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현충일
김 난 석
지난 오월은 장미의 계절이라 하던가.
해마다 유월이 오면 온 산하에 찔레꽃도 지천이다.
다섯 잎 하얀 꽃들이 송아리를 이뤄 피어대는 모습 앞에 서보면
반겨줄 이 기다릴 것도 없이 철없는 아이들 얼굴 내밀고
그리워 서러워 옷섶에 눈물 가리는 여인도 보인다.
찔레꽃 붉게 피는 남쪽나라 내고향
언덕 위에 초가 삼간 그립습니다...
국민가수 백난아의 노래를 떠올려보노라면
시간과 공간을 거슬러 올라 먼 기억의 곳간에 하얗게 쌓여진
무언지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서러움도 만나게 된다.
호국(胡國)에 끌려가던 서러운 이들을 생각하는 이도 있고
나라 잃고 북간도로 건너가던 우국지사를 생각하는 이도 있겠지.
유월전쟁의 하얀 포연 속에 잃어진 고향을 생각하는 이도 있을게다.
알 수 없는 그리움과 서러움은 하얀 꽃 향으로 달랠 길밖에 없으니
꽃들 지천일 때 가까이 다가가 볼이라도 가만히 대봐야 하지 않을까...
찔레향 따라 유월에 연원하는 아픈 기억들이 아른거리느니
그해 유월의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의 숙부님은 두 다리 잃고
육군정양원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조부님의 사망소식을 접하고야 고향에 돌아왔다.
신체발부 수지부모의 그 효를 생각해서였을까?
사지가 멀쩡한 아우가 초등학교를 나오자마자
두 다리를 잃어 몸을 가누지 못하는 숙부님에 매여 있게 되었으니
나는 그때부터 아우에게 죄인 아닌 죄인이 되고 말았다.
그런 상황에 나 혼자 어찌 대학까지 가랴.
가세가 넉넉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나는 어느 지방의 사범학교에 들어가게 된다.
성적이 좋았던지 졸업 첫해에 열아홉 살의 나이로 교사 발령을 받게 되지만
이것도 잠시, 5. 16 군사정부에 의해 내쳐지고 만다.
그 이유는 병역 미필자라는 것이니
한참 고질적 병폐를 일소하겠다던 그때
병역미필자 색출은 온 국민의 환영을 받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야 아직 징집명령이 나올 때가 안 돼서
그런 게 아니었던가.
결국 나와 같은 경우를 포함해 많은 수의 교사들이 내쳐짐을 당해
교사부족사태가 오게 되었으니 혼란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들은 행정경험이 없어 하나만 알았을 터이니
교사수급계획 같은 건 생각해봤을 리 없었을 게다.
한국전쟁의 그해 유월, 전쟁 지휘경험이 없던 지휘관들은
얼마나 많은 병사들을 무턱대고 사지로 몰아댔을까.....?
그나마 일제시대의 군 경험이 있던 이들이 지휘관으로 참여했을 테니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이요 유월의 아픔인 것이다.
드디어 행정의 실착을 깨닫고 고의가 아닌 병역미필자들을 다시 불러들였으나
나는 이미 무작정 상경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얼마간의 나의 방황은 유월의 탓일 뿐이요,
이로 인해 나의 성장과정은 아픔이 쌓일 뿐이었다.
세월은 또 흘러 아픔과 함께 성장하게 되는 것,
어렵게 학업을 마치고 어느 국가기관에 임용되어
예비군 관리실태를 점검하던 때였나 보다.
잠시 틈을 내어 내 숙부를 찾아뵈었더니
몇 명의 부인들이 와있었고
그들 앞에서 유월전쟁의 무용담을 늘어놓다가 조카 자랑을 하셨다.
어떤 이가 내게 말을 걸어오기를
자기 남편이 시골에서 올라와 예비군 이전신고를 늦게 해 조사를 당했다면서
돈도 얼마를 쥐어줬는데
감옥에 가면 어찌 살라는 것이냐고 걱정이 태산이었다.
해당 동사무소에 들려 실태를 알아보니
병사담당 캐비넷에 들어있는 것이라곤 온통 조사서류 뿐이었다.
몇 개를 들추어보니 바로 취조식의 조사서류였다.
언제 서울에 올라왔느냐, 왜 신고를 늦게 했느냐,
법의 심판을 달게 받겠느냐, 대충 이런 내용들이었으니
조사를 당한 사람들은 얼마나 불안했을까.
당시 주소지를 이전하면 일주일인가 보름 안에
예비군 전입신고를 하도록 돼있었지만
무작정 상경하는 이들이야 이를 어찌 알랴.
