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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의 산사나이' 손칠규., 휴먼원정대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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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산악인은 1% 성공할 가능성에 도전하는 직업.
99% 실패할 가능성을 극복하고 해내야.,프로 탐험가.
끊임없이 모험에 도전해야 존재 가치가 인정되는 직업.
탐험가가 탐험을 멈추면
그는 이미 '탐험가'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하기 때문.
또 99% 성공할 가능성에 대한 도전에
투자 할 스폰서 또는 열광할 관중은 없다.
그래서, 탐험가는 목숨걸고 도전을 계속한다.
스폰서는.,대개 기업체 회장이거나 광고주.
자사제품 선전광고 촬영 직후에.,원정자금 지원.
원정에 성공한 직후에 협찬회사 광고가 빛을 본다.
만약, 원정에 실패할 경우에
그 광고가 빛을 보지 못하게 되고
탐험가의 수명은 그것으로서 끝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명한 전문산악인이라도
스폰서 구하기란.,하늘의 별따기.
그래서, 모험에 아낌없이 투자할 스폰서와
스폰서가 기대할만큼 관중을 열광시키기 위해
더욱 더 불가능에 가까운 모험에 목숨걸고.,도전.
위험한 모험에 도전할수록
탐험가의 유명세는 높아간다.
결국, 자신의 목숨까지 걸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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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나이는 1%의 성공 가능성에 도전하고
그것을 자양분으로 삼아 죽을 때까지 도전하며
살아갈 수 밖에 없기에 '전설의 산사나이'가 된다.
산사나이는 대개 산에서 전설로 남아 끝내 내려오지 못한다.
'산에서 웃고 산에서 운다.'는 그들의 인생은 도전 그 자체이다.
“1%의 가능성만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다”- 박영석 산악인.
'산사나이'의 대표적인 사례.,박영석 산악인.
...............박영석 산악인.....................
2001년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했고
2005년까지 3극점 답사와 7대륙 최고봉 완등.
히말라야에만 40여 차례 도전해 22번이나 실패하며
1995년 에베레스트에서 눈사태로 파묻혔다가 살아났고
1997년 다울라기리에서는 빙하 틈에 빠졌다가 되살아났다.
박영석 산악인은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이듬해인
2006년 히말라야 14좌에 ‘코리안 루트’를 내겠다고 발표.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4전5기 끝에 신루트를 개척.
전설의 산사나이는 대개 전설을 쓰려갔다가 전설로 묻힌다.
2011년 11월 18일에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영원한 산사나이’
박영석(48) 대장. 그리고 대원 신동민(37), 그리고 강기석(33)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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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장과 함께 안나푸르나 남벽 신루트 개척 중 실종된
신 대원은 ‘괴력의 사나이’, 강 대원은 ‘차돌 같은 사나이’로
국내 산악계 차시대를 이끌 주자이자 영건들을 잃었다는 비보.
이번 등반도 정상 정복을 중시하는 ‘등정주의(登頂主義)’가 아닌,
등반 과정에 무게를 두는 ‘등로주의(登路主義)’를 지향하는 방식.
신 대원은 아내와 세 자녀가 있고, 강 대원은 미혼이었다.
이들 3명을 찾기 위해 수색작업을 진두지휘했던 대한산악연맹.
2011년 11월 20일에 해발 4800m 베이스캠프에서 위령제를 가졌다.
"세상의 주인은 따로 없다."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이다."
- 히말라야14좌 완등 후 인터뷰.,박영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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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중반에 종마(種馬) 산업 代父가 된.,손칠규.
1983년까지만 해도 "전설의 산사나이"라 불리웠던.,그.
한때는 음악에., 그리고 산에., 그후로 말에.,세번 미친 그.
1983년에 남미 아콩카구아(6959m) 남벽 등반 후.,실종.
등정 후 하산길에 15일간 조난 당해 만년설 얼음과 사막에서
밥 한톨 먹지 않고도 살아나 칠레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 보도.
그때 그는 산에 등돌리고 두미울목장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나서 2005년에 다시 돌아온.,"전설의 산사나이."
사랑하는 후배들의 시신 수습을 위해 휴먼원정대에 참여.
MBC다큐멘터리 '아! 에베레스트(엄홍길 휴먼원정대)'
에베레스트에서 숨진 후배들의 이름을 목놓아 외치며
눈물 흘리던 덩치 큰 사나이가.,손칠규 휴먼원정대 대장.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를 지키던 손칠규
엄홍길 등반대장으로부터 무전이 날아든다.
"박무택 돌무덤을 만들어주고, 대원들 하산 중."
그 무전을 받자 감격에 벅찬 목소리로
베이스캠프에서 히말라야가 떠나갈듯이
큰 목소리로 울부짖던 사람이.,손칠규 대장.
"무택아~ 집에 가자."
"장민아~ 준호야~"
"우리~ 집에 가자~"
TV 뉴스로 생방송 중계를 보고있던
전국민이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고 있다가
온나라가 떠나갈듯 환성을 터뜨린 순간이었다.
2005년 5월에 휴먼원정대 활약상.
그 누구도 에베레스트 데드존에서의
'시신 수습은 불가'하다고 여기면서도
일말의 희망을 버릴 수 없던.,순간의 낭보.
전세계 산악 역사 상에서
전무후무한 획기적인 사건.
18명의 휴먼원정대가 출정 후
3개월 만에 목숨걸고 이룬 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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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휴먼원정대 총단장을 맡으면서 출국 전
자신이 죽거던 재산 분배 방법 등을 유서로 남기고
에베레스트에 잠든 3 후배의 시신 수습을 위해 떠난 그.
첫딸이 비나, 둘째 딸이 바나, 막내 아들이 자일.
비나는 암벽을 오를때 하켄과 쟈일을 연결하는 고리.
바나는 불을 지피는 등산 도구이고, 자일은 등산용 로프.
3 자녀의 이름까지
유별나게도 작명한
그는 현대판 돈키호테.
2008년 겨울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예고없이
두미울 목장을 찾아 그에게 장시간 세상을 묻는다.
그때는 이미 말에 미친 늦은 중년의 나이였던 손칠규.
