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➀
속임수의 명수
조 케네디
리더스 다이제스트
1998년 12월 판에서 옮겨옴
옮긴이 김철주
조지프 P. 케네디에 관한 최초의 본격적인 저서가 출간된 지 어느새 30년이 넘었다. 그 후로 훨씬 더 많은 자료들이 공개되었고 또 미국 최초의 정치왕조의 우두머리와 가까이 지냈던 사람들이 이제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도 좋을 때가 되었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워싱턴 포스트」지의 前 기자요 베스트셀러 「백악관의 내부」의 저자인 로널드 케슬러는 전에 공개된 적이 없는 수십 건의 서류를 찾아냈고 일기장에서 거의 알아볼 수 없게 휘갈겨 쓴 글씨들을 판독했으며 밝혀지지 않은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과 은밀한 인터뷰를 가졌다.
심층보도의 걸작이라 할 만한 이 책에서 그는 충격적인 사실과 놀라운 가정을 제시하고 있다.
존 F 케네디의 엄숙한 얼굴을 표지에 실은 1957년 12월 2일자 「타임」지는 케네디家를 격찬하는 기사를 싣고 있었다. 그 기사는 “1957년 민주당 돌풍을 일으킨 인물”의 부친인 조지프 P. 케네디를 前 영국대사 전 미국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전 미국해사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2억 달러 이상으로 추산되는 재산의 소유자로 묘사했다. 「타임」지의 이 기사는 조지프 케네디가 좋아하는 언론 보도의 전형이었다. 그의 아들 존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꿰뚫어보는 두 눈과 주근깨 그리고 붉은 기가 도는 금발을 가진 그도 언론에 최면을 거는 능력이 있었다.
1969년 8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조지프의 애칭)는 앞에 제시된 배경과 함께 인쇄물에 묘사되곤 했다. 또한 그는 독립심과 근면으로 성공을 거둔 호레이쇼 앨저(1832~1899, 자수성가한 인물을 소재로 한 글을 쓴 미국 작가) 풍의 영웅으로서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으며 가난한 집안에 태어나서 미국에서 가장 큰 부자 가운데 하나가 된 사람이었다. 사진을 찍을 때면 그는 의례 자기 아내 로즈와 아홉 자녀들 가운데 한 명 이상과 함께 찍음으로써 헌신적인 남편이며 가장이라는 이미지를 부각시켰다.
최근 새로운 자료와 기록들이 공개됨으로써 조 케네디가 스스로 만들어냈던 공적인 이미지와 새로 알려진 진실과는 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다.
조 케네디의 젊은 시절을 다른 이야기에는 거의 예외없이 아일랜드의 감자 흉년, 보스톤 동부에서 선술집 경영자의 아들로 보낸 어린 시절, 하버드대학교에 다니던 시절 등록금을 내지 못해 쩔쩔맸던 일,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여 25세에 은행장이 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그의 조부모인 패트릭 케네디와 브리짓 머피 케네디가 1845년의 감자 흉년 이후에 아일랜드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것은 사실이다. 흔히 P, J. 알려진 그의 아버지 패트릭 조지프가 보스톤의 선술집 주인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하지만 P. J. 케네디가 강력한 보스톤의 정치가요 부유한 은행가였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가 태어난 1888년 9월 6일에 케네디가는 편안한 4층 벽돌집에서 살고 있었다. 그의 증손녀인 메리 루 매카시는 이렇게 말했다. “조 할아버지가 태어날 때 우리 집은 가난하지 않았어요. 집에 하인들이 있었고 말이 여러 마리 있었으며 좋은 옷을 입을 수 있었고 유럽 여행을 즐길 여유가 있었지요.”
집안의 살아남은 유일한 아들인 조를 가족들은 애지중지했다. 그에게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었다. 부친은 불한당같은 풍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조는 편안한 미소와 인상적인 푸른 눈 등 보다 세련된 외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조는 성격이 불 같았다. 그는 이 성격을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는데 이용했다. 화가 나면 그의 눈은 차갑고 투명한 회색빛으로 변했다. 그 눈빛이 상대방을 겁에 질리게 했다.
그의 부모는 둘 다 성취욕이 강한 사람들이었다. 특히 어머니 메리는 자기 아들에게 당시 보스톤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WASP(백인, 앵글로색슨, 신교도를 가리키는 말로 미국의 지배적인 특권계급을 지칭함)와 같은 조건을 마련해주기로 결심했다. 메리는 아들을 카톨릭에서 보스톤의 엘리트들이 모이는 보스톤 라틴학교로 전학시키기로 결심했다. 보스톤 라틴학교는 벤저민 프랭크린, 존 핸콕, 랠프 월도 에머슨을 배출한 명문교였다.
조는 자기가 평생 아일랜드인에 대한 편견과 싸워야 했다고 주장하곤 했다. 하지만 조의 시원찮은 성적을 감안할 때 보스톤 상류계급의 보루인 하버드대학교는 그를 입학시키기 위해 합격기준을 크게 낮추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하버드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에 대한 그럴 듯한 설명은 학교당국이 그가 영향력있는 정치인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시장 존 F.“허니피츠” 피츠제럴드가 P J.의 부탁을 받고 학교를 방문했을 가능성도 높다. 시장과 조의 아버지는 서로 부탁을 들어주는 사이였다. 더욱이 조는 푸른 눈과 검은 머리를 가진 아름다운 소녀인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와 이미 데이트중이었다.
조의 허버드생활은 평범했다. 그의 아버지는 1912년 대학을 졸업한 조에게 은행원이 되게 했고 뒤에 그가 정부의 은행감독관이 되도록 도와주었다. 조는 대차대조표를 읽는 법, 신용을 평가하고 자산을 감정하는 법을 배웠다. 또 어떤 회사들이 곤경에 처해 있고 어떤 회사가 남아도는 현금을 가지고 있으며 누가 자산을 취득하려고 계획하며 누가 파산하려고 하는가 등 유용한 지식도 얻을 수 있었다. 조가 후에 채택한 투자전략 중 하나는 은행으로부터 곤경에 처한 회사들에 대한 내부정보를 얻은 다음 공작을 통해 그 회사의 주식값을 떨어뜨린 후 그것을 보다 싸게 사들이는 것이었다.
1913년 11월 14일, 조는 은행감독관 자리를 그만두었다. 1914년 1월 20일 그는 그의 아버지가 설립을 도운 컬럼비아신탁회사의 사장으로 선출되었다. 「보스톤 헤럴드」지는 “25세에 은행장”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실을 대서특필했다. 지방신문들은 젊은 은행장에 대한 시리즈 기사를 싣기까지 했다. 이 기사들은 그가 하루에 14시간 내지 16시간 일한다고 떠벌여댔다.
컬럼비아신탁회사의 재무제표를 검토한 바 있는 뉴욕시 브루클린의 한 은행원이 이 기사를 읽고 조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정도의 은행을 관리하기 위해 그렇게 긴 시간을 일해야 한다면 그는 “바보”임에 틀림없다는 내용이었다.
탄탄대로
조가 자기 후원자인 피츠제럴드시장과의 관계를 더욱 공고히 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1914년 6월 13일 그는 로즈와 약혼했다. “산처녀와 결혼하는 것은 산 전체와 결혼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을 따른 것이었다. 약삭빠르게도 그는 자기의 운명을 보스톤에서 가장 힘있는 사람과 묶은 것이었다.
1914년 10월 7일 윌리엄 오커널 추기경이 두 젊은이의 결혼식을 주제했다.
결혼 후 9개월 만인 1915년 7월 25일, 조와 조의 첫아이인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2세가 태어났다. 다시 1917년 5월 29일, 푸른 눈의 작인 아이인 존 “잭” 피츠제럴드 케네디가 태어났다.
당시 1차대전이 한창 진행되고 있었다.
존이 태어나고 일주일 후 21세부터 30세까지의 미국 남자들이 징집 대상으로 등록해야 하는 시한이 닥쳤다. 조의 친구들은 대부분 군에 지원했지만 조는 전쟁터로 나갈 생각이 없었다.
조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이고 연줄이 많은 보스톤의 변호사였던 다이 커리어가 그를 구원하려 나섰다. 메사추세츠주 퀸시에 있던 베들레헴조선회사의 로비스트였던 그는 회사에 조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주라고 요청했다. 회사측은 케네디가 조선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이유로 그의 요청을 거절했다. 그러나 피츠제럴드시장이 조선회사에서 자기 사위를 받아들여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자 조는 즉각 최소 연봉 1만 5000달러를 받는 부감독으로 받아들여졌다. 조는 1917년 10월에 베델레헴조선회사에 입사했다.
이제 그는 전쟁을 돕고 있었으므로 징집면제를 신청했다. 그 신청이 기각되자 그는 베들레헴조선회사의 경영진이 자신의 징집을 면제해줄 수 있는 워싱턴의 관리들을 찾아내게 했다. 휴전이 성립되어 징집의 위험이 사라진 때로부터 7개월 후 그는 조선회사를 그만두었다.
