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는 모순이 아닌 중첩결정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
두 중년의 남성이 사소한 시비를 벌이다가 한 남성이 분을 참지 못하고 흉기로 상대방의 머리를 내리쳤다. 상대방 남자가 키 작고 흉측하게 생긴 놈이라고 자극하는 바람에 가해자는 순간적으로 자제력을 잃었던 것이다. 몇 분 후 맞은 남자는 사망하였다. 그렇다면 가해자가 행한 끔찍한 폭력의 원인은 명백한 것일까? 어쩌면 가해자의 지나친 외모 콤플렉스가 행위의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외모 콤플렉스를 지닌 모든 사람이 이런 행동을 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가해자의 인격적 미숙함을 원인으로 꼽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해자가 평소에 보통 사람들보다 심한 인격적인 결함이 없었다면 사정이 다를 수도 있다. 사소한 시비에 휘말리기 전에 집에서 부인과 심하게 다투고 나왔을 수도 있고, 본의 아닌 무단횡단으로 어린 운전자에게 욕을 먹은 것이 화근일 수도 있다. 혹은 참을 수 없는 삶의 권태감이 그의 정신을 괴롭히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가해자의 행위는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해서 설명할 수가 없다. 너무나 많은 계기들이 이 순간적인 행위를 유발시킨 원인들인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현상도 하나의 단일한 원인으로 설명할 수 없고 수많은 원인들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이를 ‘중첩결정(surdétermination)’이라고 부른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현실은 이렇게 무수히 많은 원인들이 중첩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마르크스주의는 이렇게 실타래처럼 얽혀 있는 원인들을 매우 단순한 하나의 근본적인 원인으로 소급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알튀세르는 현실이 복잡하게 얽혀서 중첩적으로 결정되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하나의 근본적인 단일한 모순으로 소급하는 전형적인 방법론을 헤겔의 변증법으로 보았다.
헤겔의 변증법은 현실을 모순(Widersprung, contradiction)의 결과물로 이해하며, 현실은 근본적인 모순의 관계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의 변증법을 충실하게 따르고 모순의 원리에 의거해서 현실을 설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알튀세르에 따르면 변증법에 대한 충성은 현실을 단순화함으로써 현실과는 거리가 먼 추상적 관념만을 만들 뿐이다.
가령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하는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에 따르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인 모순은 자본과 노동의 모순이며, 여타의 모순들은 이 근본적인 모순의 피상적이고 변형된 형태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이들에 따르면 여성과 남성의 모순, 지역 갈등, 인종 문제, 심지어 환경 문제까지도 계급모순의 하위 형태에 불과하다. 여성과 남성의 갈등이나 모순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우선 계급모순이라는 근본적인 모순의 관계를 해명해야만 가능하다.
말하자면 계급모순이 자본주의 현실의 ‘본질(essence)’이며 현실에 나타나는 다양한 갈등과 모순들은 이러한 본질이 드러난 ‘외관(혹은 현상, appearance)’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돈이 많은 집안의 남자와 가난한 집안의 여자가 남자 집안의 반대로 헤어졌다고 치자. 전통적인 마르크스주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들의 헤어짐은 유산자와 무산자 간의 계급적 모순의 결과로 설명된다. 설혹 남자가 부모를 설득하는 과정에서 지쳤거나 변심했다 하더라도 그 변심의 원인이 궁극적으로는 계급모순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한다.
남자의 변심은 이별의 원인이 아닌 계급모순이라는 본질이 외관으로 드러난 현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렇게 모든 현상을 계급모순이라는 하나의 본질로 소급하여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현실과는 동떨어진 논리적인 추상이자 관념에 불과하다.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란 유물론이나 과학적 세계관과는 거리가 먼 변형된 관념론에 지나지 않는다.
