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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월도 하순으로 넘어가는 주말입니다. 비 좀 내리더니 날씨는 한결 더 가을스럽네요. (ㅋㅋ) 산과 들, 옷 갈아입는 속도도 빨라지리라 생각합니다. 산길에는 곳곳에 낙엽이 깔리고 있습니다. 이제는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지난주에도 한두 개 흘린 밤을 보았는데 말입니다. ㅎㅎ
- 밤
와 -
눈에 들어온 것, 알밤 하나
어떻게 여기에?
누가 떨어뜨렸나?
못 보았나?
500원 동전보다 더 감동
500원의 가치나 있나?
돈이 다인가, 발견의 기쁨인걸.
얼른 집어본다.
어쩜 이리도 귀여울까.
길에 떨어지면 우리 것
숲에 떨어지면 너희 것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사는 것
가을이 주는 또 하나의 감동
산에 가는 즐거움
젊어서는 머니머니해도 머니가 최고였지만 이제는 누가 뭐래도 건강이 최고입니다. 몸져누우면 모든 좋은 세상이 그림의 떡이 됩니다. 날씨도 쌀쌀해졌는데 감기도 조심하고 건강도 잘 챙기면 좋겠습니다. 행복한 주말을 빕니다. ^)^ 2023년 10월 21일 김종우 목사 드림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아가 5 : 6)
<30일>
요즘 결혼들을 하지 않으니 보면 참고가 될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실 죽고 못 살 것 같은데 결혼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까요? 하기는 구태여 결혼하지 않고도 동거를 할 수도 있으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지난 세기 같으면 꿈도 꾸지 못할 일입니다. 어른들이 야단이겠지요. 결혼도 하지 않고 살겠다고? 하면서 야단날 것입니다. 시대가 바뀐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냥 동거하는 것과 결혼을 하고 동거하는 것과는 다를 것입니다. 그냥 동거한다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헤어질 수 있다는 환경이 되어 있는 셈입니다. 그런데 결혼하면 헤어지는 일이 말 그대로 일이 됩니다. 마음만 먹었다고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법원은 30일 숙려 기간을 준답니다. 그 시간 동안 재고해보라는 것입니다. 장난처럼 결혼하는 예는 없을 것입니다. 요즘에는 부모 선에서 결정하여 시집장가 가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좋아서, 사랑해서 결혼까지 이르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쉽게 헤어져요? 극단적인 예로는 신혼여행 갈 때와 달리 돌아올 때 따로따로 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신혼여행 간 그곳에서 두 사람 중에 숨겨진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신체적인 문제이든 심리적 정신적인 문제이든 아니면 인간성의 문제이든 그 동안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좀 살아보지도 않고 그렇게 속전속결로 끝날 수 있을까 싶기도 합니다.
흔히 해주는 말이 있습니다. 집 밖에서 만날 때와 집 안에 들어와서 만날 때가 매우 다르다고 미리 경고(?)해줍니다. 다시 말하면 연애할 때와 결혼해서 살 때는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실 새삼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알아챌 기회가 없었다는 말입니다. 연애하며 집 밖에서 만나는 경우 사람의 일상적인 버릇을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옷을 입고 벗는 것부터 시작하여 화장실 사용하는 법이나 잠자리에서의 버릇 등등 이런 것은 함께 생활해봐야 알게 됩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경우 놀랄 수도 있습니다. 좀 심하다면 내가 이렇게 계속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도 생길 것입니다. 하루 이틀이 아니라 평생을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탄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쇠뿔도 단번에 빼버려?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였습니다. 변호사 준비를 하고 있는 백수 ‘이정렬’과 부잣집 딸 ‘홍나라’의 결혼은 어렵게 성사되었습니다. 가정환경부터 매우 다릅니다. 시골 출신 남자와 도시 사람 여자입니다. 속된 말로 여자 잘 만나 그럴싸한 아파트에서부터 신혼생활을 시작합니다. 남자는 변호사 시험 준비하느라 애쓰고 있습니다. 여자는 영화사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서로가 나름 바쁩니다. 아마도 홍나라는 자기 스스로 집안일을 한 경험이 별로 없으리라 짐작합니다. 그럴 만한 환경에서 살았으니까요. 바깥일이나 하고 집에 들어오면 제멋대로입니다. 정렬이 시험 준비에 바쁜데 집안일까지 돌보아야 합니다. 이러자고 결혼했나 싶기도 하겠지요.