조는 또다른 영향력있는 인물을 알게 되었다. 성공적인 주식중개회사 헤이든 스톤사의 공동경영자인 게일린 스톤이었다. 前시장 피츠제럴드가 끼어들어 조를 고용하면 스톤의 사업이 잘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해주겠다고 약속했다.
1919년 7월 조는 주식중개인으로 일을 시작했다. 게일린 스톤은 제자에게 내부정보를 활용해서 거액의 돈을 버는 방법을 가르쳤다. 당시 이것은 불법행위는 아니었지만 역시 비윤리적인 행위였다.
그러나 조는 더 큰 돈벌이를 위해 헤이든 스톤사를 그만두었다. 더 큰 돈벌이는 주류 밀매였다.
조는 미국에서 팔기 위해 해외의 주류제조업자들-예를 들면 영국의 주류제조업자-에게 술을 주문했다고 한다. 조직 범죄계의 인물인 프랭크 코스텔로는 뒤에 주류 밀수를 도와달라고 조가 자기에게 접근했다고 폭로했다. 조는 밀수한 술을 일정한 장소에 부리게 한 다음 경찰에 뇌물을 주어 눈감아주게 했고 그러면 코스텔로가 그것을 인수해서 판매처에 돌리고 값을 정했다는 것이었다.
1920년대 중반에 조의 재산은 2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1750만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지방신문에서 조의 재산이 그렇게 많다는 기사를 읽은 로즈가 남편에게 그것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왜 자기에게 말하지 않았느냐고 따졌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되받았다.
“나 자신도 그것을 몰랐는데 내가 어떻게 그것을 당신에게 말할 수 있었겠소?”
대가족을 이루다
그동안 조의 가족은 점점 불어나고 있었다. 잭에 뒤이어 1918년 9월 13일에 로즈메리로 알려진 로즈 마리가 태어났고 1920년 2월 20일에 “킥”이라는 애칭으로 불린 캐슬린이, 1921년에 유니스 메리, 1924년 5월에 퍼트리샤가 태어났다.
조는 언젠가 「헤럴드 트리뷴」지의 기자에게 자기는 아이들이 일등을 못했다고 책망하지는 않는다고 말했지만-“야단을 친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하고 그는 말했다-자녀들의 기억은 그와 다르다. 그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무슨 일에서나 이겨야만 했다. “아버지는 경쟁심이 아주 강하셨어요. 아버지가 우리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은 이등은 좋지 않다는 말씀이었어요.” 유니스의 회상이다.
조 2세의 친구였던 토머스 빌로도는 모든 것이 아버지 중심이었다고 회상했다.
“케네디가의 아들들, 적어도 위의 두 아들은 부친을 숭배했어요. 아버지가 무슨 말씀을 하시느냐에 신경을 썼지요.”
잭(미국 대통령 존 F. 케네디의 애칭)은 언젠가 저녁식탁의 대화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우리는 의견을 가지고 있지 않았지요. 대개 아버지 혼자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 할아버지가 모든 걸 통제하셨지요” 조의 증손녀 메리 루 매카시의 말이다. “입는 옷, 식탁 메너, 학문과 종교, 정부에 대한 태도 등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하셨지요.”
여름이면 자녀들은 아침 7시에 미용체조를 배웠다. 아침식사 후에는 수영, 요트, 테니스 레슨을 받았다. 조는 자녀들이 약한 모습을 보이거나 자기연민에 빠진 듯한 기미를 보이면 참지 못했다.
그는 아이들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미소를 지울 수 있기”를 바랐다.
“테드”로 불린 아들 예드워드는 이렇게 회상한다. “아버지는 ‘너희들이 침통해하는 꼴을 난 못본다’고 말씀하시곤 했지요.” 조는 자녀들에게 늘 “케네디가 사람들은 절대로 울지 않는다”고 말하곤 했다. 로즈 역시 다정한 제스처에 인색했다. “부인은 자녀들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으셨지요.”
케네디가의 아이들을 돌본 보모 루엘라 헤니시의 회상이다. “그런 말을 하시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어요.”
로즈는 집에 없을 때가 많았다. 로즈는 값비싼 옷을 사기 위해 자주 파리여행을 했다. 집에 있을 때도 아이들이 어머니를 만나보기가 쉽지 않았다. 로즈는 하이에너스포트에 있는 땅에 오두막을 지어놓고 거기 가서 혼자 시간을 보내곤 했다.
로즈는 아이들이 아플 때도 아이들에게 자상하게 대하지 않았다. 잭이 1934년초에 코네티컷주에서 한 달 이상 입원했을 때 로즈는 한번도 아들을 찾아가지 않았다. 잭도 자기 어머니와 자기와 “조금 거리를 두고”있었다고 말한 바 있다.
조아 로즈의 관계에도 역시 이상한 데가 있었다. 40회 생일을 맞은 로즈는 혼자 파리에 갔다. 로즈가 파리에 머무는 동안 두 사람은 전보를 주고받았다. “내 40회 생일에 그이가 파리에 있는 나에게 전보를 보내 나를 ”세계의 여덟 번째 불가사의“라고 했을 때 난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느꼈다”고 로즈는 썼다. 또 1934년 10월 조와 로즈는 그들의 20회 결혼기념일을 서로에게 전보를 보내는 것으로 축하했다. 조가 과연 로즈를 사랑했는지, 아니면 로즈를 단지 자기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요한 디딤돌로 생각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분명한 것은 로즈가 조의 유일한 사랑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결혼 직후부터 조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웠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한편 케네디가 자녀들의 우애는 아주 좋았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서로를 더 좋아했어요. 그건 자연스런 일이라고 생각해요.” 유니스의 말이다. 그들은 대가족이었고 그 가장인 조는 집안의 돈을 통제했고 자녀들이 금전과는 무관하게 지내도록 했다.
조의 친구였던 「뉴욕 타임스」의 기고가 아서 크록의 견해에 의하면 케네디가의 자녀들이 가정에 대한 충성심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강한 개성” 그리고 “아버지가 자녀 모두에게 돈을 넉넉하게 대줄 수 있었다는 사실” 덕분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이 재정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것은 아버지 덕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크록은 말했다. “그들은 그것을 고마워하고 있었지요.” 따라서 조가 한 아들에게 정치에 투신하라고 말하면 그 아이들은 “네, 그러겠습니다” 하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조의 지배력이 미친 또다른 영향은 사람이 충분히 성숙하기 위해서 절대 필요한 개인적 책임을 그의 자녀들이 배울 수 없게 했다는 점이다.
1961년 5월 자신의 44회 생일을 축하하고 난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잭은 하이에너스포트의 집 앞에 서서 공항으로 갈 헬리콥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케네디대통령은 자기 아버지를 돌아보며 이렇게 말했다. “아버지, 전 수중에 1센트도 없어요.” 조는 자기 비서를 시켜 돈 한 뭉치를 잭에게 갖다주게 했다. 돈을 받은 잭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저지, 이 돈 갚을게요.” 조는 잭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도저히 못 갚을게다.”
➁ 가련한 글로리아
“조는 늘 무엇이 권력과 상류계급을 만드는가를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들을 모두 원했지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의 보좌관이었고 한때 케네디의 변호사였던 토머스 G. 코코런의 말이다.
“그는 어디서 권력이 나오는가를 관찰했지요. 권력은 돈에서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을 벌기 위해 나선거지요.
1920년대 중반에는 권력과 돈이 미국 영화산업에 집중되어 있는 것같이 보였다. 영화제작소들은 일년에 740편의 영화를 찍어내고 있었고 자동차산업만큼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있었다. “이거야말로 금광”이라고 조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영화산업에 끼어들기 위해서 조는 일년에 근 50편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던 로버트슨-콜 영화사에 속한 한 자회사의 주식을 대량으로 사들였다. 그는 또한 자기가 제작한 영화를 배급할 극장체인으로 키스-올비-오르피엄(KAO)社를 선택했다. 이 극장체인은 미국과 캐나다에 약 300개의 영화관을 가지고 있어 매일 1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조는 420만 달러를 제시했다.
그러나 KAO의 공동창업자인 에드워드 올비는 팔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자기가 회사의 사장자리를 유지하고 많은 이윤을 낼 것으로 기대한 올비는 결국 조의 제의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1928년 5월 10일 매매계약서에 서명을 하고난 후 조는 회사의 회장이 되었다. 조는 퉁명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에드, 당신 몰랐소? 당신은 이제 해고요. 당신은 이제 끝났소.”
1928년 2월 조는 뉴스영화 및 코미디 영화 제작회사인 파테社의 특별고문이 되었다. 곧 그는 그의 상투수법인 내부정보 이용수법으로 파테사를 차지한 후 회장에 취임했다.
그는 또 그의 후원자였던 가이 커리어도 이용했다. 조는 아메리카 라디오社와 이익이 많이 남는 거래를 하면서 커리어와 그의 고객들을 따돌렸던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역사 속으로 잊혀지고 말았지만 커리어는 조을 도왔던 많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조가 자기를 배반했다는 사실을 결국 깨닫게 되었다.
