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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음, 현기증, 아랫배 쌀쌀, 메슥메슥..
오늘 일정 백프로 취소!
입안이 쩍쩍 말라 들러붙는 현상까지..
떨어뜨릴래야 도저히 떨어뜨릴 수 없는, 하늘이 맺어준 운명의 아니 숙명의 친구가 있다.
처음에 우린 한 직장이라 퇴근 후 거의 매일 만나 싸돌아 다녔다.
그후 직장이 갈리고 시간 맞추기가 어려워 우린 한 달에 한번 꼴로 간신히 만난다.
그러다 이 친구, 우여곡절 끝에 프랑스와 필리핀을 몇번 왔다갔다 하게 되었고
그 사이 어느덧 조금씩 만남의 텀이 생기기 시작,
이제는 견우직녀처럼 일년에 겨우 한번 어렵사리 만난다.
대신 그날 하루는 코가 뭉그러지도록 마시게 된다.
어느새 구세군 냄비처럼 우리 둘 사이의 연중행사로 굳어졌다.
어제가 그날이다.
서울 지하철 4호선을 은하수처럼 사이에 두고
하나는 저 북쪽하늘에 하나는 까마득한 남쪽하늘 아래
각각 또아리틀고 사는 관계로다가
우린 공평하게 한 해는 숙대역에서,
그 다음 한 해는 혜화역 4번출구에서 번갈아가며 해후를 하곤 한다.
어제는 혜화역 4번출구 차례였다.
우린 출구계단서 얼굴 부딪자마자 팔짱을 끼곤 곧바로
그 옛날 [ 학림다방 ]자리의 [ 와인카페 ]( 가게 이름은 모름 )로 씩씩하게 걸어들어갔다.
그곳은 마치 80년대의 음악다방을 흉내낸 연극무대 하나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듯 아늑한 분위기다.
- '떼 라 어쩌구저쩌구' 병으로 하나 갖다 주세요.(와인 이름을 내가 못알아들은 관계로...)
잠시 후 땅콩과 크랙커와 함께 '떼 라 어쩌구저쩌구'가 병째로 테이블 위에 놓여졌다.
- 마셔봐, 카페서 이만 오천원하는 와인치고는 꽤 그럴싸해.
-어쩜 마트에선 한병에 오천원할 지도 몰라.
-맨날 이슬이만 먹지 말고 가끔은 이런 와인도 섭취해줘.
-혈액순환에 진짜 끝내줘.
-특히 이집은 안주 시키라는 은근한 압력이 없어 너무 좋아.
-사실 우리같은 사람들한테는 안주 그거 가격만 비싸고 하등에 쓸데 없는 거잖아?
사람과 사람사이의 거리를 삼십센티 자 같은 것으로 과연 측정할 수가 있을까?
부딪히는 횟수별로 순위를 매겨야 하나, 친밀도의 객관적인 측정으로 순위를 매겨야 하나..?
매일 부딪히기는 하지만 아는 체 하기는 왠지 애매해서 그냥 모르는 척하는 사이가 있을 수 있고,
일년만에 봐도 어제 본 것 처럼 여전히 익숙 친근한 사이가 있다.
예의상 그냥 까딱 목례만 하는 사이부터, 가볍게 눈인사만 하는 사이,
자주 만나기는 하는데 우리가 어떤사이인지 영 모르겠다는 혼란스런 사이,
한달에 한번 밥 한끼 먹는 모임에서만 친하다가 보름내내 전혀 생각조차 안하고 지내는 사이도 있고,
그런가 하면 일생에 딱 한번 마주쳤지만 남은 생애 내내 그리워하게 되는 사이도 있다.
물론 십수년 내내 지겹게 함께 지냈지만 이제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은 그런 인연도 있긴 하지만..
우리 둘은 말하자면 연중 한번만 만나도 늘 어제 만난 듯한 그런 사이라고 해야 하나.
그윽한 와인카페. 우리가 앉은 자리는 이층 나무난간 바로 앞좌석이었고
우리 발아래로는 일층 엘피 박스에서 간간이 새나오는 재즈 피아노 소리가 안정되게 흘렀다
일년 사이 그녀의 머리는 더 길어졌고 꽈배기처럼 구불구불해져 있었다.