게다가 시돈 지간에도 환경의 차이로 인하여 사이가 매끄럽지 못합니다. 홍나라가 시댁에 방문하여 집안일을 돕습니다. 그러나 그 일상대로 일하는 모습이 시어미에게는 흡족하지 않습니다. 있는 대로 쓰는 사람과 절약이 몸에 밴 사람과의 차이입니다. 스트레스만 안고 돌아옵니다. 자연히 남편에게로 화살이 갑니다. 남편도 자존심 상하는 입장에서 가만 넘어가지 않습니다. 서로 잘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티격태격 싸움판이 되기 십상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회수와 강도가 빈번해지고 높아집니다. 결국 끝내자고 결론을 내립니다. 가정법원으로 갑니다. 양쪽에서 이혼 사유가 조목조목 나옵니다. 어쩌면 그렇게 단점들이 많은지 서로가 놀랐을 것입니다.
30일의 숙려기간을 가지고 법원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티격태격하다가 그만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입원하고 깨어나기는 했는데 두 사람이 모두 기억상실증에 걸립니다. 자신들이 부부였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양가 부모는 일단 이혼을 결심하였으니 그렇게 진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아직은 부부니까 그대로 한 집에 거하도록 합니다. 다만 서로 다른 방을 사용하도록 합니다. 나라의 여동생이 감시원으로 동거합니다. 담당의사는 가능하면 옛날 일들이 생각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라고 조언합니다. 가족도 친구들도 그렇게 도와줍니다. 그런데 우리가 무엇을 기억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에 따라서 다르겠지요. 그런데 대부분 좋은 것보다는 좋지 않은 것이 기억에 많이 남아있습니다.
평소에도 좋은 것을 많이 담아두는 훈련과 습관을 가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에게 아픈 사건이나 힘들게 한 사람이 마음에 더 잘 새겨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부부관계가 힘들게 되면 연애하던 시절의 좋은 추억을 떠올리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서로 좋아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 좀 새로워지지 않을까요? 사실 부부가 한 평생 해로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한 지붕 아래서 맞춰 살아간다는 것은 두 사람이 평생을 이겨나가야 할 숙제입니다. 남자든 여자든 무엇보다 참고 수용해주는 태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화 ‘30일’을 보았습니다.
매혹적인 선악과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을 이야기할 때 ‘시대를 잘 타고 난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잘 읽는 것도 성공의 한 열쇄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눅 12 : 56 “외식하는 자여 너희가 천지의 기상은 분변할 줄을 알면서 어찌 이 시대는 분변치 못하느냐” 사람들, 특히 신앙인들이 흔히 날씨는 예상하면서 왜 이 시대는 분변하지 못하느냐 하는 질책입니다. 어떤 징조를 보면 그 앞을 예상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말씀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서쪽 하늘이 흐려지면 비가 올 확률이 큽니다. 날씨가 개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쪽 하늘이 밝아지면 곧 개이겠구나,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어떤 징조를 보면서 날씨를 예측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이 땅에 일어나는 사건이나 사태를 보면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예측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역사하실 때는 결코 당신이 직접 나서서 일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육의 세상에서 일하실 때 육의 일꾼에게 함께 하셔서 그 육의 사람을 들어서 일하신다는 말입니다. 그 가장 중요한 일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을 그 백성에게 알리는 것이지요. 그 한 예를 봅니다. 렘 1 : 2 “아몬의 아들 유다 왕 요시야의 다스린지 십 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였고” 4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하나님의 말씀이 선지자에게 임하여 그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세우신 목자로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받아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합니다. 그 하나님의 뜻은 성경 처음부터 명시되어 있습니다. 처음 아담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하시고 말씀하셨지요. 창 1 :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백성이 땅 곧 세상에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여 세상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 아담과 하와가 세상에서 처음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사단 마귀가 쥐고 있는 세상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마귀가 장악하고 있는 세상에서 일부를 떼 내어 아담에게 맡기십니다. 창 2 : 8 - 9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동산 가운데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그리고 주의할 것을 당부하십니다.