할리우드를 정복한 조는 정복할 다른 대상을 찾고 있었다. 그는 글로리아 스완슨에게서 그것을 발견했다. 1920년대 초에 스완슨은 찰리 채플린, 메리 픽포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스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조가 스완슨을 만났을 때 당시 28세 였던 스완슨은 무성영화계에서 가장 많은 개런티를 받는 여배우였다. 게다가 그녀는 매력이 남달랐다.
스완슨은 자신의 영화제작사에 돈을 댈 인물을 찾고 있었는데 한 친구가 조를 만나보라고 귀뜸했다. 두 사람은 합자회사인 글로리아제작사를 설립하고 이미 있던 글로리아의 영화제작사는 해체했다. 스완슨은 조의 비서인 E. B. 더를 자신의 변호사로 삼았다.
당시 난봉꾼으로 악명이 높았던 조는 스완슨과 프랑스이 후작이었던 그녀의 남편 알리 드 라 팔레즈 드 라 쿠드라예를 플로리다주 팜비치의 휴양지로 초대했다.
어느 날 오후, 조는 그의 오른팔인 에드워드 무어로 하여금 라 쿠드라예를 심해 낚시에 데리고 가도록 했다. 호텔로 돌아온 조와 스완슨은 격정적인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캘리포니아주는 조의 임시 거주지였다. 그러나 스완슨과 할리우드에 너무 매료된 나머지 그는 자기 아버지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캘리포니아주에 머물고 있었다. 동부에서 병상에 누워있던 아버지는 한번 찾아갔을 뿐이었다. P. J. 케네디는 1929년 5월 18일 71세의 나이에 간암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장에서는 당시 13세였던 조 2세가 아버지를 대신해서 로즈를 부축했다. 1929년 늦여름, 조지프 P. 케네디가 제작하고 글로리아 스완슨이 출연한 영화 “침입자”의 제작이 거의 끝났다. 이 영화의 시사회가 9월에 런던에서 열리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조는 스완슨에게 런던에서 만난 다음 시사회가 끝난 후 같은 배를 타고 뉴욕으로 오자고 제의했다.
스완슨은 자기 혼자 조와 함께 여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 눈에 띄면 안된다고 말했다. 그러자 조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닐거요. 로즈도 올거요.”
스완슨은 불같이 화를 냈다. 조는 자기 불장난을 은폐하기 위해 자기 아내를 이용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스완슨은 그와 말다툼을 해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친구를 한 사람 데리고 가겠다고 고집했다.
조와 스완슨이 여객선 갑판에 함께 나타났을 때 로즈는 그들이 연애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러나 로즈는 자기는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다만 가련한 스완슨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뿐이었다.
여행을 계속하는 동안 스완슨은 로즈가 둘 사이의 일을 알고 있는지 모르고 있는지 가늠할 수가 없었다. 스완슨은 자신의 회상록에 이렇게 썼다. “로즈는 바보였을까.... 아니면 성녀였을까? 아니면 나보다도 더 연기력이 뛰어났던 것일까?”
겉보기에는 순진해 보였을지 모르지만 로즈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로즈는 조카딸 케리 매카시에게 그들의 관계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로즈는 스완슨과의 관계를 “단명한 바람”이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로즈는 매카시에게 이렇게 말했다. “네 아저씨는 일 년 동안은 스완슨이 매력적이라고 생각했지. 하지만 일 년이 지난 다음에는 그녀가 아주 무식하다는 것을 깨달았단다.”
“가련한 글로리아”라는 로즈의 말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었다. “다른 여자들은 결코 그와 결혼하지 못할 것이고 그의 이름과 그의 돈을 갖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조지프 P. 케네디 부인이 누리는 사치를 누리지도 못할 것이다.
닭장의 여우
두 사람 사이의 불화에도 불구하고 커리어는 1929년 봄 조에게 증권시장이 과열되었다고 경고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를 구해주었다.
조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대회사의 주식을 팔고 시의 채권을 사거나 은행에 예금했다. 그는 또 투기를 함으로써 붕괴되어가는 시장에서 돈벌이를 계속했다.
뒤에 조는 글로리아 스완슨에게 자기는 주가가 “검은 화요일”(1929년 주가의 대폭락이 있던 날로 이 무렵부터 세계대공황이 시작됨)에 바닥을 치기 전에 자기가 가진 월스트리트 주식을 모두 팔아치웠다고 유쾌하다는 듯 말했다. 자기는 이제 “그렇게 약삭빠르지 못한 사람들”이 떨어뜨린 부스러기를 주우려고 기다리는 중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한편 스완슨이 출연한 영화 “침입자”가 1929년 11월 뉴욕에서 성공적으로 개봉되었다. 스완슨이 시카고 시사회에 참석하려고 뉴욕을 떠나기 전, 조의 비서들 중 한 사람이 전화를 걸어 “중요한 사람”이 면담을 요청한다고 말했다고 스완슨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주장하고 있다.
중요한 사람이란 보스톤의 오커널추기경이었다.
15년 전에 조와 로즈의 결혼식을 주재한 바로 그 추기경이었다. 그는 스완슨을 자신의 호텔 방으로 맞아들인 후 그녀와 조지프 케네디의 관계를 화제로 꺼냈다.
스완슨은 자신은 조와 사업상의 관계를 맺었다고 말했다. 그러자 추기경은 의자에서 몸을 곧추 세웠다. 자기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사업상의 관계가 아니라 사적인 관계라고 그는 말했다.
“얘기할 게 아무것도 없어요.” 스완슨은 그렇게 말하며 문쪽으로 향했다.
오커널은 스완슨을 막아서며 시선으로 그녀를 멈춰 세웠다. “당신은 카톨릭 신자가 아닙니다. 따라서 나는 당신이 케네디씨가 그의 신앙과 관련해서 빠진 궁지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를까 두렵습니다.” 추기경이 말했다.
“맞아요, 하지만 케네디씨는 카톨릭 신자시니까 그분에게 직접 얘기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스완슨이 말했다.
추기경은 압력을 계속 가했다. “내가 당신을 만난 것은 당신에게 조지프 케네디를 만나지 말아달라고 청하기 위해서입니다. 당신이 그를 만날 때마다 당신은 그가 죄를 짓는 계기를 만들어줍니다. 이 점을 깊이 생각해주십시오.”
“알겠어요.” 스완슨이 말했다.
스완슨은 누가 이 일에 추기경을 끌어들였을까 궁금해하며 호텔 방을 나왔다. 로즈? 조? 그들이 가족? 스완슨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로즈의 사촌인 제럴딘 해넌은 케네디의 전기작가 도리스 컨스 구드윈에게 그 무렵의 어느 여름날 오후에 피트제럴드의 집에서 벌어진 소란한 언쟁을 들었다고 말했다. 조의 장인이 사위에게 글로리아 스완슨과의 관계에 대해 따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장인은 그 관계를 청산하지 않으면 로즈에게 사실을 이야기 하겠다고 위협했다. 추기경에게 스완슨을 만나 얘기를 좀 해달라고 부탁한 사람이 피츠제럴드였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글로리아 스완슨과 조의 관계는 1930년에 갑작스레 끝났다.
그가 자신의 돈을 떼어먹었다는 사실을 스완슨이 알아냈기 때문이었다.
스완슨이 준 위임장을 이용해서 조는 자기가 스완슨과 다른 사람들에게 준 값비싼 선물의 대금을 스완슨의 계정에서 지불토록 했던 것이다.
증권시장이 회복되었고 조는 월스트리트에서 돈을 버는 일로 되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다. 할리우드에 족적을 남긴 그는 진정한 권력이 있는 곳은 워싱턴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케네디가의 한 구성원에 의하면 그는 민주당 대통령후보 프랭클린 D. 루스벨트와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고 최소한 36만 달러를 선거자금으로 주었다. 오늘날의 달러로 환산하면 400만 달러에 이르는 거액이었다.
다른 모든 사람이 그랬듯이 루스벨트 역시 조의 마력에 걸려들었다. 조는 뉴딜정책을 찬양하는 연설을 함으로써 루스벨트의 목적에 봉사했다. 악덕사업가이든 아니든 조는 점잖은 사업가의 언어를 구사했고 사람들은 그를 존경했다.
루스벨트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후 조는 애타게 기다렸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화가 치밀었다.
새 정부의 한 자리를 그에게 주겠다는 전화가 백악관에서 걸려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루스벨트는 월스트리트에서의 악명높은 기록 등 조의 약점을 알고 있었다.
1933년 늦여름, 기다리다 못한 조는 자기가 직접 나서기로 했다. 그는 대통령의 아들인 제임스 루스벨트를 하이애너스포트의 집으로 초청했다.
루스벨트가 선거지원에 대한 보상을 하는데 늑장을 부린다면 루스벨트의 욕심많고 비윤리적인 아들을 이용해서 대통령에게 다가 가겠다는 것이 그의 속셈이었다.
제임스 루스벨트(일명 지미)는 보스톤에서 보험사업을 하고 있었다. 조는 자기식대로 일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제임스 루스벨트는 자기가 조로부터 상당한 재정적 도움을 받고 있다는 사실은 밝히지 않은 채 자기 아버지에게 행정부에 조를 위한 자리를 하나 마련해달라고 편지를 썼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결국 조를 새로 만든 기관인 증권거래위원회(SEC)의 위원장으로 임명했다.