행정지도를 할 사항인데 이렇게 겁을 주고 있었으니
이를 빌미로 또 얼마나 많은 뒷거래가 있었으랴.
행정의 낙후도 낙후지만 모두 유월에서 연원하는 아픔일 뿐이었던 것이다.
어느 나라에서나 사회혼란기에는 공직자들의 행패가 심한 법이다.
북한에서 내려와 대학을 다니고 병원을 차려 의업을 한다는 게
당시로선 참 어려운 일이었으려니,
내 장인어른도 고초가 참 많았을 게다.
그런데도 박봉에 시달리던 나를 괜찮다고 보아 사위로 맞이했으니
그 사정을 뒤집어 짐작이 가기에
이것도 나에겐 홍자(鴻慈)가 아닌 슬픈 기억으로 남는다.
어느 공직자가 비리를 저지르고 군에 자원입대했을 때의 일이었다.
일종의 피신이었을 게다.
이를 알아보기 위해 훈련이 없는 일요일을 택해 어느 훈련소에 가보기로 했다.
물론 조사내용은 비밀로 일러두고 해당 부대장만 대기하도록 부탁했다.
토요일에 미리 내려가 숙소에 여장을 풀고
이튿날 아침 일찍 훈련소에 들렸더니
여러 지휘관들이 나와 있었다.
참 어처구니없게도 쓸데없는 짓들이 아니었던가.
전쟁이 나던 그해 유월, 많은 장병들이 이렇게 자리를 지켰더라만
그렇게 우왕좌왕하진 않았으려니
이것도 나에겐 유월의 아픔을 건드리는 것이었다.
정부의 특별사업에 관련된 비리를 조사할 때였나 보다.
많은 장성들이 사무실에 불려 들어왔다.
별이 하나도 아닌 여러 개의 장성이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보였다.
그들은 무명용사들의 영혼 앞에선 눈물을 얼마나 흘렸을까?
가만히 생각해보다 내 스스로 연민의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으니
이것도 나에겐 유월의 아픔을 건드리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부정의료행위가 많다는 여론이 있었다.
어느 지방의 한의사협회에 들려 참고이야기를 듣고 있을 때였다.
의사 자격도 없는 사람이 권력층의 비호아래 버젓이 의료행위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게 어디냐고 물었더니 말도 말라는 것이었다.
지난달에도 불려갔으나 담당검사가 금세 풀어주더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했으나 역시 말도 말라는 것이었다.
한참동안 나의 실례를 들려주었더니 신뢰를 한 것인지
어느 양옥 3층 빌딩을 일러주었다.
점심을 든 후 거길 찾아가봤다.
문 앞에 경비가 서있는 것으로 보아 심상치 않아 보였다.
누구냐고 묻기에 쪽지를 건네주고 친구라고 일러두었다.
한참 뒤에 올라오라는 전갈이 내려왔다.
올라가면서 1층과 2층을 보니 많은 환자들이 침상에 의자에 대기하고 있었다.
3층에 올라가 기다리면서 벽을 둘러보니
어느 보안부대장의 확인서가 붙어있는 게 보였다.
이 사람은 육이오 때 납치되었다가 남파된 간첩인데 자수한 사람이며
북한에 있을 때 북경에 유학 가서 한의사 자격을 딴 사람이라는 내용이었다.
아, 알겠구나. 짐작이 간다.
이윽고 방에 들어가니 “또 오셨군요” 하는 한마디였다.
그러니까 자기는 의료행위를 안하려 해도 환자들이 밀려와 어쩔 수 없다는 것이고
이럴 때마다 신고가 들어와 검찰이 기소했다는 것이며
그럴 때마다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는데
이젠 어디론가 숨어버려야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찰기관의 요주의 인물일 텐데 어디로 숨어버린단 말인가.
나는 그 협회 직원의 말대로 식언을 하고
그저 검찰에 넘기는 수순밖에 밟을 수 없었으니
이것도 유월에서 연원하는 아픔일 뿐이었다.
우리들의 아픔이 어디 이것뿐이랴.
하지만 내일은 또 내일의 태양을 맞아야 하려니
오늘 잠시 눈을 감아보는 것이다.
유월이여! 지나가려거든 깊게 패인 골에 한 부삽의 재라도 채워 넣으라.
오늘은 68회 현중일이다.
엊그제엔 북한에서 예포가 아닌 미사일을 쏴대 공포를 조장했지만
오늘 아침엔 하늘이 낮게 깔리고 안개까지 끼어
영령들을 추모하는구나.
순국선열
순 꺾어 허기 달래던 그해 유월
국가의 부름이라 뛰쳐나선 임들이시여!