1983년 남미 아콩카구아(6959m) 남벽 등반을 떠난 그.
등정 후 하산길에 15일간 조난당해 만년설 얼음과 사막에서
밥 한톨 먹지 않고도 살아나 칠레 언론에서 연일 대서특필 보도.
그뒤, 조용히 귀국하여 대구를 떠날 준비를 한다.
그러나, 그의 조난기가 외신을 타고 국내로 들어와
국내에도 알려지면서 그 부인과 가족들도 알게 된다.
그는 대구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부인과 함께
설악산이 가까운 강원도 평창으로 떠나게 된다.
평창에서 정착하려 땅을 100만평이나 구입한 그.
대구를 떠나며서 남긴 말
"손칠규 유토피아를 건설"
.
그리고, 1년 후 파리에는 에펠탑이 있지만
평창 두미울 목장엔 손칠규 에펠탑이 있었다.
그는 전 세계적인 햄 동호인들과 교신을 하면서
무선햄 송신탑을 에펠탑보다 높게 세운 것이었다.
그후, 2005년 에베레스트 휴먼원정대 대장으로 발탁.
2005년 에베레스트 휴먼원정대 대장
'베이스캠프 총사령탑 적임자'였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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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계명대학교 개교 50주년 에베레스트 원정대원
후배 박무택과 장민이 정상을 등정한 후 하산길에 조난사고
그해, 5월 20일은 '백준호, 박무택, 장민'이 사망했던.,최악의 날.
계명대학교 원정대 산악부 아우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내놓았던.,고 백준호 '의사자(義死者).
고 '백준호, 박무택 장민'은 모두 손칠규의 직계 후배들.
손칠규 산악인 역시., 대구 계명대학교 산악부 출신.
그래서, 그가 2005년에 휴먼원정대 대장을., 맡게 된 것.
국내 산악계에서는 휴먼원정대 대장으로 그를 천거했다.
원래, 그는 "괴짜 산꾼" "전설의 산사나이"로 소문난 산악인.
.....손칠규........
≫ 1951년 대구생
≫ 1971년 대구왕골산악회 입회
≫ 1973년 계명대학교 산악부 입회
≫ 1978년 설악산 토왕성폭 3등, 첫 당일등반
≫ 1979년 울릉도 삼선암, 송곳바위 초등
≫ 1983년 남미 아콩카구아(6959m) 남벽 등반
≫ 2005년 초모랑마 휴먼원정대 대장
≫ 현 두미울목장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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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겨울 노무현 전 대통령이 예고없이
그를 만나기 위해 평창 두미울목장을 찾았고
그와 장시간 대화 속에 세상을 물은 적이 있다.
그는 그무렵 어느날 갑자기 그곳으로 가서
대관령에서 낡은 찝차를 타고 초원을 누비며
아마추어햄 무선안테나를 세우고 목장개간 중.
2009년 5월 23일 (향년 62세)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5년 5월에 온 국민에게 감동을 준 휴먼원정대
대장을 손칠규가 맡은 것이 알고 퇴임 후 찾게 된 것.
2008.7.21
노무현 전 대통령은 인생길 정상 루트는 찾았으나
그곳에서 무사하게 하산하는 루트는 찾지 못한걸까?
산은 정상까지 오르는 길보다 하산하는 길이 위험한 법.
산의 정상은 오래 머물 곳이 못되듯이
높은 산에서의 하산길은.,'한순간이라도'
방심하면, 천길나락으로 떨어지기 쉬운 법.
국내 전직 대통령으로는.,처음으로 자살.
그 전에 마음 속의 길을 찾으려고 그를 찾은듯.
2009년 5월 23일에 자살한.,노무현 前 대통령.
히말라야 14좌 해외원정은
산악인들에겐 목숨을 거는 일.
그래서, 후배들은 원정을 떠나기 전
반드시, 그를 찾아가서 그의 경륜을 경청.
아직도 그는 산악계 후배들에게
존경 받는 선배이자 전문 산악인.
예나 지금이나 그가 있는 두미울목장에는
국내 산악인들이 원정 때마다 드나드는 곳이다.
그만큼 그는 국내 산악계에서 영향력이 있는 산악인.
'2004년 5월 계양대 초모랑마 원정대' 대장 박무택,
원정을 떠나기 며칠 전에 그를 찾아와 조언을 구하다가
"형님, 나도 말 타게 해주이소"라며 그를 따르던 직계 후배.
장차, 우리나라 산악계를 대표할 박무택 산악인
그 후배가 에베레스트 등정 후에 하산길에 숨지자
그는 휴먼원정대 대장을 맡기로 결심을 굳혔던듯 하다.
국내 산악계에서는 아직도 그를 가르켜
"전설의 산사나이" "괴짜 산꾼"이라고.,호칭.
그가 어릴 때부터의 괴짜 행각은.,산악계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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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시에서 과수원과 정미소를 했던 손칠규의 집은 부자였다.
아버지는 장남 칠규를 얼른 친구 사귀라며 5살때 학교에 보냈다.
하지만, 그는 나이가 어려 체구가 왜소해 친구들에게 왕따 당했다.
가계 형편 상 피아노를 팔아
등산장비를 살 여유도 없는 사람이나
등산장비를 팔아 피아노를 구입하는 사람,
양쪽 모두를 약오르게 만들던.,그의 괴짜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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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일까?'
이웃 미국인 선교사가 남기고 간 외제 피아노.
그걸 팔아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 등산화와
프랑스 샤를레 모제 피켈. 아이젠 빙벽장비 일체.
그당시에 이 세상에서 가장 좋다는 외제로만 사서
산으로 간 날에 선배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았단다.
그가 외제 장비로 중무장하고 찾아간 곳은 대구 팔공산.
선배들은 도대체 얼음도 없는 팔공산에서 그런 장비들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며 손칠규씨를 마구 나무랐던 것이다.
손씨는 선배들로부터 맞아 생긴 몸의 상처보다
마음 속에 키우고 있던 토왕폭 등반에 대한 열정이
상처를 입었다는데 생각이 미치자 아주 서러웠단다.
