야만 할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랑은 자유에서 태어날 뿐 아니라, 힘든 선택 가운데서 태어난다.성숙하고 의미 있는 사랑은 이렇게 고백해야만 한다. "나는 다른 좋은 것들을 경험해 보았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죠. 하지만 내 마음이 진정 원하는 것, 내가 모든 것 중에 선택한 것은 바로 당신입니다." 위엄 있게 집으로 돌아오려면 먼저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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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츠제랄드(Comstance FitzGerald)는 그것을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 "정서적 구원 과정에서 욕구는 억제되거나 파괴되지 않으며, 서서히 전이되고 정화되고, 변화되며, 불붙는다. 우리는 인간 욕구의 분투와 모호성을 통과하여 통합과 온전한 인격으로 나아간다."
이 귀향 과정을 가리키는 영적인 명칭이 많다. 초탈, 정서적 구속, 정화, 죄 씻음, 계속적 회심, 성화. 피츠제랄드가 사용한 욕구의 변화라는 말은 가장 호소력 있는 표현이다. 나는 앞에서 초탈에 관해 논하면서, 우리가 이 과정을 무엇이라 일컫든 간에 그것을 오해하기 쉽다고 말했다. 이것을 정확히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그 음과 양을 모두 알아야 한다. 이 과정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며,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므로 아름답다. 그러나 또한 포기와 떠나보내는 것, 위험을 무릅쓰는 것, 대단히 실제적이고 고통스러운 상실을 견뎌 내는 것을 수반하므로 지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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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영적인 열망을 되찾으려 할 때는, 집으로 향하는 여정에 그런 포기와 단념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과정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대개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모르는 편이 낫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하나님을 거역하기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오히려 나는 그 반대로, 그 과정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릇된 금욕 생활이나 사랑을 거부하는 자아박탈을 실천함으로써 스스로 거기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 더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은혜보다 앞서 달려간다. 나는 금욕 수행이 과도하게 제도화되는 과정에서 그런 일들이 발생하는 것을 보아 왔으며, 스스로 나 자신의 구원을 설계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때 나도 그런 태도에 빠졌었다. 다 소용없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가 일단 진정한 귀향 과정을 경험하기 시작한다면, 끊는다는 것에 함축된 의미는 점점 더 명료해질 것이다. 만약 은혜가 우리의 반응을 인도하도록 내어 맡긴다면, 우리가 알아서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적절한 때에 깨닫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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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가 말했듯이, "우리 자신을 즐거움에 묶어 두려 하기보다 자유롭게 날아다니는 즐거움에 입맞춰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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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유혹은 전적인 인간 존재로서의 우리 정체성에 관한 시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자신의 성장을 위한 시련과 시험이지, 하나님이 우리가 어떤 사람인지 확인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하다는 것을 아신다 시험은 우리 스스로 그 선함을 발견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집착의 시험들은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무릎 꿇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선한 길을 보여줄 수 있으며 우리의 전 존재로 그 선함을 택하게 해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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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에 내재하시는 하나님은 우리와 더불어 상처받고, 고통받으며, 분투하고, 소원하며, 우리와 함께 창조하시며, 우리의 분노와 슬픔과 기쁨의 한 방울까지도 모두 나누신다. 하나님의 실재는 우리 마음으로부터 경험상 분리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가깝다. 그러나 바로 그 하나님은 그와 동시에 초월적인 존재로서, 만물 위에 그리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며 구속하시는 권능을 발하신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신다는 것에 당황하지 말아야 한다. 이 신비를 통해서, 하나님은 성육신하셔서 사랑으로 우리의 인간 조건을 공유하시면서, 동시에 우리를 그 상황에서 강력하게 구원하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신비를 통해서 은혜는 절대적이고 영원하며 승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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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신비를 체험하기 위해서는 은혜를 진짜 선물로 맞닥뜨려야 한다. 은혜는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은혜는 성취하거나 획득할 수 없다. 조작이나 유혹을 통해 은혜를 끌어낼 수도 없다. 은혜는 그저 받는 것이다. 우리의 어떤 조건도 우리가 이 급진적인 실재를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중략>
하나님의 은혜는 조건화의 일부가 아니다. 우리가 노력한다고 해도 결코 그렇게 만들 수 없다. 하나님처럼, 은혜도 집착의 대상이 되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은혜의 흐름을 지배하려는 모든 시도는 좌절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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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는 순수한 선물이므로, 우리가 은혜와 조우하는 가장 의미심장한 순간은 아마도 뜻하지 않은 때, 우리가 방심하고 있을 때, 우리의 조절 중추들(mainpulatire systems)이 휴식을 취하고 있거나 다른 일에 몰두해 있을 때 찾아올 것이다.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은혜를 간구할 수 있으며, 적극적으로 은혜를 찾고, 그것을 받기 위해 우리 손을 펴려고 노력할 수 있다.
