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은 무엇을 믿는거죠?
프로테스탄트 계열의 개신교리를 믿는 건가요?
그렇다면 그 교리가 어떻게 생겨 낳는지도 아시나요?
교리가 아니라 야훼를 믿는 다면,,
쩝,,다른 자료를 또 올리죠,,그 야훼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인간에 의해서,,,,
네스토리우스파 (Nestorians)
431년 에페소스공의회(도적교회회의)에서 이단으로 선고된 후, 451년 칼케돈공의회에서 재차 단죄되었다. 5세기경 네스토리우스는 페르시아로 망명, 그곳에 교회를 세우고 국왕의 보호를 받아 지지자를 규합하였다. 7세기경, 페르시아가 이슬람교의 지배를 받게 된 후에도 네스토리우스파는 계속 남아 아라비아 북부 ·인도 ·몽골 ·중국 등지에 포교하였고, 당(唐)나라 때 중국에 들어가 경교(景敎) 피사(彼斯:페르시아) ·대진(大秦:로마)이라는 이름으로 번창하였다. 13세기 후반에는 페르시아 등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크게 융성하였는데, 14세기에 이르러 티무르가 지배하면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수많은 순교자를 내고 거의 절멸하고 말았으며, 살아 남은 일부도 16세기에 로마교회에 흡수되었다. 아르메니아에 남아 있던 일부 신도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를 배반하였다는 이유로 많은 희생을 당했고 나머지는 추방되었다. 극도로 미미해진 이 세력은 이라크 북부 등지에 5만 명 정도가 남아 있을 뿐이다.
그노시스파 (Gnosticism)
그노시스’는 지식 특히 영지(靈知)를 뜻하는 말이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적 주지주의(主知主義)라고 주창하고 이성 편중에, 보통 그리스도교 신앙지식 이상의 신비적 신앙지식에 도달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신앙적 태도는 신앙의 실제를 벗어나 사변(思辨)에 빠지고 말았는데, 그 결과 그리스의 철학 및 동양의 여러 종교관념과 그리스도교 교리와의 혼합이 생겨나, 단순 소박한 신앙심을 현혹시켰다. 그 대표자로는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이 처음이고, 2세기의 사토르닐로스(Satornilos), 바실리데스(Basilides), 3세기의 발렌티누스(Valentinus) 등이 있다. 그들은 구약성서에 나오는 창조주와 예수가 말한 아버지 하느님을 구별하여, 전자를 데미우르고스(제작자란 뜻)라는 하급 신이라고 주장하였으며, 또 우주가 이에 의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 영(靈)과 물질을 이원적(二元的)으로 대립시켜 놓고 그리스도가 취한 육신은 참 육신이 아니고 가짜였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그리스도 가현설(假現說:Docetism)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영(靈)의 힘으로 육체를 벗어나 영화(靈化)되는 데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교의 정통파로부터 배척되어 3세기에는 쇠퇴하였다.
성결교 聖潔敎 (Holiness Church)
1901년(광무 5) 2월, 동양선교회(Oriental Missionary Society:OMS) 소속 선교사인 C.E.카우만과 E.A.킬보른(한국명 吉寶倫)에 의해 세워진 프로테스탄트의 교파.
장로교 ·감리교와 함께 한국에서는 3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의 하나이다. 감리교 목사인 이들 선교사는 일본의 도쿄[東京] 간다구[神田區]에 동양선교회 전도관을 세우고 일본인 목사 나카다[中田]의 후원 아래 동양일원의 선교를 시작하였다. 교육에 힘쓰라는 선교회 본부의 지시도 있었으므로 전도관 1층에 성서학원을 개설, 성경 ·신학 등을 가르쳤다. 한국인 유학생 김상준(金相濬) ·정빈(鄭斌) 등이 이 학원에서 공부를 끝내고 귀국하자 1907년 염곡(鹽谷:현 무교동)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마련한 것이 한국성결교의 효시이다.
1911년 이명직(李明稙) ·이명헌(李明憲) 등 5명이 동경성서학원을 마치고 귀국, 안수를 받고 장로사(長老師:순회목사)가 되어 선교사들의 후원 아래 아현동 고개 위에 새로이 성서학원(현 서울신학대학의 전신)을 열면서 본격적인 목회자 양성과 노방전도(路傍傳道) 등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리하여 21년 9월 중생(重生) ·성결(聖潔) ·신유(神愈) ·재림(再臨)의 사중교리를 내세운 ‘기독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가 탄생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신사참배 문제로 수백 명의 성직자 ·신도들이 수난을 겪고, 교단이 강제 해체되는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교계를 휩쓴 WCC(세계교회협의회) 가입문제를 둘러싸고 교단이 분열되기 시작, 현재는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예수교대한성결교회 및 중도파 등 몇 개파로 나뉘어져 있다.
도나투스파 (Donatists)
303~305년 G.A.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교회에는 많은 배교자가 생겼다. 그 후 신앙의 자유가 찾아오자, 이 배교의 문제가 대두되었다. 당시 새로 선출된 주교 카에킬리아누스를 배교한 주교 펠릭스를 포함한 3명만의 주교가 안수(按手)했다고 하여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도나투스파는 교회 구성원은 범죄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고 주장, 성서 반납자가 행한 성례는 무효이며, 그런 주교가 행하는 성사도 무효이기 때문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순교자를 공경하고 신앙에 투철한 70명의 주교들은 카르타고의 마요리누스를 새 주교로 선출했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카에킬리아누스를 지지하여 로마(313)와 아를르(314)에서 종교회의를 열고 도나투스파의 결정을 일축해 버렸다. 411년 카르타고 종교회의에서 있은 가톨릭파와 도나투스파 간의 대논쟁(大論爭) 후인 412년에는 호노리우스제(帝)의 ‘통일령(統一令)’이 선포되면서 도나투스파를 이단(異端)으로 규정, 탄압함으로써 그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그 중 일부 세력은 비잔틴시대까지 존속하였다. 이 분쟁은 로마제국 말기의 사회적 모순이 종교적인 탈을 쓰고 나타나 확산된 운동으로 교회사상 매우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
침례교 浸禮敎 (Baptists)
자각적인 신앙고백에 기초한 침례를 시행하는 그리스도교 프로테스탄트의 한 교파.특히 유아세례를 인정하지 않으며, 성서원리(聖書原理) ·침례 ·만인사제(萬人司祭), 각 교회의 독립, 교회와 국가의 분리 등을 강조한다. 영국의 청교도(퓨리턴)의 여러 파 가운데 하나로 생겨났으며, 창시자는 J.스미스(1554?∼1612)로 알려져 있다. 그는 교직자로 1608년 국교회의 압박을 피하여 동지들과 함께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으로 망명했는데, 그 중 T.헬위스와 몇몇 동지들이 영국으로 돌아가 1612년 침례교회를 창설하였다. 아르미니우스파(派)의 입장을 취한 일반침례파와 칼뱅적 입장에 선 특수침례파의 구별이 있다. 영국에 이어 미국에서도 크게 퍼져서, 현재 미국 최대의 교파를 이루고, 대소 27개의 그룹으로 형성되어 있다.
한국에는 1890년 캐나다의 M.위크 선교사가 입국하여 함남 원산(元山)에서 선교사업을 시작한 것을 효시로 하여, 1905년 제1회 총회를 가지면서 보급되어 '대한기독교침례회연맹총회'와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총회'의 두 그룹이 있었다.
두 그룹은 1959년 '한국침례회연맹'으로 통합하였고, 1969년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침례회연맹 유지재단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76년 '기독교한국침례회'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청교도 淸敎徒 (Puritan)
‘퓨리턴’이라고도 한다. 1559년의 엘리자베스 1세가 내린 통일령에 순종하지 않고 국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는 로마가톨릭적인 제도 ·의식(儀式)의 일체를 배척하며, 칼뱅주의에 투철한 개혁을 주장하였다. 엄격한 도덕, 주일(主日:일요일)의 신성화 엄수, 향락의 제한을 주창하였다. 제임스 1세, 찰스 1세 때에 비국교도로서 심한 박해를 받고 네덜란드와 기타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중에서도 신대륙의 플리머스에 식민지를 개척한 메이플라워호(號)의 ‘필그림 파더스’는 유명하다. 청교도는 점차로 절대왕정에 대한 정치적 요구와 결부하여 의회에서 유력해지고, 1642년에 일어난 청교도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청교도 내부에서도 크게 장로파(長老派)와 독립파(獨立派)로 분열하였다. 청교도 문학으로는 밀턴의 《실낙원(失樂園)》이 대표적이다.