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본래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니 세상은 하나님의 세상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귀가 장악하고 있습니다. 롬 8 : 22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하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그래서 그것을 다시 회복하여 하나님 나라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를 위해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셨고 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실패하였습니다. 아담이 마귀의 미혹에 빠졌고 결국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배도한 것이지요. 비록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지만 죄에 빠져 그 뒤로 오는 자녀들 곧 하나님 백성이 모두 죄를 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그 백성을 구원할 계획을 세우셨고 메시야를 약속하십니다. 시대마다 하나님은 당신의 목자를 세워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하나의 모형이지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입니다. 곧 이스라엘이지요. 그러나 혈통으로 이루어진 이 하나님 나라, 하나님 백성은 실패로 끝납니다. 잘 아는 대로 정작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요 1 : 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이 구약의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이고 경계가 됩니다. 고전 10 : 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말세를 사는 우리가 질문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라는, 세상에서도 특별한 사람들이 왜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고 배척하였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하나님이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여러 모양으로 약속해주셨건만 그것을 아는 백성이 왜 그 메시야를 배척했을까요? 이 문제가 오늘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비슷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이 약속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은 초림을 약속하셨고 신약시대 예수님은 재림을 약속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이 오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 하나님 백성에게 뿐만 아니라 마귀에게도 엄청난 소식이지요. 왜냐하면 그 분이 오시는 때가 바로 자기 나라를 빼앗길 때가 아니겠습니까? 사실은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것인데 자기 것처럼 차지하고는 자기 것이라고 고집하는 것입니다. 아무튼 가만있지 않겠지요. 어떻게든 방해를 하든지 막든지 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세워지면 그곳에는 반드시 마귀가 들어오게 됩니다. 하나님이 창설하신 에덴동산에 뱀이 들어오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여 하나님 백성을 미혹합니다. 그러므로 땅에 세워지는 하나님 나라 곧 성전 또는 교회에는 사단의 목자가 함께 나타납니다. 에덴동산에 생명나무뿐만 아니라 선악나무가 함께 있듯이 말입니다. 어느 쪽이 더 멋있었습니까? 창 3 : 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생명나무보다 훨씬 멋져 보였다는 것이지요. 사단이 어설프게 유혹하겠습니까? 그러나 잘 따져보아 그것이 거짓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말씀하실 때 또는 장차 이루실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실 때는 반드시 경고를 하십니다.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종말 장’이라 하는 마 24장에 보면 이 경고가 몇 번이나 나옵니다.(4, 11, 24절)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하나님 백성이 약속대로 오신 메시야를 왜 거부했습니까? 행 13 : 27 “예루살렘에 사는 자들과 저희 관원들이 예수와 및 안식일마다 외우는바 선지자들의 말을 알지 못하므로 예수를 정죄하여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도다” 그렇습니다. 외웠습니다. 성경을 외웠는데 알지는 못했답니다. 그러니 읽고 외우고 쓰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읽지도 외우지도 쓰지도 말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모두 필요하고 소중한 일이지요. 그런데 그 뜻을 알지 못하고 한다면 의미가 없다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깨닫고 알고 해야 소중하고 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 : 10) 그런데 모른다면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영원히 기도만 할 겁니까? 언젠가는 이루어지겠지요. 문제는 이루어졌는지 안 이루어졌는지도 모른다면 어쩔 거냐, 이겁니다. 메시야가 왔음에도 왔는지 안 왔는지 모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런 식으로 해서 예수님께 가겠습니까?