알튀세르는 〈모순과 중첩결정〉(Contradiction et surdétermination, 1964)이라는 논문에서 마르크스주의에 내재한 헤겔주의 전통을 청산하기 위해서 모순이 아닌 중첩결정이 현실분석의 방법론적 토대가 되어야 함을 역설하였다. 앞서 설명한 대로 중첩결정이란 모순과 달리 어떤 현상을 결정하는 하나의 원인으로 소급할 수 없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원래 중첩결정이란 프로이트가 히스테리의 환자를 분석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용어이다. 보다 구체적으로는 꿈의 내용이 하나의 단일한 의미로 환원될 수 없고 다양한 요소들에 의해서 중첩되어 결정된다는 무의식의 기제를 설명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이러한 중첩결정의 방법론을 마르크스주의에 적용할 경우 사회는 하나의 단일한 모순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가령 자본주의 사회의 현실은 단순히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라는 하나의 단일한 논리적 추상으로 설명될 수 없다.
이에 반해 변증법적 마르크스주의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라는 단순한 관념적 추상에 의해서 현실을 설명한다. 이 모델에 따르면 오늘날의 사회는 자본주의 생산 양식이라는 단일한 사회로 추상될 수 있으며, 자본주의 생산 양식은 끊임없이 발전하는 생산력과 이를 제약하는 자본주의 생산 관계 사이의 모순에 의해서 파국적인 결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생산력은 사회의 형태와 관계없이 원시시대부터 현재를 거쳐 미래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발전하는 상수로 전제된다.
그러나 알튀세르는 자신의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Étienne Balibar, 1942~)와 공동으로 저술한 《자본론 읽기》(Lire le Capital, 1965)에서 마르크스의 생산력이라는 개념 또한 생산 관계와 무관하지 않음을 밝힌다. 가령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중세 봉건제의 생산력과 자본제의 생산력을 쟁기와 기계에 적용하여 비교하는데, 이때 쟁기와 기계는 단순히 생산 능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지표가 아닌 다른 사회적 관계를 보여주는 지표로 간주된다.
쟁기가 농노와 맺는 관계는 실질적 점유의 관계인 반면 공장의 기계와 노동자가 맺는 관계는 소유로부터 완전한 분리의 관계라는 점에서 다른 사회적 관계, 즉 생산 관계를 나타낸다.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생산력이라는 개념을 결코 생산 관계와 분리해서 독립적으로 사용하지 않았다.
모순이 아닌 중첩결정을 선택한 알튀세르의 이론적 결과에 따르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사회는 결코 단일한 생산 양식으로 추상할 수 없다. 즉 현실의 사회에는 자본제 생산 양식, 봉건제 생산 양식, 사회주의 생산 양식 등이 혼재하여 있다. 다양한 생산 양식은 오로지 논리적 추상에 불과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생산 양식에서 다른 생산 양식으로 필연적으로 이행한다는 주장은 지극히 관념론적인 추상에 불과하다.
한편 모순과 헤겔 변증법에 대한 거부는 《자본론》에 대한 전통적인 독해에 대해서도 수정을 요구한다. 가령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에서 ‘본원적 축적’은 중세봉건제 사회에서 농노가 토지로부터 분리되어 산업노동자로 변질되는 폭력적 과정이자 동시에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한 최초의 대자본이 축적되는 필연적 과정이다.
그러나 알튀세르와 발리바르는 ‘본원적 축적’ 과정이란 중세봉건제의 모순이 자본제로 해소되는 필연적 과정이라기보다는 다양한 생산 양식의 공존 속에서 기존의 지배적인 양식이 헤게모니를 상실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이러한 와해로부터 미리 주어진 어떤 새로운 형태의 사회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말하자면 한 사회로부터 다른 사회로의 필연적 이행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요소들의 재배치에 의한 우발적인 변화만 존재할 뿐이다. 여기서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헤겔의 변증법적 전통으로부터 분리하여 구조주의의 맥락으로 재구성하고 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회는 모순이 아닌 중첩결정에 의해서 설명할 수 있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
*미분-라이프니츠에서 들뢰즈, 알튀세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