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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成龍(류성룡)]
◆ 류성룡: 1542년(중종 37년) ~ 1607년(선조 40년)
*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의성 사촌(외가)출생
* 퇴계 이황의 문인이며 김성일(金誠一)과 동문수학하였으며 서로 친분이 두터웠다
* 우의정(右議政)으로 이조판서를 겸하고 이어 좌의정(左議政)에 승진하여 역시
이조판서를 겸하였으며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 허균은 나의 친가는 건천동에 있는데 근세 인물로는 류성룡 나의 형 허성 이순신 원균이
일시에 났으며 한 동리의 출신이다
이순신보다 원균이 5살 류성룡이 3살 연배이고 허성은 3살 연하이다
◆ 진진휼기민사의장(陳賑恤飢民事宜狀)
* 류성룡은 왜란에 대비하여 형조정랑 권율(權慄)을 의주목사로
정읍현감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좌수사(이순신: 1591년 47세로 부임)에
천거(薦擧)하였으며
경상우병사 조대곤(曺大坤)을 이일(李鎰)로 교체할 것을 요청하는 한편
진관법(鎭管法)을 예전대로 고칠 것을 청했다
『진관(鎭管): 조선시대 전기의 지방군사 조직 (국경과 외침 대비한 지방군사 조직)』
* 1593년(선조26년) 2월과 그해 3월에 논군량민식장(論軍糧民食狀)을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올린 상소문(서애문집 권6)
- 주 내용은 왜병이 서울을 철수한 뒤에 도성민의 굶주림에 관한 참상(慘狀)과
진구대책(賑救對策) 등을 개진하고
명나라 원병이 평양으로 퇴각한 뒤 그들이 다시 진격해올 것에 대비한
군량미의 조치와 함경도 지방의 성지(城池)보수와 호령(號令)의 통일 병기의 조치
그리고 공을 세운 사람에게 양반은 물론 천인에 이르기 까지 상을 주되
전공의 진위를 철저히 조사하여 의병 중에도 처음에는 공로가 컸으나
그 뒤 이득을 주는 것보다 폐단을 끼치는 자도 있으니
그들의 공로가 있고 없음을 가려서 공이 있는 자는 상을 주고 공이 없는 자는
의병을 다른 의병에 소속시키게 하면 얼마 안가서 의병은
모두 관군이 되어 군령(軍令)이 통일되고 민폐도 줄어들게 될 것임을 제시하였다
◆ 이순신은 전라좌수사에 부임했을 당시 군기와 함선 병기를 새로 제작하고 수리하였으며
화대 연대도 수축하여 통신시설을 확립하고 또 수영성을 쌓았다
이처럼 시설과 장비에 있어서 전쟁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였으며
한편 류성룡으로부터 얻은 증손전수방략책(增損戰守方略策)인 병서를 탐독하여
전시에 대비 하였다 이순신은 그 내용에 대하여 감탄하였다
그 내용은 수륙전의 화공전술(火攻戰術) 등을 낱낱이 기록해둔 만고 기이한 책이었다.
