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봇 시대의 수필가
이규석
개미보다 더 부지런한 동물이 있을까? 자신에게 부여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개미는 부지런함의 상징이다. 그런데 진짜 부지런하게 활동하는 개미는 전체의 20%에 불과하고 나머지 다수는 그냥 바쁜 척, 건성건성 오가고 있을 뿐이란다. ‘20%의 사람이 80%의 일을 한다.’는 파레토의 법칙이 적용되는 인간 세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기업 경영자들은 직원들이 열심히 일해주기를 바라지만, 일의 근원을 생각하면서 부지런하게 일하는 사람은 20%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런 모범적인 세력에 맞서듯 20%의 불만 세력도 있단다, 이들은 걷어내도, 잡초처럼 금세 또 생겨난다니 참으로 묘한 조직 생리가 아닐 수 없다. 이도 저도 아닌 나머지 60%의 사람들은 기웃거리다가 빵이 더 큰 쪽으로 몰려다닌다. 그래서 세상은 뜻을 가진 소수가 이끌어 간다고 하는가.
백화점에서는 20%의 고객이 80%의 매출을 올려 준다고 한다. 교회나 성당, 절에서도 열심한 신자의 비율도 20% 정도란다. 수필 전문 잡지에 실리는 수필다운 수필은 대략 20% 정도에 머문다는 게 평론가들의 평이니까, 문단의 형편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세상에 임도 보고 뽕도 따는 일이 많았으면 좋으련만 얄궂게도 파레토의 법칙이 성시를 이룬다. 하기야 내 마음속의 의지와 본능의 비율도 20 : 80인 것 같다. 그래서 선한 의도는 빗나가는 게 더 많고 삼빡한 작품 한 편 쓰기는 코로나를 이기는 것보다 더 힘이 들고 고통스럽다.
이렇게 악전고투 중에 막강 적이 나타났다. ‘챗봇 GPT’의 출현이다. AI의 기능은 날로 발달해서 인간의 일을 마구 빼앗아 가고 있으며, 머잖은 장래에 절반 이상의 직업이 사라질 것이라 한다. 그럼, 우리 수필가들의 운명은 어찌 될 것인가? ‘챗봇 GPT’가 에세이는 잘 쓴다고 소문이 자자하니, 호랑이굴에 들어가는 셈 치고 그에게 물어보아야겠다.
“넌 어떻게 해서 에세이를 그렇게 잘 쓰니?”
“내 생각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글인데 어려울 게 뭐 있어. 서론 본론 결론의 구조를 갖거나 기승전결로 꾸리면 되잖아. 내겐 엄청난 자료들도 쌓여 있잖아. 거기다 적절한 에피소드를 넣고 그에 따른 내 생각을 적당히 섞으면 멋진 에세이가 되지. 어니스트 헤밍웨이, 무라카미 하루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에세이는 물론 이어령 선생이나 김형석 교수의 글을 읽는 것도 큰 도움이 될 거야. 에세이는 자기만족을 넘어 독자들에게 ‘아~하’를 선물하면 극상이지.”
“그러면 수필도 잘 쓸 수 있어?”
“그건 좀 어려워. 수필은 개인의 경험과 정서를 바탕으로 하잖아. 유감스럽게도 내겐 독자의 심금을 울릴만한 재주는 없어. 윤오영 선생의 <곶감과 수필>을 읽어 보렴. 수필로 쓴 수필론 이니까 도움이 될 거야.”
소설을 밤(栗)에, 시를 복숭아에 비유한다면 수필은 곶감(乾枾)에 비유될 것이다....(중략)
감나무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그 푸른 풋감이 다가 아니다. 늦은 가을 풍상을 겪어 모든 나무에 낙엽이 질 때, 푸른 하늘 찬 서리 바람에 비로소 붉게 익은 감을 본다. 감은 아름답다. ...(중략) 그러나 감이 곧 곶감은 아니다. 그 고운 껍질을 벗겨야 한다. 그 껍질을 벗겨서 시득시득하게 말려야 한다. 여러 번 손질해야 한다. 그러면 속에 있던 당분이 겉으로 나타나 하얀 시설枾雪이 앉는다. 시설이 잘 앉은 다음에 혹은 납작하게 혹은 네모지게 혹은 타원형으로 매만져 놓는다. 이것을 곶감을 접는다고 한다. 감은 오래 가지 못한다. 곶감이라야 오래 간다.
수필은 이렇게 해서 만든 곶감이다. 곶감의 시설은 수필의 생명과도 같다. 곶감을 접는다는 것은 수필에 있어서 스타일이 될 것이다. 그 수필마다의 형태가 될 것이다. 그러면 곶감의 시설은 무엇인가. 이른바 정서적 신비적 이미지가 아닐까. 이 이미지를 나타내는 신비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졸과 같은 무드다. 수필의 묘는 문제를 제기하되 소설적 테마가 아니요, 감정을 나타내되 시적 이미지가 아니요, 놀과도 같이 아련한 무드에 쌓인 신비로운 정서에 있는 것이다. - 윤오영 <곶감과 수필> 일부 발췌
천하의 ‘챗봇 GPT’도 수필가로 활약하기에는 어렵겠다고 고백했으니, 수필은 우리 수필가들만의 블루 오션인 셈이다. 문학은 예술이요, 수필이 문학이라면 수필에서 예술성은 필수다. ‘붓 가는대로’ 쓰거나 ‘무형식의 형식’에 기대어 내 멋대로 써서는 문학이 되기는 어렵다. 백철 교수는 자신의 『문학개론』에서 ‘형상은 문학적 의상’이라고 했다. 홀딱 벗은 채 거리에 나설 수 없듯이 수필은 형상화의 옷을 입어야 문학작품으로 활보할 수 있다는 뜻이리라.
이참에 석현수 수필가의 제안대로 사회적 에세이(Formal Essay)를 쓰는 분에게는 에세이스트(Essayist)로, 서정적인(Informal or Personal) 수필을 쓰는 분에게는 수필리스트(Supilist)라는 칭호를 붙여드렸으면 좋겠다.
개미는 전체로 볼 때는 부지런한 집단이지만 한 마리씩 개별로 볼 때는 결코 부지런한 동물이 아니다. 수필가라고 다 명수필을 쓸 수 있는 것 또한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포기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기왕에 들어선 길, 이왕이면 교과서에 실릴 만한 작품 한 편 남기는 수필리스트가 되었으면 원이 없겠다.
첫댓글 오우~~이규석선생님!!
두 손 들어 환영합니다~~^^*
수필에 대한 견해~
멋진 에세이입니다~~^^*
딱딱하지 않은 에세이도 가능할런지?
실험 삼아 시도해 본 글입니다.
챗 gtp는 요즈음 나온 신식? 인공지능으로 알고있는데 이렇게
새로운 과학 발전의 시스템을 우리 생활에 빨리 끌어와 수필로 쓴다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과학의 시대에 수필가들도 누구보다 발걸음이 빨라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작품 내용도 짜임새있게 잘 쓰졌고요. 근래에 와서 읽은 글 중 수작입니다. 계속전진하소서. 남평
과찬의 말씀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선생님께서도 잘지내시지요?
훌륭한 글과 함께 늘 건강하셔서 좋은 인도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