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여름, DE-73 충남함은 거문도 대간첩작전에 투입되었다가 헛고생만 하고 흐지부지 작전은 끝났다.
그후 3개월이 지난 10월 하순의 어느날이었다. 이번에는 대원들이 꿈도 꾸지 못했던 즐거운 전문을 받았다.
- 목포에 입항하여 간호사관생도 여행단을 싣고 제주까지 수송하라!
너무나 신바람나는 내용이었다. 함정에 오는 전문은 비밀이지만 이 내용은 금방 함내에 다 퍼졌다. 젊은 아가씨들,
그것도 멋진 간호사관생도들을 수송한다니 대원들은 벌써부터 분홍빛 기대에 부풀어 가슴을 설레었다. 고참 수병,
부사관 할 것 없이 총각 대원들은 맞선보러 가는 신랑감이나 되는 것처럼 기분이 들떴다. 남의 눈치 볼것없이 양치질을 하고
면도를 하고 새하얀 빵떡모자에 칼날같이 주름잡힌 외출복을 갈아입으며 부산을 떨었다. 그러지 않아도 깨끗한 복장으로
외부 손님을 맞이하라고 지시를 내릴 판인데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온갖 멋을 다 부리니 참으로 가관이었다.
목포항에 입항했다. 수송할 인원은 인솔자를 포함해서 60명이었다. 간호사관생도 50명에 인솔자가 10명이나 됐다.
인솔 책임자는 여군 소령이었고 남자 군의관 3명과 훈육관인 여군 간호 중위, 대위가 6명이었다. 먼저 침실 배정부터 했다.
꽃밭?에서 근무하면서 기합이 빠져 더부룩하게 머리를 기른 군위관들은 고생 좀 해보라고 널뛰기를 가장 심하게 하는 함수
위관장교 침실을 비워주었다. 인솔 책임자와 간호장교들은 함미에 있는 기관장교 침실에 모셨다. 파도가 치면 함수보다 함미가
널뛰를 덜했다. 50명의 뻘따니 같은 생도들은 제일 넓은 후부 대원침실에 수용했다.
목포항을 출항해서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항해당직에 걸린 노총각들은 애가 달아 어쩔줄 몰랐다. 근무시간은 바꾸자꼬 담배 한 갑을 내놓기도 했다. 항해가 시작되자 한껏 멋을 부린 고참 하사들이 갑파을 기웃거리며 생도들의 동태를 살폈다.
함정이 올망졸망 섬 사이를 빠져나오는 동안 바다는 잔잔했다. 날씨도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고 상쾌했다.
생도들은 항해하는 동안 잠시 머무를 3층짜리 캔버스 침대를 배당받았지만 좁고 불편한 침대에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항해 시의 주의사항을 듣자마자 갑갑한 침실을 벗어나 갑판으로 쏟아져나왔다. 달리는 함상에서 바라보는 주변의 풍광은
젊은 간호생도들에게 경이롭기 짝이없었다. 생도들의 이번 여행은 졸업기념 함상 체험이었다.
섬 사이를 빠져나오자 바다가 확 트이고 수평선이 멀어졌다. 함정을 처음 타보는 생도들은 잔잔하게 고동치는 갑판 위에서
아득한 수평선만 바라봐도 가슴에 통증이 일 정도였다. 영원히 머무르고 싶은 순간이었다. 함정은 신나게 달리고 지나온
바다 위에는 새하얀 물거품이 안개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었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누군가 동심에 젖어 노래를 불렀다. 동요는
어느새 함창이 되어 함상에 울려퍼졌다.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아란 하늘빛 물이 들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
말을 붙이고 싶어 안달이 나서 갑판을 기웃거리던 노총각 하사들과 간호사관생도들은 어느새 한 동아리가 되었다 봄소풍나온
여학생같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며 갑판에 둘러앉았다. 남녀가 둘러앉은 동아리는 세 팀이나 됐다. 처음 만난 남녀끼리인데도
모여 앉자마자 무슨 하고싶은 애기가 그리 많을까? 간호사관생도들은 '추억만들기'였고 노총각들은 '신부감 구하기'였다.
서로 경쟁이나 하듯 재잘거리다가 어느 팀에서 먼저 수건돌리기를 시작했다. 잡힌 사람은 벌칙으로 노래를 부르는 게임이었다.
젊은 남녀들이 넓은 갑판에 둥그렇게 둘러앉아 즐겁게 노는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를 짓게 했다. 제주항에 도착하려면 아직도 시간은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노총각들은 짧은 시간에 어떻게 해서라도 인연을 만들어보려고 온갖 친절을 다 베풀었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방해꾼이 나타났다. 고사를 지내지 않은 탓인지 바다가 심술을 부리기 시작한 것이다.
