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 전 지방신문(국제,부산)에 나왔던 기사임.
길 잃었나 생각하는 순간 골짜기서 나타난 퇴락한 기와집들…
소를 부려 밭을 갈고 산나물을 뜯어 반찬을 만드는 곳. 마을을 휘돌아 나가는 계곡은 군데군데 폭포를 이루고, 숲을 스치는 바람이 이내 초록빛으로 물드는 마을. 두메산골을 연상하는가. 아니다. 메트로시티,부산의 한 마을 모습이다. 부산 기장군에 가면 첨단 문명의 이기들이 비켜간 오지마을들이 있다. 이번 주말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한 오지마을을 찾아, 은둔의 평화와 유년의 추억을 만끽해 보자.
[은둔의 땅, 상곡마을]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임기리 상곡마을' 기장군 행정주소에는 있지만 지도상에 없는 마을이다. 지도에 없으니 가는 길이 표시돼 있을 리 만무하다. 마을을 찾기 위해서는 물어물어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일도 간단치 않다. 기장군 주민들조차 모르는 사람이 많을 정도로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철마면이 기장군에서 상대적으로 외떨어진 지역인 데다 상곡마을의 어미마을 격인 임기리조차 거문산, 망월산, 백운산 줄기에 쌓여 오지에 속한다. 임기리에서 빠른 걸음으로 40분은 족히 산속으로 걸어 들어간 곳에 자리 잡은 마을이니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겠다.
상곡마을을 찾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임기리 앞을 흐르는 임기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것이다. 자동차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콘크리트 포장 도로가 나오는데 산허리를 따라 이리저리 휘어지고 꺾이며 너비도 좁다.
걸음을 재촉하며 오르막을 오르다보면 임기저수지가 시원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하늘의 구름과 푸른 숲이 수면에 그대로 떠 있다. 저수지를 뒤로하고 다시 가파른 길을 오르면 철산교에 다다른다. 다리 아래로 계곡의 시원한 물줄기와 깎아 낸 듯한 절벽의 폭포수가 만나 장관을 이룬다. '콰아아~' 비 온 뒤라 떨어지는 물소리가 장쾌하다.
마을을 찾아 골짜기로 들어온 지 40여분. 작은 외딴집 한 채 보이는가 싶더니 다랑논과 한가로이 풀을 뜯는 황소, 골짜기 사이로 흐르는 그림 같은 계곡과 폭포수, 첩첩의 산봉우리가 눈앞에 쏟아진다. 집들은 산봉우리를 따라 길게 형성됐다. 영화 '웰컴 투 동막골'을 연상시킨다. 돌담을 타고 호박 넝쿨이 소박하게 꽃을 피우고, 산허리를 갈아 만든 밭에는 콩이며 들깨가 걱정 없이 자라고 있다.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상곡마을에는 평지가 거의 없다는 것과 집이 11채라는 것이다. 그나마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은 7채다.
마을은 좁고 가팔랐지만 인심은 넉넉했다. 부산공동어시장에서 장사를 하다 1980년 이곳에 정착한 이윤구(74)씨는 아내 (67)와 소 1마리, 닭 10여 마리를 키우며 지낸다. 이씨의 아내는 낯선 길손을 붙잡아 차를 권하고 마당에 키우던 무화과를 따서 건넨다. "평상에 널어 말리고 있는 게 모두 무공해 산나물이여, 필요한 만큼 집어가." 노부부의 인심이 푼푼하다.
옛날 상곡마을은 웃골, 윗골이라 불렸다. 임진왜란 때 동래성 등지에서 부상한 군사들이 이곳에 피란하여 큰 마을을 이뤘다고 전한다. 구한말에는 부산·동래 지역에 있던 천주교인들이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이곳에 숨어서 살았다고 한다. 교인들이 모여서 기도하던 공소(기도하던 곳) 터에는 수령을 알 수 없는 돌배나무가 주렁주렁 열매를 맺고 있는데,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다. 지금은 40여 년 전부터 흉년과 가뭄, 세상의 각박함을 피해 들어온 사람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생길 때부터 은둔지요, 피난처였으므로 조용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다.