또한 거북선을 새로 꾸미어 임진 2월 8일에는 거북선의 범포(帆布: 돛을 만드는 천)
29필을 준비하였고 3월 27일에는 여수 앞바다에서 쇠사슬을 건너 매는 것을
감독하였으며 거북선에 장착한 대포를 시험 발사하였다
4월12일에는 역시 거북선에 장착한 지자포와 현자포를 쏘아보고 그 포성의 위력을
측정해서 적을 공격할 때 위력을 낼 수 있도록 정비했다
이 준비 완료 후 거북선의 함포 시험발사는 임란이 일어나기 이틀을 앞두고 거행된
것이었다
◆ 1592년 4월에 판윤 신립(申砬)과 군사에 관하여 논의하며 일본의 침입에 따른
대책을 강구하였으며 그해 4월 13일 일본이 대거 침입하자
병조판서를 겸하고 도체찰사로 군무를 촐괄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평양에 이르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기도 하였다
이해 다시 영의정에 올라 4도의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 군대양성과 함께 절강기계(浙江器械)를 본떠 화포 등 각종 무기의 제조
성곽의 수축을 건의하여 군비확충에 노력하였으며
* 소금을 만들어 굶주리는 백성을 진휼할 것을 요청하였다
* 호서의 사사위전(寺社位田)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군량미를 보충할 것과 조령(鳥嶺)에
관둔전(官屯田)을 설치할 것을 요청하는 등 명나라와 일본과의 화의가 진행되는 기간에도
군비보완을 위하여 계속 노력하였다
* 도학(道學) 문장(文章) 덕행(德行) 글씨로 이름을 떨치고 특히 영남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묘지는 안동시 풍산읍 수동 뒷산에 있다
* 안동의 병산서원(屛山書院) 호계서원, 의성 빙계서원, 상주 도남서원
예천(용궁) 삼강서원, 군위 남계서원 등에 제향되었다
◆ 진시무차(陳時務箚)
* 1593년(선조26년) 12월과 다음해 4월에 걸쳐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두 차례나 올린 상소문
- 주 내용은 명나라가 원병을 보내왔지만 그들이 우리를 구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기대할 수 없는 것이니
우리가 요해처(要害處)를 택하여 굳게 지키도록 하되 백성들로 하여금
유사시에는 들어가서 지키게 하고 무사할 때는 나와서 경작하게 하면
왜병이 진격해 와도 얻을 것이 없으며 퇴각해도 그곳에 우리군사가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니
오래지 않아서 적은 스스로 물러갈 것이라 하였으며
무엇보다도 백성을 안정시키는 데 중점을 두는 것이 급선무이며
그러한 뒤에 백성을 훈련시켜 적을 막도록 함이 현명한 계책이며
연강(沿江)에 보(堡)를 설치하고 각 도의 방수계획을 세우는 것이
곧 적을 퇴치하는 방책임을 강조하였다
◆ 청광취인재계(請廣取人才啓)
* 서애문집(西厓文集) 권7에서 어려운 시국을 타개(打開) 하기 위해서는 능력 있는
인물의 발굴을 위해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2품 이상의 문무재신(文武宰臣)과
양사(兩司) 홍문관(弘文館) 감사(監司) 병사(兵事) 수령(守令) 등은
다음과 같은 인재를 발굴할 것을 주장하였다.
(재주 지혜 학식 생각이 깊은 자. 창칼의 기술자 등 발굴)
◆ 하회마을
* 양진당(養眞堂: 보물 제306호): 겸암(謙巖) 류운룡(柳雲龍)의 종택으로 하회마을의 종가이다
종가는 가장 큰 어른 또한 가장 맏형님이 살고 있는 집으로 풍산 류씨의 대종가이다
* 충효당(忠孝堂: 보물 제414호): 임진왜란 당시 영의정을 지내며 국난을 극복했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종택(宗宅)이다
◐ 징비록(懲毖錄: 국보 제132호): 서애 류성룡이 임진왜란의 득실을 자필로 남긴
수기이다
☞ 지난 잘못을 반성하여 앞날에 대비한다 란 뜻이며
- 임진왜란의 전체 국면을 살필 수 있는 최고의 사료(使料)이다
- 임진왜란 초전(初戰)의 궤멸적 패배에 대한 이유 분석
- 전란(戰亂)을 앞두고 조(朝) 왜(倭) 양국간의 외교관계에 대한 설명
- 왜군의 전투능력에 대해선 인정하였으나 그 전략적 능력에 대해선 낮게 평가함
- 병법(兵法)에 무지한 적의허점을 찔러 7년 전쟁을 최종 승리로 이끄는
전략적 사고를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교훈이다