도둑놈을 써서 도둑놈을 잡겠다는 생각이었다.
임명 사실이 공표되자 사방에서 격열한 반대 여론이 비등했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조는 증권거래위원회가 없애려고 하는 모든 것을 상징하고 있었던 것이다.
「뉴 퍼브릭」지는 조의 임명을 “괴상한” 선택이라고 평했다. 대통령이 “여론을 철저히 무시하고” 조 케네디 같은 인물을 선택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이 잡지는 논평했다.
그러나 「뉴욕 타임스」지의 기고가 아서크록은 칼럼을 통해 반대여론을 완화시키는 데 한몫을 했다. 그는 워싱턴에서 누구보다 영향력이 큰 인물이었다. “J. P. 케네디는 여러 가지 일에서 두각을 드러냈다”가 그의 기사에 붙여진 제목이었다.
그 후 크록은 조의 비공식적인 선전자가 되었다. 그는 그 대가로 비싼 스카치 위스키 상자를 선물로 받거나 팜비치에 있는 조의 집에서 긴 휴가를 보내는 등 후한 대접을 받았다.
1934년 7월 2일, 조는 증권거래위원회 위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일년 남짓 후인 1935년 9월에 사임했따.
대사로 임명되다
2년이 흘렀다. 이제 케네디는 다른 정부 직책에 눈독을 들였다. “난 영국대사가 되고 싶소” 그는 제임스 루스벨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재선 선거전에 많은 돈을 계속 기부해온 조는 대통령이 아직도 자기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지미가 그 생각을 자기 아버지에게 전하자 대통령은 너무 심하게 웃다가 하마터면 휠체어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러나 루스벨트대통령은 자기가 아직도 조의 돈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조가 그의 정적이 될까봐 두려워했다.
루스벨트대통령은 장난스런 데가 있었으며 또 타고난 책략가였다. 대통령은 조를 만나겠다고 했다. 지미가 조를 대통령집무실로 데리고 가자 루스벨트대통령은 이렇게 물었다. “조, 내가 당신의 바지를 내려도 괜찮겠소?” 조는 그 말이 진짜로 바지를 내리겠다는 의미인지 대통령에게 물었다. 르스벨트대통령은 그렇다고 대답했고 조는 그의 뜻에 따랐다.
루스벨트는 조가 두 다리를 한데 모으고 섰을 때 무릎이 붙지 않고 O자형으로 휜 다리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루스벨트는 그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국대사는 취임식 때 반바지와 비단양말을 신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소?” 루스벨트대통령이 물었다. “우리 신임대사의 사진이 전세계 신문에 실리면 우린 웃음거리가 될거요.” 2주일도 안되어 조는 취임식 때 일반 정장을 해도 좋다는 영국왕의 허가서를 가지고 대통령을 다시 찾아왔다. “그는 아버지의 수를 되받아쳤지요. 아버지는 웃으며 그를 영국대사로 임명하는데 동의 하셨지요.” 제임스 루스벨트의 말이다.
그에게 “아홉 자녀 사절(使節)“이란 이름을 붙인 영국의 신문들은 이를 드러내고 웃는 조의 사진을 실었다. 「이브닝뉴스」지에 실린 만화는 미국대사관 밖에 커다란 버스가 서 있었다. ”케네디씨가 가족을 극장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중“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영국 언론은 처음에는 조에게 호감을 나타냈다. 그는 루스벨트의 오른팔인 중요한 정치적 인물, 1차대전 부채와 무역협정 같은 문제에서 영국울 도울 수 있는 인물로 비춰졌다.
그는 언제나 마음이 내키면 기자들을 불러놓고 발을 책상에 올려놓은 채 비공개 회견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의 해외정책에 대한 견해가 나치스를 달래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여론은 곧 달라졌다. 영국해군연맹이 주최한 트라팔가르해전 기념만찬에서 그가 한 연설은 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을 다 같이 자극했다. 그 연설에서 그는 민주국가들과 독재국가들이 “그들의 차이를 강조하므로써 그들 사이에 이미 존재하는 간격을 넓히는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당면한 문제는 무력침공, 민주주의의 생존, 도덕, 정의, 고상함이 아니라 똑같이 타당한 두 정치체제간의 이념적 차이일 뿐이었다. 1939년 9월 3일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한 후에도 조는 루스벨트가 히틀러와 협상을 한다면 “세계를 구하는 자리”에 서게 될지도 모른다는 전문을 워싱턴에 보냈다.
루스벨트는 대통령 자문위원 제임스 팔러에게 조의 전문은 “자기가 받아본 가장 바보같은 메시지”였다고 털어놓았다.
영국정부는 조의 보다 불쾌한 발언들에 관한 비밀서류철을 만들어 보관하기 시작했다.
그 서류철의 한 항목에 의하면 조는 어느 만찬장에서 영국이 톡톡히 “혼이 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고소하다는”어투로 했다. 미국 내무장관 해럴드 익키스는 자유주의적인 하원의원 조시아 웨지우드와 조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익키스에 의하면 웨지우드는 “우리가 외교관으로 훈련되지 않은, 역사와 정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부자를 영국대사로 보냈다”고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언론에 나서기를 좋아하고 미국 최초의 카톨릭 신자 대통령이 되려는 야심을 품은 것 같다”는 것이 웨지우드의 생각이었다.
둘 다 두 얼굴을 가진 사람들이었던 조와 루스벨트는 각기 자기 목적을 위해 서로를 계속 이용했다.
루스벨트의 가장 큰 관심은 조를 런던에 붙들어두는 것이었다. 런던에 머물러 있는 한 대통령 경쟁에 뛰어들기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조에게는 대사라는 것이 위신과 부를 의미했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류 수입에서 나오는 그의 적지않은 소득이 줄어들 염려가 있었다.
주류 수입은 그가 아직도 활발하게 종사하고 있는 사업이었다. 조는 대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미국으로 가는 화물선 안에 귀중한 공간을 확보했다.
전쟁이 시작되자 조는 가족들을 본국으로 보냈다. 영국에 대한 공습이 시작되었다. 1940년 폭탄이 주위에 떨어지는 가운데 조는 이제 영국을 떠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조가 귀국한 직후인 1940년 11월 5일 루스벨트는 세 번째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1월 6일 5분간 지속된 만남에서 조는 영국대사직을 사임했다.
조는 영국에 있는 동안 친구들을 별로 사귀지 못했다. 칼럼니스트인 A. J. 커밍스는 「뉴스 크로니컬」지에 실린 글에서 조의 영국대사 시절을 이렇게 요약했다.
“그가 여기 있는 동안 그는 한결같은 상냥한 미소와 지나치게 사진을 많이 찍힌 그의 아홉 자녀들, 그리고 사람들을 반기는 그의 태도 뒤에 이윤이 많이 남는 사업거래를 독재자들과 하려는 냉정한 사업가의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 그는 선량한 많은 영국인들을 속였다.”
➂ 길 잃은 어린 소녀
영국에서 돌아온 후 조는 그의 법적 주소를 팜비치로 옮겼다. 플로리다주에는 소득세와 상속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자기 평생을 돌아볼 때 그것은 거의 완벽한 것처럼 보였다. 그는 그의 뉴욕 사무실과 전화로 접촉을 유지하며 자기가 투자한 돈이 불어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태양을 즐길 수 있었다.
단 하나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그의 딸 로즈메리였다. 그 애는 항상 다른 자녀들보다 동작이 느렸다. 성장해가면서 그 애는 다정했던 성격이 심술궂게 변했고 자주 심하게 분노를 터뜨리곤 했다.
22세가 되었을 무렵부터 로즈메리는 한밤중에 혼자 거리를 쏘다니기 시작했다. 조와 로즈는 딸애가 폭력배들에게 폭행을 당하지 않을까 걱정했다.
조는 이미 로즈메리를 자기 집으로부터 효과적으로 격리해놓고 있었다. 조가 영국대사로 런던으로 떠나기 전에는 그의 비서 에드워드 무어와 그의 아내 메리가 로즈메리를 돌보았다. 런던에 부임한 후에는 조는 로즈메리를 특수한 기숙학교에 보냈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후에는 워싱턴시에 있는 수녀원으로 보냈다. 조는 전두엽절단술의 권위자가 되어 있는 워싱턴시의 두 의사와 상의했다. 두 사람 다 조지워싱턴대학교 의과대학과 관계를 맺고 있던 월터 프리먼 박사와 제임스 W. 워츠 박사는 자기네들이 하고 있는 일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가 도움을 청했을 당시 그들은 겨우 66회의 전두엽절단술을 시행해본 경험을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전두엽절단술은 1930년대초 두 사람의 신경과의사들이 침팬지들의 뇌에서 전두엽을 절단해서 침팬지들을 유순하게 만듦으로써 시작되었다. 포르투갈의 의사 안토니오 에가스 모니스는 원숭이들에게 효과가 있다면 사람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절망적인 상태의 정신병자 20명의 두개골에 구멍을 뚫었다. 그는 그들 대부분이 회복되거나 증세가 호전되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여러 경우에 이 수술은 다른 심각한 부작용을 일으켰다. 파괴적 비이성적 행동은 없어지는 대신 환자들은 뇌손상 때문에 바보가 되었다.
