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제가 2018년부터 작성해 온 글로써, 매년 조금씩 교정하여 다시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 제목에서 "가장"을 빼고 그냥 "지혜로운 기도"라고 할까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가장 지혜로운 기도가 맞는 것 같아 그냥 뒀습니다.
(마 14:25)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마 14:26) 제자들이 그가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마 14:27) 예수께서 즉시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마 14:29)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마 14:30)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마 14:31)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마 14:32)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베드로는 참 위대한 사람입니다. 풍랑 가운데서 배 밖으로 나간 유일한 사람이며 또 예수님을 제외하고 인간 중에 물 위를 걸은 유일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생각 해 보십시오. 바람이 부는(마 14:24) 물 위를 걷다니요!
제가 호주에서 잠깐 사역할 때 풍랑이 이는 날 원치 않게 바다낚시를 갔다가 배멀리로 혼이 난 적이 있었습니다. 파도가 거의 2미터 정도 됐고 그 2미터 짜리 파도들 사이에 우리 배가 놓여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세요) 그런 저로서는 바람부는 물 위를 걷겠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 자체에 감탄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가 파도를 보자 물에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항상 예수님을 바라 봐야한다', 이것이 이 구절을 인용하는 거의 대부분 설교의 주제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예수님은 과연 베드로가 물 위를 걷기 바라셨을까?"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지금부터는 아직 번역되지 않은 앤드류 워맥 목사님의 설교를 인용합니다.)
(마 14:28)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하니
그의 순수함, 믿음, 열정이야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지만 그의 질문은 분명 잘못되었습니다. "주님, 제가 물 위를 걷기 원하십니까?"라고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그는 자신이 미리 답을 정해 놓고 물었습니다. "만약 당신이 주님이라면... " 그리고 그 이후의 답은 이미 결정되어 있던 것입니다.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자신의 어젠다, 자신의 계획과 뜻이 이미 있었습니다. (보통 답정너라고 하는 우리의 기도와 비슷합니다.)
물 위를 걸어서 주님에게까지 갈 만한 믿음이, 당시의 베드로에겐 없었습니다. 그가 만일 "주님, 제가 물 위를 걷기 원하십니까? 제가 갈 수 있을까요?"라고 했다면 결과를 보아하니 예수님은 "아니. 오지 마. 내가 갈께."라고 하셨을 것입니다. 물 위를 걸은 것 자체는 너무 대단하지만 이 사건의 맥략을 쭈욱 읽어보면 "베드로는 도대체 왜 물 위를 걸은거야?"라는 생각이 듭니다. 배 안에 물이 차서 그랬다고 하기엔 배 안이나 밖이나 물은 물이고 제가 바다낚시를 가 보니 그래도 배 안이 낫습니다.
내가 미리 내 생각과 내 계획대로 시나리오를 정해놓고 주님께 요구하기 보다는 미래를 아시고 나를 아시는 주님께 "주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제가 뭘 하기를 바라십니까?"라고 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이 가장 좋은 것임을 안다면 모든 상황, 모든 순간에 주님의 뜻을 묻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기도가 아니겠습니까?
저의 삶도 돌아보면 지금 생각해도 제가 너무 기특할 정도로 순전히 주님만을 따르던 시절이 있었고 베드로처럼 답을 정해 놓고 ‘이렇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물론 베드로처럼 바다에 빠졌을지언정, 물 위를 걸은 경험은 남듯이 모든 시행착오에는 교훈이 남고 주님은 저의 모든 실수와 실패를 들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을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레슨처럼 그때 내가 주님께 주님의 뜻은 무엇인지 물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저는 그때, 그런 성숙한 질문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입니다. 다만, 앞으로의 장래를 위해 과거를 되돌아보며 되새겨 보는 것이지요.
과거의 저도, 여러분도 한때 하나님을 "천지신명"님쯤으로 생각했던 적이 다 있지 않습니까?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내 뜻대로, 내 판단대로, 내 의견대로 다 정해놓고 ‘그렇게 되게 만들기 위해 하나님을 움직이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라면서 하나님을 움직여서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방법을 찾아 헤맸던 시간들... 우리 하나님은 천지신명이 아닌데, '비나이다, 비나이다' 대신, ‘주시옵소서, 주시옵소서.’하면서 어떻게 해서든지 내 뜻과 다른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서 내 뜻을 이루려는 것. 이것이 바로 '종교'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시며,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가 아니라 나를 향해 나쁜 생각은 하나도 없으시고 나를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는(시 139:17), 죽음같이 강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입니다(아 8:6). 나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존재이신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그분의 자녀로서 한없는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이렇게 해 주세요, 저렇게 해주세요.'하면서 불완전한 판단력을 가진 내가 정해 놓은 것들을 완전하신 그분께 마구 강요하며 떼를 쓰지 않아도 됩니다.
(이쯤되면 이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해야 하나?' 이 질문은 기도에 대한 잘못된 이해, 잘못된 정의에서 나옵니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더 좋은 기도 방법 한 가지'를 꼭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짧은 해답을 드리려고 합니다.)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할까요? 당신의 뜻은 무엇입니까? 제가 기꺼이 행하겠습니다. 그러나 순종할 능력도 아버지께서 주십시오. 혼자서는 못하니 은혜를 베풀어 주세요"라고 아름다운 관계 가운데 기도할 수 있습니다.
마치 공산당처럼, 사람에게는 물론이거니와 하나님에게까지 자기의 뜻을 강요하면서 하나님의 팔까지 비틀어 내 뜻을 이루려 하던 우리가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은혜를 알아 그분의 뜻 가운데 안식하게 되었는지, 정말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내 의견이 아닌 하나님의 의견을 따라 우주에서 가장 놀라운 존재이신 우리 아버지 하나님과 더 친밀하고 깊은 관계 가운데 들어가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