☞ 징비록(懲毖錄)은 시경(詩經) 제4편 송(頌)의 소비(小毖: 일을 삼가서 함)의 문구인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에서 따왔다
즉 내가 잘못을 뉘우쳐 미래에 우환을 대비한다 란 뜻이다
懲(뉘우치다징) 毖(삼갈비)
♠ 詩經(시경)이란
第一篇(제일편) 關雎(관저)는 國風[국풍: 民間之情(민간지정)]의 始라 하고
第二篇(제이편) 鹿鳴(녹명)은 小雅[소아: 饗宴之事(향연지사)]의 始라 하고
第三篇(제삼편) 文王(문왕)은 大雅[대아: 朝廷之事(조정지사)]의 始라 하고
第四篇(제사편) 淸廟(청묘)는 頌[송: 宗廟之事(종묘지사)]의 始라 한다
☞ 징비록은 2권의 자필원고본과 16권의 간행본(刊行本)과
4권까지만 전해지는 목활자본(木活字本) 등 3종이 있다
☞ 근폭집(芹曝集): 류성룡이 선조에게 올린 건의사항 등을 수록함
진사록(辰巳錄): 군정의 책임자로서 조정에 보고한 문서를 정리한 것
군문등록(軍門謄錄): 4도 체찰사의 직함으로 각 부대에 시달했던 공문 등을
담은 것 등이 있다
녹후잡록(錄後雜錄): 근폭집 진사록 군문등록은 징비록의 정확성을 뒷받침해 주는
사료집이며
즉 왜적의 간사한 계략과 우리의 방어태세 등을 10 여편으로
요약한 것이다
* 삼신당(三神堂): 삼신당은 하회마을의 정 중앙에 위치하는 나무이다
이 곳에서 마을의 중요한 회의를 하기도 한 장소이며
여기서 하회별신굿탈놀이가 이루어지는 곳이다
◆ 병산서원(屛山書院): 본래 이 서원은 고려 말 풍산현에 있던 풍악서당(風岳書堂)으로
풍산 류씨의 교육기관이었으나 1572년(선조2년)에 류성룡이
이곳으로 옮긴 것이다
* 1863년(철종14년)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1868년(고종5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27개 서원,20 사우 중의 하나이다
안동은 2개소인 도산서원(陶山書院)과 병산서원(屛山書院)이다
* 입교당(立敎堂):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하고 있다
* 만대루(晩對樓): 향사나 서원의 행사시에 사용하였다
* 서원 뒷산은 화산(花山)이며 앞산은 병산(屛山)이다
◇ 저서(著書)로는
*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무오당보(戊午黨譜)
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잇으며
편서로는 대학연의초(大學衍義抄) 황화집(皇華集) 구경연의(九經衍義) 문산집(文山集)
정충록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孝經大義)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 그런데 그의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 영모록 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 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 징비록과 서애집은 임진왜란사 연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史料)이다
▣ 당시 주위 정세
♠ 율곡 이이(李珥)는 1583년(선조 16년)2월에 48세로 병조판서에 임명되어 선조에게
시무육조(時務六條) 즉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를 올림(선조실록과 수정실록에는 없고
사계 김장생이 찬한 율곡행장에서 처음 등장하나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이와 풍신수길은 나이가 동갑임≫
♠ 이때 풍신수길(도요토미히데요시)48세로 일본의 전국을 장악하여 4년 뒤에 전국을 통일함
* 풍신수길: (1536~1598.8.18.)일본은 이미 1543년에 포르투갈 사람들로부터 총과 포술을
들여다가 신무기로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 또한 이때에 45세의 누르하치(청태조: 1559~1626.9.30.)는 이미 거병하여 요동지방을
석권함으로써 옛날 금나라의 영토를 확보해가고 있었다
☞ 풍신수길의 지독한 유언
「내가 일어나지 못할 것 같다 내가 죽으면 배를 갈라 창자를
꺼내고 깨끗이 씻은 다음에 말꼬리로 꿰맨 다음 시체를 술독에 담궈라」
그리하여 내가 죽었다는 것을 알리지 말아라
끝까지 조선 정복과 대륙 진출의 헛된 야욕을 버리지 못함
풍신수길의 첩들은 그의 유언대로 행하였으나 몇 달이 되어서는
