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는 왜 꼭 재미있어야 하나
사람들은 드라마 작가로서 내게 불만이 많다.
대부분 그들의 불만은 이유가 있다.
‘노희경의 드라마는 머리가 아프다,
재미가 없다, 대중성이 없다, 흥행성이 없다.’
맞는 말이다. 공감한다.
그런데 왜 난 그들의 말을 따라줄 수 없는 걸까.
그건 내 드라마관이 그들과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드라마란 대중을 위한 오락 프로이며,
재미가 있어야 하며,
보고 나선 잊어도 좋은 것쯤으로 생각한다.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시청자뿐만 아니라 작가들조차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에 대해 묻고 싶다.
왜 드라마는 반드시 가벼워야 하는가?
그것이 드라마의 존재 이유라고
누가 감히 말할 수 있는가?
확언하건대, 그건 편견이다.
드라마는 대중이 아닌 소수의 것일 수도 있고,
(낮은 시청률 10퍼센트만 계산해도 400만인데,
그걸 소수로 볼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재미의 시간이 아닌 고민의 시간일 수도 있으며,
일회성이 아닌 영원성을 지닐 수도 있다.
얼마 전 어른 한 분이 내게
일본 드라마 단편 극본집 한 권을 주었다.
나는 일본 드라마에 대한 심한 편견을
가지고 있던 터라 그걸 묵혀만 두었다.
(우리나라 작품들이 끊임없이 모방하는
대상 정도로만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한 날,
남아도는 시간을 때울 요량으로 책을 펴들었는데,
그때 그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까.
흥분과 전율이 일었다.
그곳에 실린 글들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드라마의 범주를 크게 벗어나 있었다.
진지한 철학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트랜디와 액션, 코미디, 섹슈얼리즘,
그 사이에 철학을 포함한 드라마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례를 든다면, 영화 <우나기>의 질문
공즉시색 색즉시공의 질문 같은)
그런데 우린 어떤가?
전부는 아니라 해도(분명 전부는 아니다),
대부분의 드라마가 트랜디와 코미디로만 흐른다.
그것도 우리 식, 내 식이 아닌
어디서 본 듯한 어디서 들은 듯한
것들이 천지다.
작가란 단어를 풀이하면 '만드는 자'란 뜻이다.
다시 말해 창조하는 자란 뜻이다.
창조를 하지 않으면 그는 작가가 아니다.
글을 '본떳다'고 하는 것은 '훔쳤다'란 말과
다르지 않으며 따라서 훔친 드라마는
드라마가 아니다.
그건 도둑의 장물과 같다.
나는 우리나라 시청자들만큼 불쌍한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 없단 생각을 종종 갖는다.
작가들과 방송국은 그들을 멸시한다.
그들은 시청자를 이렇게 평가한다.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1, 2학년 수준.
코미디를 좋아하며 같은 얘기를 또 들려주어도
모르는 멍텅구리.
깊이는 절대로 강요하지 말 것.
3분 정도는 웃겨주고,
3분 정도는 대충 감동 비슷한 걸 만들어줄 것.
꿈을 좇는 사람들이 많으므로
신데렐라, 캔디, 콩쥐 캐릭터는 필수.”
나는 내 형제가 ,내 친구가, 나 자신조차
이런 대접을 받는 걸 참을 수 없다.
가끔 출판사에서 전화가 온다.
그들은 내 비위라도 맞추려는 양 이렇게 말을 한다.
“노희경 씨는 소설을 쓰셔도 될 것 같아서….”
마치 드라마보다 소설이 한 급 위인데,
소설을 쓸 급수에 든다는 투다.
그럼 나는 그 말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언성을 높이게 된다.
“나는 드라마 작갑니다.
때문에 소설을 쓸 생각이 없습니다.”
탁!(전화 끊는 소리).
진정한 민주주의는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다.
그렇다면 아직 우리 나라의 방송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없다.
어제도 오늘도 나는 강요받았었다.
남들처럼 재미있게.
죄송하지만 사양한다.
나는 드라마의 다양함을 추구하는 작가이고 싶다.
그래서 획일화되는 드라마의 구조를
조금만 흔들 수 있다면 내 도리는 한 것이다.
하지만, 이번 원고에서도 나는 욕을 먹을 것이다.
시청률 제로에 도전하는 작가?
밥줄이 끊길지도 모를 일이다.
● 10년 후 다시, 그 뒤의 이야기●
앞의 글을 읽는데 식은땀이 난다.
내가 10년 전 이렇게 위험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나 싶어,
입 안마저 바짝 탄다.
이 글이 인터넷에 떠돌며 내가 가르친 학생들이 읽고
얼마나 혼란스러웠을까 싶은게,
책을 내는 이 마당에 이 글을 확 지우고
단 한 번도 이런 말을 한 적 없다고
시침을 떼고 싶은 심정이다.
그런데, 그래선 안 되겠단 생각이 든다.
사람은 누구나 어리석게 생각할 때가 있고,
세월이 흘러서 혹은 새로운 경험이 생겨서
그것이 어리석었다고 깨달을 때가 있고,
나도 그랬다고 말하는 게 중요한 일이겠다 싶다.