진정한 선물을 구하는 기도는 아주 단순한 것이다. 아무런 거래 조건 없이, 흥정 없이, 조작 없이 그저 욕구를 표현하면 된다. 은혜의 수여자이신 하나님은 솔직한 요청을 받으실 만하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에게는 그 요청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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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의 실재들은 명료하다. 즉 은혜는 항상 존재하며, 항상 유효하며, 항상 선하며, 항상 승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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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성장한다는 것은, 우리가 가장 성공적으로 영위하는 삶의영역에서뿐 아니라 가장 상처받기 쉽고, 손상되고, 연약한 그런 영역들에서도 하나님을 더욱더 신뢰하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진실한 믿음으로 행동할 진정한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우리 개인의 힘이 가장 좌절된 것처럼 보이는 때이다. 고작 손의 힘을 빼거나 꽉 움켜쥐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전부일 때, 말없이 하나님을 향하거나 그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모든 것일 때, 가장 순수한 믿음이 생긴다. 예수님이 겨자씨 크기에 비유하셨던 이 작은 선택, 믿음 안에서, 은혜와 인간 영혼이 절대적인 완전함 가운데 서로 결합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으로 폭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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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위험을 반복해서 감수함으로써 신뢰를 구축해 가는 것은 다른 수많은 배움의 과정과 여러 가지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는 한 가지 행동을 반복하면서 그것이 안전하고 믿을 만하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면 우리의 뇌 세포들은 그것을 좀더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그 후에 신뢰가 자라나면, 또다시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는 것이 더 수월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에 믿음을 걸어 보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하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우게 된다. 우리의 가장 근본적인 욕구가 신뢰할 만하다는 것에 믿음을 걸어 보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믿음의 모험은 가장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삶의 영역들에서만 일어날 수 있기 때문에, 결코 진정으로 편안하게 겪을 만한 일이 되지 않는다. 한 층 한 층 신뢰를 쌓아 올릴 때마다 좀더 어려운 또 다른 모험이 주어진다. 진정한 믿음의 선택은 그러므로 항상 모험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점점 더 우리 존재의 깊은 곳으로 나아가면서 그저 진행되어 간다. 모든 선택은 어렵다. 이 과정에서 진정으로 갖추어지는 것은, 단지 믿음의위험을 감수하고자 하는 자발적 의지와 준비된 자세다. 위험을 감내한다는 느낌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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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는 집착과의 투쟁이 벌어지는 장소다. 광야 전승은 노예 생활에서 벗어나 광야를 통과해 집으로, 동산으로 향하는 여정에 대해 들려준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여정 그 이상이다. 그것은 약함의 깊이와 은혜의 힘 그리고 그 둘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다. 나아가, 광야에서 일어나는 일은 단지 힘든 여행과 위험이 많은 배움이 아니라, 회개와 회심, 복잡한 동기들이 정화된 욕구로 변화되는 과정이며, 은혜의 생수를 통해 광야를 푸른 동산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것은 지리적인 여행이 아니며, 모든 것은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정화와 정제만이 아니라,인간의 영혼과 그 창조주 사이에 사랑의 구애와 집단장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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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광야는 우리 삶을 측량할 수 없이 풍요롭게 만든다. 각각의광야는 회개의 씨앗들을 품고 있으며, 우리의 동기들이 실제로 얼마나 복잡한지를 깨닫게 해줄 가능성을 품고 있다. 그리고 은혜의비가 내리면, 모든 광야는 우리의 진정한 마음속 욕구를 되찾게 할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다. 우리가 그 가장자리만을 건드릴지라도, 광야는 우리 개인의 힘의 한계를 가르쳐 주며, 하나님께 의지하는 가운데 우리의 존엄을 발견하게 될 우리 자신의 변하지 않는 중심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리켜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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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적이건 내적이건, 선택했건 아니건 간에, 광야의 특징은 영혼이 금단증상으로 고통받으며, 몸과 정신이 거짓 안전들로부터 멀어지고, 그 결과인간적 의지력과 신적인 은혜의 신비로운 지형을 탐구하는 일만이 남는다는 것이다. 가장 온화한 차원에서, 광야는 한 사람이 중독과 은혜에 대해 무언가를 배우는 실험실이다. 좀더 자세히 말하자면, 광야는 믿음과 사랑이 불로 연단받는 훈련의 장이다. 그리고 은혜로 인해 광야는 교만과 자기 만족, 심지어 집착 자체가 갖는 힘의 일부마저 불태워질 수 있고, 하나님의 사랑의 비가 삶을 자유의 씨앗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진정한 회개와 정화의 용광로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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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 본질상, 진정한 금욕은 대개는 철저히 평범하며, 결코 떠들썩하지 않다. 예수님과 수많은 사막 교부들이 보여 준 예들은 최선의 금욕 형태가 무엇인지를 보여 준다. 그것은 은혜 안에서의 진정한 삶을 주장하며,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 안에서 기쁨과 자유를 자라게 하며, 견뎌내는 능력의 한계까지 진정한 열정을 강화한다.