냄새가 심하게 밖에까지 풍기므로 할 수 없이 발상하니
뒤늦게 그 소식을 전해들은 왜장들은 비밀리에 군사를 거두어 철군하기 시작함
◇ 구국방책(救國方策) = 유정(惟政).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
* 사명당은 1578(선조11년) 34세에 율곡에게 국난을 예고하고 10만양병설을 역설함
◇ 을미상소(乙未上疏) = 유정(惟政). 사명당(四溟堂). 송운대사(松雲大師)
* 1595년(선조28년)9월에 전쟁에 대비하여 역사적 안목과 현실을 파악한 시국대책을 상소함
♠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1584(선조 17년) 1월 16일에 49살로 세상을 떠남
♠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4.13. 오후5시(선조 25년) 일본침략군 약21만이 조선 침입함
♠ 정유재란(丁酉再亂): 1597.1.14. (선조 30년) 약 20만의 일본군 다시 침략함
★ 풍신수길 1598.8.18.(선조31년) 사망으로 풍신수길의 유언으로 일본군 총철수 개시함(9월)
★ 이순신(李舜臣 1545년 인종1년 출생)의 노량해전 54세로 전사 (선조31년 1598.11.18)
▣ 이순신의 모함: 우리나라에는 바다의 영웅 이순신이 거북선으로 막고 있으니 이것을
대항 할 길이 없었다
소서행장의 부하며 왜놈의 간첩인 요시라(要時羅)의 모략(謀略)에 당함
조선에는 당파싸움이 많은 나라라 당파싸움을 붙여 이순신을 실각시키면 바다건너기가
쉽게 하기 위해서 경상우병사 김응서를 이용하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의 모함에 당함
「가등청정이 조선을 또 치겠다고 내년 1월 13일 단가(單?)로 바다를 건너올 예정이니
조선수군은 기회를 놓치지 말고 가등청정을 잡아 죽이십시요」
가토(가등청정)는 이미 수일 전에 서생포(西生浦)에 들어온 뒤였다
* 혹한 고문과 죽음 직전에 우의정 정탁(鄭琢)의 변호로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도원수 권율
(權慄)의 막하로 들어가 두 번째 백의종군(白衣從軍)을 하게 됨
* 왜적은 원균(元均)이 이순신의 통제사 자리에 받게 되었다는 소식이 왜적들에게 알려지자
왜적들은 이제는 염려가 없다하고 재침을 함
원균은 경상우수사로 있을 당시 싸워보지도 않고 배 90척을 내버리고 도망한 자이니
왜적은 마음 놓고 처 들어옴
* 우리조정에서는 왜적을 들어오라고 문을 열어준 셈이되었다
* 삼도수군통제사 원균(元均)은 적의 유인전술에 빠져 거제 칠천양(漆川梁)에서 전멸됨
→ 정유재란(丁酉再亂) 선조30년 1597.7.15.
♠ 이순신의 재 등용
* 원균의 패보가 조정에 이르자 조야가 놀라서 어찌할 바를 몰랐음
왕은 비국대신(備局大臣)들을 불러 의논하였으나 당황하여 바로 대답도 못하였다
오직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만이 이순신을 다시 불러 통제사로 기용할 것을
주장하였을 뿐이다
이리하여 이순신의 죄가 조정을 기만하고 임금을 무시한 죄
적을 토벌하지 않고 나라를 저버린 죄
다른 사람의 공을 빼앗고 모함한 죄
방자하여 꺼려함이 없는 죄 등의 많은 죄명을 뒤집어씌워 죽이려고까지 하였던
이순신을 통제사로 기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재 등용은 선조 30년 1597.8.3.이었다
그러나 화약과 쌀 군사는 없고 맨주먹만 남음
기가 막힘(한달 후 12척으로 왜선 31/133척을 격파 명량대첩)
◐ 논개(論介)의 순국장소: 경남 진주 촉석루(矗石樓) 앞에 있는 의암(義巖) 바위(19세)
* 죽음을 각오하고 일본 왜장 죽임: 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 - 게야무라 로쿠스케
* 게야무라 로쿠스케[모곡촌육조(毛谷村六助)]: 임진왜란 때 가장 용맹하고 지혜로운 장군
혹독한 고행을 극복하고 신검(神劍)이란 명성을 휘날린 검술 사범으로서
출세한 입지전적인 사무라이였다 당대 청년들의 우상이었다
가토(加藤淸正)는 그의 군 선봉장으로 추대했다
그런데 그런 게야무라가 장렬하게 전사한 것도 아니고
다 이긴 전승기념 연회에서 조선의 여성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일본군 전체에 대한 모욕이자 씻을 수 없는 수치였다
거기에다 게야무라의 죽음은 곧 수많은 왜병들의 사기를 저하시키는
지리멸렬하게 만든 한 요인으로 작용했고