재세례파 再洗禮派 (Anabaptists)
종교개혁에 수반하여 출현한, 비자각적(非自覺的)인 유아세례(幼兒洗禮)를 비성서적이라 보고, 세례 지원자에게 다시 세례를 베푸는 프로테스탄트계의 종파.
재침례파(再浸禮派)라고도 한다. 이 파는 여러 파로 나뉘는데, 자각적인 신앙고백 이후의 세례만이 유일한 세례라고 주장한다.
그 주요 종파로는 ① 1521년 독일 비텐베르크의 T.뮌처와 츠비카우 밑에 모인 신비주의 종파, ② K.그레벨, F.만츠 등이 주축이 되어 무저항을 제창한 스위스 형제단, ③ 오스트리아에서 J.후터의 지도하에 재산공유제 생활을 이룩한 파, ④ 네덜란드에서 멜히오르후프만에 의해 시작된 가현적(假現的) 그리스도론, 천년왕국설(千年王國說)을 교리로 삼는 B.후프만파(혹은 멜히오르파), ⑤ 뮌스터에 성도의 왕국을 세우고자 한 뮌스터파, ⑥ 뮌스터파 왕국 멸망 후 지리멸렬된 멜히오르파를 재정비한 메노 시몬스가 이끈 메노파 등이 있다. 이들의 행동은 모든 국가권력의 간섭을 부정하는 등 지나치게 과격하여서 가톨릭만이 아니라, 프로테스탄트 쪽에서도 배격당하여 현재는 후터파와 메노파가 40만 명쯤 남아 있다.
광교회 廣敎會 (Broad Church)
광교회는 '폭 넓은'(broad) 관점을 대표했고, 앵글로-가톨릭(나중에 고[高]교회가 됨)이나 반(反)로마 복음주의(저교회)가 갖고 있던 좁은 교리적 입장을 피한 중도파인 교파이다.
19세기초 복음주의적 부흥을 통한 영적 각성은 영국의 종교생활을 지배했으며, 국교회에서 대규모 분리를 일으켰다. 19세기에는 새로운 자유주의 운동인 "광교회운동"이 일어났다. 광교회운동은 특정신학의 공식화에 대한 불만때문에 일어났다.
19세기초 종교사상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사람은 콜러리지였다. 콜러리지(Samuel Taylor Coleridge:1772-2834)는 시인 겸 비평가이자 철학자였다. 그는 독일에서 철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그는 캠브리지 플라톤주의자들(the Cambridge Platonists)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Aids To Reflection](1825)에서 칸트의 영향을 볼 수 있다. "이성"은 종교적 진리를 직접적으로 인지하는 능력이다. 외적 권위가 아니라 종교의식이 강조되었다. 그는 영국의 슐라이에르마허로 불렸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현대인에게는 현대적 신조'를 요구하는 모더니즘 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광교회 신도들은 미국에 영국 그리스도교 사회주의를 들여와서 사회적으로 보수적이었던 성공회를 사회복음의 선봉에 서는 교회로 바꾸어놓았다.
독립파 獨立派 (Independents)
회중파(會衆派)·조합파(組合派)로 불리기도 하였다. 종교적으로는 칼뱅주의를 신봉하고 분리파(分離派)와 맥락을 같이하면서도 장로파(長老派) 외 여러 교파의 중간적 입장을 취하였기 때문에 독립파로 불리었다. 국가와 교회의 완전분리를 주장한 R.브라운의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는데, 독립파가 두드러지게 두각을 나타낸 것은 1643년 말의 웨스트민스터 종교회의에서였다.
비국교도 非國敎徒 (Nonconformists)
1660년 왕정복고 후에 나온 형법 법령과 통일령(1662)에서 처음 사용된 용어로서 통일령에서는 영국국교회에서 떨어져 나간 분리주의자들의 비밀집회에 관해 언급하면서 비국교도라는 말을 썼다. 통일령에서는 교파와 관계없이 모든 개신교 신자는 영국국교회 감독의 지시에 따를 것을 명하였다.
일반적으로 영국국교회에 반대한 모든 프로테스탄트교회 교파, 즉 침례교·회중교회·장로교·감리회·유니테리언에게 사용되었으며, 퀘이커 플리머스 형제단, 영국 모라비아 교회, 그리스도의 교회, 구세군과 같은 독자적인 집단을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다.
비국교도는 1673년의 심사율(審査律)과 1678년의 의원심사율에 의해 영국국교회에 따를 것을 강요당하고 공직에서 추방되는 등 박해와 정치적·사회적 차별을 받았다. 그러나 1689년의 관용령에 따라 영국국교회의 신조 중 그들의 본질에 관한 조항들이 삭제되는 등 많은 부분이 완화되어 일부 반삼위일체론자(反三位一體論者)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신앙의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
19세기 말 각 교파에 속한 비국교도들은 자유교회라고도 부르는 자유교회연합협의회를 구성하여 영국의 급진주의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들에 대한 정치·사회·교육 면에서의 불평등은 1828년 심사율이 폐지되고 나서도 19세기 후반까지 계속되었다.
장로파 長老派 (Presbyterians)
장로회라고도 한다. 목사와 신도 중에서 선출된 장로가 교회의 관리·운영을 담당하는 장로주의를 신봉하였다. 이 장로주의가 영국에 전파된 것은 16세기 후반으로 처음에는 그다지 성하지 못하였다. 16세기 중반 칼뱅의 제자 녹스가 전파한 스코틀랜드에서는 우세했지만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에 국교를 강제했기 때문에 그들은 1638년 국민맹약을 맺고 단결하여 강력히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다음해에는 무력항쟁으로 궐기하여 청교도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혁명 초 영국의 장로파는 독립파와 협력하여 국왕파 타도에 힘쓰는 한편 전국적인 교회통일 조직을 목표로 삼았을 뿐 원칙적으로 독립파와 행동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혁명이 일단락되자 군대를 주력으로 하는 독립파에 대하여 런던의 대상인이나 귀족을 지지세력으로 삼고 의회를 거점으로 하여 대립하였다. 그러나 구금된 왕과 타협하려고 했기 때문에 1648년 프라이드대령에 의해 의회에서 쫓겨나 세력을 상실하였다. 그러나 호국경(護國卿) 정치 말기에 다시 대두하여 왕정복고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장로교 長老敎 (presbyterian)
칼뱅의 신학(神學)과 신앙고백을 중심으로 성립한 그리스도교 개신교의 교파.그들은 성서의 말씀을 정확하며 오류가 없는 것(無誤)으로 받아들이고 교회와 전통보다 우위에 두었으며, 예정론(豫定論)과 하느님의 영광에 궁극적인 목표를 두었다.
성공회 聖公會 (The Anglican Domain)
개혁 은 대주교 크랜머에 의해 프로테스탄트적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크랜머는 1549년 성서적 요소를 회복시킨 공동기도서를 만들었다. 1553년 여왕 메리 1세(15 53~ 1558)가 로마가톨릭으로 복귀했으나, 여왕 엘리자베스 1세(1558~1603) 즉위 후 종교개혁의 정착기를 맞이하였다. 1559년 로마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를 포용하는 기도서를 제정하고 1563년 중용 노선을 추구하는 39개 신조를 발표하여 가톨릭적이며 개혁적인 성공회의 전통을 형성하게 되었다. 1570년 교황 비오5세가 여왕 엘리자베스 1세를 파문하자 성공회는 로마교회와 완전히 갈라섰다.
