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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상식 스크랩 [축구역사] 축구의 탄생과 프로화 (사진으로 보는 축구역사)
흐르는 가람 추천 0 조회 147 07.09.30 14: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축구의 탄생과 프로화 -1800년대-

볼을 발로 차는 놀이는 고대로부터 세계각지에 존재했다. 우리 나라는 삼국시대의 김유신과 김춘추의 일화에서 나타나듯이 ‘축국(蹴鞠)’이라는 것이 있었고 중국과 일본도 고대에 이와 유사한 또는 같은 놀이가 있었다. 또한 프랑스에는 ‘스루’, 이탈리아에는 ‘카르초’라고 불리는 게임이 있었는데 그러한 게임을 발전시켜 스포츠로 한 것은 잉글랜드의 퍼브릭스쿨(기숙 사립학교)였다. 19세기전반기의 축구는 손을 사용해도 좋다는 등 각 학교마다 독자적인 룰로 플레이하고 있었다. 그리고 1863년 손을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었던 이튼교, 할로교의 졸업생을 중심으로 통일된 룰을 결정하기 위한 회의가 열렸다. 이 때 그들은 축구협회(FA)를 설립, 손을 사용하지 않는 새로운 룰을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근대 축구의 탄생이다.


그렇지만, 이 룰에 찬성하지 않았던 것이 손을 사용하는 룰을 채용하고 있던 럭비교. 손을 사용하는 룰을 채용한 클럽은 1871년에 럭비 풋볼 협회를 결성하였고 이렇게되어 축구와 럭비가 다른 스포츠가 되었던 것이다.


1871년에는 최초의 FA컵이 행해지는 등 축구는 잉글랜드 중에 널리 퍼졌다. 당초에는 상류계급의 스포츠였던 축구였지만 1883년의 FA컵에서는 노동자들의 클럽인 블랙번이 첫 우승을 차지하는 등 축구는 대중화되어 갔다.


대중화에 따라 노동시간을 축구의 경기에 소비하는 것에 대한 보상금이나 이적금이라는 형식으로 금전의 수수가 행해지게끔 되었다. 이것이 축구 프로화의 시작이다. 그리고 1888년에는 잉글랜드에서 세계 최초의 프로축구리그가 탄생하여 축구는 본격적으로 놀이에서 프로스포츠가 되어 간 것이다.

 

 

축구의 전파와 비대화 -1900~20년-

잉글랜드에서 시작한 근대 축구는 급속하게 외국에도 퍼져나갔다. 19세기말에는 이미 선원이나 유학생을 통해 유럽 각지나 남미, 그리고 동아시아 지역까지도 보급되어 갔다. 독일에서는 1904년의 시점에 200개 가까운 단체가 존재하고 9000명 이상의 선수가 있었다고 이야기되고 있다. 클럽팀간의 국제시합도 행해지게 되어 각지에서 축구협회가 설립되었다.

이와 같은 국제화의 흐름을 받아들여 1908년 런던 올림픽부터 축구가 올림픽의 공식종목이 되었다. 그리고 1904년에는 네덜란드의 힐슈만과 프랑스의 로베르 궤랑을 중심으로 FIFA(국제축구연맹)가 설립되어 궤랑이 초대회장에 취임했다. 설립 당시에는 유럽 7개국 뿐이었으며 영국의 4협회도 가맹하지 않았었는데 남아프리카나 아르헨티나 등 유럽이외로도 가망협회를 늘려갔다. 1916년에는 남미선수권이 시작되는 등 축구는 유럽이외에도 성행하게 되었다.

한편, 모국 잉글랜드에서는 축구인기가 더욱 높아져 1905년에는 FA에 가맹한 클럽이 1만을 넘었으며 19010년에는 아마추어 등록선수수가 30만명을 넘었다. 1901년의 FA컵 결승에는 11만명이상의 관객이 몰려드는 등 큰 인기를 누렸기 때문에 각지에서 거대 스타디움이 건설되게 되었다.
이리하여 축구는 더욱더 비대화해 갔다.