결국 호남평야를 눈앞에 두고도 장악하지 못한 채 퇴각해야만 하는
억울함으로 끝나고 말았다
▣ 다시는 지난날과 같은 수모와 치욕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서로 협력하여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흐르는 역사 속에 이러한 애국충의(愛國忠義)의 훌륭한 정신이 있었기에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사명당(四溟堂)과 덕천가강(德川家康)의 주요한 대화 내용을 적으며 끝맺을까 합니다
수만의 생명과 허다한 재산을 상실하였으며
우리 국가민족의 천추의 원한(怨恨) 그것을 나 한 사람이 어찌 풀거나 맺을
수가 있겠는가
일본이 우리 백성의 부모형제와 처자를 죄 없이 죽였으니
그 원수가 어찌 말로 풀어질 것인가
그 때 조선을 치고 우리 백성을 죽이고 종묘사직을 기울게 했던 풍신수길과
가등청정 흑전장정 도진의홍 와도직무 소조천융경 모리휘원 우희다수가 송포진신
등당고호 구귀가융 고교통증 세천충흥 협판안치 가등가명 모리수원 와도승무 등
범죄자 백여명을 어찌할 것인가
일찍이 일본보다 몇 십 배 강력한
수양제의 100만 대군으로
당태종의 80만 대군으로
원나라의 40만 대군으로
침입하여도 오히려 참패를 당하고 아무 이익을 보지 못하였거늘
귀국이 20만으로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 하였던가 .......
귀국이 다음에 20만 아니라 백만 2백만으로 우리를 침범하여도
우리나라 백성이 한 사람만 남는다 해도 그대 나라에게 항복할 리 없는 것이다
천하 만고의 원수(怨讐)에게 항복할 리가 없다
임진 정유 양차 침범에 우리나라 백성이 죽은 자 21만 8천7백72명이요
행방불명이 4만 7천9백39명이요
병신된 자가 3만 6천8백75명이요
재산은
궁전소실 가옥분탕 도둑맞은 역대보물 사찰소화 파괴
귀중한 서적소실 유실 등은 그것이 얼마치나 되는지 그대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그것에 대한 대가를 배상하여야 될 것이 아닌가
덕천가강은 우리는 참 죄가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죄가 많습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아보니
과거 2천년 전부터 우리민족은 귀국을 못살게 하였습니다
신라시대 때부터 귀국 지방을 침입한 것이 무려 150여 차나 됩니다
그런데 귀국에서는
모든 학자 학문 기술 등 여러 가지를 우리나라에 보내주셨으며
귀국은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 잘못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우리나라는 귀국에 잘한 일이 한 번도 없습니다
이 죄를 어찌하면 좋으리까 하며 흐느껴 우는 것이었다
(終) 心操彿山
관직 생활 |
1564년(명종 19) 생원·진사가 되고, 다음해 성균관에 들어가 수학한 다음,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자를 거쳐 예문관검열로 춘추관기사관을 겸직하였다. 1568년(선조 1) 대교, 다음해 전적·공조좌랑을 거쳐 감찰로서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돌아왔다. 이어 부수찬·지제교로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춘추관기사관을 겸한 뒤,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뒤 정언·병조좌랑·이조좌랑·부교리·이조정랑·교리·전한·장령·부응교·검상·사인·응교 등을 역임한 뒤, 1578년 사간이 되었다. 이듬해 직제학·동부승지·지제교로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춘추관수찬을 겸하고, 이어 이조참의를 거쳐 1580년에는 부제학에 올랐다. 1582년 대사간·우부승지·도승지를 거쳐, 대사헌에 승진하여 왕명을 받고 「황화집서(皇華集序)」를 찬진(撰進)하였다. 1583년 다시 부제학이 되어 「비변오책(備邊五策)」을 지어 올렸으며, 그해 함경도관찰사에 특제되었으나 어머니의 병으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으며, 이어 대사성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다가 경상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다음해 예조판서로 동지경연춘추관사(同知經筵春秋館事)·제학을 겸하였으며, 다음해 왕명으로 「정충록발(精忠錄跋)」을 지었고, 또 그 다음해에 『포은집(圃隱集)』을 교정하였다. 1588년 양관대제학에 올랐으며, 다음해 대사헌·병조판서·지중추부사를 역임하고 왕명을 받아 「효경대의발 孝經大義跋」을 지어 바쳤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 |