성공회는 온건한 칼뱅주의로, 성세·성체·고백·혼인·견진·종부·신품성사의 7성사를 행하며, 구약과 신약 66권 외에 외경(外經) 14권을 준정경(準正經)으로 삼고 있다. 신앙의 판단은 성서와 이성, 전통에 의거하며, 다음의 람베드-시카 고 4개 조항을 신앙적 기준으로 삼는다
회중파교회 會衆派敎會 (Congregationalists)
조합파(組合派)교회라고도 한다. 각 교회의 독립자치의 원칙에 입각하며, 교회상호의 교류를 존중하지만 각 교회에 대한 위로부터의 지배를 부정하고, 국가로부터의 분리를 주장한다. 따라서 독립파교회 ·분리파교회 등으로 부르기도 한다. 각 교회는 신(神)과의 계약 및 인간 상호의 계약에 의해서 자발적으로 형성된 단체이며, 더구나 그리스도가 직접 지배하는 단체이기 때문에 회원 모두가 말하자면 신의 사제(司祭)라고 하며, 그런 의미에서 회중파교회는 원시교회의 본래의 모습을 재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기원은 R.브라운의 사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미 엘리자베스 1세의 교회개혁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이 국교회(國敎會)로부터 독립하여 집회를 가짐으로써 기운이 조성되고 있었다. 후에 박해를 받아 네덜란드로 피하고, 일부는 다시 미국에 이주하기에 이르렀으나, 마침내 청교도혁명을 거쳐 하나의 교파로 성장하였다. 그후 미국에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교파로서,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에 외국 전도(傳道)를 위한 아메리칸 보드가 설립되어 세계 각지에서의 전도가 시작되었다.
감리회 監理會 (Methodist Church)
1729년 영국에서 존 웨슬리(John Wesley)에 의하여 시작된 그리스도교 교파.
옥스퍼드대학을 중심으로 존 웨슬리(John Wesley)와 그의 동생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 그리고 G.휘필드 등의 대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그들은 신성클럽(Holy Club)을 조직하고 종교적 의무를 다하는 데 규칙적이면서도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메서디스트(Methodist:格式主義者)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는 모라비아 교도들이 모인 올더스케이트 거리의 집회소에 참석하여 오후 8시 45분경 인도자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의 로마서(書) 서문을 읽을 때 갑자기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다고 한다. 이 회심의 사건은 존 웨슬리의 생애에서 일대 전환점이 되었고, 감리회의 구원·신앙·성결의 교리를 설명해 주는 산 증거가 되었다. 원래 존 웨슬리는 고교회파(高敎會派)로서 영국교회에 속해 있으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였는데, 영국교회에서는 그의 교회 내 설교를 금하였으므로 야외설교의 방법을 택하여 그 운동은 점차 확대되었다.
1744년 존 웨슬리는 메서디스트파 신자들을 런던에 모아놓고 전도사업 방침에 대하여 협의하였는데, 이것이 곧 감리회의 최초의 연회(年會)이다. 이때까지도 존 웨슬리는 영국교회와 분리하려는 뜻은 없었고 교회에 속한 채 전도하려 했지만, 1784년 런던 감독에게 미국으로 파견할 선교사를 안수하여 주도록 청하자 감독이 거절하므로 그 자신이 안수를 베풀어 T.코크 박사를 미국의 총감독으로 삼고 그 밖에도 몇 사람에게 안수를 주어 목사로 세우니 이때부터 감리교회는 실제적인 한 교파를 이루게 되었다.
감리회의 발전은 교구제도와 경건한 신앙을 고수하는 데 있었다. 존 웨슬리의 인격 ·조직력 ·지도력, 그리고 야외설교 ·평신도설교 등 꾸준한 복음활동 및 엄격하고 규율적인 생활에 의하여 발전되었다. 1791년 존 웨슬리가 서거하였을 때의 교세는 영국 전역에 확장, 잉글랜드를 본거지로 하였던 감리회 부흥운동은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이르렀고 미국에서는 휘필드의 주도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조직의 기본단위는 구역이며, 그것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교회로 조직된다. 구역들은 지역적으로 지방회를 조직, 감리사가 피차 협동하여 교회조직과 사업발전에 힘을 기울이고 지방회는 다시 더 큰 집단을 형성하여 연회를 조직하며, 연회는 감독이 관할한다. 그리고 최고기관인 총회가 있다.
감리회 교리는 사도신경 속에 제시된 전통적 그리스도교 신앙에 근거한다. 감리회의 특색은 교리보다도 실제적인 생활과 성경의 진리를 실천하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에 의하여 구현되는 신앙과 종교적 경험을 강조하며 이성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고 신학적 이론을 비교적 자유롭게 전개할 수 있는 것도 특색의 하나이다. 감리회에는 모든 신도가 각기 행하지 않으면 안될 규율, 곧 규범이 있고, 25개조의 종교강령이 있으며, 이것은 감리회의 헌법정신이기도 하다. 감리회 전도방법의 특색은 부흥설교를 통한 전도와 평신도를 통한 개인전도 및 심방전도이다.
감리회의 신앙과 교리는 존 웨슬리가 발표한 25개조의 종교강령과 그의 53개의 ‘표준설교’, 그리고 그가 지은 신약성서 주석에 잘 나타나 있다.
구가톨릭교 舊-敎 (Old Catholic Church)
제1차 바티칸 공의회(公議會)에 반대하여,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분리되어 나간 종교단체.
복고가톨릭교회라고도 한다. 1869~1870년의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교황 피우스 9세(비오 9세 : Pius Ⅸ)가 선포한 '성모의 무염 수태'를 둘러싼 논쟁에서 비롯된 교황무류성(無謬性)과 교황수위권(首位權)을 교의(敎義)로 확립하자 1871년 독일의 본대학 신학교수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항의와 시위가 독일 전역으로 확산되었다.
이그나츠 될링거(Ignaz v. Dollinger), 요한 프리드리히(Johann Friedrich), 프란츠 로이시(Franz Reusch), 요한 슐테(Johann V. Schulte) 등 신학자들은 뮌헨에서 구가톨릭교도 대회를 열고 독립교단을 발족시켰으며, 오스트리아·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등 여러 나라에도 구가톨릭 교회가 생겨났다.
1873년 독자적인 주교를 세우고 공의회에서 결정한 교의를 정면으로 부정하였으며, 위트레흐트 연맹이 형성된 1889년 주교들이 발표한 위트레흐트 성명은 구가톨릭 교회의 교리와 정책 헌장이 되었다. 교회는 나라마다 한 사람의 주교를 두고 있으며, 그 아래 독립된 국교회가 조직되어 있고, 각 국교회는 주교회의를 통해 결합되어 있다.
국교회의 입법·사법·행정권은 성직자와 평신도로 구성된 교구회의에서 행사하며, 주임사제(主任司祭)는 신자들이 선출한다. 구가톨릭교에서는 주교회의가 최고의 권한을 가지며, 위트레흐트 대주교는 일종의 명예대주교직이다.
영국 가톨릭 자유교회를 낳게 하였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그 수가 오히려 줄어들어 1968년에 들어서면서 교회일치의 정신 아래 분열을 극복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WCC(World Council of Churches:세계교회협의회)에도 참여하고 있다.
로마가톨릭교회
가톨릭교회는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유대인의 가르침에 의해 창립되어, 이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믿는 사람들이 이 교회에 속하였다. 예수는 제자 중에서 12명을 선정하여 그 장(長)에 베드로를 임명하고 그에게 전체 교회를 통치하는 권위를 부여하였다(마태 16:18∼19). 예수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다음 제자들은 성령(聖靈)에 의해 신앙이 강화되었으며, 예수의 가르침을 널리 폈다. 사도의 장인 베드로도 예루살렘을 떠나 먼저 안티오키아에, 그리고 로마에 사도의 자리를 정착시켰다. 당시 교회에는 유대교로부터의 개종자와 순수한 그리스도교도가 있어 이들 사이에 유대교의 율법을 준수할 것이냐 아니냐에 관한 논쟁이 일었다.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사도회의를 열고 그리스도교도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결정하였다. 로마제국의 모진 박해 속에서 교회는 점차 조직을 강화해갔으나 전부터 로마제국에 있었던 이교(異敎)의 영향으로 교회에는 그노시스 ·몬타누스 ·마르키온 및 마니교(摩尼敎) 등의 이단(異端)이 생겼다. 이 이단에 대항하여 교부(敎父)라 불리는 뛰어난 교회사상가가 나타났는데, 그 중에서도 클레멘스, 오리게누스, 아우구스티누스 등이 특히 유명하다.