 

 

 

 

줄리메와 월드컵의 창설 -1920년대-

월드컵이 개최되기까지 축구의 가장 큰 국제대회는 올림픽이었다. 잉글랜드는(영국으로서 출장) 1908년과 1912년 대회에서 연속 우승하는 등 최강을 자랑했지만 당시의 올림픽은 유럽팀 만으로 행해지고 있었다. 올림픽이 진정한 세계 1위를 정하는 대회가 되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에 의해 중단된 후인 1924년 대회부터이다. 남미에서는 최초의 참가국이 된 우르과이가 첫 우승을 장식하고 이어 1928년 대회도 연패. 잉글랜드 이외 국가의 축구수준이 향상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한편으로 유럽의 톱 선수는 프로가 많아 아마추어가 참가하는 올림픽에서는 각국의 최강 팀이 플레이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설립 당초부터 세계대회의 구상을 가지고 있던 FIFA(국제축구연맹)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모두 관계없이 참가할 수 있는 축구의 세계선수권 창설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그 중심에 있던 것이 1921년에 FIFA 3대 회장에 취임한 줄 리메였다. FIFA는 1928년에 암스텔담에서 열린 FIFA 총회에서 30년에 새로운 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했다. 개최국은 24년과 28년 올림픽을 연패하였고 독립 100주년을 축하하는 기념행사를 찾고 있던 우르과이로 정해졌다.


그러나 배로의 긴 여정을 꺼린 유럽의 국가들로부터는 겨우 4개국 밖에 참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참가국은 13개국으로 당초의 예상을 크게 밑돌았다. 그렇지만 대회는 예상이상으로 성황을 이루었고 개최국 우르과이가 아르헨티나를 꺾고 첫 우승을 이루었다.

 

 

 

 

 

전쟁과 이탈리아의 2연패 -1930년대-

30년대는 파시즘의 대두와 전쟁의 그림자가 농후해졌다. 그런 시대에 월드컵을 2연패한 것이 이탈리아였다.
홈에서 개최된 1934년 대회는 독재자 무솔리니의 ‘우승’이라는 지상명령을 받은 이탈리아가 주장이며 주 공격수였던 조세페 메아짜(Giuseppe Meazza)의 활약으로 첫 우승했다. 그렇지만 이 대회에서는 이탈리아의 압력에 의한 부정이 행해졌다는 의혹도 있어 사상 최악의 대회라는 혹평 또한 있다.

나치스 지배하의 독일에서 행해진 악명 높은 베를린 올림픽에서도 우승한 이탈리아는 38년 대표도 제압, 연속 우승을 달성했다. 38년 프랑스 대회는 전쟁이 눈앞에 다가와 있던 일촉측발의 상황도 영향을 주어 아르헨티나나 우르과이, 스페인 등이 출장을 거부, 참가국이 감소했다. 그렇지만 그런 대회를 맞아 눈에 띄는 활약을 펼친 것이 브라질이었다.
지금과는 달리 우르과이나 아르헨티나에게 실적에서 밀리고 있던 브라질이었지만 프랑스 대회에서는 높은 개인기를 피로, 축구왕국의 숨결을 느끼게 해주었다. 대회의 하이라이트는 브라질과 전대회 우승국인 이탈리아가 대결한 준결승. 2명의 주력을 쉬게 한 브라질을 이탈리아는 2-1로 격파. 결승에서도 헝가리를 누르고 사상 첫 연패를 달성했다.

2연패의 주역이었던 조세페 메아짜는 AC 밀란, 인텔 두 팀에서 플레이한 영웅. 현재는 스타디움의 이름으로써 남아있다.

 

 

 

 

전쟁에 의한 공백의 시대 -1940년대-

1939년 발발한 제2차 세계대전의 전화는 축구를 포함한 여러 스포츠에 심대하고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월드컵은 전년에 개최되었던 프랑스 대회를 마지막으로 중단되어 40년대에는 개최되지 않았다. 당연할지 모르겠지만, 유럽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리그전, 컵전 모두 중단되었고 스타디움에서는 환성이 사라졌다.