대구 왕골산악회 회원으로 발군의 등반력을 가졌던 그는
그당시 산꾼들의 꿈인 토왕폭 초등 야심을 키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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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와 바꿔치기한 외제 빙벽 등반장비들이 팔공산과는
궁합이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안 그는 남들이 들으면
농담이라며 웃고 말았을 정도의 기발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집에는 커다란 과일 저장창고가 있었다.
그 창고 벽을 얼리고, 또 얼음을 쌓아 다양한 형태를 갖춘
빙벽 훈련장을 만들었고 그곳에서 토왕폭 초등자를 꿈꾸면서
그는 매일 창고 속에서 피켈을 휘두르며 얼음을 깨뜨려 놓았던 것.
그러나,
겨울산간학교(한국등산학교 전신)에서 배운
'피올레 캉'이니 '피올레 라마세'니 하는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연습하기에 창고의 빙벽이 너무 가파랐다.
그래서,
이 엉뚱한 사나이는 더욱 황당한 생각을 하게 됐다.
아이젠을 신고 집 마루에서 프랑스식 오리걸음을 흉내.
그 바람에 그의 집안에 마룻바닥이 온통 울퉁불퉁해졌다.
마루에 엎어져 피켈을 휘두르며 프론트 포인팅까지 연습.
그 탓에 마루는 곧 부숴졌지만, 그의 마음 속에서는 토왕폭이
곧은 소리를 내며 일어섰고 그의 꿈은 토왕폭을 향해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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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는., 모두 의치(義齒).
오토바이, 암벽등반, 스킨 스쿠버 다이빙 등
이가 부러질 짓만 골라서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고교 때부터 즐긴 오토바이 질주로 모두 부숴졌고
그뒤 다이빙 하다가 물속 바위에 얼굴을 받는 바람에
의치와 새로 낀 앞니가 다시 몽땅 내려앉고 말았기 때문.
그의 취미에서 사진을 빼놓을 수 없다.
남들은 가질 엄두조차 못 냈던 핫셀 블라드를
'소품으로 쓴다'고 큰 소리쳐 다른 사진쟁이들의
간을 뜨끔하게 만들기도 했을 정도로., 괴짜 행각들.
제대한뒤 대학 전공(작곡)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사진 찍는 재미로 지낼만 했단다.
커닝하는 아이들의 표정,
매질하는 어느 여선생의 모습.
교무실에서 입 벌리고 잠든 노처녀.
그 수학선생의 입벌리고 낮잠 자는 표정.
침을 흘리는 모습등을 카메라에 몰래 잡아
대문짝 만하게 인화해 음악실에 걸어 뒀던 것.
그러다가 토요일만 되면
요란하게 오토바이를 몰고
대구 근교 산으로 사라지는 그.
이 괴짜 음악선생은 침을 흘리면서 잠들었던
여선생의 사진이 화근이 되어 교육계를 떠났다.
그리고는, 자신의 작은 토왕폭이 된,
얼음 창고와 마루에서.,등반훈련을 거듭.
물론 토왕폭을 오르기 위한 훈련과정이었다.
1977년 12월 말 설악의 토왕폭으로 정찰등반.
같은 해 1월에 크로니산악회와 부산합동대에
초등과 제2등의 영예를 잇따라 내어준.,토왕폭.
그는 7년간 키워온
토왕폭 등정의 꿈을
접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짐 싸들고 설악산으로 가서
토왕골에 들어가 토왕폭을 요모조모
뜯어보던 중 아버지 부름을 받고 하산.
대구 집으로 돌아와보니.,자신의 혼수함이
전혀 알지도 못하는 처녀의 집에 가 있었다.
전에 만나본 적 없고, 누구인지도 모르는 처녀.
그는 설악에서 갓내려온 산행 차림으로
배낭을 짊어진채 그 처녀의 집으로 가서
신랑으로서 인사를 올릴 수 밖에 없었다.
그의 부모는 가문의 종손인 그를
대학시절부터 결혼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산으로 도망친 그.
하지만, 이번에도 아들이 산으로 도망가버리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다가 아들이 토왕골에 들어간 틈을 노려
양가의 어른끼리 만 기습적으로 합의해 결혼을 성사시킨 것.
그야말로 본인의 의사와는 무관하게
양가의 부모끼리 합의 하에., 결혼을 추진.
신부까지는 알았는데, 신랑 본인만 몰랐던 것.
그는 숙제하는 기분으로 결혼식을 치루었다.
그가 달리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없었기 때문.
얼른 숙제를 마치고 설악산으로 돌아갈 생각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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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에서 신혼여행을 며칠 함께 보낸 뒤에
갓 경혼한 신부를 대구 근교의 처가에 맡겨 두고
1978년 1월 말, 그는 곧장 설악으로 달려가야 했다.
토왕골에는 토왕폭을 함께 오르기로 약속한
'악우회' 윤대표 일행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
1978년 설악산 토왕폭 3등., 첫 당일등반 신기록.
1978년 토왕폭 등반 직후.,손칠규 & 윤대표.
▲이진우(左).신성삼씨
캠프에서 토왕성 빙폭을 등반하는
윤대표. 손칠규씨를 지켜보고 있다
그당시 그는 대구 산악계에서도
단단히 낙인이 찍힌 이단자였다.
짐 잘지고 밥 많이 먹고 술 또한 잘 마시면
선배들로부터 좋은 후배라고 귀염받는 분위기.
그러한 속에서 손씨는 술을 입에 대지도 않는데다
남들은 걷기 산행에 열을 올릴 때도 바윗길만 고집했다.
또 그는 이중섭이 그린 바닷게 등짝처럼 생긴
키슬링 대형배낭 대신 날렵한 외제 배낭을 메고
외제 신발을 신고 바위벽 만을 쳐다보고 다녔으니
산선배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특히 오토바이를 타고 팔공산 바윗골까지 달려가서
암벽 등반을 하는 바람에 산선배들 미움을 톡톡히 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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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음악에 미쳐 작곡을 전공하더니
그후로는 산에 미쳐 산을 집 삼아 돌아다니더니
2008.10.8. 현재 58세 그는 평창에서 말에 미쳐 산다.