4세기에 이르러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그리스도교에 자유를 부여하고 보호하였으며, 4세기 말에 황제 테오도시우스는 ‘그리스도교 국교령’을 발포하여 그리스도교 이외의 종교를 배척하였다. 한편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를 비롯한 중요한 공의회에서는 가톨릭의 교의를 명확하게 확정지었다. 중세에 이르러 처음 로마제국의 영향 밑에 있던 교회는 동(東)로마제국의 지배를 피해, 마침내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하는 서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나, 그 사이에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방교회는 로마가톨릭 교회로부터 이탈하였다. 로마가톨릭은 신성(神聖) 로마제국의 속권(俗權)과 성직서임권(聖職敍任權)을 둘러싸고 논쟁을 거듭하여 마침내 ‘보름스 협약’에서 서임권을 획득하고 교권을 확립시켰다. 이리하여 교회는 강대한 힘을 가지게 되었고, 밖으로는 7회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였으며, 안으로는 학문과 문화향상에 힘을 기울였다.
15세기가 되자 유럽의 경제력은 증대하고 생활은 현저하게 향상되었으나, 반면 교회는 차차 세속주의에 빠져들었고, 교회 지도자는 권력을 둘러싼 싸움의 계속으로 분열을 일으켜 대립교황(對立敎皇)이 출현하였다. 또한 성직자나 수도자의 무지와 도덕성의 퇴폐도 심하여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고 M.루터의 등장으로 결정적 단계를 맞게 되어 가톨릭교가 분리되면서 프로테스탄트교회가 성립하였다. 이에 대하여 가톨릭교회에서도 예수회 등의 신수도회에 의한 쇄신운동을 진행시켜 교회는 점차 새로운 힘을 회복시켜 해외 선교활동 등도 활발히 진행되었다.
16세기 이후 유럽 통일이 붕괴되면서 근대국가가 탄생하여 주권의 독립을 주장하게 되자 가톨릭교는 이들 국가와 정교조약(政敎條約)을 맺었다. 1929년에는 이탈리아 정부와 로마가톨릭 사이에 ‘라테란협정’이 체결되어 세계 최소의 독립국 바티칸시국(市國)이 승인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제2차 세계대전으로 교회는 전쟁과 박해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인종 ·국적 ·종교의 차별없이 원조하였고, 전후에는 평화 확립에 노력하였다. 교황 요한 23세는 이와 같은 세계정세를 감안하여 제2바티칸 공의회를 열어 교회 쇄신에 착수하였다. 이 공의회는 교회의 현대화, 에큐메니즘(교회일치주의) 등 뛰어난 교의를 선언하였다.
귀일교회 歸一敎會 (Uniate churches)
동방 가톨릭교회 ·동방전례(典禮) 가톨릭교회라고도 한다. 로마 교황의 수위권(首位權)을 인정하면서도 동방교회의 독자적인 전례 ·관습 ·교회법 ·언어 등을 지키고 있다. 합동의 동기는 종교와는 관계가 없는 정치적인 이유가 많다. 이에 속하는 교회에는 레바논의 마론파(派)교회(1182년 합동), 아르메니아교회(1198~1291년 및 1741년 합동) 폴란드의 루테니아교회와 카르디아교회(1595년 합동), 안티오키아 총주교 관할하에 있는 시리아교회(1663년 합동), 메르키트파교회(1741년 합동), 아프리카의 콥트교회(1724년 합동)와 에티오피아교회(1839년 합동), 인도의 마라발교회(1930년에 합동) 등을 들 수가 있다.
그 밖에 헝가리 ·유고 ·루마니아 등에도 몇몇 교파가 있다. 가장 신도 수가 많은 것은 우크라이나 지방으로 그곳의 귀일교회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정교회에 편입되었다. 전례 ·관습상 로마 가톨릭과 다른 주요한 점은 성직자가 대처(帶妻)할 수 있다는 점과 빵과 포도주로 성체배령(聖體拜領)을 하는 점, 세례(洗禮)를 침수례(浸水禮)로 한다는 점 등이다.
러시아의 정교회
기원 후,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겨서 흑해(黑海) 주변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한다(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 사도 안드레아가 방문 선교했던 지역은 후일 키예프와 노보고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988년 키예프공국의 블라디미르대공(980~1015)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9년 야로슬라브 공(1015~1054)이 키예프 러시아의 권력자가 되어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하는 데 공헌하였다.
1037년에는 테오 펨프스 대주교가 키예프 러시아의 수좌주교로 착좌하였다. 1237년 11월 바투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대공의 막내아들 다니엘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전쟁으로 찌든 러시아 백성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반 1세(다니엘의 둘째아들) 때에는 모스크바가 전체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1380년 9월 8일, 약세의 러시아 군대는 40만 몽골대군을 격전 끝에 격파함으로써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비잔틴 황제의 조카 소피아 팔라이올로고스와 결혼하고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紋章)을 취하고 자칭 짜르, 곧 황제가 되어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라 불렀다.
1589년 모스크바 총대주교좌가 축성되어 욥(1589~1605)이 초대 총대주교로 취임하였다. 1917년 이래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괴했다. 1918년 2월 1일 총대주교 티콘은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고 무신론 정권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의 집단, 곧 ‘살아 있는 교회’를 단죄하였다. 1920년 11월 20일 티콘 총대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인 조직을 증언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1921년 세르비아 총대주교의 입회하에 칼루프치에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19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수좌대주교와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다. 1921년 이후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칼루프치에서 독일 뮌헨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던 스탈린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러시아 안의 정교회에 다소 자유를 주었다. 당시 소련 헌법에는 반종교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두어서 교회의 사회활동 금지, 사제교육 금지, 종교교육 금지, 액션단체 조직 활동 금지, 교회내 도서실 폐쇄, 성경 및 교회서적 출판금지, 교회의 토지 ·건물 ·현금은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990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자 교회의 개방은 급격히 증가되어 90년 모스크바 관구에는 40개의 성당이 문을 열었다. 1993년에는 300여개 넘는 성당들이 문을 열고 열심히 선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마론파 (Maronites)
동방정교회(東方正敎會)에 속하는 한 종파로, 동방전례(典禮)의 가톨릭교회.
즉 안티오키아식 전례를 행하는 일파로, 레바논 ·시리아 등에 많다. 아랍어로는 마루니(M嚆r後n爻)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그 시조인 시리아의 수도자 마론(?~423?)의 이름을 딴 것이다. 7∼8세기 무렵에는 큰 세력으로 퍼져 이슬람교도의 침입에 대항하였으며,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도 이들에게 조공을 바쳤다고 한다. 오랫동안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 세르기우스(?~638) 교리, 즉 특이한 그리스도론(論)인 단의론(單意論)을 따랐기 때문에 이단으로 취급되었으나, 16세기 십자군 시대에 로마 가톨릭교회에 귀속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 정식으로 동방전례 가톨릭교회가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하에서는 드루즈파(派) 등 다른 종파와의 반목이 심하여 박해가 끊이지 않았으며, 1860년에는 많은 신자가 학살당하고 수많은 망명자가 생겨났다.
제1차 세계대전 후 프랑스의 위임통치와 1943년 국민협약 등을 거쳐 오랜 내전을 종식시키고 레바논을 독립시키는 데 인구의 30 %를 차지하는 이교도가 크게 기여하였으며, 공화국 성립 후 확고한 세력을 갖게 되어 대통령은 언제나 이 파에서 선출되는 불문율이 생겼다. 전례는 시리아어로 행해지며 독특한 양식을 사용한다.
두호보르파 (Dukhobor)
두호보르란 ‘영혼을 위해 싸우는 자’라는 뜻의 러시아어로, 심령주의(心靈主義)를 나타낸다. 교의(敎義)의 특징은 신앙의 중심을 정신의 내면에 두고 있다. 1740년경 하리코프 부근에서 농민이던 S.콜레스니코프와 L.포비로힌에 의해 창시되었는데, 교회의 외형적 제도 전반에 대해 부정적이던 이들 일파는 교회의 의식도 완전히 무시하였다. 경전도 《생명의 책》이라는 그들 독자의 것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태도로 결국 정부와 교회 당국으로부터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조프해(海) 북쪽 기슭, 카프카스의 특정 지역으로 이주하기를 강요당했는데, 거기서 서로의 절대적인 우애와 재산공유의 원리에 터전을 둔 공동생활을 하였다. 1898년 신도들 가운데서 병역 기피의 움직임이 표면화되자 정부의 박해는 더욱 심해져 드디어 교회에 충실한 약 7,500명의 신자들이 소설가 톨스토이 등의 도움을 받아 멀리 캐나다로, 또 약 5,000명은 키프로스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소설가 톨스토이가 제안한 도덕과 영적인 거듭남에 관한 원칙들을 받아들였고, 톨스토이는 러시아 황제에게 청원하여 그들이 해외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리하여 절필하였던 톨스토이가 이주 비용을 마련하고자 다시 붓을 들어 《부활》을 썼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현재 러시아에는 극소수가 남아 있다.