나치 독일이 항복하고 뉘른베르크 재판이 진행되고 있던 1945년 11월. 소비에트연방의 디나모 키에프가 영국원정에 나서 아스날, 셀틱 등 명문 클럽과 4경기를 벌여 2승 2무를 기록, 모국의 국민들 뿐만 아니라 영국의 국민들까지 크게 놀라게 했다. 영국의 4협회는 ‘영광스런 고립’을 관철해 온 보답이 어느 정도 컸는지, 이를 통해 깨달았을 것이다. 그 다음해인 1946년에는 4협회가 모두 18년만에 FIFA(국제축구연맹)에 복귀하게 된다.

40년대후반, 두 개의 클럽이 전성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매우 득점력 높은 FW를 보유하여 ‘라 마키나(기계)’라고 불렸던 아르헨티나의 리버플레이트. 그리고 전쟁전후를 통해 리그 5연패를 달성하여 ‘그란데 토리노(위대한 토리노)’라고 절찬받은 이탈리아의 토리노였다.

모두 국내에서는 최강을 자랑하여 그 명성이 대륙 전체에 자자했지만, 이 당시는 챔피언스컵도 리베르타도레스컵도 없던 시대. 아무리 ‘전설의 팀’이라고 하더라도 세계적인 명성과 타이틀을 얻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1949년 5월, 토리노는 ‘수페르가(Superga)의 비극’이라고 불리는 비행기 사고를 당한다. 포르투갈의 벤피카와 친선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던 도중 토리노가 내려다 보이는 수페르가 유적에 탑승한 비행기가 추락, 선수 18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와 함께 위대한 토리노의 시대도 막을 내리게 된다.

 

 

 

 

매직 마자르와 레알 마드리드-1950년대

국제대회의 주역은 ‘매직 마자르(Magic Magyars)’(마법을 쓰는 마자르인)이라고 불렸던 헝가리 대표였다. 푸스카슈가 이끈 헝가리는 코치슈, 히데쿠티, 보지크 등의 명 선수를 옹유하며 1952년 헬싱키 올림픽을 제압하는 등 50년 5월부터 패배없이 무적을 자랑했다.(31전 27승 4무) 53년까지 계속된 잉글랜드의 홈불패신화를 깬 것도 바로 매직 마자르이다.

당연히 54년 월드컵 스위스 대회에서는 우승후보로 지목되었고 순조롭게 결승에까지 올랐다. 결승의 상대는 서독. 서독은 그룹 리그에서 헝가리에게 3-8로 대패했었다. 결승전에서도 시작초반 헝가리가 일찌감치 2점의 리드를 허용. 그러나 여기서부터 독일은 ‘게르만의 혼’을 발휘, ‘베른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3-2의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며 첫우승을 차지했다. 그 후, 56년에 헝가리 동란이 발생, 수명의 주력선수가 외국으로 망명. 매직 마자르는 붕괴하고 만다.

한편 클럽 레벨에서는 55년에 챔피언스리그의 전신인 챔피언스컵이 설립되었는데, 디 스테파노, 그리고 매직 마자르의 주역인 푸스카슈 등이 활약한 레알 마드리드가 5연패를 달성하며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당시는 아직 대표팀을 바꾸는 것이 허가되고 있었기 때문에 디 스테파노나 스페인으로 망명한 푸스카슈는 스페인 대표로도 뛰었다.

 

 

 

 

 

황제 펠레의 시대 -1960년대-

마라도나와 더불어 축구역사상 최고의 선수라고 불리는 펠레. 1958년 월드컵 스웨덴 대회에서 약관 17세로 충격적인 데뷔를 장식, 브라질에게 첫 영예를 안겨주었다. 결승인 스웨덴전에서 보여준 리프팅으로 DF를 제친 후의 발리슛은 전설로 남아있다.

그렇지만 그 후의 두개 대회에서는 부상으로 인해 생각대로의 활약을 보이지 못했다. 62년 칠레 대회에서는 브라질이 우승하기는 했지만 펠레는 부상으로 인해 개막전 밖에 플레이하지 못했다. 66년 잉글랜드 대회도 불가리아전에서 부상을 당해 포르투갈전에서는 부상으로 도중에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브라질도 이 경기에서 패배했다.) 이 두 대회는 거친 플레이가 너무나도 눈에 띈 대회로 불려지는데, 기분을 상한 펠레는 “더이상 이 대회에는 출장하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잉글랜드를 뒤로 했다.