수송작전은 일몰 전에 마쳐야 했다. 넓은 바다에 나오자 충남함은 서서히 속력을 올렸다. 게다가 넓은 바다로 나오니 담 너머 처녀 구경하듯 굼실굼실 높은 물너울이 갑판을 넘겨다보며 시샘을 했다. 속력을 20노트로 올리자 함체는 껑충껑충 말달리기를 했다. 갑판에는 세찬 바람이 일어나고 파도의 비말이 쏟아졌다. 함상은 경주마의 말등같이 심하게 요동쳤다. 핸드레일을 붙잡고 있어도 몸을 가누기 힘들 정도였다.
즐겁게 웃고 떠들던 생도들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안색이 하얗게 변했다. 청춘 남녀가 둘러앉았던 동그라미는 파도처럼 너무나 아쉽게 허물어지고 말았다. 함체의 뜀박질과 함께 뱃멀미가 생도들의 위장 속을 쥐어짜기 시작했다. 생도들은 울컥 치미는 토악질을 참지 못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고 침실로 뛰어들었다. 총각들은 마음 같아선 괴로워하는 생도들을 침실까지 업어다주고 싶었지만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하사 이하는 간호사관생도들이 수용된 침실에 출입할 수가 없었다. 결혼한 중사와 상사, 그리고 장교들만 드나들며 보살펴 줄 수가 있었다.
전속항진으로 함체의 요동이 심하고 바람이 거세어 비상이 걸리자 인솔한 간호장교들이 생도들을 챙기려 갑판으로 나왔다. 하지만 멀미에는 계급도 소용이 없었다. 갑판에서 후부 대원침실로 들어가려면 좁은 수밀 스커틀을 통과하여 가파른 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한다. 내가 안전순찰을 돌기 위해 후갑판으로 나가는 순간이었다. 갑판에 나갔다가 되돌아오던 간호 중위와 계단에서 마주쳤다.
그 쩗은 순간이었다. 훌쩍 공중으로 치솟았다가 내려앚는 함체의 요동에 계단을 내려오던 간호 중위는 몸을 가누지 못하고 내 가슴에 퍽 엎어지며 안겼다. 그와 동시에 울컥 토악질을 하고 말았다. 검은 동근무복을 입은 내 가슴은 졸지에 토사물투성이가 되고 시큼한 냄새가 진동을 했다. 뜻하지 않았던 오물세례였지만 나는 더러운 줄도 모르고 터져 나오는 웃음을 꾹 참았다. 내 어깨를 붙잡고 비틀거리는 간호 중위의 허리를 신부처럼 부축하여 후부 장교침실로 인도했다. 침실에 들어가니 거기도 이미 난장판이었다. 화장실 변기에는 아직 소화도 안 된 콩나물 대가리가 둥둥 떠 있었다. 변기에 토하고 난 뒤 세척수 내릴 기운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전투복 차림으로 군화 끈도 풀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던 여군소령님은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었다. 나는 냄새나는 변기에 세척수를 내리고 브러시로 대충 소제까지 해주고 나왔다. 그들이 떠나고나면 곧 우리가 사용할 침실이었다.
어둡기 전에 제주항에 도착했다. 울고불고 법석을 떨던 생도들은 바다가 잔잔해지자 금방 기운을 되찾아 해죽해죽 웃고 있었다.
떠날 때는 짧은 여행이 아쉽다는 듯이 현문을 나서며 "갈 때 또 바요!" 하고 귀엽게 애교를 부리며 손을 흔들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점심 먹은 것 까지 아낌없이 토해준 간호 중위님은 너무 부그러운 탓인지 얼굴도 볼 수 없었다. 그들이 떠난 뒤 사관실에서 식사를 하며 함장이 나를 보고 이렇게 놀렸다.
"보수관, 이번 수송작전에 보수관이 제일 큰 선물 받았네. 얼마나 반했으면 먹은 것까지 다 토해준단 말인가?"
노총각들은 학수고대했지만 생도들이 돌아갈 때는 여객선을 이용했는지 충남함은 부르지 않았다.
그때 내 가슴에 먹은 것까지 아낌없이 다 토해준 그 간호중위님도 지금은 칠순의 할머니가 되었을 것이다.
그날의 부끄러운 추억을 설마 잊지는 않았겠지....
*** 더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옛날 생각하며 한 바탕 웃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