아담파 (Adamites)
그리스도교의 교파.이 파에 속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모임을 낙원이라고 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몬타누스파, 마니교도 등 이단 종파들에게 이와 같은 이름을 붙였다. 1421년에 보헤미아의 다보르파라는 교파의 영구적인 호칭이 되었다. 이들은 약탈을 일삼았으며, 야간 무도회에서 야만적인 행위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에피파니우스나 아우구스티누스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은 모두 옷을 벗고 생활하여 인간 본연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주장하였으며, 지하실에서 예배를 드리고, 일반 사람들과의 교제를 회피하였다
개혁교회 改革派敎會 (Reformed Churches)
프로테스탄트의 유파.원래 가톨릭에 대한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차차 마르틴 루터파에 대한 칼뱅주의 신학을 신봉하는 교파를 이르는 말이 되었다. 이 교회의 출발점이 된 초기 지도자에는 장 칼뱅(Jean Calvin) 외에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요한 불링거(Johann Heinrich Bullinger) 등이 있다.
하느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것과 이중예정설(二重豫定說)이 이 개혁교회의 특징적인 교리이다. 또 “유한(有限)은 무한(無限)을 수용하지 않는다”는 입장은 그리스도론과 성찬론에 있어서 “유한은 무한을 수용한다”는 마르틴 루터파의 주장에 대립되고 있다.
유럽에서는 주로 네덜란드·스위스·독일·프랑스·헝가리 등에 퍼지고 있는데, 네덜란드와 스위스를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소수 그룹에 불과한 형편이다. 그러나 영국에서는 장로교회로서의 세력이 있으며, 특히 스코틀랜드에서는 국민교회(國民敎會)로 되어 있다. 미국에서는 17세기 이민을 통해 네덜란드에서 전달된 개혁교회와 영국에서 전해진 장로교회가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각국 개혁교회의 연합운동체로는 1875년 영국에서 조직된 개혁교회세계연맹(World Alliance of Reformed Churches)이 있으며, 1949년 네덜란드·남아프리카·미국 개혁교회 대표들이 네덜란드에서 조직한 개혁주의 에큐메니컬대회(Reformed Ecumenical Synod) 등이 있다.
그리스도의 교회 (Churches of Christ)
1807년 장로교 출신의 토마스 캠벨이 주창한 환원운동에 근원을 둔다. 환원운동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으로, 성서에 기록되지 않은 인위적 신조나 전승들을 거부하였다. 이들은 침례를 주장하였으며, 개체교회 이외의 어떠한 교회적 권위도 부정하였다. 매주일 성찬식을 행하였으며, 그리스도인 연합운동에 적극적이었다. 교회 내의 호칭도 목사, 장로 등을 거부하고 형제, 제자, 그리스도인과 같은 용어를 사용하였다
초기에는 침례를 주장하였기 때문에 개혁주의적 침례파와 연합하였으나, 1827년 침례파와 결별하고 제자파(Disciples)를 독자적으로 조직했다. 1831년 서부 지역에서 신앙운동을 벌이던 B.W.스톤의 그리스도교회와 연합하여 활발한 전도활동을 벌였다. 1849년에 첫총회가 개최되었는데, 이때 미국 그리스도선교회(American Missionary Society)가 창립되었다.
그러나 1906년에 진보와 보수의 갈등으로 두 개의 파로 나뉘었다. 보수적 교회는 예배시 악기를 사용하지 않는다고 하여 무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 진보적 교회는 악기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유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로 불렸다.
1927년 유악기파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시 분열하였는데, 다른 교단에서 들어오는 비침례교인의 입교문제를 놓고 개방입장과 보수입장으로 나뉘어 보수적 교회들이 복아메리카 그리스도인 총회를 조직하였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교회는 극단적 보수주의의 무악기파, 중립적 독립파, 개방적 협력파 등 셋으로 나뉘었다.
한국은 1974년 3월 한국그리스도의교회선언이 발표되었고 유악기파와 무악기파로 크게 구분되어 교세를 확장해가고 있다.
그리스도재림교회 (Advent Christian Church)
그리스도교의 교파.1831년 미국의 윌리엄 밀러에 의해 시작되었다. 1844년 10월 22일에 예수가 재림한다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그날이 되어도 재림하지 않자 여러 갈래로 분열되었고 사회적으로 지탄받았다. 분열된 교파 중 크게 형성된 것이 그리스도재림교회와 제7일안식일 예수재림교이다. 윌리엄 밀러의 예언이 날 수를 계산할 때의 오차로 생긴 것이라며, 곧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는 것을 계속 강조하였다.
그후 1853년에 제2차 예언하였는데, 예언이 맞지 않자 독자적으로 교회 조직을 착수하여 1861년 매사추세츠주(州)에서 그리스도재림교회 협의회를 구성하였다. 이들은 사람이 죽어서 무의식상태로 무덤 속에 누워 있다가 재림 때 부활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대한복음교회 基督敎大韓福音敎會
1935년 한국인에 의해 창립된 프로테스탄트 교단.본래 교파로서 출발하였다기보다는 1920∼1930년대의 기성교회를 비판, 반성하는 입장에서 한국인 자신의 주체적인 신앙결단으로 출발한 점이 특색이다.
당시 일본에서 신학 공부를 하고 돌아온 최태용(崔泰瑢)이 1925년부터 《천래지성(天來之聲)》을, 1929년부터는 《영(靈)과 진리(眞理)》라는 신앙잡지를 발간하면서 각지에서 전국의 독자를 중심으로 종교집회 ·강연을 벌이자, 곧 기성교회로부터 비판 또는 이단시하는 대상이 되었다.
결국, 1935년 12월 22일 '기독교 조선복음교회' 창립 총회를 가지기에 이르렀는데 이는 주로 호남지방인 이리 ·군산 ·서산 ·김제 ·임실 ·금마 등지의 독자들과, 서울 ·강원(북한) 금강산 일대 및 함경도 명천 등지에서의 집회를 통한 교인이 주체를 이루었다.
창립 총회에서 최태용 목사가 초대 감독(1935∼36)이 되었는데, 출범 당시 전국의 교회수는 8개였다. 그 후 2대 감독은 백남용(白南鏞)(1936∼50), 이사장 제도로 개편되고 나서는 지동식(池東植)(1961∼70) ·장성환(張聖煥)(1970∼77), 총회장 제도로 재개편된 후로는 조용술(趙容述)(1977∼) ·허정에 이어 오충일 목사가 담당하였다. 재단이사장으로는 조용술이 활동하고 있다.
교단의 주장은 ① 신앙은 복음적이고 생명적이어야 하며, ② 신학은 충분히 학문적이어야 하며, ③ 교회는 한국인 자신의 교회이어야 한다는 것 등이다. 1999년 12월 현재 전국에 60개 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2만 7000명이다. 신학교로 1개 교가 있고, 사회사업기관으로 장애인복지시설 등이 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 성회 基督敎大韓-聖會
보통 순복음교회(純福音敎會)라고도 한다. 성경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와 부활, 삼위일체(三位一體)인 하느님을 믿으며, 중생(重生) ·성령충만
·신유(神癒) ·재림(再臨) 등을 주요교리로 삼고 있다. 1928년 개인 자격으로 M.C.럼시양(孃)이 오순절적 신앙선교를 목적으로 내한하여 당시 구세군에
근무하던 청년 허홍(許弘)과 함께 정동(貞洞)에 선교본부를 둔 것이 이 교회의 효시가 된다.