예수님은 쾌활하셨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즐기도록 권유하셨다. 그분은 먹고 마시고 연회를 즐기셨다. 울고, 화내고, 농담을 하셨다. 좋아하는 친구들이 있었고, 그들의 관심과 사랑에 감사를 표하셨다. 그분은 자기 백성들이 자신과 함께 있는 동안 금식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셨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활 방식도, 더욱 엄격한 세례 요한의 금욕도 백성들의 기대를 만족시킬 수 없다고 한탄하셨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하니."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금욕생활을 갖고 계셨다. 그분은 고독과 기도, 제자들의 혼란과 오해를 견뎌 내는, 스스로 선택한 광야를 갖고 계셨다. 그리고 광야(사탄의 시험), 겟세마네, 십자가라는 이끌림을 받은 광야도 갖고 계셨다.예수님은 그 모든 광야에 기꺼이 들어가셔서 그 가운데서 정직하고 책임을 다하며 믿음을 지키고자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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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찬가지로, 내 속에서는 순수함과 완전함에 대해 의심한다. 나는 자신이 순수하고 완전하다고 생각한 몇몇 사람들을 알고 있는데, 그들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또 성실하게 순수함과 완전함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알고 있는데, 그들을 존경은 하지만 나는 어쩐지 그들이 무섭다. 가끔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를 진정으로 해방된 그리고 창조적으로 사랑하는 상태로 생각할 수 있지만 또 다른 때엔 그것이 탈집착에 관한 상투적인 오해들, 즉 엄격함, 무감각, 인간적 관심의 결여에 더욱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나는 자문한다. 그런 '자유'안에서 인간의 영은 어디에 있는가? 열정은 어디에 있는가? 성취하고 달성하고자 하는 충동과 창조를 위한 고통과 분투는 어디에 있는가? 이 경이로운 불완전한 인간 조건의 일부인 풍성함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는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는 은혜를 필요로 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기도 한다고까지 말할 수 있는 지경이 되었다. 간결하게 말해서, 내 안의 많은 부분은 우리 인간은 집착해야 하고, 불순해야 하며, 불완전해야 한다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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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영적 온전함은 근본적인 속성상 개방적이다. 그것은 언제나 되어 가는 과정 중에 있으며, 언제나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도 항상 불완전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여하신, 계속적인 창조에 동참할 권리를 결코 행사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 삶의 과정은 정확히 성 어거스틴이 지적한 것과 같다. 하나님 안에서 안식을 찾을 때까지,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하게 되어 있지 않으며, 안식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 귀중한 불안정성은, 우리의 육체적 존재에 의해, 그리고 우리 뇌와 신체의 세포들이 주변 환경에 끝없이 적응할 때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면서 수행하는 미세한 노력들의 결합에 의해 조정되며, 그것들을 통해 명백해진다.
우리의 근본적인 불편함(dis-ease)은 그러므로 정확한(precise) 신경학적 현상이면서 동시에 가장 값진 (precious)하나님의 선물이다. 그것은 무언간 잘못되어 있다는 징후가 아니라,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올바르다는 것을 나타내는 징후다. 그것은 해결해야 할 문제나 치료해야 할 이상 상태가 아니며, 고쳐야 할 질병도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진정한 보물이며, 우리가 소유한 가장 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 영혼 안에 울리는 하나님의 사랑의 노래다.
게다가,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이 하늘 저 멀리에서 우리에게 불러주시는 노래가 아니다. 그것은 동시에, 그리스도가 우리와 함께,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표현이다. 그분은 우리의 고통과 불안정성을 공유하시고 우리를 구성하는 바로 그 세포들 속에서 살면서 창조하시고 능력을 부여하시며, 우리의 행위와 상태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친밀한 사랑으로 우리의 자유를 지켜 주신다. 그리고 언제나, 우리를 불만족스러운 채로 남겨두고 우리를 부르시는 것이다. 우리 운명의 제자리를 되찾기 위해,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그 달콤하고도 고통스러운 불완전함을 받아들이고 주장해야 할 뿐 아니라, 그것을 우리의 온 마음으로 확언해야만 한다. 어떻게든 우리는 그것과 사랑에 빠지게 될 것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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