프리먼박사의 감독아래 워츠박사가 로즈메리의 수술을 했다. 이 문제에 관해 가진 단 한번의 인터뷰에서 당시 90대였던 워츠박사는 1941년에 있었던 수술과정을 묘사했다.
워츠박사가 사용한 도구는 버터 자르는 칼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는 이 칼을 아래 위로 움직여 뇌조직을 잘라냈다. 워츠박사가 뇌조직을 자르는 동안 프리먼박사는 로즈메리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예를 들면 주기도문을 외워보라고도 했고 미국국가를 불러보라고도 했고 숫자를 거꾸로 세어보라고도 했다. “우리는 환자의 반응을 근거로 얼마나 깊이 자를 것인가를 가늠했다”고 워츠박사는 말했다.
로즈메리의 대답이 두서없어지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자르기를 멈추었다.
로즈메리의 수술이 성공하지 못했다는 것이 금방 분명해졌다. 사실 수술은 로즈메리의 상태를 훨씬 더 악화시켰다. 로즈는 저서 “기억할 시간들”에서 수술이 딸의 격렬한 행동을 없애주기는 했지만 또한 “로즈메리를 영구적인 무능력자로 만들어버렸다”고 말하고 있다.
이전의 로즈메리는 사랑이 넘치는 편지를 쓸 수도 있었고 춤을 출 수도 있었으며 산수문제를 풀 수도 있었다. 수술을 받은 후 로즈메리의 지능은 어린아이의 수준으로 떨어졌다. 로즈메리는 위스콘신주 제퍼슨에 있는 성 콜레타스쿨 구내의 외딴 집에서 아직도 살고 있다. 로즈메리는 세수를 할 줄도 모르며 옷을 입을 줄도 구두를 신을 줄도 모른다. 늘 다른 사람의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있다.
서로간의 우애가 돈독한 체하는 가정에서 로즈메리는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되었다.
“로즈메리의 이름이 집안에서 한 번도 입에 오른 적이 없어요.” 조의 비서였다가 후에 그의 정부가 된 재닛 데스 로지어스의 회상이다.
“나는 로즈메리의 존재를 알고 있었지요. 다락방에 있는 가족사진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내 생각에 케네디부인이 매년 딸을 만나러 가는 것 같았어요. 내가 알기로는 조는 그 딸을 만나지 않았어요.”
“케네디부인은 20년 전에 나에게 전두엽절단술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고 무척 슬펐다고 말했어요. 전에 아무도 그녀에게 그런 얘기를 해주지 않았다는 거예요.” 케네디가의 친구인 낸시 테니콜먼이 덧붙이는 말이다.
가정문제를 다루는 조의 권위적인 방식을 감안할 때 로즈의 이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잭의 만성적인 허리 통증이 미식축구경기 중에 입은 상처 때문이라는 얘기를 꾸며낸 것처럼 조는 로즈메리가 저능아였다는 얘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이 말은 워츠박사에 의해서 부정되었다. 그의 견해로는 로즈메리의 증세는 지능발달 지체가 아니라 일종의 우울증이었다.
버트램 S. 브라운 박사도 로즈메리가 저능아가 아니라 정신병을 앓고 있었다는 워츠박사의 견해에 동조하고 있다. 美국립정신건강연구소 소장을 지낸 브라운박사는 로즈메리의 증세에 관해 얘기할 수 있는 특이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케네디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었던 그는 정신지체에 관한 대통령 자문기구의 장이었으며 이 증세에 관해 한 권의 책과 10편의 논문을 쓴 사람이다.
브라운박사에 의하면 로즈메리가 풀 수 있었던 산수문제의 수준으로 보아 그녀의 지능지수는 대부분의 학교에서 특별수용 대상자를 가리기 위해 정신지체의 기준으로 사용하는 지능지수 69를 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 당시 정신병이라는 낙인은 암에 걸렸다는 선고보다 더 무서운 것이었지요.
가족 중에 정신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통령이 될 수 있겠습니까?
정신지체는 분명히 가족의 잘못이 아니지요. 그 시절에도 정신지체자에게 전두엽절단수술을 시행하는 것은 의료과오였을 것입니다.“ 브라운의 말이다.
브라운박사는 로즈메리에 관한 진실의 은폐야말로 정신건강과 관련된 “역사상 가장 큰 은폐”라고 말했다.
자신의 오만과 지나친 야망이 자녀들 가운데 몇몇을 파멸로 이끌었다는 것은 조의 일생의 비극적 아이러니였다. 로즈메리는 그 첫 희생자였을 뿐이다.
전진 명령
성인이 된 후에도 케네디가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강력한 의지를 느꼈다. 하버드시절 잭의 친구였던 제임스 A. 루마니에르는 잭이 철저하게 조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그의 첫 번째 선택이었던 프린스턴 대신 하버드에 다니게 된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의 아버지가 하버드에 갈 것을 고집했다”는 것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등생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 잭은 “런던에서의 타협”이라는 논문을 썼는데 이 논문의 주제와 결론은 그이 아버지가 제시한 것이었다.
잭이 하버드를 떠나서 푸른 눈과 금발의 여인 잉가 아바드를 만난 후에도 아버지의 통제는 계속되었다.
아바드는 덴마크계의 아름다운 여자로 「워싱턴 타임스-헤럴드」지의 “...한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라는 칼럼을 쓰고 있었다. 이 칼럼은 워싱턴의 유명인사들과의 가벼운 인터뷰였다.
아바드는 이 신문사에서 편집국장의 비서로 일하고 있던 “킥” 캐슬린 케네디를 만났다.
캐슬린이 아바드를 잭에게 소개했다. 잭은 해군소위로서 워싱턴에 있는 해군 정보국에 배치되어 있었다. 곧 잭과 기혼녀 아바드는 열애에 빠졌다.
신문사의 한 친구가 캐슬린에게 잉가 아바드가 외국의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말을 한 것은 미국이 일본에 대해 선전포고를 한 1941년 12월 8일 이후였다. 그 친구는 자기가 어느 옛날 신문에서 아바드가 베를린 올림픽 때 히틀러와 같이 찍은 사진을 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 사진의 설명은 잉가 아바드를 덴마크의 나치 선전책임자가 된 덴마크 미인이라고 묘사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캐슬린은 그 사실을 아바드에게 이야기 했다.
아바드는 FBI에서 자신의 혐의를 풀어주기 위한 조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바드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FBI는 이미 그녀의 활동을 내사하고 있었다. FBI는 아바드의 아파트를 감시하고 도청장치도 설치해놓고 있었다.
1942년 1월 아바드가 잭과 연애중이라는 사실을 안 FBI는 한층 더 신경을 곤두 세웠다.
정보보고서를 쓰는 잭의 일은 비밀취급인가를 받은 사람들이 할 수 있었고 따라서 잭은 “비밀”로 분류된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같은 정보를 받은 J. 에드가 후버는 즉시 조에게 전화를 걸었다. 조가 생각하기에는 아바드가 주는 가장 큰 위협은 그녀로 인해 잭의 정치적 장래가 위협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잭과 결혼하는 여자는 정치적 부담이 아니라 정치적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게 그의 생각이었다.(같은 이유로 그는 자기 자녀들이 데이트하는 상대의 배경을 늘 체크했으며 뒤에는 그들을 감시하기 위해 사설탐정을 고용했다.)
조는 독일 스파이 혐의를 받는 여자로 인해 잭의 명성에 금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는 잭에게 전화를 걸었고 잭은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잭의 많은 친구들이 받은 인상으로는 아바드는 몇 안되는 잭의 진정한 연인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잭은 결국 아바드에게 두 사람의 관계가 끝났음을 알렸다.
뒤에 알려진 사실이지만 FBI가 도청한 아바드와 잭의 많은 대화에는 잭이 해군정보국에서 하는 일에 대한 내용이 별로 없었다. 아바드가 스파이였다고 해도 유능한 스파이는 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잭은 순시어뢰정(PT 보트)의 지휘장교로 태평양으로 보내졌다. 1943년 8월 2일, 일본의 구축함 아마기리호가 솔로몬군도의 블래킷해협을 순시중이던 잭의 어뢰정 PT-109호를 들이받았다. 책이 지휘하던 어뢰정은 침몰했다. 두 명의 선원이 전사했고 심한 화상을 입은 다른 승무원들은 익사의 위험에 처했다.
잭은 부서진 선체 파편에 안전하게 기어올라갔지만 그의 부하들이 구해달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어 위험한 조류와 싸우면서 최소한 2명을 구해냈다. 생존자들은 6일후 인근의 섬에서 온 구조대에 의해 모두 구조되었다.
1944년 8월 12일, 조 2세가 전사했다. 그의 비행기가 영국 상공에서 폭발했던 것이다. 2명의 신부가 하이애너스포트에 있던 조에게 이 슬픈 소식을 전했다.