[시간이 멈춘 내덕마을]
기장군 장안읍 덕선리 내덕마을은 1970년대 시골 모습 그대로다. 마을을 사방으로 둘러싼 산봉우리들에 시간이 갇혀 미처 흐르지 못한 듯하다.
기장읍에서 14번 국도를 타고 좌천사거리에서 정관면으로 들어서 첫 번째 마주치는 주유소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된다. 울창한 숲길을 꼬불꼬불 따라 가다, 길을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소박한 마을이 눈앞에 펼쳐진다. 마을을 조망하기 위해 이리저리 둘러볼 필요도 없다. 오밀조밀한 40여 채의 집이 한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국도에서 2㎞ 남짓 들어왔을 뿐인데, 타임머신을 타고 30년은 족히 거슬러 온 기분이다. 퇴락한 기와집과 재래식 아궁이, 아무렇게나 보관된 쟁기와 가래…. 얼핏 봐도 옛날 농촌 모습 그대로다. 그래서 40대 이하 세대에게는 낯선 풍경도 많다. 3형제가 한마을에 살고 있다는 최종택(81)씨의 기와집은 방문 문살이 옛 궁궐의 그것인 양 고풍스럽다. 몇 년 전 골동품 도둑이 문짝의 문양에 반해 1짝을 훔쳐 갔다고 한다. 집 오른편 외양간에는 누렁소 1마리가 묶여 있다. 아들이 사준 경운기가 있지만 다룰 줄 몰라 하염없이 세워두고 있다. 대신 최씨는 여전히 소를 몰아 논을 고르고 밭이랑을 간다.
최성해(69)씨의 집 모습도 다르지 않다. 기와로 이은 처마 왼편으로 땔감용 장작이 무더기로 쌓여 있고, 그 위를 호박 넝쿨이 타고 올라가 노란 꽃을 피우고 있다. 마당에는 암소 1마리와 송아지가 풀을 뜯고 있었는데 어김없이 코뚜레를 하고 있다. 농사짓는 소라는 의미란다.
내덕마을은 오지마을 치고는 기와집이 제법 많다. 옛날에는 잘살았었다는 증거. 최씨는 "60년대 이전, 이곳 마을주민들은 산에서 나무를 베어 팔아 돈을 많이 벌었고, 기장에서도 부자동네로 알려진 곳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탄이 개발된 이래 땔감 나무의 수요가 줄었다. 이후 마을은 발전을 멈춰버렸다고 한다.
산기슭을 따라 좌우로 퍼져 있는 촌집들을 거미줄처럼 잇는 돌담길의 운치도 그만이다. 돌담 사이마다 낀 두터운 이끼가 마을의 간단치 않은 내력을 보여준다. 돌담 옆으로는 산죽과 감나무들이 도열해 햇빛을 가려 시원함을 더한다. 오래 전 종영된 '전원일기'의 양촌리보다 10년은 오래 돼 보인다. 이 마을이 21세기를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곤 집집마다 걸려있는 위성방송 접시안테나가 전부다.
한때 40가구가 넘던 것이 지금은 36가구 안팎이다. 그동안 빈집도 늘었다. 하지만 지금은 전망 좋은 위치에 외지인들이 전원주택을 지어 들어오고 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주민들은 바뀌어 가겠지만 그들 또한 내덕마을의 자연과 함께 토박이를 닮아갈 것이다.
첫댓글 우리가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을 덜쑤셔놓았네요. 알탕에 가서 옷벗고 풍덩 거리고 뛴다고 오뉴월의 개처럼 헉헉 거리고.
타임 머신 여행 자알 했읍니다. 그때를 아시나요의 영상이 글 로서 표현 되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