그렇지만 4년후인 70년 멕시코 대회, 펠레는 최고의 형태로 부활을 알렸다. 자일징요, 토스타오, 알베르토, 카를로스, 리벨리노 등 훌륭한 팀 메이트를 얻은 펠레는 브라질을 세 번째 우승으로 이끌었다. 70년 대회에서는 스피드는 비록 떨어졌지만 체코슬로바키아전에서의 초장거리 롱 슛이나 우르과이전에서의 GK을 제치는 장면 등 다른 선수들이 생각지도 못한 창조적인 플레이를 연발했다.

이런 활약에 의해 펠레가 달고 있던 등번호 ‘10’은 에이스 넘버로서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끔 되었던 것이다.

 

 

 

 

 

 

축구를 바꾼 크루이프의 토탈축구 -1970년대-

70년대에는 그 후에 큰 조류가 되는 새로운 스타일의 축구가 나타났다. 그것은 ‘토탈 축구’라고 불리며 미래의 축구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팀의 중심은 ‘하늘을 나르는 네덜란드인’ 요한 크루이프. 본래는 FW인 크루이프가 자유분방하게 포지션을 바꾼다. 이에 맞춰 주변 선수도 격렬한 포지션 체인지를 반복한다는 선수 전원이 공격도 수비도 행하는 축구였다. 크루이프는 이 토탈 축구로 소속되어 있던 아약스에서는 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인 챔피언스 컵에서 3연패를 이룩하는 등 황금시대를 이루었다.

그러나 천재 크루이프가 이끄는 네덜란드도 월드컵 우승은 달성하지 못했다. 크루이프 앞을 막아선 것은 리베로의 포지션을 확립한 ‘황제’ 베켄바우어. 베켄바우어의 서독은 1974년 월드컵 결승에서 크루이프의 네덜란드와 대전, 뮐러의 골 등으로 네덜란드를 제압하고 우승한 것이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보여준 네덜란드의 축구는 그 후의 축구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

또한 70년대는 또 하나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북미축구리그(NASL)이다. 피크를 지난 스타선수가 많았지만 그래도 펠레, 크루이프, 베켄바우어, 조지 베스트 등 축구역사에 찬란히 빛나는 위대한 이름의 선수들이 플레이했다. 그리고 당시 그 성황은 웬만한 유럽리그 못지않았다.

 

 

 

 

신의 아들 마라도나 -1980년대-

디에고 마라도나. 80년대 축구의 명장면은 이 남자와 함께 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의 재능은 이미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78년 월드컵은 마리오 켐페스가 이쓰는 아르헨티나가 우승했지만, 그 때에 이미 마라도나의 대표팀 발탁을 원하는 목소리가 있었다. 결국 이 때에는 마라도나의 대표 발탁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런 한풀이를 78년 일본에서 벌어진 제2회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마음껏 풀었다. 후에 견원지간이 되는 라몬 디아스와 함께 팀을 견인한 마라도나는 아르헨티나를 대회 우승으로 이끌었다. 이렇게 아르헨티나의 스타로 성장한 마라도나였지만, 이 대회에서 브라질의 바티스타를 발로 한방 먹여 퇴장처분을 당한 쓴 경험도 맛보았었다.

그러나 고대하던 월드컵 출장을 이루어 맞이한 86년 멕시코 대회에서는 전설이 된 ‘신의 손 골’이나 월드컵 최고의 명 장면으로 꼽히는 ‘5명을 제치는 골’ 등을 해내며 아르헨티나를 우승으로 이끌었다. 클럽팀으로는 바르셀로나, 나폴리에서 여러 전설적인 골을 기록하는 등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목소리도 드높다.

같은 시대에는 지코, 플라티니 등 훌륭한 선수들도 있었지만, 마라도나를 뛰어넘는 선수는 없다고 일컬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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