구약시대 백성은 예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듣고 외우기도 하였습니다. 예언 자체는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예언이 봉해져 있다는 것입니다. 사 29 : 11 “그러므로 모든 묵시가 너희에게는 마치 봉한 책의 말이라 그것을 유식한 자에게 주며 이르기를 그대에게 청하노니 이를 읽으라 하면 대답하기를 봉하였으니 못하겠노라 할 것이요” 그래서 유식해도 모르고 무식해도 모릅니다. 그러나 알 때가 옵니다. 언제입니까? 그 예언이 이루어질 때입니다. 소위 약속하신 목자가 오실 때입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알게 되는 것이지요.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언의 말씀과 대조해보면 아는 것입니다. 과연 그러한가, 대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스스로 이 작업을 하심으로 제자들에게 당신을 증거하셨습니다. 눅 24 : 27 “이에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신 일은 사실 이것입니다. 44 - 45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고 믿어야 하는 근거는 오직 성경입니다. 성경을 깨닫지 못하면 믿는다고 하는 것도 헛것입니다.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성경을 떠난 하나님이 참 하나님일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믿는 것입니까? 성경을 읽는다고 믿는 것입니까? 성경을 암송한다고 믿는 것입니까? 깨닫지 못하면 헛것입니다. 더구나 깨닫지 못하는 심령을 마귀가 노리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미혹합니까? 자기 것으로 미혹합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두고 사람의 가르침으로 바꿉니다. 오랜 세월 하나님 백성은 메시야를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까 분명 오시리라는 것은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오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다르게 믿고 있었습니다. 막 14 : 61 “잠잠하고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물어 가로되 네가 찬송 받을 자의 아들 그리스도냐”
‘찬송 받을 자’ 하나님이 어떤 분입니까? 거룩하시고 존귀하시고 모든 영광이 집합하여 있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분이십니다. 그런 분의 아들이라면 그와 버금가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네 앞에 잡혀온 청년을 보십시오. 거지나부랭이 같이 초라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합니까? 막 14 :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랍니다. 믿어집니까? 이런 젊은이에게 무슨 말을 해주겠습니까? 우리 아버지는 너 같은 거지 나부랭이를 아들로 두신 적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너 같은 놈 입에서 감히 우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다니! 우리 아버지를 모욕해도 유분수지! 그래서 참람하다고 한 것입니다. 어떻게 할까요? 속된 말로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도록 하였습니다. 그래도 분이 풀리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서기관 바리새인, 제사장과 장로들 소위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자기들의 계명이 있을 뿐입니다. 자기들이 생각하고 있는 하나님만 있을 뿐이지요. 마귀는 그렇게 자기 목자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성전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은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그들이 하나님의 목자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언젠가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마 22 :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들은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몰랐습니다. 그러니 오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있어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모르니까. 그러므로 자기 것을 말합니다. 자기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했겠지요.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확고하게 믿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겉은 양이요 하나님 목자이지만 속은 이리요 마귀의 종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가리켜 뱀이고 독사의 새끼들이라고 하셨습니다. 마 23 : 33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 너희가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하겠느냐”
초림 때의 이 사건은 오늘 우리에게 거울입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2천 년 가까이 지나왔습니다. 구약시대의 4천 년을 합하면 합이 6천 년입니다. 6천 년 긴 세월 하나님은 하나님 나라 회복을 기다렸고 역사해 오셨습니다. 벧후 3 : 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그렇다면 6천 년 곧 6일이 지난 오늘 우리는 과연 7일 안식을 앞두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날짜는 몰라도 그 징조는 분명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회복하시려 참 목자를 보내시니 마귀의 목자들이 하나님의 교회들을 장악하여 그 백성을 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것을 먹이고 있지요. 