유성룡은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와는 달랐다. 그는 네 살 때 이미 글을 읽기 시작했으며, 여섯 살 때는 종조부로부터 『대학』을 배웠다. 유성룡은 여덟 살 때 『맹자』를 배웠는데, 그 중 한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좔좔 외어 그의 아버지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때부터 세상 사람들의 입을 통해 풍산유씨 집안에 인물 났다는 말이 나돌게 되었다. 어린 유성룡은 공부에 열중하는 것 못지않게 옳은 일에 대한 고집도 대단하여, 한때는 고집불통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유성룡의 아버지는 의주 등 여러 고을을 돌아다니며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그도 아버지를 따라다녀야 했다. 유성룡의 나이 열여섯이 되던 해, 그는 처음으로 지방에서 보는 향시에 응해 당당하게 합격했다. 열아홉이 된 유성룡은, 다음 시험 준비를 위해 관악산에 있는 한 외딴 암자로 들어갔다. 그리하여 그의 본격적인 수업이 시작되었다. 유성룡이 있는 암자 근처에 자그마한 절이 있었는데, 그 절의 중 하나는 유성룡이 낮이나 밤이나 책에 파묻혀 사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건성으로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과연 어느 쪽인지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 날 자정이 되자, 그 중은 암자가 있는 계곡으로 숨어 들어갔다. 창호지 문을 통해 안을 들여다보니 희뿌연 호롱불이 깜박깜박 졸고 있었다. 힘이 장사인 그 중은, 끙끙거리며 큰 돌덩이 하나를 집어 들더니 담 안으로 휙 던졌다. ‘쿵’하는 둔한 소리를 내며 돌덩이는 툇마루 바로 곁에 떨어졌다. 숨을 죽인 채 안을 살폈으나 끝내 아무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서 그 중은 그가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애꿎은 호롱 심지만 태우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아침, 상을 물리고 나서 다시 책상머리에 앉는 유성룡을 보고 중이 실쭉샐쭉 웃으며 그에게 말을 걸었다. “밤새 별 일 없었는지요?” “자정 쯤 되어 앞마당에 웬 바위 굴러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던데 하도 재미난 대목을 읽고 있던 참이라 내다보지 못했다네.” 이에 중은 아무 소리 못하고 암자를 내려오며 혼자 중얼거리면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더니, 예사 분이 아니군.” 하였다. |
주관적 학문 성향 |
유성룡은 어려서부터 공부를 함에 실천에 힘썼으며, 몸가짐이 근엄 장중하여 집안사람들조차 그가 기대어 앉거나 게으른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일찍부터 경국제세(經國濟世)에 뜻을 두어 예악(禮樂)으로부터 치병(治病) 이재(理財)에 이르기까지 깊이 깨치지 않은 데가 없었으며, 성리(性理)에도 깊은 연구를 하여 퇴계 학맥의 한 갈래를 이루었다. 서애는 학문을 함에 있어서 경전(經傳)의 요지와 성현의 심법을 밝혀, 글을 읽음에는 옛사람의 주석에 얽매이지 않고 되도록 자유로운 해석을 하려 힘썼다. 그러므로 경전을 숙독 완미하여, 스스로 그 뜻을 완전히 해득한 뒤에라야 주석을 보고 자기의 해석과 비교해 보곤 했다. |
행력 |
기사전거 : 年譜, 行狀(鄭經世 撰) 등에 의함 |
들려주신님들 오늘도 행복 가득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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