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26/가외加外의 재미]‘자연인 친구'여, 부디 건강하시라!
이 졸문은 ‘단상斷想’이 아닌 ‘귀향백서歸鄕白書’라 해야 맞겠다. 2021년 끝자락은 아직 두 달이 남았건만, 농사 갈무리를 하고 아내의 집에 안착하여 사흘째, 마침 시월의 마지막날이기에 지난 1년을 정리할 마음이 뭉게뭉게 들기 때문이다. 밭농사, 논농사가 나의 주된 일상일 수는 있지만, 농사꾼이 아닌 주제에 중언부언해봤자 ‘밑천’이 다 드러날 것은 뻔한 이치. ‘가외加外의 재미’ 그러니까 ‘그밖의 재미’에 대해서도 정리를 하고 싶었다.
‘자연과 벗 삼아’ 나날을 산다는 것은 ‘멋진 삶’이다. 오랜 세월 꿈꾸며 바라던 삶이었다. 날마다 똑같은 해님과 달님이 떠올라 낮과 밤을 이루지만, 그것을 관찰하는 게 아니고 늘 보고 있으니, 우리가 언제 한번 이렇게 산 적이 있었던가. 도회지의 삶은 하늘을 우러러 보거나, 땅을 굽어 볼 필요가 어디 있는가. 하지만 시골의 삶은 날씨에 민감해서가 아니고 눈만 뜨면 해를 저절로 보게 되고, 밤이 되면 달이 어디에 있나 올려다보게 된다. 달은 기본이고 하늘에 총총히 박혀 빛을 발하고 있는 수많은 별들은 내 삶의 보너스가 아니런가. 숨을 쉬는 맑은 공기가 좋고 ‘코로나 마스크’를 쓰지 않아서도 좋다. 이른바 청정지역.
귀향 또는 농촌예찬론을 쓰려는 게 아니다. 아무리 자연自然이 좋다지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어쩌고 한 윤선도처럼 ‘오우가五友歌’를 부를 일은 아니다. 역시 사람은 사람과 어울리며 살아야 ‘맛’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참 복이 많은 편이다. 이웃마을에 사는, 나는 그를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그는 초등학교 1년 후배이기에 칼같이 ‘형님’이라고 부르며 거의 날마다 붙어사는 이가 있다. 차마 그 친구의 ‘인생 이야기’를 물어보지 못했지만, 띄엄띄엄 전해 들은 이야기는 소싯적부터 공사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대형 건설사의 하청을 받아 지하철 건설을 한 잘 나가는 중소 건설사 대표였다 한다. 노가다 현장직원이 4000명이 넘었고, 서울 지하철 환승구간 공사는 거의 도맡아한 ‘잘 나가는’ 대표가 어찌 ‘몰락’했는지는 모르지만,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뜨고 본인도 위암으로 위를 100% 절제했는데 간으로까지 전이되면서 고향마을로 낙향한지 7년이 됐다던가.
지독한 항암치료 끝에 치아가 모두 망가져 대문니 두 개만 덜렁 있으니 볼썽사납기가 말도 못한다. 5년이 지나 완치판정을 받고 임플란트를 할 수 있다하여 ‘대공사’를 하려는데 그야말로 ‘빈손’이기에 하지도 못하고 있다. 생활은 일제때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할아버지 덕분에 50만원에 못미치는 유족연금이 전부라 했다. 잘 나갈 때 지어놓은 대궐같은 2층 양옥집에서 덩그러이 혼자 살고 있는, 소위 말하는 ‘루저looser 인생’인 셈. 보고 듣고 실제로 해본 사회경험이 무척 많을 뿐아니라, 재담才談도 보통을 훨씬 웃돈다. 하지만 그 동네는 '흙속에 진주'인 그를 깔보는 것같아 안타깝다.
암투병 이야기를 조금 들었는데, 고향에 금방이라도 뼈를 묻으러 내려왔지만, 50대 중반 나이에 살려고, 살아야겠다는 의지까지 없어졌을 것인가. 군내버스를 아무거나 타고 아무 종점에서 내려 인근 산에 올라다니기를 3년간 밥 먹듯 했다고 한다. 임실군내 오르지 않는 산이 없을 정도로 혼자 쏘다니며 자연식(엄나무 수액으로 밥을 해먹는 등)을 하며 ‘나홀로 치유’에 나섰다고 한다. 이 친구의 ‘자연인 행세’는 들으면 들을수록 흥미롭고 모두 금시초문인지라 “진짜?” “정말?”하며 머리를 갸우뚱하게 한다. 어느 산 어느 지역에 ‘다래 군락지’가 있고, 어느 골짜기에는 담비가 살고, 송이버섯과 고비(고사리종류)가 어디에서 나오는지, 산에 산재하는 ‘모든 것everything’을 다 알고 있다고 보면 된다. 어쩜 그럴 수가?