“그들이 소식을 전하러 왔을 때 나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로즈의 조카 조가건의 말이다.
“점심을 끝냈을 때였지요. 그들이 현관에 와서 케네디씨를 만나겠다고 했습니다. 아저씨가 자기 방으로 들어오라고 했지요. 그후 아저씨는 일광욕실로 내려와서 나머지 자녀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로즈아주머니도 거기 계셨지요. 아저씨는 물론 로즈아주머니에게도 말했습니다. 두 분 다 비탄에 빠졌지요. 그러나 아저씨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는 우리가 여기 앉아서 울고 있는 걸 원하지 않을거다. 그러니 우리 배나 타러가자’ 그래서 자녀들은 요트를 타러 갔습니다.“
그해 크리스마스에 팜비치에서 존은 잭에게 그가 조 2세를 대신해서 정치에 투신해야 한다고 말했다.
몇 년 후 잭은 보브 콘시딘 기자 앞에서 그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다. “마치 징집을 당한 것 같았습니다. 아버님은 당신의 첫째 아들이 정치에 투신할 것을 원하셨습니다. ‘원하셨다’는 단어는 적절한 단어가 아니지요. 그분은 그것을 요구하셨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분명했다. 조가 잭에게 전진 명령을 내리고 꼭 7개월 후에 ‘우리는 주말을 함께 보내기 위해 하이애너스포트에 와 있었다.“고 잭의 전우인 제임스 A. 리드는 회상했다.
1945년 7월, 우리 저녁 들기 전에 한잔 하고 있었지요. 하니 피츠(잭의 외할아버지 피츠제럴드)가 장래의 미국 대통령을 위해 건배하자고 제의했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운좋게도 잭은 2차대전이 끝난 직후 하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종전의 기쁨에 들떠 있던 미국인들은 귀국한 전쟁영웅이라면 그 누구라도 포옹할 태세였다.
잭은 분명히 전쟁영웅이었다. 그러나 미국에는 그런 전쟁영웅이 수만 명이나 있었다. 잭이 다른 사람들과 달랐던 점은 아버지가 자기 아들의 무공을 정치적으로 선전할 재치와 추진력과 연줄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조는 자기 아들이 영웅적인 전투에 관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그에게 명예훈장이나 최소한 해군수훈장이 수여되게 하려고 애썼다.
잭은 위의 두 훈장 대신 해군⦁해병대 메달을 받았다. 조는 언론인들과의 친분을 이용하여 자기 아들을 다룬 기사가 「리더스 다이제스트」를 비롯한 주요 잡지에 실리도록 했다.
1946년 4월 22일, 잭은 민주당의 하원의원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고 선언했다.
그보다 앞서 조는 1945년에 조지프 P. 케네디 2세 재단을 설립했다.
곧 이 재단은 보스톤 지역 잭의 지역구내에 있는 카톨릭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아들의 선거전을 지휘하는 일이 조의 주된 일이 되었다. 그가 모든 중요한 재정적, 전략적 결정을 내렸고 선거운동원들의 선발을 인가했으며 선거자금을 분배했다. 그는 또 선거운동기간 동안 매일 일과가 끝나면 리츠-칼튼 호텔에서 잭과 만나 다음날에 있을 행사에 관해 잭에게 코치했다. 잭은 미소를 지으며 사진을 찍는 명목상의 후보에 불과했다.
자기가 지나치게 관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조는 모든 것- 잭의 선거사무실, 잭의 선거광고- 의 대금을 은밀하게 현금으로 지불했다.
잭의 찰스타운 선거본부를 책임맡고 있었던 데이비드 파워스는 조의 비서 한 사람이 사무실 임대료를 그에게 전해주던 일을 이렇게 회상했다. “아주 기묘한 경험이었습니다. 나는 선거전 중앙본부에서 에드워드 무어를 만났고 그러면 그는 나를 남자화장실로 데려 갔습니다. 거기서 그는 자판기에 동전 한 개를 넣은 후 나를 칸막이된 화장실로 데리고 들어갔지요. 그런 다음 그는 나에게 현금을 건네주었습니다.” 또다른 선거운동원은 이렇게 말했다. “선거자금 기부를 제한하는 법률이 있었지만 우리는 별로 그 법에 구애를 받지 않았습니다.
잭이 당후보 지명전에서 승리하도록 돕기 위해 조는 건물관리 잡역부인 조지프 루소에게 돈을 주어 후보로 나서게 했다.
이것이 투표자들을 혼동시켜 이미 후보로 등록되어 있던 정치인 조 루소에게 갈 표를 분산시켰다. 이 작전은 크게 성공을 거두어 진짜 정치인 후보 루소의 숙모까지도 잡역부 루소에게 잘못 표를 던졌다고 조 루소의 아들인 조지프 A. 루소는 회상했다.
잭은 1946년 6월 18일 민주당 하원의원 후보로 당선되었다. 그러자 조는 그의 주류수입회사인 서머싯 수입회사를 팔아서 선거전에서 잭을 도울 자금 800만 달러를 마련함과 동시에 조가 술회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주요 이슈가 되지 않도록 미리 조치를 취했다.
전 하원의장 토머스 “팁” 오닐에 의하면 조는 잭의 첫 번째 선거전에 30만 달러를 썼다고 한다. 이것은 오늘날의 돈으로 환산하면 173만 달러에 해당한다. 이 돈은 6년 후 같은 선거구에서 벌어진 팽팽한 선거전에서 자기가 쓴 액수의 6배나 되는 거액이었다고 오닐은 말했다.
돈을 헛되이 쓴 것은 아니었다. 1946년 11월 5일, 잭은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며칠 후 그는 선거전을 위해서 어떤 돈도 모금하거나 사용하지 않았다는 보고서를 메사추세츠주 국무부에 제출했다.
곧 잭은 하원의원 재선을 위해 선거전을 벌였다. 그 무렵 비극의 그림자가 다시 한번 케네디가를 덮고 있었다. 프랑스에서 일어난 비행기 추락사고로 인해 “킥”이라고 부르던 캐슬린이 사망했던 것이다.
딸을 만나러 이미 파리에 가 있던 조는 딸의 시신을 확인하러 갔다.
그는 아직도 죽은 사람이 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한 관리가 캐슬린의 관을 열었을 때 그는 그의 28세 된 딸의 처참한 시신을 보았다.
그날 저녁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처참한 딸의 모습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딸의 측은한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조는 영국에서 거행된 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파리로 가서 패션쇼도 보고 새 옷도 사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지만 로즈는 딸의 장례식에 가는 것이 불편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제 자녀들 중 조 2세와 캐슬린이 세상을 떠났다.
사실 로즈메리도 이 세상에 없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조의 증손녀 메리 루 매카시에 따르면 조 2세는 “조할아버지가 가장 총애하던 아들이었고 킥은
조할아버지가 가장 좋아한 딸”이었다.
캐슬린은 영국에 묻혔다. 캐슬린의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새겨져 있다.
“그녀가 준 기쁨 — 그녀가 찾은 기쁨”
➃ 대 야망
하원의원에 세 차례 당선되고 난 후, 잭은 1952년 4월 24일 상원의원 후보로 출마했다.
핸리 캐봇 로지 2세의 상원의원 자리를 빼앗으려고 나선 것이다.
메사추세츠주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더 많다는 사실을 안 케네디 가족은 이 많은 여성 투표자들의 환심을 사는 어떤 방법을 찾아내야겠다고 생각했다. 잭의 누이들인 유니스, 퍼트리샤, 진이 주 전역을 돌며 티파티를 연다는 기발한 생각을 해냈다. 조는 이것을 “매우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지만 자기 딸들에게 민주당원들뿐 아니라 무소속과 공화당원들도 초대해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6월 15일 일요일, 티파티가 케임브릿지 콘티넨탈호텔에서 열렸다. 수천 명의 여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잭이 연설을 했다. 이런 티파티들은 그에게 그의 매력적인 외모와 재치로 여성유권자들의 환심을 살 기회를 주었다. 로지는 뒤에 자기의 패배는 “그 빌어먹을 티파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잭이 우세로 돌아선 큰 전환점은 보스톤의 유력한 신문 「보스톤 포스트」지가 그를 지지한 것이었다. 몇 년 후 「보스톤 포스트」지의 발행인 존 폭스는 조가 자기에게 50만 달러를 빌려주었다는 사실을 시인했다. 그는 그 돈을 “이자를 붙여 갚았으며” 돈을 빌린 것과 그의 신문이 잭을 지지한 것은 무관하다고 주장했다. 조 역시 이 문제에 관해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60일 동안의 이 대출-오늘날의 돈으로 280만 달러 상당-은 “충분한 담보를 잡고 충분한 이자를 붙인 순전히 상업적인 거래였으며 제때에 모두 되돌려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폭스의 친구이며 폭스의 투자업체인 존 폭스사의 재정담당 부사장이었던 레이먼드 H. 팩슨은 필자와의 단독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폭스는 돈이 필요했고 그 돈을 조로부터 얻었다. 액수는 50만 달러였고 폭스는 그 돈을 갚았다. 그러나 폭스는 기간을 지키지 않았다. 담보가 있었지만 그 가치는 50만 달러가 되지 못했다. 그것은 분명히 뇌물이었다.