“ 소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고 소가 정복 당했나.
산은 버릴 수도 정복할 수도 없는 존재다.”
영동고속도로 속사IC로 나와 진부 쪽으로 가면
도로변에 검은 말만 달랑 그려놓은 간판이 보인다.
작은 길을 따라 들어가면 갑자기 사위가 확 열리고
그림 같은 초원 속에 늘씬한 경주마들이 뛰어다닌다.
두미울 목장은 100만평에 100필 넘는
말을 기르는 국내 최대의 민간 종마장.
손칠규는 그 목장 주인이다.
1983년, 젊은 시절 설립했던
사업을 처분해 목장을 만든 것.
전직 음악교사였던 그는 농촌의 부활을 꿈꾸고
중간 유통을 배제한 도-농 직결기업을 설립했었다.
그 꿈을 접고 직원 100명 공장을 처분해 산게.,평창 땅.
다른 축산업자들을 규합해 평창종마법인 설립.
이제 종마 산업은 평창군의 주력산업이 되었다.
국내 종마산업 대부로 변신하기까지.,인생 내력.
그는 대구시 달성군에서
과수원과 정미소를 운영했던
손칠규의 집은 원래 부자였다.
그 장남인 칠규는 몸이 왜소했다.
아버지는 약한 아들을 보고
얼른 친구 사귀라며 다섯 살 때
초등학교에 보냈기에 키가 작고 어려
동급생들은 부잣집 아들을 왕따시켰던 것.
외로운 아이는
친구들이 있는 곳은
어디든 혼자 찾아 다녔다.
방학 때였다. 동네 앞산이 와룡산인데
사귀고 싶은 아이가 자기 집이.,산 너머.
그래서, 산을 넘어 그 친구를 찾아갔단다.
1학년 때였다. 어른 배꼽 높이만한 아이가
아침에 출발해 별이 뜰 때까지 산을 넘었다.
집에서는 아들이 실종됐다고 난리가 났던 것.
와룡산은 개구리 소년들 유해가 발견된 곳.
그당시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놓은 산이다.
어릴 때부터 그에게 친구는 대개 음악이었다.
음(音)과 음이 만드는 장엄한 화음, 그게 좋았다.
내친 김에 서울 예원중에 입학 고교도 예고로 진학.
대구 계명대학교 작곡과 입학
대학시절에 마음껏 음악을 했다.
"그때는 내가 음악 천재인 줄 알았다.
내 딴에는 독창적인 예술을 한다고 별별
화음과 비화음을 섞어가며 작곡을 했다."
그리고, 대학 산악회에
입회하면서 산에 미친 그.
.
"나뭇잎이 바르르 떨리는 바람소리,
별, 달무리…. 그런 게 너무 좋았다.
감수성이 예민한 놈이라 음악도 산도
나한테는 똑 같았다." 그리고 덧붙인다.
"70년대, 용감한 학생은 거리로 나갔다.
조금 비겁한 사람은 음악다방에 처박혔고
나처럼 진짜 비겁한 사람은 산으로 숨었다."
집에 있던 외제 피아노와 다른 악기를
몽땅 팔아 최고급 등산장비를 샀다는 그.
이탈리아제 돌로미테 이중등산화
프랑스제 샤를레 모제 피켈, 아이젠.
세상에서 제일 좋다는 빙벽 등반장비
일체로 중무장하고 팔공산으로 간.,그.
그래서, 그당시 선배들에게 죽도록 맞았다.
"팔공산 암벽에 그런 장비는 필요가 없는데
그냥 오르면 되는 걸, 무슨 사치를 하겠다고.."
선배들은 손칠규를 이상한 놈이라고 생각했던 것.
그렇다고 커서도 어릴 때처럼 왕따당하고 살 것인가.
손칠규는 오토바이 타고 산에 올라 혼자 암벽을 탔다.
"당시 대구 산악계에서 암벽은 대접받지 못하는 장르.
그런 걸 내가 하고 다녔으니 별로 환영 받지 못했던 것."
지금도 최고급 명품인 핫셀블러드 중형카메라
바위 틈에 끼자 거기에 자일을 묶고 하산했던 그.
내려와서 후배한테 "그거 뺄 수 있으면 가져와" 주문.
다행히 후배가 구조한 카메라는 지금도 그가 쓰고 있다.
바위 위로 오토바이 타다가 넘어지고
스쿠버다이빙하다가 물밑 바위에 부딪쳐
이가 부러지는 등 "이 부러질 짓" 만 했던 그.
지금 그의 이빨은 90% 의치거나 남의 이빨이다.
결국, 대학 졸업하고 군 제대 후
음악교사 재직 1년 만에 때려 치웠고
기업을 설립해 운영하며 산귀신이 된 그.
설악산 토왕폭 등반 중 집에서 사람이 찾아왔던 것.
"큰일이 났으니 대구로 얼른 돌아오라"는 것이었다.
서둘러 가보니 결혼식 날짜가 잡혀 있어 결혼했다.
"장가도 안 가고 산에 미쳐 돌아다니니,
어른들이 그 꼴을 못봐 강제 결혼 당한 것.
신랑 손칠규는 밀양 손씨 38대 장손이다.
신부 정영자는 어릴적 집안끼리 정혼 약조.
한번도 본적이 없는 신부와 결혼식을 치르고
신혼여행 동계 한라산 등반에 초죽음 된 새색시.
신부를 처가에 남겨두고 다시 토왕폭으로 떠난 신랑.
토왕폭에 가서 한 달 만에 돌아온 신랑은
뻑 하면 해외원정을 떠나 몇달씩 있다 왔다.
아내가 말했다. "훗날 뭔가 될 사람 같아 결혼."
"지금까지 함께 살아오며 아내로서 힘든 점은.,?"
"이 사람은 지금도 내가 힘든 거 모른다. 그렇지?"
손칠규가 활짝 웃으면서 그런 아내를 토닥거린다.
아내 정영자는 남편 후배가 찾아오면 소주 한 박스.