늘 그렇듯이 검은색 셔츠, 검은색 바지, 검은색 자켓, 검은색 가방에 검은색 단화구두 차림.
그녀는 검정이 아주 잘 어울린다.
- 와아, 넌 계속 그 색 입어라. 절대 검은색은 입지 마.
-검은색 입으면 시체, 미이라, 죽은 사람 같아.
-내 작년에 말했지? 눈물 흘리는 마네킹 같다고.
-지금 그 색 너한테 너무 잘 어울려. 그게 그러니까 무슨 색이지? 완전 파란색? 파스텔톤 블루?
-그런데 그것보다 더 잘 어울리는 색은 연한 파스텔 핑크야.
-그게 젤루 잘 어울려. 명심할 건 절대 블랙은 피할 것. 알지? 근데 어째 눈이 더 커졌어?
- ㅋㅋ 눈을 왜 째? 지금 이 눈도 오무리고 싶고만. 눈알도 더 들여보내고 싶고.
- 마저, 너 눈알은 곧 쏟아질 거 같지. 걱정마, 쏟아지면 내가 손바닥으로 받아줄게.
-들고 바로 안과 가자. 집어넣어달라구. ㅋㅋ
- 근데, 피부가 깨끗해졌네? 아이피 수술했나? 아 뭐야. 대체 나 모르게 뭔 수술을 한거야?
- 너, 그런 수술할 돈 있음 그 돈으로 술을 마시겠다.
-알잖아. 우리 둘이 그거 공통점. 미모보다는 술~ ㅋㅋ..
- 맞다 그래, 역시 술은 이렇게 주거니 받거니 하며 둘이 함께 마셔야 제 맛이 나!!
-아들은 어때? 내년에 고1 올라가나?
- 응, 그럭저럭 요즘은 진정국면 같어.
- 과외는?
- 애들 더 늘었어.
- 잘 됐네. 남편은?
그녀의 얼굴이 확 어두워진다.
- 전남편 얘기 물어보는 사람이 젤루 싫은 거 알어?
- 알써, 미안.
와인 두병을 연달아 해치운 후,
2차로 혜화역 1번출구 옆 그녀의 친구네 돼지집으로 들어갔다.
들어갈 때만 해도 말짱했는데
그 안에서 잎파리 세개 달린 참이슬 세병을 안주없이
한 시간만에 해치우는 만행을 둘이 순식간에 저지르고 만다.
만행 끝에 그녀는 내 하얀지갑이 이쁘다고 몇번이나 강조해 그럼 너 가지라고 했다.
그러자 그녀가 1차에 이어 2차 술값도 자기가 지불하겠다며
그대신 나보고 우리를 실어다 줄 참한 운전기사나 하나 대령하란다.
- 운전기사? 없어. 그런 거.. 나 안 키워...
- 그런 것도 하나 안 키워두고. 그동안 대체 뭐하고 살았대? 에이 능력없다 ..
- 그러는 넌 뭐했니? 너두 능력 꽝이다 뭐. 내 너였음 남편도 없겠다 남자 키우느라 살판 났겠구먼.
- 아 그럼 남편 있는 여자가 한번 징하게 전화라도 해봐.
-모시러 오라구. 그럴 자신도 없으믄서 대체 왜 살어!
- 내가 왜 그럴 자신이 없냐? 기다려. 누가 데릴러 오나 기대해봐 전화할테니 씩씩~
- 삐리리리링 삐리링~ 아, 여보세요?
- 어, 나... 아직 사무실이야?
- 어, 아직 사무실. 어디야? 누구랑 있는 거야?
- 나? 은영이랑. 올래?
- 아.. 이 사람이 왜 또 그래? 취했어? 얼마나 마셨길래?
- 나 데릴러 오래. 안그러면 안좋아하는 걸루 여기겠대. 은영이가.
( 잠시 고민하는 듯.. )
- 거기가 대체 어딘데 그래?
- 4호선 혜화역 1번출구 옆 ???.
- 알써, 꼼짝 말고 거기 둘이 가만있어. 지금 바로 갈게.
전화를 끊자마자 그녀가 박수치며 나를 때리며 환호성이다.
- 우우, 보람있네. 어우.. 대단한데? 많이 컸구만 나 없는동안..
- ............
