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수업 시간에, 진평왕릉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경주로 소풍가는 이야기를 나누면서 ㅡㅡㅡ
집에 와서 컴을 뒤적이니, 몇 년 전에 쓴 수필이 있어서, 도움이 될까하여
올려 봅니다.
진평왕릉
이동민
경주에서 학교를 다녔다.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월성이 있고, 안압지가 있다. 조금 더 먼 곳이라면 남산 아래에 삼릉이 있고, 동쪽 자락에는 옥련암이 있는 탑골이 있다. 고적한 분위기를 즐기려 자주 들린 곳이 반월성이었고 오릉 숲 길이었다.
유홍준 선생이 쓴 문화유산답사기에는 경주의 참 맛을 느끼려면 맨 먼저 들려야 할 곳으로 진평왕릉을 꼽았다. 거리로 따진다면 남산이나 진평왕릉이나 고만고만한 거리이지만 나는 한 번도 들려보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글을 읽었을 때는 어디쯤에 있는지 조차 몰랐다. 경주에 살았던 내게 떠오르는 곳은 오릉이나 삼릉이지 진평왕릉은 아니었다. 신라를 세웠고, 신라가 망해가는 전설을 머금은 곳이니 이 보다 더 경주다운 곳이 어디에 있으랴. 청소년시절에 이곳을 수도 없이 찾아가서 거닐곤 했다.
마음만 먹으면 진평왕릉은 언제든지 찾아갈 수가 있다. 나는 책을 읽고 나서 궁금하여 진평왕릉을 여러 번이나 찾아갔다. 갔었지만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봄에도 갔고, 여름에도 갔고, 가을에도 갔고, 겨울에도 갔다. 가족들과도 갔고 답사반을 데리고 가기도 했다. 경주의 왕릉은 구불구불한 소나무들이 숲을 만들고 있어 안까지 들어가지 않으면 둥근 곡선을 만드는 왕릉을 볼 수 없다. 진평왕릉의 숲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소나무는 듬성듬성하고, 군데군데에 수 백년은 됨직한 왕버들이 있다. 왕버들은 가을이면 잎을 떨구어서 숲이라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
왕릉의 잔디에 앉으면 바로 눈 앞에 보문들이 펼쳐진다. 들녘이 끝나면서 낭산의 마루와 닿아 있다. 낭산 기슭에 있는 마을의 집들은 대문까지 보인다. 담 너머로 솟아있는 나무들도 보인다. 왕릉의 잔디에 앉아서 바라보면 철마다 풍광이 달랐다. 보리가 익을 때는 산 아래 마을에 꽃이 피어 화사하다. 벼가 익어 출렁거릴 때는 감도 빨갛게 익어서 꽃처럼 보인다. 나는 여기에 앉아 있으면 시골의 우리 마을이 생각난다. 뒷산 자락에 있는 묘지의 잔디에 앉아서 바라보면 들녘이 멀리까지 펼쳐졌다. 들녘 너머에는 초갓집이 엎드려 있는 우리 마을이 보였다. 봄철이면 복사꽃과 홍도화로 뒤덮여서 무척 화사하고 푸근했다.
여름에 진평왕릉에 오면 푸른 벼들이 마을에 닿아있고, 마을너머 낭산의 푸른 숲과도 손을 잡고 있다. 겨울이면 텅빈 들의 갈색 흙빛이 황량하지만 산 아래에 선명히 보이는 탑이 어둔 마음을 어루만져 준다. 낭산 위의 숲속에는 선덕여왕 능이 있다. 진평왕의 딸이 그곳에 있다. 지난번에 선덕여왕 능에 가서 아버지인 진평왕릉이 보인다고 설명했다. 소나무 숲이 너무 무성해서인지 나무들에 가려 왕릉이 바로 보이지는 않았다.
어릴 때를 보낸 시골 마을과 같아서 가장 경주다운 곳이라고 하였을까? 여기에 앉아 있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두고 풍광은 바뀌어도 한결같이 느껴오는 것이 있다. 고요함이다. 내가 어릴 때에 느꼈던 시골 마을의 적막함이 여기에 있다. 소리는 어디로 숨어버리고 햇살 아래에 잠겨 있는 마을은 마치 깊은 물속의 적막처럼 느껴졌다. 고요함이 오히려 두렵기까지 했다. 어릴 때의 기억 속에 잠겨 있던 모습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경주다운 참 맛이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까? 아닐 것이다?
겨울인데도 모처럼 경주 일원의 탑을 답사하러 갔다. 낭산의 뒷자락에 있는 황복사지 탑에 갔다. 산마루를 타고 오르면 바로 선덕여왕 능묘이다. 그리고 들녘 너머에는 눈앞에 진평왕릉이 보였다. 왕버들은 잎을 떨구어 버렸고 소나무는 듬성듬성했다. 마른 잔디로 덮힌 능묘가 오후의 겨울 햇살을 받고 유연한 곡선의 자태를 드러냈다. 아득하긴 해도 맑은 공기 탓인지 능묘가 윤곽을 보여주었다. 선덕여왕께서 아버지를 바라보기가 참 좋은 날이네. 중얼거려 보았다.
진평왕릉를 감싼 몇 그루의 소나무 옆은 제법 높은 둔덕이었다. 둔덕은 능묘 너머로 산자락과 이어졌고, 언덕베기 뒤에는 보문 마을이 숨은 듯이 보였다. 갑자기 우리 동네의 동구가 떠올랐다. 마을 입구에 제법 높은 돌무더기가 있었다. 오늘처럼 햇빛이 기울어가는 오후녁이면 나는 학교를 가려 동구를 나와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어머니는 내가 가물가물해질 때까지 돌무더기 위에서 나를 바라보았다.
진평왕은 저 높은 둔덕에 올라 딸을 애린의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딸에게 물려준 나라가 위태위태 했다. 비담을 중심으로 귀족들은 반란을 일으켜서 바로 코 앞의 명활산성에 진을 쳤다. 당나라에서는 여자 왕이라고 조롱하는 병풍 그림을 보냈고, 삼국은 서로 집어삼키려 으르렁거리던 것이 선덕여왕 때가 아닌가. 선덕여왕도 아버지에게 가슴 답답함을 털어놓고 싶어서 진평왕릉이 한 눈에 보이는 낭산의 꼭대기에 묘지를 잡았을 것이다.
그런 딸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나는 황복사지 탑에 답사를 와서 불현 듯이 동구 앞에 서있던 어머니를 느꼈다. 아버지와 딸의 애틋함이 느껴지는 곳이라서, 가장 경주다운 곳이라고 하지 않았을까?
2017. 1.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