잭은 1952년 11월 4일 상원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34만 9646달러를 선거비용으로 썼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옥외광고 비용에도 못 미치는 액수였다. 그가 선거에 쓴 돈은 수백만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잭을 상원의원으로 당선시킨 조는 이제 아내를 맞으라고 말했다. 아내와 가족은 정치적 필수품이었다.
재클린 리부비어를 만나본 조는 재클린이 잭의 아내로 부족함이 없다고 인정했다.
재키(재클린의 애칭)는 “잭이 대통령이 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 케네디가 생각하고 있던 모든 중요한 사회적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C, 데이비드 헤이먼은 「재키라는 이름의 여인」에서 썼다.
“미스 포터스 스쿨, 배서칼리지, 소르본대학, 그해의 사교의 여성... 재클린 이력은 화려했다. 더욱이 재클린은 돈이 많은 여자라는 인상을 주었다. 이것은 사실 환상에 불과했다. 사실 그녀는 무일푼이었다. 그러나 재클린이 잭과 결혼할 때까지 아무도 이 사실을 몰랐다.”
하이애너스포트를 방문한 재키는 자기와 잭 단 둘이서 요트를 타러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조는 「라이프」지의 사진기자로 하여금 요트에 동승해서 사진을 찍도록 해놓았다.
그 결과가 “「라이프」지, 상원의원의 구애작전에 동행하다”라는 제목의 「라이프」지 기사였다.
언제나 그렇듯 잭은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했다. 1953년 9월 12일 잭과 재키는 보스톤의 대주교 리처드 J. 쿠심의 주재로 결혼식을 올렸다. “조 케네디는 이 결혼을 용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자기가 직접 나서서 추진했다”고 잭의 친구 렘 빌링스는 말했다.
처음에 재키는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잭의 누이들은 그녀를 조롱했다. 그들은 그녀를 “데브”(‘사교계에 처음 진출한 여자’라는 뜻도 있지만 ‘불량소녀’라는 뜻도 있음) 라고 불렀고 그녀가 자기 이름을 “잭린”이라고 발음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퀸(여왕)이라는 단어와 운이 맞기 때문이라고 떠들어댔다.
재키는 잭의 누이들이 스포츠를 즐기지는 않고 모든 게임에서 이겨려고만 기를 쓰는 것을 비웃었다.
재키는 케네디가의 딸들을 자기편만을 응원하는 열광적인 사람들이라고 해서 “라라 걸”들이라고 불렀다. 시어머니 로즈와 재키의 관계는 마지못해 서로를 용인하는 관계였다.
1956년 잭을 민주당 대통령후보 애들레이 E. 스티븐슨의 러닝메이트인 부통령후보로 지명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조는 잭에게 스티븐슨은 선거에서 이기지 못할테니 그의 러닝메이트가 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잭은 CBS방송국의 “국민과의 대면” 프로에 출연해서 자기는 대통령후보나 부통령후보는 아니지만 후보로 지명된다면 수락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1956년 8월 16일 시카고 당대회에서 있었던 첫번 째 투표에서 스티븐슨은 민주당 대통령후보로 지명되었다. 그러나 잭은 38과 2분의 1표 차로 부통령후보 자리를 테네시주 출신의 에스터스 키포버 상원의원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조는 격노했다. 조는 뒤에 이것이 잭이 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은 단 한 번의 경우라고 말했다.
그러나 잭은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전국적으로 이름이 더 알려지게 되었다.
조도 그 사실을 인정했던 것 같다. 언론조작은 그의 전문분야 가운데 하나였다.
정치선전 전문가들의 입에서 대통령후보들을 포장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가 나오기 훨씬 전에 조는 이미 어느 광고업자가 할 수 있었던 것보다도 더 효과적으로 잭의 이미지를 부각시켜놓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잭을 비누거품처럼 팔 작정이다. 정치에는 우연이란 없다.”
그는 늘 자기 아들들에게 그들이 하는 일을 어감이 나쁜 “정치”라는 말 대신 “공직”이나 “공공 봉사”하는 말로 표현하라고 일렀다. 「타임」지의 어느 기자에게 조는 잭이 자기 두 할아버지가 일요일 집회에서 이야기하는 것을 듣고 공공 봉사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말했다.
대통령선거전 초기에 조는 또한 뉴잉글랜드의 어느 텔레비전 방송사 최고경영자를 설득해서 잭에게 카메라 앞에 서는 방법을 가르치도록 했다. “그는 대통령선거전에서 TV의 역할이 매우 크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잭에게 카메라 앞에서의 테크닉을 가르쳤지요. 우리는 그에게 카메라 렌즈를 똑바로 보라고 했습니다. 잭은 누구보다도 빨리 배웠지요.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집에 가서도 연습을 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잭은 1960년 1월 2일 대통령 출마를 공식 발표했다. 당시 미국 국민들이 조가 얼마나 철저하게 아들들을 지배하며 또 그가 아들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쓰는지 알고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잭에게 도움이 된다면 100만 달러를 못 쓰겠는가?” 언젠가 조는 증권감독위원회에서 그와 같이 일했으며 뒤에 잭의 고문이 된 제임스 M. 랜디스에게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1960년 11월 9일 조가 잠에서 깨어보니 잭이 0.1%의 근소한 표차로 대통령에 당선되어 있었다. 그의 필생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그제서야 그는 아들과 함께 사진을 찍기로 동의했다. “나는 이제 원할 때는 언제나 그와 함께 공식석상에 나타날 수 있다”고 그는 말했다.
조가 예측했던 대로 텔레비전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그 무렵 약 90%의 미국 가정이 텔레비전 수상기를 가지고 있었다. 텔레비전으로 방영된 잭과 리처드 닉슨의 토론이 케네디에게 현직 부통령을 이길 수 있는 표를 주었던 것이다.
아들의 선거전을 지휘하고 선거자금을 대준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조는 아들의 직무수행까지도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조지 스매더스 상원의원(민주당, 플로리다주)은 선거가 끝난 어느 날 오전 팜비치의 풀 한쪽 끝에 잭과 함께 앉아 있던 일을 회상했다. 풀이 다른 쪽 끝에서 조가 신문을 읽고 있었다. 잭은 고민에 싸여 있었다. “보비(로버트이 애칭)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그애가 이번 선거전에서 애를 많이 썼거든.” 그가 말했다.
“난 이렇게 말했지요. ‘그를 국방차관보에 임명하지 그래?’” 스매더스가 당시를 회상하는 말이다.
“그러자 잭은 이렇게 말하더군요. ‘노인께서는 그에게 법무장관이 되는 것을 바라시거든.’ 내가 대답했지요. ‘그는 평생 재판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일세, 차관보가 된다 해도 그는 많은 권력을 행사할걸세. 실무경험이 없는 사람에게는 차관보가 적당한 자리일세.’ ”잭이 말했습니다.‘자네가 직접 노인에게 말해보게.’“
그러자 스매더스가 조에게 다가가 말했다. “대사어른, 잭과 저는 방금 보비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잭은 보비에게 무언가 해주고 싶어합니다. 저는 그가 국방차관보가 되면 어떨까 생각합니다. 일년 쯤 지나서 더 높은 자리로 승진할 수 있을겁니다.”
지체없이 “조는 ‘잭, 이리 와’하고 잭을 불렀다”고 스매더스는 회상했다. “잭이 그에게로 걸어오자 조는 이렇게 말했다. ‘네 동생 보비는 그의 신명을 다 바쳐 네 선거운동을 했어. 난 그에게 미국 법무장관이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에는 법무장관이 돼야 해. 알겠냐?’ 그러자 잭은 ‘네, 알겠습니다’하고 대답했지요. 그래서 보비는 법무장관이 됐습니다.
종말의 시작
1961년 12월 19일 아침, 로즈의 조카딸 앤 가건이 처음으로 조와 함께 팜비치국제공항으로 가서 잭을 배웅한 후 조를 팜비치 골프장으로 태우고 갔다. “우리가 16번 홀을 끝마쳤을 때 조아저씨가 공을 주워 올리시면서 기운이 없다고 말씀하셨어요.” 가건의 말이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 방으로 갔다. “아저씨는 옷과 골프화를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었어요.” 가건은 말을 계속했다. 비서가 와서 보비가 전화를 걸었는데 조가 전화를 받지 않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아저씨의 방으로 갔지요. 침실 문은 열려 있고 아저씨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계셨어요. 전화를 받으러 일어날 수가 없었던거지요.” 가건이 말했다.
세인트 메리병원의 의사들은 조가 중증의 뇌졸중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오른쪽 팔과 다리는 거의 완전히 마비되어 있었다. 쉰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뿐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오른쪽 안면 근육도 굳어져 있었고 그의 입도 한쪽으로 비뚤어져 있었다.