그리고, 삼겹살을 내놓는다. 하루 있다 가겠다는 사람들.
1박2일씩 붙잡아 술 먹이고 고기 먹이는 통 큰 누나가 된 것.
그 사이에 딸 둘, 아들 하나 낳았다.
장녀 이름은 '비나'. 등산용 고리다.
둘째 딸은 '바나'. 불 지피는 버너다.
막내아들은 '자일'. 등산용 밧줄이다.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셋 다 한자 이름.
둘째 딸은 호적에 '미나'로 올라가 있다.
"아버지가 이름 적은 종이를 잃어버렸다.
동사무소 직원이랑 두 사람이 머리를 싸매며
이름을 추정하다가 '미나'라고 올려버렸던 것."
세 자녀는 장성해
화가, 수의사, 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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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한국의 베어그릴스'.,전설의 산사나이.
뱀과 오리를 산채로 뜯어먹던.,'아콩카과 조난 사건.'
그런데, 그 미친 한국인이 바로, '대구 산악계 돈키호테'.
미국 기업가 2명의.,'7대륙 최고봉 도전기' 논픽션
남미 아콩카구아(6959m)편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베이스캠프에서 미친 한국인을 만났다.
장비도 없이 정상에 가겠다는 사람이었다.
운동화 차림 그는 실종된게 틀림 없으리라."
1982년 11월에, 남미 단독원정.
이번에도 역시 단독원정이었다.
남미 산들을 원정하고 싶은데 여권 만들 명분이 없었다.
그래서 칠레 세계산악인회의 참석 명분으로 여권을 냈다.
6000m급 이상 등정 기록이 있을 것,
암벽등반 및 빙벽등반 경험이 있을 것,
영어 또는 스페인어 능통할 것.,등이 조건.
그러한 조건을 충족시키고 칠레로 떠났다.
회의는 뒷전. 칠레와 아르헨티나 접경지대
남미 최고봉 아콩카과 밖에 보이지 않았다.
일반 루트를 타고 베이스캠프를 지나
정상 아래에 장비를 묻어놓고 내려왔다.
남벽을 타고 오른 뒤 사용할 장비였던 것.
아콩카과 벽은 '지저분한 벽면'이라 불린다.
바위도 거칠고 땅도 거칠고 기상도 거친 루트.
"정상에 가겠다고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더니
미국 원정대들이 나더러 미친 놈이라고 했다.
그 사람들한테 인사하고 올라가 장비 묻어놓고
내려오니 와인을 퍼 마시고 이미 다 자고 있더라."
오르는 사람만 봤고 내려오는 걸 못봤으니
"미친 한국인이 실종됐다"는 기사가 나온 것.
정상 정복은 성공했다.
산꼭대기에 작은 철 십자가.
거기에 태극기 묶어놓고 하산.
"내려올 때까지는 좋았다.
갑자기 발밑이 꺼져 내리더니
내가 한없이 추락하는 것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눈사태까지 만나
손칠규는 직하방으로 추락했던 것.
"700m 떨어지는 동안 영화 한편 봤다"
까맣게 잊었던 여섯 살 때 기억부터 아내의 얼굴,
그리고 자기 상가에서 신나게 술 퍼마셔댈 친구 놈,
술 대신에 꺼이꺼이 울고 있을 친구 놈 등 인생 총정리.
그런데 추락 속도가 빨라서 눈사태를 추월하더니
떨어진 곳이 눈 덮인 경사면이라 몸 부서지지 않고
미끄러지며 멈추는게 아닌가. 기적으로 살아난 것이다.
그때부터 지옥이었다.사방을 둘러보니 빙하지대요,
하늘 끝까지 설산. 닷새 동안 아무 것도 못먹고 걸었다.
절벽에 간신히 붙어서 전진했다. 그런데 지층이 끊기고
내 몸보다 짧은 거리 앞에서 다시 길이 시작되는 절벽 끝.
천길 낭떠러지 앞에서 이틀을 고민하다가 펄쩍 뛰었다.
반대편 길에 엎어지며 이빨이 바위에 부딪쳐 부러졌다.
그런데 얼마나 웃음이 나오는지. 행복하고 통쾌한 웃음.
하지만, 주위에 사람 흔적은 없었다.
그러나, 환청처럼 들려오는 장모의 음성.
"원수 같은 놈!~ 자기 장가가는 날도 모르고
식구들 애간장 태우다가 산으로 신혼여행 가서
신부를 초주검 만들더니 결국 과부를 만들었구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까불더니
결국 지구 반대편에서 끝장을 냈구나."
동정 반 야유 반 퍼부어댈 산악계 사람들.
계곡을 만났다.
물을 한껏 마시고
개미 3마리 잡아먹었다.
닷새 만에 먹는 식량이었다.
개미 맛은 몹시 매웠다.
다음날 매미를 잡아먹었다.
그리고, 새끼 오리가 보이길래
대가리를 쥐고 산채로 뜯어먹었다.
지금 먹으라면 절대 안 먹는다."미쳤나?"
조난일지와 카메라 촬영은 빼놓지 않았다.
일기를 수첩에 깨알 같이 쓰고,, 셀카 촬영.
그리고
쓴.,유서.
'나는 한국인 손칠규다.
언젠가 시체가 발견되면 한국에 알려 달라.
이 카메라, 절대 열지 말고 대사관으로 보내달라.
정상부터 여기까지 다 찍혀 있다.' - 손칠규 씀 -
그리고나서,
그는 신(神)에게
마구 욕을 퍼부었다.
"죽이려면 그냥 죽이라고.,
왜 이 따위로., 죽을 만 하면,
살려내서 사람을 약올리냐고.."
그는 기력을 완전히 소진.
동공이 풀리는게 느껴졌다.
바지 속으로 오줌이 새나왔다.
구멍 막을 힘도 없었던 거다.
죽는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번에는 신(神)에게 싹싹 빌었다.
"살려만 주신다면 정말 열심히 살겠다.
신 만을 위해 살겠다고 맹세한다. 정말로."
"난 처참하게 신한테 항복했다, 항복한거라구".