두어 달 전에는 제법 높은 동네 뒷산에 올라 싱싱한 다래를 한 푸대 따가지고 청매실과 같은 방법으로 엑기스(청)를 담았다. 물론 진두지휘는 그 친구. 나는 한 발짝도 앞서거나 나서지 못한다. 며칠 전 아내와 함께 다래청을 떠먹어봤는데, 솔직히 매실청은 ‘저리 가라’였다. 완전한 ‘울트라캡션 짱’. 그 오묘한 맛이라니? 어디 그뿐인가. 산山은 그렇다치고 천川(내)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다. 어느 저수지에 무슨 물고기가 살고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민물새우, 자라, 다슬기 등은 어떻게 잡는지를 디테일하게 알려준다.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각종 잡기雜技의 가르침을 따라가기에 벅차다. 속으로 ‘오매, 어떻게 이런 친구가? 내가 대체 무슨 복이대?’라고 한 적이 여러 번이다. 오죽하면 어느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의 주인공들이 별 것 아니라고 생각했겠는가. ‘건설인들은 다 이럴까?’ 생각도 해봤다. 무슨 일을 하든 손이 엄청 빠르고 요령(일머리)이 뛰어나다. 이른바 '도구를 아는, 도구를 다룰 줄 아는 인간'인 것이다. 사귄 지 1년도 채 안되는데, 벼라별 경험을 한 것은 순전히 그 친구 덕분이다.
여수에서 직송한 하모로 하모탕을 어찌나 잘 끓이는지 감탄을 연발하게 한다. 재야의 요리고수와 요리달인. 완전, 완벽한 쉐프였다. 백 마리도 넘는 하모의 뼈와 껍질을 근 10시간 고아 만든 육수로 어죽과 된장국을 끓였다. 제법 식도락가를 자처하는 나는 아예 할 말을 잃었다. 언제 어디에서 이런 신묘한 요리를 배웠을까, 불가사의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단코 과장이 아니고 오버도 아니다, 즉석에서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신조로 쓱쓱싹싹 만들어내는 그의 재빠른 요리 덕분에 우리집을 찾은 대처의 친구들이 여러 번 깜짝 놀란 게 여러 번이었음을, 그 고마움을 이 졸문에서 처음으로 밝힌다. ‘흉칙한’ 외모의 그를 나는 언제나 ‘내 친구’라며 자랑스럽게 소개하는데 한번도 주저하지 않았다. 그 맛이 궁금하시는 분, 언제든 오시라.
그 친구 말이 재밌다. “자라울(그 친구 동네이름) 백수와 냉천(우리 동네 이름) 백수가 너무 늦게 만났다”며 자기의 모든 상식, 지식, 기술을 전수해주지 못해 지나치게 안달복달이다. 그렇다. ‘두 동네 백수白手’가 어쩌면 조만간 ‘무슨 일’을 저지를 것같기도 하다, 그 가운데 백미白眉는 단연 그가 수년간 많은 시행착오 끝에 터득했다는 그만의 '농사기술農事技術’이다. 물론 많은 동네사람들이 “걔가 무슨 농사를 아냐. 그 친구 말 절대 믿지 말라”며 ‘개무시’하고 있지만, 나는 철석같이 그의 ‘내공’을 믿고 있다. 하여, 그 친구의 훈수에 따라, 내년부터 내 명의의 논 600평에 아버지의 걱정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모작을 하기로 작정했다. 쌀 대신 하지감자와 콩농사이다. 내심 기대가 크다. 1필지 소득이 10필지 논농사와 비숫하다면 누군들 덤비지 않으랴. make money 때문만은 아님을 아실 것이다. 만의 하나, 실패를 한다해도 친구를 원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누가 아는가. 카잔차키스의 희대의 명작 <조르바>같은 작품이 탄생할는지? 흐흐.
첫댓글 백서! 보너스! 이모작!
거의 잊어버린 단어인데, 추억마저 동반 생각나게 해주는 우천의 글 내공에 박수 짝짝짝.
냉천부락의 보너스는 만프로, 우천의 이모작은 대박, 추후 우천백서 기대됨다.
꿀맛 같은 우천생활 글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