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켓볼·스누커 국가대표 차보람·유람 자매
운동 미련많은 아버지, 테니스 시원치 않자 "당구를 해라" 종목변경
외모도 실력도 스타로…
한때 '독거미'로 불린 당구(撞球)여왕이 있었다. 재미교포 자넷리(39)다. 미모에 실력까지 갖춘 그로 인해 2000년대 한국에 당구가 붐을 이뤘다. 지금은 자매가 뒤를 잇고 있다. 이른바 '쌍독(雙毒)', 차보람(25)·차유람(23)이다.
차유람의 인터넷 미니 홈페이지는 누적 방문자 수가 175만명이다. 실력 좋은데다 '얼짱'이니 관심이 안 쏠릴 수가 없다. 언니도 당구선수다. 그런데 그는 동생이 국제대회를 휩쓸 때 변변한 성적 한번 못 내자 테이블을 떠났다.
5년간 쉬며 유치원 교사를 꿈꿨지만 끝내 당구의 매력을 잊지 못한 언니는 작년 6월 복귀했다. 자매는 나란히 광저우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뽑혔다. 차유람은 포켓볼로, 차보람은 스누커 대표로 뛰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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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저우 아시안게임 당구 국가대표 차유람(왼쪽)·보람 자매가 태릉선수촌 훈련장에서 몸을 풀고 있다. 이들은“사설 당구장에서 연습하다가 태릉에서 합숙훈련을 하니 실력이 부쩍 오르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준헌 객원기자 heon@chosun.com
■완도의 테니스 자매, 당구를 치다
자매는 전남 완도초등학교 테니스부에서 '작은 공'과 첫 인연을 맺었다. 아버지 차성익(56)씨가 운영하던 횟집에 테니스부가 회식하러 종종 들르면서 자매는 학교도 가기 전부터 테니스에 익숙해졌다.
거기에 아버지의 열망도 더해졌다. 완도수산고 육상부 '에이스'였지만 형편 탓에 뜻을 접었던 아버지는 "내가 못 이룬 꿈을 자식들이 이뤄주길 바랐다"고 했다. 아버지는 두 딸을 데리고 좋은 코치를 찾아 전국을 떠돌았다.
이사만 10번 넘게 한 '테니스 데디(daddy)'였다. 이 이상한 부녀를 부양한 것은 어머니(고소영·47)였다. 어머니는 홀로 완도에서 식당일을 하며 돈을 벌었다. 하지만 자매는 2000년에 나란히 테니스를 그만뒀다.
당시 테니스 실력에 대해 차보람은 이리 말했다. "실력도 중간 정도였다. 별로 장래도 밝지 않았다." 까맣게 그을러 가는 딸들의 모습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결단을 내렸다. 실내종목을 하자, 뭘 할까? 바로 당구!!
아버지는 "당시 TV로 자넷리를 보고 여자 당구선수가 저렇게 멋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아버지는 현실적이기도 했다. "최악의 경우, 먹고 살 수는 있어야 하잖아요. 같은 당구장도 여자가 하면 더 잘될 것 같아…."
"딸 인생 망치냐" "미쳤느냐"는 말이 나왔지만 아버지는 물론 딸들도 신경 쓰지 않았다. 차유람이 말했다. "당구가 뭔지도 몰랐지만 테니스가 워낙 힘들어 이것저것 따질 여력도 없었다. 테니스만 아니면 뭐든 괜찮았다."
■달라진 자매의 당구 인생
자매는 서울 가산동 한국당구아카데미에서 레슨을 받으며 당구에 올인하기 시작했다. 유람은 수원 율전중 2학년 때, 차보람은 서울디자인고 1학년 때 학교를 자퇴했다. 고졸 자격은 검정고시로 땄다.
자매는 하루 만번씩 스트로크를 했다. "어깨가 빠지는 것 같어요."(차유람) "허리를 구부리고 엉덩이를 뒤로 빼는 당구 자세가 괜스레 부끄러웠어요."(차보람) 힘든 건 같았지만 당구를 보는 마음가짐은 달랐다.
동생은 1년에 한 번쯤은 포기하려 했다. 차유람은 "도저히 즐길 수 없었다. 매일 훈련하고 경기하고…. 엄청 질리더라"고 했다. 반면 언니는 "당구가 즐거웠다"고 했다. 공의 움직임을 알면서부터 비로소 기뻐졌다.
성공은 그런 동생에게 먼저 다가갔다. 차보람은 동생보다 테니스는 더 잘 쳤지만 당구는 달랐다. 그래서 2004년 당구를 떠났다. 그는 "사람들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었다"며 "상심이 너무 커 당구가 재미있는 줄 몰랐다"고 했다.
차유람은 2006년 9월 일약 '신데렐라'가 됐다. 잠실 롯데월드에서 열린 이벤트 대회에서 자넷리와 대등한 대결을 펼치며 외모와 실력이 세간의 관심을 받았다. 순식간에 인터넷 포털사이트의 검색순위 1위에 올랐다.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차유람은 올 3월엔 피겨 스타 김연아(20)가 속했던 매니지먼트사와 3년 전속계약을 맺었다. 순식간에 수퍼스타가 된 것이다. 그런 그를 연예인 보듯 지켜본 사람이 있었다. 언니 차보람이었다.
■같은 듯 다른 자매의 길
자매는 가끔 말다툼을 하지만 아시안게임 메달을 향한 집념만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 둘은 6월부터 태릉에서 합숙하며 하루 7~8시간 훈련하고 있다. 차유람은 "잘될 확률을 높여가는 중"이라고 했다.
아시안게임 이후의 목표는 다르다. 차보람은 지도자가 되고 싶어한다. 후배들에게만큼은 제대로 된 당구의 재미를 가르치고 싶다는 것이다. 차유람은 그 말에 맞장구치며 "언니는 속 깊고 정도 많아 지도자가 맞는다"고 했다.
차유람은 "세계 챔피언을 목표로 했다가 그거 이루면 허무해질 것 같다"고 했다. 한계를 긋기 싫다는 뜻이다. 그는 '여자 당구=섹스 어필'에 대해선 이리 말했다. "여성스러움을 발산해야 한다면 해야죠. 그것도 제 일인데…."
☞ 포켓볼
테이블 구멍에 번호가 적힌 공을 일정한 룰에 따라 차례로 넣는 경기다. 공 8개를 넣는 ‘에이트 볼(eight ball)’과 9개를 넣는 ‘나인 볼(nine ball)’로 구분된다. 광저우 아시안게임엔 남·여 2개씩 금메달이 걸려 있다.
☞ 스누커
흰색 공으로 빨간 공 15개(각 1점)와 6개의 색깔 공(2~7점)을 쳐 구멍에 넣는 경기이다. 빨간 공을 먼저 넣고 다음에 색깔 공을 친다. 개인전·단체전으로 나누어지며 광저우 아시안게임엔 남녀 2개씩 금메달이 걸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