바위에 자빠져 있는데 오른쪽 뒤편으로
희끄무레한 뭔가가 느껴지는 것이었다.
담배쥐듯 손가락 두 개로 잡아보니까 뱀.
머리랑 꼬리를 잡고 잡아당겼더니
껍질이랑 내장이 튀어나왔다. 막 포식하고
쉬던 참이었는지, 뱀 뱃속에는 카멜레온 한 마리.
" 뱀이랑 카멜레온을 씹어먹었다.
다음날, 뱀독이 올라 온몸이 퉁퉁 부었다.
그렇게 장장 여드레를 빙하와 사막을 헤매다가
사슴 사냥꾼을 만나 빵을 먹고 잠을 잔 다음 이튿날에는
군부대까지 내려가 조사받고 귀국했으니 1983년 1월 이야기.
현지 신문들은 그의 생환 소식과
그가 묶어둔 태극기를 가지고 내려온
다른 원정대의 이야기를 대서특필 기사화.
"아무도 모르겠지" 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더니
이미 외신으로 조난 전말기를 접한 동료, 가족들이
"이 문제아 두고 보자"며 벼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듬해.
목장에 은둔했지만 소년기 때 그를 지배한 음악.
그리고 청년기를 매혹한 산과는 이별하지 못했다.
2004년 5월. 산악계 후배 박무택이
히말라야 초모랑마 하산 중 죽었다.
백준호, 장민과 함께 숨졌던.,박무택.
초모랑마 원정 며칠전 찾아와 조언을 구하다가
"형님, 나도 말 타게 해주이소"라던.,박무택 후배.
2005년 그들의 시신 수습을 위한
휴먼원정대가 히말라야로 떠났다.
산악계에서는 손칠규를 원정대장으로 추대했다.
등반대장은 엄홍길. 설산에서 손칠규는 통곡했다.
"준호야, 민아, 무택아! 집에 가자!" 산을 버리지 못하는,
아니 평생을 산과 함께 손칠규. 한 사내의 진한 울음이었다.
지금도 그는 수시로 전국 산을 산보한다.
아내는 후배들에게 소주 한 박스와 삼겹살.
아직도 그것을 잊지 않는.,통큰 큰누님이다.
전직 대통령 노무현이
예고없이 찾아와 그에게
세상을 묻고 간적도 있었다.
또 이름만 대면 삼척 동자도 아는
젊은 기업가가 찾아와 산행을 청한다.
"산을 어떻게 버리나.
산은 저기 있을 뿐인데."
그러면서 동행하는.,손칠규.
자칭 음악 천재, 자칭 독창적인 산꾼.
손칠규가 환갑을 바라보며 회고한 말.
"생각해보면 나는 껍질을 꽁꽁 싸맨 양파였다.
내 것만 고집하고 내가 최고인 줄 알고 살았다.
지금은 껍질을 한풀한풀 벗기며 산다. 다 벗기면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그게., 나 였다.
"산을 정복해? 어떻게!
소 머리에 파리가 앉았다고
소를 정복했나." - 손칠규 -
2005년 손칠규는
‘휴먼원정대’원정대장으로
히말라야 초모랑마로 떠난 산악인.
초모랑마 등정 후 하산 도중
조난 당한 산악인들의 시신을
수습하러 떠난 휴먼원정대였다.
휴먼원정대.,손칠규 대장.
휴먼원정대.,손칠규 & 엄홍길.
휴먼원정대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위령제.
2008.9.20 두미울 목장., '한국 종마 대부' 손칠규
2009.10.5 강원도 오대정 마사회 회장.,손칠규
2011.3월 울릉도 산악스키 페스티발 & 2010. 2월.,손칠규
손칠규 ^
2011.8.19 하오개 그림터(권용택 화백 작업장) 방문.,손칠규.
‘천재’라고 부르는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공통점.
그들은 자신만의 세계가 확고하며, 남들이 보기에
불가능해 보이는 일들을 아무렇지 않게 해내곤 한다.
또한 대게 주위에 친구가 별로 없다는 공통점.
그들의 기이한 행동을 이해하고 그것을 함께 할만한
친구를 찾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거니와 그들 천재 자체가
누군가와 함께 그러한 행위들을 한다는 것에 불편을 느끼기 때문.
때론 세인들의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들에게 고독이란 떨쳐낼 수 없는 그림자 같은 존재.
스스로 괴짜이고자 했던 손칠규(1951년생 계명대산악부OB).
그에게는 괴짜라기보다 천재의 특징들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음악에 미쳐 지냈던 학창시절, 산에 미쳐 청춘을 불살랐던 20대에도,
말(馬)에 미쳐 지내는 지금까지 그는 늘 남들과 다른 길을 선택해 왔다.
세상이 정해놓은 틀에 맞춰 사는 것은 흥미가 없었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것은 스스로 용납할 수 없던 탓이다.
조직에 어울리지 못하는 그를 사람들은 ‘이단자’라 낙인 찍었다.
남들이 하지 않는 짓만 골라 한다며 ‘괴짜’라고 불렀지만
그는 남들이 자기를 알아주든지 말든지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오로지 당시 자신이 미쳐있던 분야에서
본인이 만족할 만큼 깊이 파고드는 일에만 몰두.
그가 산에 다닐 때에는 그 미친 정도가 가장 심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기 위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심연의 바다와 싸우는 다이버들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랑블루(Le Grand Bleu)>를 너무 좋아해서
몇 번이나 봤다는 화려한 영상미와 탄탄한 스토리 때문.
하지만, 어쩌면 끝모를 산의 세계에서
자신의 한계를 넘고자한 본인의 모습을
영화 속에서 발견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를 만나기 위해 두미울목장을 찾아갔던 날,
그는 머리 뒤쪽으로 물이 담긴 주머니를 달아
목을 끌어당겨주는 의료기구를 턱밑에 착용한채
기자를 기다렸고 젊은날 산에서 몸을 혹사한 것이
나이들어 지금에 와 목디스크로 나타난 것이라 했다.