“몇 가지 방법으로 아저씨는 당신의 뜻을 전할 수 있었지만 그 뜻이 분명치 않았어요. 아저씨는 ‘아냐 아냐, 아냐’ 하고 말씀하시고 했지요. 몇 가지 다른 말도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건 모두 욕이었어요.” 가건의 말이다.
조는 언젠가 자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한 가지 일은 몸이 마비되어 자신을 제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이제 그의 가장 큰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그는 주위를 인식할 수는 있었지만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 잭이 비행기를 타고 워싱턴에서 날아왔고 다른 가족들도 모여들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쉴새없이 케네디가에 전화를 걸어댔다. “대통령, 부친과 함께 뱃놀이를 하다. 조지프 케네디의 병세 호전.” 「뉴욕 타임스」는 그렇게 보도했다. “조지프 케네디는 매일 산책을 한다”고 「보스톤 글로브」지는 보도했다.
뉴욕재활연구소에서 치료를 받은 결과 조의 병세는 다소 호전되었다. 가족들은 이것을 더욱 부풀려서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백악관은 조가 “다시 말하기 시작했으며 지능도 정상이고 마비된 근육도 되살아나고 있다”고 발표했다.
1962년 12월 3일. 「보스톤 글로브」 지는 조가 “상당히 회복되었다”고 보도했다.
“일부 후유증은 남아 있지만 그는 전처럼 정상적으로 활동하고 있다”고 가족 대변인이 말했다고 이 신문은 보도했다.
사실 조를 치료한 러스크연구소의 연구원 헨리 베츠 박사는 조는 “다른 사람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는 있지만 말을 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조는 눈과 안면 표정, 정상인 왼손으로만 의사소통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963년 11월 22일 오후, 하이애너스포트의 집 하녀들 중 한 사람인 도라 로렌스가 비명을 질렀다. 로렌스는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대통령이 총에 맞았어요! 세상에!” 로렌스가 고함을 질렀다.
그 소식을 들은 로즈의 눈이 흐려졌다. 아무 말도 없이 로즈는 돌아서더니 자기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로즈는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는데 한 손이 약간 떨리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로즈가 조의 간호사 리타 댈러스에게 말했다. “그는 괜찮을거야. 두고보라구.” 로즈는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닫았다.
조는 잠들어 있었다. 그러나 집안에 있던 5대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벨을 울려대자 잠에서 깼다. 맨 먼저 보비가 잭이 살아날 것 같지 않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다음에 잭이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로즈는 방에서 나와 댈러스에게 조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일렀다. 밖에 테드와 유니스가 조에게 사실을 알렸다. 유니스가 속삭였다. “아빠, 사고가 있었어요. 아빠, 아빠, 잭 오빠가 죽었어요. 오빠가 죽었다구요. 하지만 오빠는 천국에 갔을거예요.” 테드는 무릎을 꿇고 얼굴을 두손으로 가렸다.
“아빠, 오빠가 죽었어요. 오빠가 죽었어요.” 유니스가 다시 말했다.
“케네디의 시선이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어요.” 댈러스의 회상이다. “그분은 나를 올려다보았어요.‘
그분이 한 손을 유니스의 머리에 얹을 때 슬픔의 바다가 그분의 얼굴을 덮치는 것을 보았어요.“
조에게 주스를 가져간 댈러스는 그의 신문을 한옆으로 밀쳐놓았다. 댈러스는 그가 그것을 달라고 하지
않기를 바랐다.
검은 띠를 두른 제목의 기사는 암살을 세세하게 보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는 신문을 달라고 했다.
잠시 신문을 읽은 후 그는 그것을 바닥으로 밀쳐 떨어뜨렸다.
댈러스가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뒤돌아보았다. 두 눈은 감겨 있었지만 눈물이 그의 두 볼을 타고 흘
러내리고 있었다.
장례식이 끝나고 이틀 후, 재키가 잭의 관을 덮었던 미국 국기를 조에게 가지고 왔다. 재키가 말했다.
“아버님, 잭은 갔어요. 이제 우리들은 모든 것이 전과 같지 않을거예요. 이번 일에 대해서 아버님께
말씀드리고 싶어요.” 재키는 쉬지도 않고 잭이 댈러스에 도착할 때부터 워싱턴에서 장례식이
거행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조에게 했다. 추수감사절 다음 주에 쿠싱추기경이 집으로 와서 그가 잭에게
바쳤던 추도사를 조를 위해서 반복했다.
비극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1968년 6월 5일. 뉴욕주 상원의원으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선거운동
을 하던 보비 케네디가 로스엔젤레스에서 암살되었다. 조는 총격장면을 다시 보여주기 위해 텔레비전
수상기가 번쩍거릴 때 침대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조는 두 눈을 가렸다. 리타 댈러스는 그이 얼굴에
흘러내리는 눈물을 볼 수 있었다.
일년 후 더욱 비극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1969년 7월 18일 금요일 저녁에 테드는 보비의 선거운동을
했던 여자들을 위해 마르타포도원 동쪽 끝에 있는 채퍼퀴딕섬에서 파티를 열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에
테드가 차를 몰고 오다가 다이크 다리 너머로 떨어졌다. 그의 차에 타고 있던 메리 조 코페크니가
익사했다.
늑장을 부린 끝에 이 사실을 뒤늦게 경찰에 신고한 테드가 하이애너스포트의 집 계단을 올라와서 자기
아버지의 침실로 들어갔다. 그가 말했다. “아버지, 사고가 있었어요. 차에 여자가 한 사람 타고 있었어
요. 그 여자는 익사했어요.“
조는 머리를 앞으로 기울이고 테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댜.
테드는 주저앉아 그의 얼굴을 두 손에 파묻었다. “아버지,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후 리타 댈러스는 조의 상태가 악화되는 것을 감지했다. “나는 채퍼퀴딕사건 후 그분의 상태가
내리막길을 달리는 것을 알 수 있었어요. 어떤 일이 있을 때마다 그분은 조금씩 기력이 약해졌지요.
채퍼퀴딕사건 후에 그분은 다시 기운을 차리지 못하셨어요.“ 댈러스의 말이다.
그해 여름이 끝날 무렵 조는 식욕을 잃어버렸다. 시력도 잃었다. 목구멍이 굳어서 음식을 삼킬 수도
없었다. 그의 성대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소리를 낼 수 있을 뿐이었다.
그는 안경을 벗어버렸다. 그에게 그렇게 많은 문을 열어주었던 미소가 그의 얼굴에서 사라져버렸다.
대신 뇌졸중이 가져온 일그려진 표정이 나타났다.
1969년 11월 15일. 조는 그동안 여러차례 일으켰던 심장발작을 다시 일으켰다. 이튿날 로즈는 하루
종일 그리고 밤까지 조와 함께 앉아 있었다. 11월 17일이 되자 조의 생명징후는 희미해졌고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날 밤 재키가 그의 옆에 계속 앉아 있었다. 가족들은 의례적인 방법을
사용해서 그의 생명을 연장하지 않기로 이미 합의해놓고 있었다.
11월 18일 아침. 가족들이 모였다. 테드와 조앤, 패트, 진과 시티븐 스미스, 재키, 에설, 유니스,
그리고 사전트 슈라이버였다. 그들은 조의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었고 유니스가 기도를 시작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
다른 가족들이 차례로 기도의 다음 말을 이어갔다. 오전 11시 5분, 로즈의 기도로 끝냈다. “우리를
악으로부터 구하소서. 아멘” 바로 그순간 조 케네디는 세상을 떠났다.
11월 20일, 조는 가족들이 전에 살던 집에서 4km쯤 떨어진 브루클린 할리후드묘지의 가족묘역에 묻
혔다. 바람이 관 옆에 무릎을 꿇은 채 자기 친구에게 작별인사를 하는 쿠싱추기경의 목소리를 휩쓸어
갔다.
조지프 P. 케네디는 최초의 카톨릭 대통령과 3명의 상원의원, 1명이 법무장관, 3명의 하원의원을 배출
했고 장차 미국의 역사를 만들어갈지도 모르는 미래의 대통령 후보감들을 배출해낸 왕조를 창시했다.
그러나 조 케네디가 한 일은 미국의 한 정치명문가를 창설한 것 이상이었다. 농부로서 2명이 미국대통
령을 배출한 왕조를 창설한 존 애덤스와는 달리, 조 케네디는 그의 아들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그는 무언의 동업자로서 아들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돈과 연줄을 마련해 주었으며 그들의 선거전을
앞장서서 지휘했다.
그의 아들이 고위직에 오른 후에도 그는 계속 그들의 행동을 지배함으로써 갖가지 신화와 잡음을 만들
어냈다. 그가 이런 일을 한 이유는 단순했다.
공공 봉사에 대한 그의 모든 공언에도 불구하고 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권력을 거머쥐는 것이
었다. 자신이 창설한 정치왕조를 통해서 조지프 P. 케네디는 그가 꿈꾸었던 것 이상의 권력을 손에 쥐
었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끝
첫댓글 허심님 오랫만입니다ㅡ ^^ 긴 글이지만 몇번에 결쳐서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
그래요
오랜만입니다
애니님 글 올리시는 것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