그날 밤, [ 남자를 부른 여자 ]와 [ 남자를 거부한 여자 ]를 한 남자가 혜화역 1번출구 앞에서 납치,
자기차에 강제로 우겨넣은 뒤 무작정 내달렸다.
어느새 차는 [ 남자를 거부한 여자 ] 집에 세워졌고
남자를 향해 여자가 차라도 한잔 마시고 가라고 달콤하게 유혹한다.
[ 남자를 부른 여자 ]도 은근 합세한다.
-그래, 은영이 집에서 커피 딱 한잔만 마시고 가자 응?
못이기는 척 남자가 엘리베이터로 따라 들어온다.
잠자던 은영이 아들이 놀래 뛰어나와 문을 열어주고
조심조심 들어간 우리 둘을 향한 그녀의 환대는 밤이 깊도록 끝이 없다.
돌아오는 길, 이 남자가 조심스레 입을 연다.
- 참 열심히 사는 친구군. 혼자 몸으로 과외해가며 아들까지 저렇게...
- 그래 맞아. 단지 남자가 없다는 것 하나만 빼고는! 돈 잘 벌고 성격 좋은 남자 하나만 물색해줘.
- 그런 놈들은 벌써 다 여자가 있지.
- 그래도 찾아봐. 진짜 남자다운 놈으로 눈 크게 부릅뜨고.
- 근데 왜 당신 친구들은 하나같이 다 독신이야? 남자 구하는 친구가 왜 이리 많아?
- 나두 몰러. 유유상종이라고, 내 안에도 아마 독신팔자가 들어있어 그런 친구들한테 자꾸 끌리나봐.
- 그게 아니지, 내가 볼 때 당신은 남편이나 자식을 오버해서 자랑하는 친구들의,
그 행복떠는 꼴을 도저히 아니꼬와서 아예 처음부터 못보는 타입이지. 안 그래?
차라리 남자 없이 혼자 고독하게 사는 친구와의 [ 일대일 깊은 대화 ] 같은 것을
당신은 훨 더 편안하고도 인간적으로 받아들이는 스타일이야. 내 말이 맞을 걸?
- 그래, 당신 말이 맞다. 아주 정확해.
이럴 때 보면 이 사람도, 은근 예리하다. 내 속을 완전 꿰뚫는다.
모임에서 자식자랑, 남편자랑, 마누라자랑, 명품물건 자랑쪽으로 화제를 은근히 돌리고
슬쩍 말흘리는 여자구 남자구 그들 앞에선 완전 할 말 없다.
아니 할 말 없는 정도가 아니라 집에 얼른 가고 싶다.
'자기자신'에 대한 진솔한 대화를 하는 모임이나 만남을 난 더 원하므로.
이런 심리를 불타는 질투나 시기심이라 해도 할 수 없고
남의 행복을 들어주지 못하는 소인배의 속좁음이라 해도 할 수 없다.
내 살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판국에
뭣하러 비싼 회비까지 내가면서 스트레스를 얻어 오나 싶은 거다.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하는 친구들만 어렵사리 선별해서 만나기도 아쉬운 세상,
죽기 전에 내게 허락된 시간이 이젠 시시각각 너무도 아까운 이 판국에,
뭣하러 싫은 모임까지 끌려나가 돈내고 시간 죽이고
스트레스까지 덤으로 사오냐 말이지요. 안 그러냐고요?
오랜만에 진하게 우러난 진국같은 친구들과 사랑앓이를 해본다.
활짝 열린 차창으로 밤 공기가 얼굴을 때리고...
은영이와 그녀의 아들 얼굴이 ...
눈을 감아 버리게 한다...
Dance Me To The End Of Love / Madeleine Peyroux
첫댓글 담담하게 써 내려간 글에서 진한 우정의 향기가 피어납니다. 한편의 수필을 읽은 느낌입니다. 건강하세요. *^^*
여자들의진한 의리가 느껴지고 그런 진실한 친구가 있는한 외롭지 않을 거예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28.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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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러워요![!](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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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분^*^
멋지네요^^*
조용조용한 꼴찌 님 ~~오랜만이요. 멋진 우정!
오늘도 행복하세요``````````````
남자든, 여자든...자기 속의 이야기를 다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행복한 일이지요...좋은 친구가 되시길..그 분도..꼴찌님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