물주머니 압력 때문에 얼굴이 붓고 목이 꽉 잠겼지만,
그는 멀리서 온 손님들을 위해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영화보다 영화 같은 그의 이야기가 흥미로웠다
대구 농산물청과조합과 냉장협회를 꾸려나간 아버지 덕에
손칠규씨의 성장환경은 동년배 친구들보다 넉넉한 편이었다.
감수성이 남달라 중학교 때부터 피아노를 치고 작곡을 했던 그.
고등학교 때는 심포니를 작곡할 정도로 대위법에 통달해있었다.
당시 그는 스스로를 베토벤 모차르트와 동렬에 있는 천재라고 생각.
계명대 음대 작곡을 전공으로 택했지만 대학생활은 그의 기대와 정반대.
“대학에 가면 나의 음악세계가 크고 넓어질 거라 생각했어요.
하지만 친구들은 대학에 와서야 대위법을 배우는 수준이었고,
전공교수들 또한 편협한 사고에 갇혀서 내 음악을 이해 못했죠.
그러니 수업이 지루해지고 음악 자체에 흥미가 떨어지더라고요.”
친구들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비틀즈, 퀸,
레드 제플린 등 모던록(modern rock)에 열광했지만,
손칠규 자신은 오히려 그런 음악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세상에서 고립될수록 자신 만의 세계에 심취하고 몰입했다.
떠오르는 악상을 주체할 수 없었던 그는 며칠이고 밤을 새워
오선지를 채웠고, 그 음률 환청을 손으로 옮기기에도 벅찼다.
하지만 스스로 대곡이라 여긴 곡을 발표한 연주회에서
사람들이 꾸벅꾸벅 졸자 음악을 접기로 마음을 먹었다.
군부독재 저항데모 대학환경도 산으로 가는 결정적 계기.
그는 선배나 동기들과 몇 번 시위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데모 당위성을 못느끼고, 그곳에서 겉도는 느낌을 받았다.
“내가 산에 간 이유는 비겁했기 때문.
조금만 덜 비겁했다면 음악다방 같은데서
낭만적으로 젊음을 소비할 수도 있었겠죠.
하지만 거리 또는 다방에 나가는 대신에
나는 산으로 가는 걸 택했어요.”-손칠규 -
그는 당시 유명무실하던 계명대산악부 대신
대구에서 활발하였던 왕골산악회에 가입했다.
하지만, 왕골 선배들은 그를 탐탁찮게 여겼다.
무릇 후배라면 소처럼 짐도 많이 지고 술도 잘 받아 마시며
빠릿빠릿한 맛이 있어야 하는데, 손씨는 그런 것과 거리가 멀고
술을 입에 대지 않았고 산악회 워킹 분위기와 달리 벽 등반만 고집.
거기에다가 그의 외제 피아노를 팔아 돌로미테 등산화와
샤를레 모제 피켈 등 고가장비를 가지고 팔공산에 나타난 그
“산악회라는 것이 오와 열에 맞춰서 틀에 맞춰진 조직인데,
나는 그 대열에서 삐죽 튀어나온 돌멩이 같은 존재였어요.
왕골산악회 선배들은 그런 나를 용납하지 못했죠.” - 손칠규 -
그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솔로등반가의 길을 걷게 된다.
어차피 등반은 온전히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 여겼기에
심리적인 안정을 위한 자일파트너조차 배제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그의 일상에서 모든 행동이 난이도 높은 벽등반 훈련.
통학버스 안에서는 자리가 있어도 앉지 않고 서서 갔으며,
악력을 키우기 위해 항상 그는 손에 작은 공을 쥐고 다녔다.
겨울에는 혹한산행에 대비해 창문열고 해먹 잠.
학교 갈 때도 등산화를 신고 배낭을 메고 다녔다.
혼자 다니는데 가장 어려운 것은 ‘무게와의 싸움’.
옷 상표까지 뗄 정도로 무게를 줄이는데 고심.
식량과 장비 사이에서 수많은 고민을 해야 했다.
주말등반을 위해 금 월요일은 수강신청을 안했다.
그러고도 벽 밑까지 가는 시간이 아까워
걷는 대신에 산악 오토바이를 타고 갔으며
이 때문에 더 선배들의 미움을 받기도 했다.
인수봉 선인봉 등반을 위해 비행기 타고 서울 왕래.
한때 음악에 미친듯 이유도 모른채 산에 빠져들었다.
나무 끝에 스치는 바람소리, 벽에서 풍기는 매캐한 냄새.
혹한기에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까지도 그대로 좋았다.
그렇게 산에 미친 종손을 두고 볼 수 없었던 그의 부모.
그가 산에 간 사이에 양가 어른끼리 합의 보고 결혼 추진.
1978년 12월 토왕폭 정찰 중 집에서 부모님이 보낸 이들에게
불려나간 그는 배낭을 멘체 처가에 인사드리고 결혼식을 올렸다.
이후 부인과 사이에 태어난 딸들과 아들에게
‘비나’ ‘바나’ ‘자일’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는 산은 생계수단이 되지 못했다.
산은 그와 그의 가족을 먹여 살리지는 못하기 때문에,
그는 전공을 살려 포항에서 음악교사를 한 적이 있다.
하지만, 1년 남짓한 교사생활에도 바람 잘 날 없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구룡포만을 헤엄쳐 횡단.
첫 바다수영으로 학교가 있던 나루곶에서 구룡포만 횡단.
반대편에 도착해보니 수중에 돈도 없고
심지어 몸에 걸칠 실오라기 옷도 없었다.
뒷일은 생각 않고 일단 건넌 실수를 한 것.
선생 체면에 비키니 같은 수영복을 입고
시내버스터미널에 갈 자신이 없었던 그는
다시 바다를 건너 집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밤중 바다를 건너는데 서치라이트가 비추고 난리
군부대에서 날 간첩으로 오인한 건데 다행히 그 부대의
중대장이 학생 학부형이라 구조된후 밥까지 얻어먹었어요.”
이외에도 교무실에서 침 흘리며 잠든 노처녀 선생의
사진을 찍어 음악실에 건 일, 아이들 음치 교정한다고
음악실에 온갖 오디오를 설치한 일, 토요일이면 산으로
사라져버리는 등으로 학교를 발칵 뒤집은 적이.,비일비재.