요즘 나는 드라마는
반드시 가벼워야 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가벼운 게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앞의 글을 쓸 당시,
가벼움을 ‘깊이 없다’ 로 착각하고 있었다.
가벼움의 반대말은 무거움이요,
깊다의 반대말을 얕다인데,
가벼움의 반대말은 깊다로 착각하고
무거움과 깊다를 동의어로 착각해서 벌어진 해프닝이다.
드라마는 왜 꼭 재미있어야 하느냐는 질문에도
나는 요즘 이전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드라마는 꼭 재미있어야 한다.
굳이 재미없는 걸 이 재미없는 세상에 쓸 필요가 있나 싶다.
물론 재미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슬픈 재미, 아픈 재미, 서글픈 재미, 배우는 재미 등등.
어른이라면, 아니 청소년기라 해도
재미가 깔깔대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은 다 알 법하다.
위의 글을 쓸 당시에도
나는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너무 격해서 본래 하고자 한 말을 못하고
이상하게 말이 꼬였던 거 같다.
(앞의 글은 <거짓말>을 막 끝 냈을 때인데,
그때 나는 나름대로는 자중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나고 보니 아프지만,
그때만큼 내가 교만한 적은 없었다, 이제야 인정이 된다),
소설 출판 제의를 받은 부분에서도
나는 위에서처럼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었다.
제의를 해준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고맙지만, 저는 드라마 쓰는 게 더 좋습니다.”라고
말했어야 했다. 뭐한다고 성의를 가지고 제의해준
사람한테 화를 내나. 참 어이없다 싶다.
‘본떴다’는 말을 ‘훔쳤다’고 매도한 부분도 사과해야겠다.
우리는 누구나 본을 뜬다.
나는 내 어머니를 본뜨려고 참 애쓰고,
내가 존경하는 스승을 본뜨려고도 무지기 애쓴다.
모방은 창작의 어머니란 말이 괜히 생겼겠나.
모방은 나쁘다 할 수 없다.
나는 다만 ‘패러디와 표절의 차이’에 대해서만 말했으면 됐다.
패러디란 겉모습은 본떴으나,
작가가 새로운 해석을 불어넣은 것이고,
표절은 작가가 새로운 해석 없이 다만 베끼는 데
목적이 있는 걸 말한다.
재해석을 하든 표절을 하든 그건 작가 스스로의 몫이다.
뭐가 나쁘다 좋다 할 게 없다.
다만 표절을 하면 표절작가란 소리를 들음 된다.
그리고 대부분 표절작가에겐 작가로서의 자격 박탈이
주어지니 그걸 달게 받을 일이다.
사람들은 요즘도 내게 말한다.
남들처럼 재미있게.
그러나 나는 이전처럼 사양한다고 소리치지 않는다.
다만 ‘배우겠습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가진 장점이 있다면 그걸 가진 채
다른 사람의 장점을 배우는 자세가
내 것만을 고집하는 것보다 더욱 소중함을 알아차린 때문이다.
누굴 위해서? 나를 위해서.
시간이 가서 지난날의 내 글을 보는 맛이 참 쓰다.
부끄럽고, 때론 너무 여렸구나,
그 여리고 어리석은 탓에 세상살기가 고단도 했겠구나,
괜한 연민도 생긴다.
그러면서도, 생각이 변하고, 사람이 변하고,
마음이 변하고, 다 변하는 것이구나를
알아가는 게 참 좋다.
10년 후에 난 또 이 글을 보고 무엇을 느끼려나.
기대가 된다.
첫댓글 http://blog.naver.com/noh_writer/220494325081
십년후에 십년젼 글을 읽고 부끄러웠다 하고 삭제할수도 있었을텐데 느낀점을 바탕으로 글을 쓰고 자기가 깨달은걸 글에 담은게 흥미돋이다.. 멋지당
노희경 작가님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함 작가님 책 또 내주셨으면 좋겠다!!노희경 작가님 드라마는 엄마랑 나랑 자주 보는 편인데 볼 때마다 운다ㅠㅠ
이처럼 사람의 생각은 살아가며 변할수도 있는건데 과거 어떤말을 했더라도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도 있다는걸 염두해둬야겠어. 다른사람들의 과거의발언하나로 아직도 그럴거라고 생각하고 편견을 두는건 지양해야 할 것 같아. 물론 노희경작가님처럼 나이가들고 그 분야에서 입지를 다지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과거의 발언들을 다시 생각하며 언급하시는분이 많지는 않을 것 같지만... 이런 어른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지.
일단 드라마란게 일차적으로는 오락을 위한 수단이지 않나? 그 자체가 되게 상업적인 성격일 뿐더러 재미있다는 것이 꼭 웃기거나 긴장감 있는 전개에만 국한되는 말은 아닌데(글 초반만 대충 읽고 쓰는 댓글)
아 나중엔 생각 되게 많이 바뀌셨구나..생각이란게 언제 어떻게 바뀔지 모르기에 말 한마디에 신중해야겠단 생각을 하게되네 혹 생각없이 남에게 상처줬더라도 과거의 실수를 인정하고 더 나아질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