선열 되어 돌아오신 고귀한 넋
열사들이 그 뒤를 이어가시니이다.
순
국
선
열
2023. 6. 6.
첫댓글 석촌님 현충일 추모글에 잠시 숙연해 짐니다.
건안이요.
네에 잘 지내시지요?
전쟁의 상처는
전쟁이 끝난 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고아도 생겨나고,
상이군인, 미망인(?)도, 이산가족도 생겼지요.
사기꾼, 소매치기, 양아치, 양공주, 삥땅이란 신조어도 생겼습니다.
그런 와중에도 바람난 가장도 있었지요.
자식들이 헐벗고 남의 집으로 간 후,
길을 잃고 40여년을 가족없이 생고아도 있었지요.
그래도 장한 것은
그 어려움을 이겨 낸 국민들이 많았기에
지금 이 좋은 세상을 만났으니요.
그어떤 어려움을 겪고도 이만큼 살게 된 나라에,
아직도 정신 못차리는, 남의 탓만 일삼는 사람 많습니다
'상기하자 육이오'
석촌님, 오늘 꼭 읽어보아야 할 글
감사합니다.
정치권은 오늘도 술렁댔지만
국민들은 조용히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중국 러시아 비행기는 간을 보고 가고요.
오늘은 현충일 아무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참새가 방아간 못 지나 가듯
수필방에 들렸더니 선배님께서 들려주신
순국선열의 시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어떤일이 있어도 다시는 6.25 전쟁같은
비극은 없어야죠.
나무랑님은 그 시대를 살짝 비켜났지만
엄청난 세기적 비극이었지요.
평화를 기원하네요..
나 태평성대는 군대 생활 31 개월을 하고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내 두 아들들도 24 개월 이상의 군대 생활을 하고 만기 제대를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 가족들은 다들 군대를 갔다 왔습니다
나는 예비군 이던 시절을 포함해서 군대에 있을때에는
전쟁이 나면 대한민국을 위해서 전쟁터에서 이 한목숨을 초개 같이 바치리라고 다짐 했습니다
30대 후반 40 대 초반의 민방위 시절에도 전쟁이 나면 전쟁터에 나가서 물자라도 나르겠다고 다짐 했습니다
아마 대부분 군대를 다녀온 대한민국 남자들은 똑 같은 생각 이었을 겁니다
평화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 입니다
강해야지 타 국가가 깔보지 않습니다
도발하면 혼내 주겠다는 생각이 있어야지 전쟁을 예방할수 있을겁니당
현충일을 맞이해서 나의 생각을 말씀드려 봤습니당
충성 우하하하하하
맞아요, 말로만 백번 하는 평화는 아무 소용없어요.
그래도 사나이 결기가 대단한 태평성대님...^^
안녀하십니까? 선배님.
어느 국가기관에서 근무하셨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공무원이나
군인들 그리고 나라세금을 지원받은 단체들을
감시하고 비리를 조사하는 곳이라면
선배님께선 엄청 무서운 곳에 근무하셨군요.ㅡㅋ
현충일ㅡ
사전에서는 대한민국과 한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친 분들을 기억하는 날이다.라고 표기됩니다.
지정된지 벌써 68회 되는 현충일입니다.
외국에 나가 지낸지 1년 정도 지나니까
외롭고 지칠때 부모님과 가족이 생각 나듯이
내나라도 소중하고 그리워 지더군요.
당시엔 내나라에 살고 계신 모든 분들이 애국자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ㅡㅋ
추모 기념일이 다가오면 항상 그렇지만
5월 25일 경에 아버님 묻혀 계시는
임실 호국원에서 참배객들의 집중 방문으로
원내 주차 공간이 부족하고 교통체증이 예상되니
당일 보다는 하루전이나 그 다음날
참배를 권유하는 문자를 받았습니다.
분명 호국원은 국가 권력기관이 아닌데도
저는 '넵, 따르겠습니다.'하고 답장은 하지 않았지만
부친께선 625 참전 용사로 모셔졌기에
며칠 뒤에 뵈러 갈려고 합니다.
행복하십시요.
국가보훈가족이시군요.
함께 추념합니다.^^
지난날의 전쟁 아픔과
생생한 체험담이 실감나는 글입니다.
오늘은
석촌님의 자서전..일대기의 줄거리를 읽게 되고
석촌님에 대해 더 많은 이해의 장이 된 것 같습니다.
베란다에 반기를 내걸며 바라보니
우리 아파트는 거의 국기를 게양하지 않았더군요.
점점 625에서 전사한 분들에 대한 추모도 희미해지는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