하지만 사표낸 결정 사유는 수업료 못 내는 아이들에게
돈내라는 닦달을 못하는 약한 심성과 감수성이 예민한
학생들에게 조율 안된 피아노를 들려주지 못한 기질 탓.
인연없는 교육계를 떠난 후 부친의 사업을 물려받아
‘도농농산’을 설립하고 농산물 수출입 사업을 시작했다.
사업 성격상 해외출장이 잦았는데, 그때마다 산으로 갔다.
1979년 겨울 일본 북알프스, 1980년 대만 옥산,
1981년 미국과 일본, 1982년 네팔을 다녀오고,
1982~83년에는 1년 여간 남미 등지를 쏘다녔다.
그리고 그곳에서 꿈에도 잊지 못할 사고를 체험.
1982년 11월 칠레 산티아고 국제산악인회합 참석 후,
파타고니아의 세로토레와 피츠로이를 정찰 등반하고
12월에는 팔모레, 산호세 등을 그는 단독으로 등정했다.
예정된 등반을 마쳤는데도 여권 기한이 열흘 남자,
남미 최고봉 아콩카구아(6959m) 남벽 단독등반 시도.
1983. 1. 7. 멘도사 도착 아콩카구아 남벽 아래 베이스캠프.
등정 장비와 식량 등을 데포하기 위해.,노멀 루트 행.
그당시 노멀 루트 베이스캠프인 프라자 데 뮤라스에는
미국 상업원정대와 하세가와 츠네오를 필두로 한 일본대.
그들에게는 거지몰골 혼자인 최씨가.,경계의 대상.
미국 상업원정대를 이끈 리지웨이는 후일 자신의 책.
불가능한 꿈은 없다(Seven Summit)> 아콩카구아 편에서
“등산화조차 신지 않은 미친 한국인을 보았다. 그가 정상으로
가는 것은 보았지만 이후 그를 다시 본적이 없다”며 혹독한 악평.
“당시 내 등반장비는 남벽 베이스캠프에 있었고,
난 노멀 루트를 등반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라.,오해.
설악산에서 몇 달씩 지낼 때,
희운각에서 양폭이나 비선대에
놀러가는데 장비 갖추고 가지 않듯.
리지웨이는 나의 단편적 모습 만 보고
훗날 그가 쓴 저서에서 그런 글을 쓴 것.
”리지웨이응 이후 손칠규를 볼 수 없었던 것.
손칠규가 남벽을 등반하고 있던 이틀 사이에
미국원정대는 노멀 루트로 등반을 했기 때문.
1박2일 사투 끝에 남벽을 올라 아콩카구아 정상에 선 손칠규.
하지만 날씨가 나빠 장비를 데포해둔 지점을 찾을 수 없었다.
이틀간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지그재그 정상부 방황.
어느 순간 발밑이 꺼지며 끝도 없이 아래로 추락하고 있는 자신.
7백m 추락 끝에 멈춘 무인구(無人區)는 프라자 데 뮤라스와 반대쪽.
그때부터 샹쥬앙 군인초소 앞에 도착하기 전까지 보름간 사투는., 지옥.
그가 조난당한 일주일 뒤, 스페인 원정대는
아콩카구아 정상에서 돌로 눌러놓은 태극기 발견.
그 태극기는 당시 현지신문에도 등장을 했지만, 국내에서
그의 남벽 등정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조난사’로 여겼다.
.
“성취의 보람보다 행위의 고통을 사랑한다” - 손칠규.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는 이름없는 산도 많이 올랐다.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는’ 자신과의 싸움을 하며
“내가 이러이러한 등반을 했다” 떠든 적이 없는 손칠규.
그가 가장 경멸하는 말 중 하나가 “산을 정복했다”는 말.
연애할 때 지켜주고픈 소중한 연인과의 일을 떠벌리지 않듯,
산은 그에게 온전한 기쁨이고 만족이며., 아껴주어야 할 대상.
아콩카구아 사고 이후 그는 음악을 접었던 것처럼 산을 접었다.
그 전보다 더 잘할 수 없을 것 같은 한계를 느꼈고,
더 깊이 들어갈수록 점점 고립되는 자신을 느낀 때문.
말(馬)에 미쳐 살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산사람들과 소통.
예전에는 산에서 술을 입에 대지 않던 그이지만
요즘은 산악회 모임에 나가 어울려 술을 마시고,
그의 집은 사흘이 멀다 하고 찾는 후배들로 북적.
그는 여전히 괴짜이긴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그를 "이단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찾고 있으며,
또 다시 미쳐볼 대상을 찾으면 이내 돈키호테처럼
말을 타고 돌진할 것이며 끊임없이 도전을 하고 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천 가지 종류의 맥주들을
마셔보는 것 등이 그것이다.
2015년 평창군 진부면 두일2리(이장 손칠규).
지난 해에 이어 '제2회 산꽃약풀 축제'를 개최.
두일2리 축제위원회를 중심으로 마을주민들이 참여한 가운데
약초, 허브체험 및 오토캠핑장에서 주민과 함께 즐기는 노지 캠핑,
주민의 설명을 들으며 걷는 자연생태 트래킹 등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
마을에서 재배하고 채취한 여러가지 허브 체험을 통해
어린이들에게 천연 허브 체험 학습의 기회를 제공하고
어른들에게는 오대산 경치와 허브를 느낄 기회를 제공.
"산꽃약풀축제는 체험거리 제공 뿐만이 아니라
주민들과 함께 어울리는 소통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함께 생활하며 즐기는 축제를 통해 주민은 활력을 얻고
도시민들은 삶의 여유를 찾는 기회가 되기를.," -손칠규 이장 -.
첫댓글 정말 멋지게 인생을 사는분같네요...
많은 전문산악인들에게 영향력을 미치는힘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요
존경스럽습니다..
.
그는 우리나라 전문 산악인들 중에서는
산에서 가장 잘 내려올 줄 아는 사람인듯..
그래서, 해외원정대 후배들이 많이 찾는듯.
답글 감사합니다.-*^=^*-