성경을 모르니 그것은 당연한 일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나님 백성을 미혹하여 붙잡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성전 곧 교회를 붙잡고 있으니 하나님 백성이라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려니 믿고 따라갑니다. 초림 때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러나 경계해야 할 것은 그것이 마지막 때 결코 변명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소경인 목자를 따라가는 소경도 구덩이에 빠지기는 마찬가지라는 말입니다. 마 15 : 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그러므로 성도 각자가 정신 차리고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세상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지요. 성경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을 이야기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야기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워 하나님 백성으로 세상을 하나님 나라로 회복하시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하나님 나라로 세운 성전과 교회에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도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부터 처결하고 새로운 하나님 나라를, 하나님 백성을 세워서 이루고자 하시는 겁니다. 성경은 하나님 백성이 어떻게 하나님을 등지고, 그래서 어떻게 심판을 받고, 어떻게 새롭게 구원받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해주고 있습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승리가 약속되어 있고 그 이루어져 가는 과정 속에 우리들이 살고 있습니다. 이제 바야흐로 신약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그만큼 사단 마귀의 방해공작 또한 치열합니다. 엡 6 : 12 - 13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단의 사주를 받은 목자들은 혈과 육의 전쟁으로 말하고 가르칩니다.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와 줄줄이 달라붙은 화려한 이력과 경력은 하나님 백성을 현혹하는데 매우 유용한 무기들입니다. 유창하고도 달콤한 설교는 과연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한 열매입니다. 에덴동산의 선악과도 겉으로는 생명나무를 능가하였습니다. 오죽하면 하나님의 사람들 아담과 하와가 미혹을 당하였지요. 그렇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의심 없이 따라갑니다. 화려한 성전 웅장한 교회, 과연 그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그래서 정말 하나님 백성은 그곳을 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무기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 진리입니다. 저들의 설교는 젖과 꿀처럼 달고 먹기 쉽습니다. 세상 이야기로 하면 귀에 솔깃솔깃 들어옵니다. 재미있습니다. 은혜가 넘친답니다. 그러나 진리의 말씀은 단단한 식물입니다.(히 5 : 12 - 14) 성경 말씀대로 하면 딱딱하다고 합니다. 먹기 불편합니다. 그래도 그 진리의 말씀이 우리를 살리는 것입니다. 많이 씹어야 합니다. 깨달아야 비로소 그 맛을 알게 됩니다.
더욱 조심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의중은 제쳐두고 자기 임의로 연구하고 생각하고 믿는 것입니다. 특히 하늘 이야기를 땅 이야기로 생각하고 믿고 전하는 일입니다. 분명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데 세상 전쟁 이야기나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사실 땅에서는 역사 이래로 전쟁이 있어 온 것 아닙니까? 엡 6 :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우리 신앙인들의 전쟁은 곧 마귀와의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땅의 이야기로 둔갑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게 마귀의 짓거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성도들이 목자가 전하고 있으니 분별없이 아멘, 하고 받아들입니다. 마귀가 손뼉을 치겠지요. 자기 바라는 대로 되어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목자가 하나님의 목자이겠습니까? 요란스런 가운을 입고 화려한 강단에서 외치고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들 스스로 정신 차리지 아니하면 함께 구덩이로 떨어집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7 : 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하나님의 종이든 마귀의 종이든 똑같이 교회에 있고 똑같이 하나님의 종이라고 우깁니다. 분별하는 방법은 하나입니다. 그 우는 소리 곧 설교를 들어보면 압니다. 양은 양의 울음을 낼 것이고 이리는 이리의 울음을 낼 것입니다. 사람의 계명, 세상 이야기나 떠드는 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닙니다. 마지막 때 기근이 일어나고 지진이 일어난다고 아우성입니다. 마 24 : 7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 이게 오늘날 새삼스럽게 일어나는 일들입니까? 역사 이래로 이 지구촌에 빈번하게 일어났던 일들입니다. 그러니 세상 이야기로 말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예수 천당’이나 외치면서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고집하면 천국과는 상관없이 지옥행입니다. 왜 좁은 문이고 협착한 길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마 7 : 13 - 14 “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목숨을 걸고 믿음을 지켰는데 그렇게 한가하게 신앙하며 천국 타령이나 한다면 좀 미안하지도 않습니까? 참으로 정신 차리고 올바른 목자를 찾아야 합니다. 화려하고 요란한 교회와 목자를 쫓아다닐 것이 아니라 하늘의 말씀을 전해주는 목자를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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