그 후 1932년 일본에서 돌아온 박성산(朴聖山) ·배부근(裵富根)이 서빙고에 오순절교회를 설립하고 교세를 확장하던 중, 1945년 일제의 종교탄압으로 외국인 선교사들이 강제출국을 당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
광복과 더불어 일본에서 오순절계 신학을 공부하고 귀국한 곽봉조 ·윤성덕 ·김성환(金城煥) 목사 등이 각기 고향에 교회를 세웠으나 6 ·25전쟁이 일어나 또다시 시련기를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오순절 운동이 직접적으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교회와 연결된 것은 미국 '하나님 성회' 소속 선교사 A.B.체스넛이 내한하여 박성순 목사와 함께 전국을 순회하며 신앙동지를 규합, 1953년 서울에서 교단을 창립하고 명칭을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라고 한 때부터이다.
같은 해, 교역자 양성을 위한 순복음신학교를 설립하고 교세확장에 힘쓰다가 1957년 신학교 맹휴사건으로 교단이 분열되었다. 그 후 1959년 미국의 아시아 선교부장 케참 목사가 내한하여 2만 달러를 투자, 신학교를 신축하고 서대문에 중앙회관을 설립하는 등 전국복음화운동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특히 1960년대에 들어서면서 '순복음(Pure Gospel)' 운동의 주동이 되어 교회 명칭에도 순복음이 들어가게 되었고, 1972년에는 분열되었던 교단이 다시 합쳐 선교부와 협력관계를 맺고 조직적인 발전을 이룩하였다.
1999년 현재 교회 1,413개, 교역자 3,486명, 교인 122만 4084명이며, 교육기관으로 한세대학교, 신학교 3개 교가 있다. 이 밖에 5개의 농아교회, 경기도 파주시의 오산리 기도원과 2곳의 수양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평동 222번지이다.
기독교한국루터회 基督敎韓國-會
신약 ·구약성서의 말을 믿음과 행위의 유일한 법칙이며 규범으로 삼고,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및 《루터 소교리문답서》를 기독교의 대표적 교리로 여긴다.
루터교회가 한국에 진출한 것은 1958년 1월 미국의 루터교 미주리의회에서 선교사 3명을 파견하면서부터이나, 실제적인 선교사업은 1959년 11월 기독교방송 전파를 이용, '루터란아워' 선교방송이 시작되면서부터이다.
1960년 5월 기독교 통신강좌 보급을 시작하였고, 컨콜디아출판사를 통한 문서선교를 시작하였으며, 1961년 3월부터 월간 《새생명》을 발간하였고, 1981년 6월에는 경기도 용인시에 신학교를 신축하여 개교함으로써, 전도사업과 지도자 양성을 위한 기초를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1971년 3월부터 기독교한국루터회, 즉 루터교단을 조직, 운영하게 되었다.
컨콜디아사 ·기독교통신강좌부 ·사회사업부 ·국제복음방송 루터란아워 ·베델성서연구원 등의 기구가 있고, 1999년 현재 서울 ·부산 ·대구 ·대전 ·천안 ·인천 등에 30개 지역교회가 있으며, 교인수는 3,925명, 교역자수는 32명이다. 1972년에는 루터교세계연맹에 가입하여 정식 회원교회가 되었다. 본부 소재지는 한국 서울특별시 송파구 신천동 7-20번지 이다.
나사렛교회 (Church of the Nazarene)
성결교 보수주의 운동을 배경으로 만들어졌다. 1895년 미국 캔자스주(州) 캔자스시티에서 설립되었는데, 1907년 미국 오순절연합교회와 합하였고, 1908년에는 그리스도성결교회와 합하여 세력을 확장하였다. 성결교와 마찬가지로 감리회의 신학 전통을 고수하며, 특히 18세기 웨슬리신학의 성화교리를 강조하였다. 즉, 은총에 의한 중생을 첫째 사역으로 보고 성화를 둘째 사역으로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목회자들이 성화를 체험하도록 요구되고 있다.
교회조직은 감리회를 모방한 것이 많으며, 세례와 성만찬만을 성례로 인정하며 신유를 인정한다. 그리고 성서의 영감, 만인 구원, 재림, 죽은 자의 부활, 최후 심판 등을 믿는다.
한국에는 두 갈래로 나사렛교회가 들어왔다. 일제강점기의 일본 나사렛교단을 통한 초기 유입과 8·15광복 후에 미국 나사렛교단을 통하여 들어온 것이 있다. 1948년 정남수 목사가 미국에서 나사렛교회의 한국선교를 협의하고 미국 나사렛교회 감독 니스와 함께 내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특히 같은 오순절 운동계통인 ‘하나님의 교회’와 협력하였다. 이 두 파가 정식으로 합동하여 1948년 4월 정식교단으로 출범하였다.
1950년 이후 교단이 본격적으로 발전하였고, 1954년 5월 미국 나사렛교회 선교사 오언즈(D.D.Owens)가 내한하여 크게 활약하였다. 특히 나사렛대학교를 설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하였다. 현재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회로 교단이 구성되어 있다.
모두 5개의 연회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특별시를 중심으로 중부연회, 남부연회, 호남연회, 동부연회, 영남연회가 있다. 각 연회는 감독을 두고 있으며, 3~4개의 지방회 조직을 가지고 있다.
셰이커교도 (Shakers)
지복천년설(至福千年說)을 믿고 공산공유(共産共有)의 종교적 사회를 형성하여 독신으로 지낸다. 17세기 후반 프랑스에서 조직되었으나 박해를 받아 영국으로 이주하였다. 여기에서 퀘이커교와 제휴하여 발전하였는데,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신앙부흥운동의 물결을 타고 최성기를 맞이하였다.
셰이커란 '몸을 흔드는 사람'이라는 뜻인데, 예언자는 몸을 흔들어서 예언을 얻었다고 믿고, 이 동작을 그들의 예배의식에 받아들인 데서 이 이름이 붙여졌다. 하느님을 유성(有性)으로 보는 이 교리는 기성교단들로부터 이단시(異端視)되어 현재는 아주 쇠퇴하였지만, 그들이 제작한 공예작품과 가구 등은 미국 미술사에 큰 영향을 끼쳤다.
소치니파 (Socinianism)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교의(敎義)인 속죄(贖罪) ·삼위일체설을 부정한 일파.16세기 말부터 17세기에 걸쳐 행해졌다. 이같은 생각은 이미 이탈리아의 법률가인 L.소치니가 품고 있었으나 공개적인 의사 표현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죽은 뒤 그의 유고(遺稿)를 상속받은 조카 F.소치니는 백부로부터 결정적 영향을 받아 마침내 반(反)삼위일체론을 제창하였다.
1579년 폴란드로 옮겨간 그가 그곳에 있는 유니테리언파(派)를 선동하여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 데 노력하였다. 그것이 헛되지 않아 그가 죽은 지 1년 만에 소치니파 교회가 설립되기도 했다. 그러나 1658년에 이르러 이 파는 이단자로 몰려 폴란드에서 추방당하자, 독일 ·폴란드 ·영국 ·북아메리카로 흩어져서 유니테리언파에 흡수되고 말았다.
카타리파 (Cathari)
12,13세기에 유럽에서 위세를 떨친 그리스도교 이단(異端).청정무구(淸淨無垢)를 의미하며, 물질을 악의 근원이라 해서 신과 대립시키는 이원론(二元論)과 육식 ·결혼생활, 재산의 사유 등을 부정하는 극단적인 금욕주의가 특징이다. 11세기 후반 불가리아의 보고밀파로부터 영향을 받은 소종파(小宗派)가 남유럽에 나타나, 특히 1140년부터 30년간에 걸쳐 그 교세가 급속히 신장하여 라인란트, 남북 프랑스, 북이탈리아에까지 퍼지는 등, 12세기 말까지 11주교구(主敎區)가 개설되었다. 로마 교회는 이를 이단으로 단정하고 여러 차례 개종토록 했으나 효과가 없자, 교황 이노켄티우스 3세는 1181∼1229년 3차례에 걸쳐 십자군을 파견하여 이들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이용당한 이 십자군은 그 잔혹성으로 후세에 오명을 남긴 결과가 되었다. 카타리파는 이때부터 붕괴되어 15세기 초 완전히 소멸되었다.
재림파 再臨派 (Adventists)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굳게 믿고 신앙생활에 분발하는 많은 프로테스탄트계(系) 교단의 총칭.
'어드벤티스트'라고도 한다. 이와 비슷한 사상은 옛날부터 교회 안에 있어 왔으나, 근세에는 J.A.벤겔이나 예수회 라쿤차의 저서에 영향을 받아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전쟁 후 유럽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각지에서 일어났다.
특히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운동이 가장 세력이 컸다. 그것은 뉴욕주(州)로 햄프턴에 사는 뱁티스트파(침례교)의 농부 W.밀러가 1831년 무렵, 구약성서의 《다니엘서》의 예언에 의거해 계산하면 그리스도의 재림이 1844년 10월 22일에 있을 것이라고 정확히 예언함으로써 수천 명의 신봉자를 모았다.
그의 예언은 실현되지 않았으나, 그 신봉자들은 1645년 이후 스스로를 '재림파'라고 부르는 집단을 형성하고, 또한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왔다고 주장하였다. 그후 복음재림교(Evangelical Adventists)·그리스도 재림교회(Advent Christian Church)·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Seventh day Adventists) 등의 소파로 나뉘었다.
제7일안식일예수재림교 第七日安息日-再臨敎 (Seventh Day Adventists)
그리스도의 재림과 안식일 엄수를 주장하는 그리스도 교파.1830년대 말에서 40년 초에 걸쳐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을 중심으로 윌리엄 밀러 주도하에 일어난 예수재림의 대망을 강조하는 운동이 그 효시가 된다. 당시 200여 교회의 목사와 5만여 명의 그리스도교 신도들이 교파를 초월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였는데, 그 후 그들은 성경연구를 통하여 《창세기》부터 인류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계명 중 지금까지 무시되어 온 넷째 계명, 즉 제7일 안식일의 준수를 회복하고 실천하는 무리를 이루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의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와 ‘믿음만으로(Sola fide)’의 두 원리 위에 입각, 하느님의 백성으로서 십계명을 준수할 것을 역설하고, 십계명의 넷째 계명인 안식일이 제7일에 해당되므로 금요일 해질녘부터 토요일 해질녘까지를 엄격하게 구별하여 지키는 한편, 그리스도가 개체를 가지고 재림할 것을 고대하며 그 사건을 가장 큰 소망으로 바라고 있다. 이 교단은 현재 190개국에서 567개 방언으로 전도사업 ·교육사업 ·의료사업 ·출판사업 ·구호사업 등을 전개하며, 대총회라는 이름으로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두고 세계를 13개 지회로 나누어 연합회 ·대회 ·교회의 순서로 조직체를 이루고 있다.
이 교단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1904년 손흥조(孫興祚)가 일본에서 교리를 전해 듣고 이를 임기반(林基盤)에게 전하여, 여기에 흥미를 가진 사람들이 일본의 구니야히데[國谷秀] 목사를 초청하여 전도회를 연 데서 비롯되었다. 1905년 스미스 목사가 첫 선교사로 내한하여 같은 해 순안(順安)에서 교육사업과 출판사업이 시작되었다. 1908년 한국 미션, 1919년 한국연합회가 조직되었고 특히 1915년에는 이근억(李根億) ·정문국(鄭文國)이 최초의 한국인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현재 서울 동대문구 회기동에 있는 한국연합회는 산하에 5개 지방 대회를 두고 600여 교회가 있으며 기관으로 삼육대학(三育大學)을 비롯한 27개의 각급 학교, 서울 ·부산의 위생병원, 80여 년의 역사를 가진 선교잡지 《시조(時兆)》 및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는 시조사, 삼육식품공장 등이 있다
콥트교회 (Coptic Church)
칼케돈공의회(451)에서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디오스코로스가 이단으로 단죄된 데 반발하여 국민적 교회로서 독립하였다. 아랍인의 정복하에서도 그 종교 ·풍습을 존속시켰고, 19세기에 이르러 다시 세력을 만회하였으나 고위 성직자와 신도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났다. 1928년 화해가 성립되어, 양측 대표로 이루어진 선거회에서 총주교를 선출하게 되었다. 한편 4세기 중엽에 이집트에서 에티오피아로 전해진 단성설은, 여기서도 콥트 국민교회를 형성하였고, 1935년 에티오피아를 정복한 이탈리아는 이것을 이집트로부터 완전 분리시켰다.
통일교회 統一敎會 (Unification Church)
문선명(본명 龍壽)은 북한에서의 종교 박해로 흥남 감옥에서 2년 8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유엔군의 북진으로 석방되어 부산으로 피난, 1952년 부산 범일동(凡一洞)에서 토담집 교회로 시작, 1953년에는 대구에 교회를 설립하는 등 선교활동을 계속하다가 서울로 올라와 세계기독교 통일신령협회(世界基督敎統一神靈協會:약칭 통일교회)를 창설했다. 세계에 흩어져 있는 모든 교회를 신령과 진리로 통일하여 한 하느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세계를 만듦으로써, 하느님의 창조이념을 이 땅에 실현하는 것을 지상목표로 삼고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였다. 1957년에는 교리서인 《원리강론(原理講論)》을 완성시켜 교리적인 체계를 갖추었다.
그 내용은 전편 7장(창조원리 ·타락론 ·종말론 ·구주론 ·부활론 ·예정론 ·기독론)과 후편 2장(복귀원리 ·재림론)으로 되어 있으며, 교인들은 다음과 같은 신조(信條)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한다. ① 유일신(唯一神)인 창조주 하느님을 인간의 아버지로 믿는다. ② 신 ·구약성서를 경전으로 받든다. ③ 하느님의 독생자인 예수님을 인간의 구주인 동시에 복귀된 선(善)의 조상으로 믿는다. ④ 예수께서 한국에 재림할 것을 믿는다. ⑤ 인류세계는 재림하는 예수를 중심삼고 하나의 대가족사회가 될 것을 믿는다. ⑥ 하느님의 구원섭리의 최종목표는 지상과 천상에서 악과 지옥을 없애고 선과 천국을 세우는 데 있는 것으로 믿는다.
이같은 인류 대가족사회에 대한 그들의 염원은 선교활동을 국내에만 국한하지 않고 미국 ·일본 등 세계 각국을 향하여 전개시켰다. 1959년에는 일본에 교회를 설립하고, 1960년에 미국교회 등록, 1964년에는 독일에 설립, 1966년 오스트리아에 등록, 같은 해 이탈리아에 등록, 1968년 스위스에 개척전도 시작, 1969년 프랑스에 교회를 세우고 같은 해 레바논 ·노르웨이 ·스웨덴 ·벨기에 ·덴마크 ·룩셈부르크 ·시리아 ·터키에서 개척전도를 개시하였다. 1975년에는 미국 ·일본 ·독일 3개국 출신 선교사 3명씩을 1조로 조직, 세계 각국에 파송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하고 있다. 1972년 이후 세계선교본부를 미국에 두고 전세계를 향한 폭넓은 선교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1977년에는 방이 2,000개나 되는 43층의 뉴요커빌딩을 매입, 세계선교본부로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1961년 36쌍의 합동결혼식을 시작으로 82년 잠실 종합운동장 실내체육관에서 거행한 6,000쌍의 합동결혼식 등을 가져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는가 하면, 리틀엔젤스를 창단하여 세계 각국에서 공연을 하게 한 일 등은 유명하다. 한편, 초교파기독교협회 ·국제크리스찬교수협의회 ·국제기독학생회 등을 통하여 기성교회의 목회자 ·평신도 ·학생 등을 유혹한다고 하여 교계에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학술활동으로는 1973년 서울에서 창립한 ‘세계평화교수협의회’가 현재 70개국에 확대되어 매년 평화에 관한 국제회의와 미국에서 연례적으로 주최하는 ‘국제과학통일회의’는 수준높은 국제학술회의라는 평가도 받고 있다. 육영사업으로는 학교법인 선화학원 안에 선화예술중 ·고등학교와 경복초등학교가 있고, 1975년에는 미국에 통일신학대학원, 1985년에는 국내에 성화(成和)신학교(선문대학) 등을 설립하였다. 언론 ·출판사업으로 국내에서는 《주간종교》, 미국에서는 《뉴욕 트리뷴》 《워싱턴 타임스》, 에스파냐어판 《노티시아스 델 문도》, 일본의 《세계일보》, 우루과이의 《울타마테 노티시아스》 등의 일간신문을 발행하고 있다. 예술활동도 활발하여 리틀엔젤스 외에 미국에서는 25개국 청년 남녀로 구성된 ‘새소망합창단’을 비롯하여 ‘선버스트 경음악단’ ‘고 월드 브라스밴드’ 등을 창단하였다. 1975년에는 뉴욕 심포니오케스트라를 인수하고 1976년에는 뉴욕의 맨해튼 오페라하우스를 매입하고, 1979년에는 영화사 ‘원웨이 프로덕션’을 설립하였다.
통일교는 이같은 활동 외에 경제활동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는데, 국내에는 (주)통일 ·한국티타늄(주) ·(주)일화 ·(주)일신석재 ·(주)동양기계공업 ·홍영수산(주) ·(주)일성종합건설 등 150여 개 사업체를 운영하며, 미국 전역과 유럽 등 전세계에 걸쳐 제약 ·화공 ·조선 ·운수 ·무역 ·건설 ·출판 ·언론 등 많은 사업에 손을 뻗치고 있어 그에 따른 수입규모는 엄청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통일교의 현 교세는 한국에 약 600개 교회와 50만여 명의 신도가 있으며, 세계적으로는 한국 신자를 포함하여 약 400만 명의 신도가 있다.
파울리키우파 (Paulicians)
마르키온파 및 마니교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현세를 지배하는 악신(惡神)과 앞으로 다가올 선신(善神)의 존재를 주장하는 이원론(二元論)을 교지(敎旨)로 하며, 창도자는 콘스탄티누스 시르와누스라고 전한다. 이들은 성서(聖書)의 권위를 인정하였으나 구약성서 및 <베드로의 편지>을 거부했다. 또한 물 ·빵 ·포도주 ·기름 등으로 행하는 전례적(典禮的) 효과나 지상의 교회, 교직의 위계(位階)를 부정하였다. 이 파는 당초 비잔틴제국 내에 정치적 ·군사적 반란을 일으켰으며, 콘스탄티누스 3세, 유스티니아누스 2세 등으로부터 탄압을 받았다. 9세기 후반에 이르러 다시 부활하여 그리스 ·소아시아에서 흥성했으나 872년 바실리우스 1세의 원정대에게 제국(帝國) 주변으로 추방당했고, 일부는 대(對)불가리아 국경 경비원으로 배치되었다. 이 파의 교설(敎說)은 10세기 초 마케도니아에서 일어난 보고밀파에 큰 영향을 끼쳤다.
모르몬교 (Mormons)
말일성도(末日聖徒) 예수그리스도의 교회(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의 속칭. 1830년 미국 뉴욕주(州)의 맨체스터에서 조지프 스미스에 의해 창립되었다. 이 종파는 신 ·구약 성서 외에 스미스가 하느님의 계시에 따라 만들었다는 《모르몬경(經)》과 기타 계시의 집대성(集大成)이라는 《교의와 성약(聖約)》 《값진 진주》(모세가 받은 계시의 수정판인 셈) 등을 기본 경전(經典)으로 삼고 있다. 삼위일체(三位一體)의 하느님 및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믿는 점 등은 정통 그리스도교와 같으나, 스미스에게 나타난다는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특수한 현현(顯現), 《모르몬경》, 시간 및 공간을 무한한 것이라 하고, 물질은 영원한 것이지만 하느님에 의한 피조물(被造物)이 아니라는 점 등, 이단적(異端的)이고 그노시스주의적인 면도 다분히 있다.
모르몬 교인은 12세가 지나면 안수를 받고 성직자가 되는데, 전문적인 성직자는 없다. 1843년 스미스는 계시에 따라 일부다처제(一夫多妻制)를 인정한다 하여 곳곳에서 중혼(重婚)을 규탄하는 여론이 비등하였다. 1844년 그는 군중에 의해서 살해된 데 이어, 상당수의 교인이 살해되거나 피신하는 사태를 빚었다. 중혼문제는 미국 대법원이 개입하여 이를 금하였고, 교회에서도 1895년 중혼을 금지하는 결의를 함으로써 중혼문제는 일단락되었다. 스미스의 후계자가 된 브리감 영이 1847년 본부를 로키산맥 너머의 유타주(州) 솔트레이크로 옮긴 후 30년간 교세를 크게 확장, 유타주는 모르몬주로 불릴 만큼 인구의 70% 이상이 신자가 되었으며, 1858년 미국내의 신자수는 100만을 넘었다. 교구(敎區)는 10개 이상의 ‘와드’로 조직되는 ‘스테이크’로 이루어진다.
【한국에의 전교】 한국에는 1951년 김호직(金浩稙)박사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침례를 받고 귀국하여 피난 수도인 부산에서 미군들과 예배를 드림으로써 시작되었다. 1973년 3월 초대교구가 되었고, 1990년 현재 국내에는 10여 개의 와드로 이루어진 14개의 스테이크가 있고, 1와드당 신자수는 200∼300명으로, 총신도수는 5만 2000명이다. 선교사는 500여 명이며 전국에 5개의 선교부를 두고 있다. 이슬람 ·바하이교 등 6 ·25전쟁과 함께 도입된 종교 중 가장 큰 교세를 이루고 있다. 서울 서대문구에 성전이 있다.
구세군 救世軍 (Salvation Army)
1865년 7월 2일 런던에서 당시 감리교(監理敎) 목사이던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와 그의 부인 캐서린 부스(Catherine Booth)가 창시하였다. '그리스도교 전도회(Christian Mission)'라는 명칭으로 서민층을 상대로 동부지역 빈민가 등을 찾아가 노방(路蒡)전도를 한 데서 시작하였다.
그리스도 신앙의 전통을 따르는 교리를 가지고 선도와 교육, 가난구제, 기타 자선 및 사회사업을 통해 전인적 구원을 이루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1878년 구세군으로 개칭하였다. 조직은 군대식 제도를 모방하고 교회를 국제적인 단일조직으로 하여 부스가 초대 대장이 되었다.
각 군국(軍國)에는 사령관이 있고 지역사령부에는 지역사령관이 있다. 또한 군국마다 각 지방을 관장하는 지방장관이 있으며, 각 지방에는 소속된 영(營)이 있어 담당 사관이 복음선교와 예배, 지역사회 봉사사업을 지도한다. 영문(營門)에는 병사가 있는데, 이들은 구세군을 통하여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영혼의 구원을 위하여 세상의 죄악과 싸울 것을 다짐하고 병사로서 동참하고 있다.
주요 교리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① 신구약 성서는 하느님의 영감으로 이루어졌으며, 성서만을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실천의 표준으로 믿는다. ② 하느님만을 만물의 창조자요 보존자요 통치자로 믿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는다. ③ 하느님 안에 성부·성자·성령의 3위가 있는데, 본질상 동등하며 권능과 영광으로도 동등함을 믿는다.
④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에는 신·인성(神人性)이 합쳐 있어 예수는 참 하느님이요 참 사람임을 믿는다. 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여 하느님의 진노의 대상의 실존임을 믿는다. ⑥ 예수의 죽음은 만인의 죄를 대속한 은총이므로,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 ⑦ 구원의 조건은 하느님께 회개하고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새로 나는 것이다.
⑧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마다 구원의 체험을 갖게 됨을 믿는다. ⑨ 구원 상태의 지속은 순종하는 믿음을 계속 가져야 한다. ⑩ 예수의 재림을 믿으며 신자는 그때까지 성결을 보전하게 됨을 특전으로 믿는다. ⑪ 영원한 생명은 현재적이요 미래적임을 믿으며 육체의 부활, 세상 끝의 총심판,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영원한 행복을 믿는다.
이상 11개 교리에서 신학적으로 하느님의 본질과 목적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윤리면에서는 하느님에 관한 일반적 지식[神認識]은 반드시 성서적 지식에 의하여 해석되어야 하고 완성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 국제규모의 복음전도와 각종 사회사업을 전개, 세계 80개국 나라에 1만 6000개의 전도센터가 있으며, 3,000여 개의 사회복지단체·기관·학교·병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한국에도 1908년 영국에서 파견된 로버트 호가트(Robert Hoggard) 정령(正領)이 이끄는 10여 명의 사관이 선교사업을 시작한 이래, 그 교세를 확장하는 한편, 의료선교 및 고아원·양로원·육아원 등을 경영하며, 그밖에도 교육기관을 통해 포교에 힘쓰고 있다. 본부는 영국 런던에 있다.
그리스도교 교파로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가 창설한 교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